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사랑한 남자들

입력 2011.03.24 (06:22) 수정 2011.03.24 (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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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세기의 여우(女優)' 답게 여덟번의 결혼으로 숱한 화제를 뿌렸다.

테일러는 우선 영화배우 리처드 버튼과 두번에 걸친 `세기의 결혼과 이혼'으로 화제를 낳았다. 두사람은 1962년 영화 `클레오파트라'의 로마 촬영 세트장에서 만나 불타는 사랑에 빠졌다.

모두 배우자가 있었던 두 사람의 열애는 언론을 충격에 몰아넣었고 교황청이 나서서 비난하는 사태로 이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1964년 결혼해 1974년까지 사랑을 이어가다 이혼했고, 이 과정에서 10편의 영화에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이후 1975년10월 재결합했으나 다음해 7월 버튼의 알코올 중독 등으로 다시 파경을 맞았다.

테일러는 생존시 "로마에서 처음 만난 순간부터 우리는 언제나 미칠듯 강력한 사랑에 빠졌고 많은 시간을 함께했지만 충분하지는 않았다"고 회고했다.

지난 1984년 뇌출혈로 숨진 버튼도 최근 발견된 테일러에게 보낸 연서에서 "당신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여배우일 것"이라면서 "특출한 미모까지 겸비해 당신을 더욱 특별하게 한다"며 정열적인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보석을 고르는 안목과 씀씀이가 대단했던 리처드 버튼은 리즈 테일러에게 33.19 캐럿의 `크루프 다이아몬드' 그리고 루비와 다이아몬드로 꾸며진 목걸이의 중심에 박혀있는 물방울 모양의 라 페레그리나 진주도 선물했다.

이에 대해 테일러는 클레오파트라를 촬영할 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글이 웨일스어로 새겨져 있는 금시계를 버튼에게 선물하며 화답했다.

테일러의 화려한 결혼 이력은 18살때인 1950년 5월 호텔 재벌인 콘라드 힐튼 2세와 처음 결혼하면서 시작됐지만 해가 바뀌기도 전인 그해 12월 이혼했다. 이어 1952년에는 영국 영화배우 마이클 와일딩과 결혼해 두 아들을 두기도 했으나 4년만에 헤어졌다.

1957년에는 영화 제작자인 마이클 토드와 결혼해 딸을 낳았지만 토드가 다음해 비행기 추락사고로 숨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세번째 남편 토드가 죽은 뒤 테일러는 토드의 절친한 친구이자 자기 친구 데비 레널즈의 남편이었던 팝가수 에디 피셔와 염문을 뿌려 화제가 됐다. 당시 한 기자가 세간의 비판을 전하자 "날더러 어쩌라구? 그럼 혼자 자란 말야?"라고 응수했다.

테일러와 피셔 부부는 런던으로 이사했지만 테일러가 영화 클레오파트라 촬영장에서 리처드 버튼을 만나면서 파경을 맞게된다.

테일러는 버튼과 두번의 결혼과 파경으로 인연을 끝냈지만 "내가 죽으면 전 남편인 리처드 버튼의 고향에 뿌려지길 원한다"고 말할 정도로 버튼은 테일러가 가장 사랑한 남자로 평가되고 있다.

이후 테일러는 해군장관을 지낸 정치인 존 워너와 1976년 결혼했고, 워너는 이후 버지니아주에서 상원의원에 당선돼 상원 군사위원장을 지내는 등 워싱턴 정가를 주름잡기도 했다. 하지만 두사람은 1982년 헤어졌다.

테일러는 1991년 20년 연하인 공사장 노동자이자 트럭 운전기사이던 래리 포텐스키와 마이클 잭슨의 목장에서 결혼식을 치러 화제를 낳기도 했지만 5년만인 1996년 파경을 맞았다.

테일러는 작년 4월 78세의 나이로 29세 연하남인 할리우드 매니저 제이슨 윈터스와의 약혼설이 나돌기도 했으나 공식 부인했다.

테일러는 당시 자신의 트위터에 "나의 약혼에 관한 소문은 사실이 아니다"라면서 "제이슨은 내 매니저이자 가장 친한 친구이며 그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밝혔다.

