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영웅, 현지 소대장

입력 2011.06.06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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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럽전선에 참전한 한 미군의 이야기를 다룬 영홥니다.

주인공은 직접 전쟁에 참여했던 오디 머피가 맡았습니다.

이등병이었던 오디 머피는 많은 전공을 세웠고 장교가 부족했던 미군은 그를 전쟁중에 소위로 임관시킵니다.

<녹취> "자네를 상병에서 소위로 임명하네. 지금 부터는 장교답게 행동하게"

전쟁터 현지에서 소대장이 된 오디 머피는 33개의 훈장을 받고 중위까지 진급합니다.

사후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힌 오디 머피.

그의 묘지는 존 F 케네디의 묘지 다음으로 방문객 수가 많습니다.

현지임관제도를 아십니까?

전쟁중에 모자란 장교를 충원하는 제돈데요.

한국전쟁 당시 우리나라도 미국처럼 현지임관 제도를 도입해 전사자로 인해 부족한 소대장을 보충했습니다.

전문교육을 받지 않고서 장교가 됐지만 치열한 전투현장에서 산화해간 현지소대장들.

기억속에서 잊혀져 가고 있는 그들의 이야기를 취재했습니다.

환영 연주 속에 포병 출신 노병들이 부대를 찾았습니다.

호국 보훈의 달을 맞아 포병부대가 마련한 초청행삽니다.

<녹취> "지금부터 K10에서 K9으로 포탄이 이동되는 모습을 보시겠습니다."

후배들의 설명과 시연을 흡족한 눈으로 바라보는 최갑석 예비역장군.

여든을 넘긴 노병이지만 이등병으로 입대해 육군 소장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군인입니다.

이등병에서 육군소장까지 진급한 계급만 16개.

최다계급을 승진했고 36년이라는 최장 군 복무경력을 지닌 산 역삽니다.

<인터뷰>최갑석(장군) : "언제라도 적의 그. 그 도발에 대해서 즉각 타격할 수 있는 태세를 갖췄다는 점에 대해서 크게, 크게 신뢰가 갑니다."

최갑석 장군의 군생활은 해방 2년후인 1947년에 시작됐습니다.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에 지원입대해 이등병이 된 최갑석.

배는 고팠고 일본군이 남기고 간 낡은 옷과 장비가 보급품의 전부였지만 자부심 하나로 버텼습니다.

<인터뷰>최갑석(장군) : "우리나라 군대니깐 스스로 들어가자 하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니깐 동네 청년들 다 같이 가자했는데 다 떨어지고 나만 혼자되니깐 미안한 생각도 들고 우월감도 생기고 그래서 당당하게 이등병으로 들어가니깐, 문자 그대로 이등병이죠."

성실한 군생활로 일등상사까지 진급한 그는 춘천의 한 포병부대에 배치됐고 그곳에서 한국 전쟁을 맞게 됩니다.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던 1950년 7월 29일.

최갑석 일등상사는 갑작스런 호출을 받고 사단 본부로 갑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바로 소위에 임명됩니다.

전쟁터 현지임관을 한 것입니다.

전쟁중이다 보니 임관식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인터뷰>최갑석(장군) : "사단장이 술을 부어주는 거예요. 술을 조그마한 잔, 조그마한 잔에 이제 술을 부어 주면은, 감사합니다. 하고 그거를 쫙 마셔요. 마시고 나면 부관 참모가 오징어가 있었는데 당시에 오징어 오징어 이제 다리 다리를 하나 찢어가지고서는 안주로 주는 겁니다."

포병장교로서 포대장을 맡은 최갑석 소위는 1951년 양구 탈환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화랑무공훈장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신병 보충을 위해 모집한 학도병 160여명을 이끌고 이동하던중 북한군의 기습을 받아 심각한 부상을 입는 등 죽을 고비도 3번이나 넘겼습니다.

<인터뷰>최갑석(장군) : "소위 달고 그날 나가서 싸우다가 그날 전사하면 그 하루살이라고 이제 그렇게도 표현을 했죠. 한 달 살면 오래 살고 삼개월 죽지 않고 살 으면 에.. 저..환갑 된다 하는 말까지 나오고.."

한국전쟁 초기 월등한 화력과 병력을 앞세운 북한군의 기습에 아군의 피해는 막대했습니다.

