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맺힌 ‘망간기념관’

입력 2011.06.20 (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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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 90cm, 높이 120cm, 사람이 서기 힘든 좁고 낮은 통로.

웅크린 자세로 채굴한 200~300kg의 광석을 등에 진 채 앉은 자세로 기어 나와야 하는 가혹한 노동, 일본인들이 일하려 하지 않는 곳에 강제 징용된 조선인 3천여 명.

1989년, 일본 내 유일한 강제징용 현장, 단바 망간 기념관 개관.

20년 간 계속된 적자, 결국 2009년 5월 폐관.

<앵커 멘트>

여러분, 단바 망간 기념관을 아십니까? 일본 단바라는 지역의 한 폐광산을 기념관으로 만든 곳인데요, 2년 전 운영난 끝에 문을 닫았다가, 우여곡절 끝에 이달 말 재개관을 앞두고 있습니다. 자칫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했던 이 곳 단바 망간 기념관의 사연을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일본 교토 시내에서 북동쪽으로 30여 km 떨어진 교토시 단바(丹波) 지역, 얼핏 한국의 강원도 분위기와 비슷한 이 곳엔 한 때 300여 개의 망간광산이 있었습니다.

마을 외곽에 세워진 표지판을 따라 올라가면 비로소 망간기념관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녹취> "이것이 망간입니다. 이런 것을 발견해 구멍을 뚫은 것이 광산의 시작이 되는 거죠. (사람이 들어가 망간을 모두 가지고 나오나요?) 네, 이렇게 작은 곳, 가장 좁은 곳은 높이가 60cm 정도이고 폭이 30cm 정도인데 그런 곳을 기어 들어가죠."

기념관은 일제강점기 1918년부터 폐광 때까지 강제 징용된 한국 광부들이 실제 일했던 갱도 내부와 각종 자료들을 모아 놓은 전시실 등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건전지의 재료로 쓰이기도 하는 망간은 철의 강도를 높여주기 때문에 대포의 포신 재료로 쓰이는 등 당시 중요한 전쟁 물자였습니다. 이 기념관을 만든 초대 관장 이정호 씨, 그 자신도 이 광산에서 일했던 광부였고, 이제 그 아들이 운영을 맡고 있습니다.

<녹취>이용식(2대 관장-故 이정호 씨 아들) : "왜 조선인이 했냐면 당시는 전기가 없어서 매우 캄캄한 상태였습니다. 그 속에서 초롱불에 의지해 어두운 가운데 해머를 내려쳤죠. 매우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에 조선인들만 했습니다."

갱도 연장은 총 20킬로미터, 이 가운데 관람로는 300 미터로 당시 작업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마네킹과 도구들이 있습니다. 옛 모습이 남아 있는 갱도 안으로 직접 들어가 봤습니다. 성인 1명이 제대로 몸을 가누기 힘든 공간에서 한국인 노동자들은 가혹한 노동과 함께 지독한 외로움과도 싸워야 했습니다. 취재진은 일제강점기 시절, 이 곳에서 일했던 한 강제징용자를 찾아 갔습니다. 올해 89살의 김갑선 할아버지, 22살의 나이에 처자식을 남겨둔 채 고향인 전북 순창에서 끌려 왔습니다.

<녹취>김갑선(강제징용 노동자/89살) : "그 때는 조선인들이 관청에서 나와서 (소집영장을 줬지). (그러더니 일본으로 가라고 했나요?) 그 날 오더니 바로 데려 갔어요."

일제강점기 이렇게 모여든 한국 노동자는 3천여 명, 가혹한 중노동으로 배가 고팠지만, 밥이라고는 작은 공기에 담긴 보리밥 한 그릇이 전부였습니다. 무엇보다 이들에게 남겨진 가장 큰 고통은 진폐증, 다이너마이트 폭발로 생긴 아주 작은 분진이 폐를 찌르고 이내 폐가 딱딱하게 굳어져 숨쉬기가 곤란해지는 병입니다. 김 할아버지 역시 진폐증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녹취>김갑선(강제징용 노동자/89살) : "(어떨 때 아프신가요?) 지금은 아프다는 느낌은 없어요. 그냥 괴롭지, 폐활량이 떨어지니까."

초대 관장인 이정호 씨는 이런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사재를 털어 탄광을 기념관으로 바꾸는 일에 나섰습니다.

<녹취>故 이정호 씨(1990년 日 간사이TV 촬영) : "우리들은 조선에서 와서 일본에서 아무 것도 없이, 더군다나 선거권도 없고 생활이 유복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이대로 죽는 것은 아쉽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정호 씨의 가족들은 순순히 그 뜻을 이어 받았습니다.

