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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즈업 북한] ‘작은 북한’ 조총련
입력 2011.06.11 (10:18) 남북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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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속의‘작은 북한’조총련의 역사는 해방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 강점기 이전에 수천 명에 불과했던 재일동포는 1945년 일본이 패망할 당시 230만 명에 이르렀다.

전쟁은 끝났지만 재일동포들의 귀국길은 순탄치 않았다.

미 군정이 귀국 지참금을 턱없이 낮게 책정하자, 재일동포 60만 명 가량은 자의반타의반으로 잔류를 선택했다.

이들이 스스로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단체가 재일조선인연맹 ‘조련’이었다.

좌익이 주도하던 조련은 한때 회원 수가 40만 명에 육박했지만 일본 정부와의 마찰로 1949년 해산됐다.

2년 뒤 조련의 핵심들이 다시 조선민주전선을 결성했고, 1955년에는 북한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재일조선인총연합회를 다시 출범시켰다.

조총련은 출범 당시 재일동포의 80%인 43만 명이 가입한 명실상부한 동포사회의 구심점이었다.

조총련은 빠른 속도로 세력을 키워나갔고, 1960년대에 전성기를 맞았다.

도쿄 중앙본부를 비롯해 지방본부 48개, 지부 260개, 지방분회 1300여개에 이르렀다.

회원 수는 50만 명으로 늘어났다.

조선은행과 조선신보 등 22개 기업과 단체를 산하에 뒀다.

조총련은 동포들의 권익신장과 단합을 기치로 내세웠지만, 본질적으로는 북한의 해외 거점 성격을 띄고 있었다.

조총련 출범 당시 북한의 대외 당면과제는 한반도 통일과 일본과의 수교였다.

이 두 가지 역할이 조총련에게 주어졌다.

<인터뷰> 박정진(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연구교수) : "북한이 일본과 국교 정상화를 하기 위한 외교전략을 수행하기 위한 준외교기관으로서의 성격이 첫 번째 있었고요 또 한 가지는 일본 내에서 활동을 통해서 한반도 통일을 돕는다, 즉 통일전선 조직으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었습니다."

일본 정부도 조총련에 과세를 하지 않음으로서 조총련의 외교기관 성격을 인정했다.

조총련이 지금까지 가장 역점을 둔 사업은 우리 말과 글을 가르치는 민족교육이었다.

조총련은 일본 곳곳에 조선학교를 설립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는 물론 도쿄 인근에 최고 교육기관인 조선대학교까지 설립했다.

우리에게 ‘인민 루니’로 알려진 북한 축구 대표팀 정대세 선수도 조선대학교 출신이다.

조선학교는 151개교에 재학생이 6만 명에 육박할 정도로 성장했다.

<인터뷰> 진희관(인제대학교 통일학부 교수) : "조총련의 성격은 애초에 조련에서 시작했을 때부터 동포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그런 역할이 제일 중요했고, 미시적으로 들어간다 면 외국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 자녀, 우리 말과 글을 가르칠 수 있는 민족학교를 지원하는 일이 중요했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북한의 재정적 지원이 큰 역할을 했다.

북한은 재일동포들을 포섭하기 위해 해마다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을 조선학교에 지원했다.

1957년 첫 지원금은 2억엔, 가장 많았던 1975년에는 34억엔이었으며 지금까지 모두 154차례에 걸쳐 462억엔에 이른다.

차별을 받고 살던 재일교포들은 조선학교의 설립과 확장에 크게 감격했다.

민족교육사업을 통해 재일동포 사회의 절대적 지지를 얻은 북한과 조총련은 재일동포 북송사업에 나섰다.

조총련은 북한을 ‘지상낙원’으로 선전하며 북송사업을 벌였다.

‘조센징’이라는 멸시 속에 궁핍하게 살던 많은 재일동포들이 주저 없이 북송선에 올랐다.