특히 최전방에서 싸우던 소대장들의 피해는 더욱 심각해 전쟁 초기 한달동안 약 60%가 손실을 입었습니다.

<인터뷰>손경호(박사) : "정작 어려운 상황이 되면 뭐, 초급 간부 분들이 나서지 않으면 병사들이 따라오지 않거든요. 그러다 보니깐 자기들을 많이 노출시키는 그런 일들을 하게 되는데 이런 일들을 다 감당해야 되는 인원들이 바로 초급 장교들입니다."

장교 양성이 제대로 되지 않는 창군 초기인데다 많은 손실을 입은 소대장을 보충하기 위해 군 수뇌부는 현지임관을 실시했습니다.

일등상사와 특무상사, 준위 가운데 뛰어난 부사관을 현지 소대장에 임명한 것입니다.

<인터뷰>손경호(박사) : "기존 부대에 발생한 전투력 공벽, 공백. 장교 공백을 어, 매우는 요소로다 현지 임관 하신 분들이 관용을 되셨고요, 또 한국전 당시 개전 초에 우리가 8개 사단을 가지고 시작했었는데 이것이 어, 사단 규모가 이제 늘어나게 되죠. 그런 부대들의 이제 충원, 창설 요원으로 할당이 되고 또 활용되는 사례들이 많이 발생을 합니다."

현지 임관으로 소대장을 지냈던 노병들이 국립현충원을 찾았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 6달 동안 현지소대장에 임관된 부사관만 2천6백 52명.

소위계급장을 달자마자 이들은 치열한 전투현장에 투입됐습니다.

그리고 천 여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면서 이제 추념비에 이름만 남았습니다.

<인터뷰>서갑성(예비역 대령) : "그러니깐 그 당시에는 소위 임관이 되면서 어떤 심정을 가졌냐면 이제 죽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전방에 가서 제일 먼저 나가서 싸워야 하는 사람이 소대장 아닙니까? 그러니까 오죽하면 소모소위, 그 당시에 임관된 사람들 전부 소모소위입니다."

<인터뷰>이영구(예비역 소장) : "소장했던 유품. 유품이 다 같이 동시에 다 매장되어 있어요. 추념비 제일 아래쪽에.."

<인터뷰>박재홍(예비역 대령) : "(매년) 평균 11명, 11명씩 서거를 하고 있습니다. 생존해 있는 현지임관 장교들이.."

현지 소대장들의 나이는 이제 여든에서 아흔사이.

전사에다 노환으로 하나둘 세상을 떠나면서 남은 사람은 270명 정돕니다.

하지만 산자와 죽은자 모두는 화랑무공훈장 이상을 받은 역전의 용사입니다.

84살의 김한준 예비역 대위. 1946년 이등병으로 군에 입대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역시 현지 임관으로 소위가 됩니다.

지금은 부인의 도움을 받아야만 겨우 움직일 수 있는 노인이지만 한국전쟁 당시에는 전사의 한 획을 긋는 영웅이었습니다.

전쟁 막바지였던 1953년 7월 20일 강원도 화천 북방 425고지 전투에서 한개 중대로 연대규모의 중공군을 격파하면서 동부전선을 지켜냈습니다.

<인터뷰>김한준(대위) : "나는 9남매의 장남이다 9남매의 장남인데 내가 죽으면 동생이 장남 노릇을 하면 될 것 아니냐, 이런 그저 과거의 슬로건으로 전쟁을 했어."

김한준 대위는 최고 훈장인 태극 무공 훈장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충무와 화랑 무공훈장 등 모두 4개의 훈장을 받을 정도의 뛰어난 현지 중대장이었습니다.

그의 활약상은 어린이 동화용 책으로까지 제작됐습니다.

<인터뷰>김한준 아내 : "이거는 이제 전쟁 당시에 오뚝이같이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고 다시 일어나고 그래서 책자로 이분을 위해서 지어서, 오뚝이 중대장님이라고.."

아내를 두고 전사하면 또 다른 불행만 남긴다며 전쟁이 끝난 뒤 지금의 부인과 결혼한 김한준 대위.

그는 현지 소모 장교라는 용어를 받아 들일 수 없습니다.