<녹취>이용식(2대 관장-故 이정호 씨 아들) : "아버지는 이 박물관이 내 무덤이다, 무덤을 만드는 대신 박물관을 만들어 달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1983년부터 3년 동안 자료 조사를 한 뒤, 갱도 확장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대부분 직접 손으로 넓혀야 하는 어려운 공사, 꼬박 3년이 걸렸습니다.

<녹취>이순연(故 이정호 씨 딸) : "(힘든 일이다, 계속 유지하는 것도 무리라고 생각한 적이 있을 것 같은데요?) 진폐증으로 숨진 광부들을 위해 반드시 이 역사를 남길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가족이 하나가 돼 했습니다."

하지만 지역 사회의 반대는 완강했습니다. 기념관으로 이어지는 진입로를 내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다며 거세게 반대했습니다. 험난하고 외로운 싸움의 순간, 일본 내 양심 있는학자와 시민단체들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녹취>나카무라 히사시(日 단바기념관 이사장) : "일본인은 (강제징용을) 잊고 싶죠. 하지만 중요한 역사적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잊지 않고 이를 잘 보고 생각하는 것이 일본 장래를 위해 중요합니다."

지난 1989년 기념관이 처음 문을 열자, 일본 사회의 관심은 높았습니다.

첫 해 관람객 2만 명, 이정호 씨 가족은 입장료 수입만으로도 운영해 나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사회의 우경화 바람 속에 관람객 수는 급격히 줄기 시작했고,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 씨 가족은 교토시 등 일본 지자체와 정부에게 수 백 차례의 지원 요청을 했지만 단 한 푼의 지원금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20년 동안 20만 명이 방문했지만 쌓인 적자는 40억 원, 결국 기념관은 2009년 5월, 폐관을 맞게 됩니다. 폐관 소식이 전해지자 한-일 양국에서 기념관을 살리자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바다 건너 일본에서 전해진 안타까운 소식에 국내에서 가장 활발히 움직인 것은 다름 아닌 고등학생들입니다.

<녹취>송수연(성동글로벌경영고 3학년) : "저희가 학교 댄스 동아리거든요. 저희가 할 수 있는 게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춰서 사람들 모아서 단바망간기념관을 알릴 수 있는 계기라고 생각해서 하게 됐어요."

<녹취>최진경(시민) : "그냥 말로만 이런 일제 만행들을 들었지 직접 이런 사진들이랑 이런 걸 보니까 참 마음이 아프네요."

기념관의 사연을 접한 뒤,직접 행사장으로 와 돕겠다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녹취>신석호(중앙고 2학년) : "독도가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알아 가지고 도우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망간박물관도 최대한 사람들이 많이 알아서 이제 전 국민적으로 도움을 줘 가지고 우리나라 역사를 바로 알 수 있는 장소들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게 제 바람입니다."

여기에 한 고등학교 선생님의 열정과 노력은 기념관을 살리는 데 큰 밑거름이 되고 있습니다.

<녹취>황의중(성동글로벌경영고 국어교사) : "일본에 한 5년 동안 파견을 갔다 왔어요. 그래서 파견을 가서 봤더니 우리 재일동포에 대한 현실이 너무 우리 사회에 제대로 알려지지가 않고 있어서 그 분들의 삶과 역사를 좀 알리고 싶다."

국회에서도 망간기념관의 사연을 알리는 작은 후원행사가 열렸습니다.

<녹취>이용식(2대 관장) : "여러분들의 기부금이 모였지만 단바 망간 기념관의 갱도 내부를 보수공사 하는 게 굉장히 많은 돈이 들어서 아직도 많은 자금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폐관 2년이 흘러 드디어 오는 26일, 기념관은 다시 문을 엽니다. 하지만 여전히 망간기념관을 아는 사람은 너무나 적습니다. 그나마 최근 들어 일부 정치인들이 적극 나서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엄두도 못 내는 시설 보수와 유지를 위해서라도 지금부터가 더 중요한 때라고 한-일 양국 관계자들은 강조합니다.

<녹취>카츠무라 마코토(리츠메이칸대학 교수) : "이용식 관장의 마음을 움직여 재개관하게 된 것은 한국의 시민사회 움직임이 원동력이었고, 이를 전한 것은 재일조선인, 재일동포의 힘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재개관 소식이 알려지면서, 최근 단바 망간 기념관에는 관람객들이 조금씩 찾고 있습니다.

<녹취>양현희(오사카 거주 재일동포) : "(직접 와서 보시니까 어떠세요?) 마음이 뭐랄까 찡한...(찡해요?) 네"

<녹취>김성수(오사카 거주 재일동포) : "저는 동굴이라고 해서 큰 곳을 생각했는데, 이런 곳에서 일을 했다고는 생각 못 했습니다."