첫 북송선은 1959년 12월 일본 니가타에서 5만 명의 인파가 몰린 가운데 청진으로 떠났다.

<인터뷰> 진희관(인제대학교 통일학부 교수) : "대부분 고향이 남한임에도 불구하고 남한에서도 경제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 당시 북한에서 그 사람들을 받아 들였기 때문에 북송 초기에는 강제로 이 사람들이 끌려간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활로가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그것을 북한이 받아들인 상황이었습니다."

북한이 재일동포들을 받아들인 건 정치경제적 목적이었다.

전후 국가 재건을 위한 노동력 확보와 재일동포 사회를 활용한 일본과의 외교 관계 교섭을 위해 재일동포들이 필요했다.

일본 정부 역시 재일동포들을 가난하고 범죄율이 높은, 사회 불만세력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송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북한과 일본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면서 북송사업은 남한의 결사적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959년부터 1984년까지 25년 동안 북한으로 이주한 재일동포는 무려 9만3천명에 이르렀다.

<인터뷰> 박정진(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연구교수) : "북한도 필요해서 했고 일본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죠. 한국도 반대를 했고..북한을 중심으로 말씀을 드리면 당시 제1차 5개년 계획이 시작됐던 시점이기 때문에 노동력이 많이 부족했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조총련은 1965년 남한이 일본과 먼저 수교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북일 수교는 당시 북한이 조총련에 지시한 핵심목표였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북한과 조총련의 적극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한과 먼저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인터뷰> 박정진(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연구교수) : "한일국교정상화가 북일국교정상화보다 먼저 되면서 조총련의 일본 내에서의 합법적 지위가 상실이 되고요. 반면 65년 이후에는 통일전선조직으로서의 성격이 강화됩니다. 나아가서 (생략) 북한과 일본과의 관계가 상당히 단절되고 통일전선조직으로서의 성격이 일면 비합법적인 활동까지 확대가 되죠. 따라서 조총련의 이미지 뭔가 북한의 공작활동을 지원한다거나 통일운동을 백업 하는 이미지가 이때 형성됩니다."

조총련은 한일 수교 이후 북한 국적을 버리고 남한 국적을 선택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조직적 기반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또 조총련의 적극적인 대남공작 활동과 조선학교에서 이뤄진 과도한 김일성, 김정일 우상화 교육도 재일동포들의 이탈을 가속화시켰다.

1960년 후반대 들어 북한의 경제력도 약화되기 시작하면서 조총련과 북한의 경제적 관계도 역전됐다.

북한은 조총련에 애국 송금을 요구했고, 조총련은 조선은행을 통해 매년 10억 달러 가량을 북한으로 보냈다.

북한은 조총련을 달래고 재일동포들에게 소속감을 심어주기 위해 1967년부터 조총련 간부들을 우리의 국회의원격인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임명했다.

초대 의장을 맡은 뒤 지난 2001년 숨질 때까지 조총련을 이끌었던 한덕수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7번이나 연임했다.

하지만 북한의 경제사정 악화와 맞물린 조총련의 쇠퇴를 막아내지는 못했다.

여기에다 북한의 핵개발과 납치문제는 조총련에 결정적 타격을 줬다.

1990년대 들어 북한이 핵개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국제사회에 알려지면서 일본 국민들은 큰 위협을 느꼈다.

당연히 일본 내에서 조총련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커졌고, 이로 인해 재일동포들은 일상생활에서조차 어려움을 겪게 됐다.

여기에다 북일정상회담을 통해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가 공론화되면서 조총련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쇠퇴일로에 있던 조총련은 지난 2001년 금융기관인 조선은행이 600억엔 대의 부채를 남기고 파산하면서 재정적 위기까지 맞았다.

조총련의 땅과 건물들은 물론, 조선학교까지 속속 가압류됐다.

도쿄에 있는 조총련 본부 건물은 매각 위기에 놓였다.