테일러는 여덟번의 결혼으로 4명의 자녀와 10명의 손주, 4명의 증손주를 둔 가운데 말년에는 독신으로 지냈다. 파란만장했던 결혼생활과 관련해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나는 평생 화려한 보석에 둘러싸여 살아왔어요.하지만 내가 정말로 필요로 했던건 그런게 아니었어요.누군가의 진실한 마음과 사랑 그것뿐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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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사랑한 남자들
    • 입력 2011-03-24 06:22:00
    • 수정2011-03-24 06:27:08
    연합뉴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세기의 여우(女優)' 답게 여덟번의 결혼으로 숱한 화제를 뿌렸다. 테일러는 우선 영화배우 리처드 버튼과 두번에 걸친 `세기의 결혼과 이혼'으로 화제를 낳았다. 두사람은 1962년 영화 `클레오파트라'의 로마 촬영 세트장에서 만나 불타는 사랑에 빠졌다. 모두 배우자가 있었던 두 사람의 열애는 언론을 충격에 몰아넣었고 교황청이 나서서 비난하는 사태로 이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1964년 결혼해 1974년까지 사랑을 이어가다 이혼했고, 이 과정에서 10편의 영화에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이후 1975년10월 재결합했으나 다음해 7월 버튼의 알코올 중독 등으로 다시 파경을 맞았다. 테일러는 생존시 "로마에서 처음 만난 순간부터 우리는 언제나 미칠듯 강력한 사랑에 빠졌고 많은 시간을 함께했지만 충분하지는 않았다"고 회고했다. 지난 1984년 뇌출혈로 숨진 버튼도 최근 발견된 테일러에게 보낸 연서에서 "당신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여배우일 것"이라면서 "특출한 미모까지 겸비해 당신을 더욱 특별하게 한다"며 정열적인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보석을 고르는 안목과 씀씀이가 대단했던 리처드 버튼은 리즈 테일러에게 33.19 캐럿의 `크루프 다이아몬드' 그리고 루비와 다이아몬드로 꾸며진 목걸이의 중심에 박혀있는 물방울 모양의 라 페레그리나 진주도 선물했다. 이에 대해 테일러는 클레오파트라를 촬영할 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글이 웨일스어로 새겨져 있는 금시계를 버튼에게 선물하며 화답했다. 테일러의 화려한 결혼 이력은 18살때인 1950년 5월 호텔 재벌인 콘라드 힐튼 2세와 처음 결혼하면서 시작됐지만 해가 바뀌기도 전인 그해 12월 이혼했다. 이어 1952년에는 영국 영화배우 마이클 와일딩과 결혼해 두 아들을 두기도 했으나 4년만에 헤어졌다. 1957년에는 영화 제작자인 마이클 토드와 결혼해 딸을 낳았지만 토드가 다음해 비행기 추락사고로 숨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세번째 남편 토드가 죽은 뒤 테일러는 토드의 절친한 친구이자 자기 친구 데비 레널즈의 남편이었던 팝가수 에디 피셔와 염문을 뿌려 화제가 됐다. 당시 한 기자가 세간의 비판을 전하자 "날더러 어쩌라구? 그럼 혼자 자란 말야?"라고 응수했다. 테일러와 피셔 부부는 런던으로 이사했지만 테일러가 영화 클레오파트라 촬영장에서 리처드 버튼을 만나면서 파경을 맞게된다. 테일러는 버튼과 두번의 결혼과 파경으로 인연을 끝냈지만 "내가 죽으면 전 남편인 리처드 버튼의 고향에 뿌려지길 원한다"고 말할 정도로 버튼은 테일러가 가장 사랑한 남자로 평가되고 있다. 이후 테일러는 해군장관을 지낸 정치인 존 워너와 1976년 결혼했고, 워너는 이후 버지니아주에서 상원의원에 당선돼 상원 군사위원장을 지내는 등 워싱턴 정가를 주름잡기도 했다. 하지만 두사람은 1982년 헤어졌다. 테일러는 1991년 20년 연하인 공사장 노동자이자 트럭 운전기사이던 래리 포텐스키와 마이클 잭슨의 목장에서 결혼식을 치러 화제를 낳기도 했지만 5년만인 1996년 파경을 맞았다. 테일러는 작년 4월 78세의 나이로 29세 연하남인 할리우드 매니저 제이슨 윈터스와의 약혼설이 나돌기도 했으나 공식 부인했다. 테일러는 당시 자신의 트위터에 "나의 약혼에 관한 소문은 사실이 아니다"라면서 "제이슨은 내 매니저이자 가장 친한 친구이며 그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밝혔다. 테일러는 여덟번의 결혼으로 4명의 자녀와 10명의 손주, 4명의 증손주를 둔 가운데 말년에는 독신으로 지냈다. 파란만장했던 결혼생활과 관련해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나는 평생 화려한 보석에 둘러싸여 살아왔어요.하지만 내가 정말로 필요로 했던건 그런게 아니었어요.누군가의 진실한 마음과 사랑 그것뿐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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