<인터뷰>김한준(대위) : "내가 하기 싫어도 그저 정부에서 시켰어. 소대장 대리 근무하면 그냥 장교로 임관시켜버렸어. 근데 장교로 임관시키면서도 귀관들은 소모 장교다, 사단장한테 신고할 적에 사단장이 그런 소리 할 적엔 기분이 안 좋았어. 왜 소모 장교가 돼야 하나 승리 장교가 돼야지."

<녹취>김한준(대위) :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흘러가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의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사라져간 전우야 잘자라."

장교로서 큰 전공을 세우고 수많은 훈장을 탄 그에게는 당시 전장을 누비던 모든 전우가 영웅이었다고 말합니다.

뛰고, 기고, 적 진지를 향한 공격이 한창입니다.

사병과 장교의 다리 역할을 하는 부사관을 양성하는 학굡니다.

한국전쟁 당시 현지임관을 통해 국가에 공헌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들과 같은 부사관 출신들입니다.

육군 부사관학교 역사관에는 현지 임관한 선배들의 계급장과 훈장들이 진열돼 있습니다.

<인터뷰>신희라(부사관 교육생) : "병에서 장군까지 힘든,힘든 길을 올라오셨는데 저도 그 업적에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부사관으로서 한명의 부사관이 되어서 열심히 업적에 누가되지 않도록 열심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전시가 아닌 만큼 현재 훈련을 받고 있는 부사관들이 장교로 진출할 기회는 사실상 없습니다.

하지만 선배들이 한국전쟁에서 보여준 용기와 투지만큼은 이들 후배들에게 큰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소대장으로 현지 임관된 후 6달을 살기 힘든 전시 상황.

제대로 된 임관식 하나 없이 소모 장교라는 두려움 속에서도 누구보다 앞서 최전방을 누볍습니다.

그리고 전사에 길이 남을 수많은 승리를 일궈냈습니다.

대부분은 전쟁터에서 죽거나 다친 그들.

그리고 남겨진 이들은 이제 80을 넘겨 노병이 되었습니다.