조총련의 현재 회원 수는 5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전성기의 10분의 1 수준이다.

150개를 넘었던 조선학교 수는 절반으로 줄었고, 한때 6만 명에 육박했던 재학생 수는 만 명 수준으로 떨어졌다.

회원 수 급감, 심각한 재정난, 일본 내 부정적인 여론, 북한의 경제난과 3대 세습.

총련은 그야말로 총체적 위기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북한은 여전히 조총련을 지도하고 있고, 또 매년 2억엔 가량의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지만 영향력은 크게 줄어든 상태다.

일본 산케이신문은 북한의 3대 세습과 연평도 포격 도발 이후 조총련 회원들이 흔들리고 있다고 진단했다.

<인터뷰> 진희관(인제대학교 통일학부 교수) : "사상이나 정치 문제보다는 동포들의 경제나 사회 복지, 이 문제에 중점을 두지 않으면 그 조직은 존재하기 어렵지 않겠느냐 이런 측면에서 정치적인 측면보다는 그 외적인 측면을 비중을 둘 수밖에 없지 않는가 생각됩니다."

남북 분단 상황은 한반도의 허리에 38선이 그었듯 재일동포 사회에도 보이지 않는 38선을 만들었다.

북한계열 조총련과 남한계열 민단이 2000년대 들어 화해를 모색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대립하고 있다.

일본의 상황은 남북의 7000만 명이 하나가 되는 통일뿐만 아니라 700만 명에 이르는 재외동포들의 통일도 과제라는 점을 일깨워준다.

그런 점에서 일본 안의 작은 북한 ‘조총련’의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터뷰> 진희관(인제대학교 통일학부 교수) : "조총련에 대한 관심은 북한의 하나의 외곽조직으로 보는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향후 우리가 통일해 나가는 과정에서 한민족으로 나가야할 대상이라는 측면에서 그들을 이해 하고 (중략)고민해나가야 하는것이 우리가 해야할 일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됩니다."


  • [클로즈업 북한] ‘작은 북한’ 조총련
    • 입력 2011-06-11 10:18:21
    남북의 창
일본 속의‘작은 북한’조총련의 역사는 해방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 강점기 이전에 수천 명에 불과했던 재일동포는 1945년 일본이 패망할 당시 230만 명에 이르렀다.

전쟁은 끝났지만 재일동포들의 귀국길은 순탄치 않았다.

미 군정이 귀국 지참금을 턱없이 낮게 책정하자, 재일동포 60만 명 가량은 자의반타의반으로 잔류를 선택했다.

이들이 스스로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단체가 재일조선인연맹 ‘조련’이었다.

좌익이 주도하던 조련은 한때 회원 수가 40만 명에 육박했지만 일본 정부와의 마찰로 1949년 해산됐다.

2년 뒤 조련의 핵심들이 다시 조선민주전선을 결성했고, 1955년에는 북한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재일조선인총연합회를 다시 출범시켰다.

조총련은 출범 당시 재일동포의 80%인 43만 명이 가입한 명실상부한 동포사회의 구심점이었다.

조총련은 빠른 속도로 세력을 키워나갔고, 1960년대에 전성기를 맞았다.

도쿄 중앙본부를 비롯해 지방본부 48개, 지부 260개, 지방분회 1300여개에 이르렀다.

회원 수는 50만 명으로 늘어났다.

조선은행과 조선신보 등 22개 기업과 단체를 산하에 뒀다.

조총련은 동포들의 권익신장과 단합을 기치로 내세웠지만, 본질적으로는 북한의 해외 거점 성격을 띄고 있었다.

조총련 출범 당시 북한의 대외 당면과제는 한반도 통일과 일본과의 수교였다.

이 두 가지 역할이 조총련에게 주어졌다.

<인터뷰> 박정진(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연구교수) : "북한이 일본과 국교 정상화를 하기 위한 외교전략을 수행하기 위한 준외교기관으로서의 성격이 첫 번째 있었고요 또 한 가지는 일본 내에서 활동을 통해서 한반도 통일을 돕는다, 즉 통일전선 조직으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었습니다."

일본 정부도 조총련에 과세를 하지 않음으로서 조총련의 외교기관 성격을 인정했다.

조총련이 지금까지 가장 역점을 둔 사업은 우리 말과 글을 가르치는 민족교육이었다.

조총련은 일본 곳곳에 조선학교를 설립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는 물론 도쿄 인근에 최고 교육기관인 조선대학교까지 설립했다.

우리에게 ‘인민 루니’로 알려진 북한 축구 대표팀 정대세 선수도 조선대학교 출신이다.

조선학교는 151개교에 재학생이 6만 명에 육박할 정도로 성장했다.

<인터뷰> 진희관(인제대학교 통일학부 교수) : "조총련의 성격은 애초에 조련에서 시작했을 때부터 동포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그런 역할이 제일 중요했고, 미시적으로 들어간다 면 외국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 자녀, 우리 말과 글을 가르칠 수 있는 민족학교를 지원하는 일이 중요했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북한의 재정적 지원이 큰 역할을 했다.

북한은 재일동포들을 포섭하기 위해 해마다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을 조선학교에 지원했다.

1957년 첫 지원금은 2억엔, 가장 많았던 1975년에는 34억엔이었으며 지금까지 모두 154차례에 걸쳐 462억엔에 이른다.

차별을 받고 살던 재일교포들은 조선학교의 설립과 확장에 크게 감격했다.

민족교육사업을 통해 재일동포 사회의 절대적 지지를 얻은 북한과 조총련은 재일동포 북송사업에 나섰다.

조총련은 북한을 ‘지상낙원’으로 선전하며 북송사업을 벌였다.

‘조센징’이라는 멸시 속에 궁핍하게 살던 많은 재일동포들이 주저 없이 북송선에 올랐다.

첫 북송선은 1959년 12월 일본 니가타에서 5만 명의 인파가 몰린 가운데 청진으로 떠났다.

<인터뷰> 진희관(인제대학교 통일학부 교수) : "대부분 고향이 남한임에도 불구하고 남한에서도 경제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 당시 북한에서 그 사람들을 받아 들였기 때문에 북송 초기에는 강제로 이 사람들이 끌려간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활로가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그것을 북한이 받아들인 상황이었습니다."

북한이 재일동포들을 받아들인 건 정치경제적 목적이었다.

전후 국가 재건을 위한 노동력 확보와 재일동포 사회를 활용한 일본과의 외교 관계 교섭을 위해 재일동포들이 필요했다.

일본 정부 역시 재일동포들을 가난하고 범죄율이 높은, 사회 불만세력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송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북한과 일본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면서 북송사업은 남한의 결사적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959년부터 1984년까지 25년 동안 북한으로 이주한 재일동포는 무려 9만3천명에 이르렀다.

<인터뷰> 박정진(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연구교수) : "북한도 필요해서 했고 일본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죠. 한국도 반대를 했고..북한을 중심으로 말씀을 드리면 당시 제1차 5개년 계획이 시작됐던 시점이기 때문에 노동력이 많이 부족했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조총련은 1965년 남한이 일본과 먼저 수교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북일 수교는 당시 북한이 조총련에 지시한 핵심목표였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북한과 조총련의 적극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한과 먼저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인터뷰> 박정진(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연구교수) : "한일국교정상화가 북일국교정상화보다 먼저 되면서 조총련의 일본 내에서의 합법적 지위가 상실이 되고요. 반면 65년 이후에는 통일전선조직으로서의 성격이 강화됩니다. 나아가서 (생략) 북한과 일본과의 관계가 상당히 단절되고 통일전선조직으로서의 성격이 일면 비합법적인 활동까지 확대가 되죠. 따라서 조총련의 이미지 뭔가 북한의 공작활동을 지원한다거나 통일운동을 백업 하는 이미지가 이때 형성됩니다."