한국 전쟁이 일어난지 61년의 긴 세월이 흘렀지만 그들의 조국수호 정신은 갈수록 빛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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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잊혀진 영웅, 현지 소대장
    • 입력 2011-06-06 08:59:05
    취재파일K
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럽전선에 참전한 한 미군의 이야기를 다룬 영홥니다. 주인공은 직접 전쟁에 참여했던 오디 머피가 맡았습니다. 이등병이었던 오디 머피는 많은 전공을 세웠고 장교가 부족했던 미군은 그를 전쟁중에 소위로 임관시킵니다. <녹취> "자네를 상병에서 소위로 임명하네. 지금 부터는 장교답게 행동하게" 전쟁터 현지에서 소대장이 된 오디 머피는 33개의 훈장을 받고 중위까지 진급합니다. 사후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힌 오디 머피. 그의 묘지는 존 F 케네디의 묘지 다음으로 방문객 수가 많습니다. 현지임관제도를 아십니까? 전쟁중에 모자란 장교를 충원하는 제돈데요. 한국전쟁 당시 우리나라도 미국처럼 현지임관 제도를 도입해 전사자로 인해 부족한 소대장을 보충했습니다. 전문교육을 받지 않고서 장교가 됐지만 치열한 전투현장에서 산화해간 현지소대장들. 기억속에서 잊혀져 가고 있는 그들의 이야기를 취재했습니다. 환영 연주 속에 포병 출신 노병들이 부대를 찾았습니다. 호국 보훈의 달을 맞아 포병부대가 마련한 초청행삽니다. <녹취> "지금부터 K10에서 K9으로 포탄이 이동되는 모습을 보시겠습니다." 후배들의 설명과 시연을 흡족한 눈으로 바라보는 최갑석 예비역장군. 여든을 넘긴 노병이지만 이등병으로 입대해 육군 소장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군인입니다. 이등병에서 육군소장까지 진급한 계급만 16개. 최다계급을 승진했고 36년이라는 최장 군 복무경력을 지닌 산 역삽니다. <인터뷰>최갑석(장군) : "언제라도 적의 그. 그 도발에 대해서 즉각 타격할 수 있는 태세를 갖췄다는 점에 대해서 크게, 크게 신뢰가 갑니다." 최갑석 장군의 군생활은 해방 2년후인 1947년에 시작됐습니다.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에 지원입대해 이등병이 된 최갑석. 배는 고팠고 일본군이 남기고 간 낡은 옷과 장비가 보급품의 전부였지만 자부심 하나로 버텼습니다. <인터뷰>최갑석(장군) : "우리나라 군대니깐 스스로 들어가자 하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니깐 동네 청년들 다 같이 가자했는데 다 떨어지고 나만 혼자되니깐 미안한 생각도 들고 우월감도 생기고 그래서 당당하게 이등병으로 들어가니깐, 문자 그대로 이등병이죠." 성실한 군생활로 일등상사까지 진급한 그는 춘천의 한 포병부대에 배치됐고 그곳에서 한국 전쟁을 맞게 됩니다.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던 1950년 7월 29일. 최갑석 일등상사는 갑작스런 호출을 받고 사단 본부로 갑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바로 소위에 임명됩니다. 전쟁터 현지임관을 한 것입니다. 전쟁중이다 보니 임관식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인터뷰>최갑석(장군) : "사단장이 술을 부어주는 거예요. 술을 조그마한 잔, 조그마한 잔에 이제 술을 부어 주면은, 감사합니다. 하고 그거를 쫙 마셔요. 마시고 나면 부관 참모가 오징어가 있었는데 당시에 오징어 오징어 이제 다리 다리를 하나 찢어가지고서는 안주로 주는 겁니다." 포병장교로서 포대장을 맡은 최갑석 소위는 1951년 양구 탈환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화랑무공훈장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신병 보충을 위해 모집한 학도병 160여명을 이끌고 이동하던중 북한군의 기습을 받아 심각한 부상을 입는 등 죽을 고비도 3번이나 넘겼습니다. <인터뷰>최갑석(장군) : "소위 달고 그날 나가서 싸우다가 그날 전사하면 그 하루살이라고 이제 그렇게도 표현을 했죠. 한 달 살면 오래 살고 삼개월 죽지 않고 살 으면 에.. 저..환갑 된다 하는 말까지 나오고.." 한국전쟁 초기 월등한 화력과 병력을 앞세운 북한군의 기습에 아군의 피해는 막대했습니다. 특히 최전방에서 싸우던 소대장들의 피해는 더욱 심각해 전쟁 초기 한달동안 약 60%가 손실을 입었습니다. <인터뷰>손경호(박사) : "정작 어려운 상황이 되면 뭐, 초급 간부 분들이 나서지 않으면 병사들이 따라오지 않거든요. 그러다 보니깐 자기들을 많이 노출시키는 그런 일들을 하게 되는데 이런 일들을 다 감당해야 되는 인원들이 바로 초급 장교들입니다." 장교 양성이 제대로 되지 않는 창군 초기인데다 많은 손실을 입은 소대장을 보충하기 위해 군 수뇌부는 현지임관을 실시했습니다. 일등상사와 특무상사, 준위 가운데 뛰어난 부사관을 현지 소대장에 임명한 것입니다. <인터뷰>손경호(박사) : "기존 부대에 발생한 전투력 공벽, 공백. 장교 공백을 어, 매우는 요소로다 현지 임관 하신 분들이 관용을 되셨고요, 또 한국전 당시 개전 초에 우리가 8개 사단을 가지고 시작했었는데 이것이 어, 사단 규모가 이제 늘어나게 되죠. 