조총련은 한일 수교 이후 북한 국적을 버리고 남한 국적을 선택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조직적 기반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또 조총련의 적극적인 대남공작 활동과 조선학교에서 이뤄진 과도한 김일성, 김정일 우상화 교육도 재일동포들의 이탈을 가속화시켰다.

1960년 후반대 들어 북한의 경제력도 약화되기 시작하면서 조총련과 북한의 경제적 관계도 역전됐다.

북한은 조총련에 애국 송금을 요구했고, 조총련은 조선은행을 통해 매년 10억 달러 가량을 북한으로 보냈다.

북한은 조총련을 달래고 재일동포들에게 소속감을 심어주기 위해 1967년부터 조총련 간부들을 우리의 국회의원격인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임명했다.

초대 의장을 맡은 뒤 지난 2001년 숨질 때까지 조총련을 이끌었던 한덕수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7번이나 연임했다.

하지만 북한의 경제사정 악화와 맞물린 조총련의 쇠퇴를 막아내지는 못했다.

여기에다 북한의 핵개발과 납치문제는 조총련에 결정적 타격을 줬다.

1990년대 들어 북한이 핵개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국제사회에 알려지면서 일본 국민들은 큰 위협을 느꼈다.

당연히 일본 내에서 조총련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커졌고, 이로 인해 재일동포들은 일상생활에서조차 어려움을 겪게 됐다.

여기에다 북일정상회담을 통해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가 공론화되면서 조총련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쇠퇴일로에 있던 조총련은 지난 2001년 금융기관인 조선은행이 600억엔 대의 부채를 남기고 파산하면서 재정적 위기까지 맞았다.

조총련의 땅과 건물들은 물론, 조선학교까지 속속 가압류됐다.

도쿄에 있는 조총련 본부 건물은 매각 위기에 놓였다.

조총련의 현재 회원 수는 5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전성기의 10분의 1 수준이다.

150개를 넘었던 조선학교 수는 절반으로 줄었고, 한때 6만 명에 육박했던 재학생 수는 만 명 수준으로 떨어졌다.

회원 수 급감, 심각한 재정난, 일본 내 부정적인 여론, 북한의 경제난과 3대 세습.

총련은 그야말로 총체적 위기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북한은 여전히 조총련을 지도하고 있고, 또 매년 2억엔 가량의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지만 영향력은 크게 줄어든 상태다.

일본 산케이신문은 북한의 3대 세습과 연평도 포격 도발 이후 조총련 회원들이 흔들리고 있다고 진단했다.

<인터뷰> 진희관(인제대학교 통일학부 교수) : "사상이나 정치 문제보다는 동포들의 경제나 사회 복지, 이 문제에 중점을 두지 않으면 그 조직은 존재하기 어렵지 않겠느냐 이런 측면에서 정치적인 측면보다는 그 외적인 측면을 비중을 둘 수밖에 없지 않는가 생각됩니다."

남북 분단 상황은 한반도의 허리에 38선이 그었듯 재일동포 사회에도 보이지 않는 38선을 만들었다.

북한계열 조총련과 남한계열 민단이 2000년대 들어 화해를 모색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대립하고 있다.

일본의 상황은 남북의 7000만 명이 하나가 되는 통일뿐만 아니라 700만 명에 이르는 재외동포들의 통일도 과제라는 점을 일깨워준다.

그런 점에서 일본 안의 작은 북한 ‘조총련’의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터뷰> 진희관(인제대학교 통일학부 교수) : "조총련에 대한 관심은 북한의 하나의 외곽조직으로 보는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향후 우리가 통일해 나가는 과정에서 한민족으로 나가야할 대상이라는 측면에서 그들을 이해 하고 (중략)고민해나가야 하는것이 우리가 해야할 일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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