그런 부대들의 이제 충원, 창설 요원으로 할당이 되고 또 활용되는 사례들이 많이 발생을 합니다." 현지 임관으로 소대장을 지냈던 노병들이 국립현충원을 찾았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 6달 동안 현지소대장에 임관된 부사관만 2천6백 52명. 소위계급장을 달자마자 이들은 치열한 전투현장에 투입됐습니다. 그리고 천 여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면서 이제 추념비에 이름만 남았습니다. <인터뷰>서갑성(예비역 대령) : "그러니깐 그 당시에는 소위 임관이 되면서 어떤 심정을 가졌냐면 이제 죽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전방에 가서 제일 먼저 나가서 싸워야 하는 사람이 소대장 아닙니까? 그러니까 오죽하면 소모소위, 그 당시에 임관된 사람들 전부 소모소위입니다." <인터뷰>이영구(예비역 소장) : "소장했던 유품. 유품이 다 같이 동시에 다 매장되어 있어요. 추념비 제일 아래쪽에.." <인터뷰>박재홍(예비역 대령) : "(매년) 평균 11명, 11명씩 서거를 하고 있습니다. 생존해 있는 현지임관 장교들이.." 현지 소대장들의 나이는 이제 여든에서 아흔사이. 전사에다 노환으로 하나둘 세상을 떠나면서 남은 사람은 270명 정돕니다. 하지만 산자와 죽은자 모두는 화랑무공훈장 이상을 받은 역전의 용사입니다. 84살의 김한준 예비역 대위. 1946년 이등병으로 군에 입대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역시 현지 임관으로 소위가 됩니다. 지금은 부인의 도움을 받아야만 겨우 움직일 수 있는 노인이지만 한국전쟁 당시에는 전사의 한 획을 긋는 영웅이었습니다. 전쟁 막바지였던 1953년 7월 20일 강원도 화천 북방 425고지 전투에서 한개 중대로 연대규모의 중공군을 격파하면서 동부전선을 지켜냈습니다. <인터뷰>김한준(대위) : "나는 9남매의 장남이다 9남매의 장남인데 내가 죽으면 동생이 장남 노릇을 하면 될 것 아니냐, 이런 그저 과거의 슬로건으로 전쟁을 했어." 김한준 대위는 최고 훈장인 태극 무공 훈장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충무와 화랑 무공훈장 등 모두 4개의 훈장을 받을 정도의 뛰어난 현지 중대장이었습니다. 그의 활약상은 어린이 동화용 책으로까지 제작됐습니다. <인터뷰>김한준 아내 : "이거는 이제 전쟁 당시에 오뚝이같이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고 다시 일어나고 그래서 책자로 이분을 위해서 지어서, 오뚝이 중대장님이라고.." 아내를 두고 전사하면 또 다른 불행만 남긴다며 전쟁이 끝난 뒤 지금의 부인과 결혼한 김한준 대위. 그는 현지 소모 장교라는 용어를 받아 들일 수 없습니다. <인터뷰>김한준(대위) : "내가 하기 싫어도 그저 정부에서 시켰어. 소대장 대리 근무하면 그냥 장교로 임관시켜버렸어. 근데 장교로 임관시키면서도 귀관들은 소모 장교다, 사단장한테 신고할 적에 사단장이 그런 소리 할 적엔 기분이 안 좋았어. 왜 소모 장교가 돼야 하나 승리 장교가 돼야지." <녹취>김한준(대위) :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흘러가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의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사라져간 전우야 잘자라." 장교로서 큰 전공을 세우고 수많은 훈장을 탄 그에게는 당시 전장을 누비던 모든 전우가 영웅이었다고 말합니다. 뛰고, 기고, 적 진지를 향한 공격이 한창입니다. 사병과 장교의 다리 역할을 하는 부사관을 양성하는 학굡니다. 한국전쟁 당시 현지임관을 통해 국가에 공헌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들과 같은 부사관 출신들입니다. 육군 부사관학교 역사관에는 현지 임관한 선배들의 계급장과 훈장들이 진열돼 있습니다. <인터뷰>신희라(부사관 교육생) : "병에서 장군까지 힘든,힘든 길을 올라오셨는데 저도 그 업적에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부사관으로서 한명의 부사관이 되어서 열심히 업적에 누가되지 않도록 열심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전시가 아닌 만큼 현재 훈련을 받고 있는 부사관들이 장교로 진출할 기회는 사실상 없습니다. 하지만 선배들이 한국전쟁에서 보여준 용기와 투지만큼은 이들 후배들에게 큰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소대장으로 현지 임관된 후 6달을 살기 힘든 전시 상황. 제대로 된 임관식 하나 없이 소모 장교라는 두려움 속에서도 누구보다 앞서 최전방을 누볍습니다. 그리고 전사에 길이 남을 수많은 승리를 일궈냈습니다. 대부분은 전쟁터에서 죽거나 다친 그들. 그리고 남겨진 이들은 이제 80을 넘겨 노병이 되었습니다. 한국 전쟁이 일어난지 61년의 긴 세월이 흘렀지만 그들의 조국수호 정신은 갈수록 빛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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