단바 망간 기념관 2대 관장 이용식 씨는 지난 20년 기념관의 역사를 책으로 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녹취>이용식(2대 관장) : "지금 한류 붐으로 일본과 한국은 아주 사이가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매우 얄팍한 화해입니다. 정말로 일본이 아시아와 화해하고 싶다면, 아시아에 대해 일본이 해 온 가해의 역사를 알고, 그걸 바탕으로 화해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단바망간, 과거 속에 내일이 있네 단바망간, 고통 속에 희망이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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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맺힌 ‘망간기념관’
    • 입력 2011-06-20 07:48:23
    취재파일K
폭 90cm, 높이 120cm, 사람이 서기 힘든 좁고 낮은 통로. 웅크린 자세로 채굴한 200~300kg의 광석을 등에 진 채 앉은 자세로 기어 나와야 하는 가혹한 노동, 일본인들이 일하려 하지 않는 곳에 강제 징용된 조선인 3천여 명. 1989년, 일본 내 유일한 강제징용 현장, 단바 망간 기념관 개관. 20년 간 계속된 적자, 결국 2009년 5월 폐관. <앵커 멘트> 여러분, 단바 망간 기념관을 아십니까? 일본 단바라는 지역의 한 폐광산을 기념관으로 만든 곳인데요, 2년 전 운영난 끝에 문을 닫았다가, 우여곡절 끝에 이달 말 재개관을 앞두고 있습니다. 자칫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했던 이 곳 단바 망간 기념관의 사연을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일본 교토 시내에서 북동쪽으로 30여 km 떨어진 교토시 단바(丹波) 지역, 얼핏 한국의 강원도 분위기와 비슷한 이 곳엔 한 때 300여 개의 망간광산이 있었습니다. 마을 외곽에 세워진 표지판을 따라 올라가면 비로소 망간기념관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녹취> "이것이 망간입니다. 이런 것을 발견해 구멍을 뚫은 것이 광산의 시작이 되는 거죠. (사람이 들어가 망간을 모두 가지고 나오나요?) 네, 이렇게 작은 곳, 가장 좁은 곳은 높이가 60cm 정도이고 폭이 30cm 정도인데 그런 곳을 기어 들어가죠." 기념관은 일제강점기 1918년부터 폐광 때까지 강제 징용된 한국 광부들이 실제 일했던 갱도 내부와 각종 자료들을 모아 놓은 전시실 등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건전지의 재료로 쓰이기도 하는 망간은 철의 강도를 높여주기 때문에 대포의 포신 재료로 쓰이는 등 당시 중요한 전쟁 물자였습니다. 이 기념관을 만든 초대 관장 이정호 씨, 그 자신도 이 광산에서 일했던 광부였고, 이제 그 아들이 운영을 맡고 있습니다. <녹취>이용식(2대 관장-故 이정호 씨 아들) : "왜 조선인이 했냐면 당시는 전기가 없어서 매우 캄캄한 상태였습니다. 그 속에서 초롱불에 의지해 어두운 가운데 해머를 내려쳤죠. 매우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에 조선인들만 했습니다." 갱도 연장은 총 20킬로미터, 이 가운데 관람로는 300 미터로 당시 작업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마네킹과 도구들이 있습니다. 옛 모습이 남아 있는 갱도 안으로 직접 들어가 봤습니다. 성인 1명이 제대로 몸을 가누기 힘든 공간에서 한국인 노동자들은 가혹한 노동과 함께 지독한 외로움과도 싸워야 했습니다. 취재진은 일제강점기 시절, 이 곳에서 일했던 한 강제징용자를 찾아 갔습니다. 올해 89살의 김갑선 할아버지, 22살의 나이에 처자식을 남겨둔 채 고향인 전북 순창에서 끌려 왔습니다. <녹취>김갑선(강제징용 노동자/89살) : "그 때는 조선인들이 관청에서 나와서 (소집영장을 줬지). (그러더니 일본으로 가라고 했나요?) 그 날 오더니 바로 데려 갔어요." 일제강점기 이렇게 모여든 한국 노동자는 3천여 명, 가혹한 중노동으로 배가 고팠지만, 밥이라고는 작은 공기에 담긴 보리밥 한 그릇이 전부였습니다. 무엇보다 이들에게 남겨진 가장 큰 고통은 진폐증, 다이너마이트 폭발로 생긴 아주 작은 분진이 폐를 찌르고 이내 폐가 딱딱하게 굳어져 숨쉬기가 곤란해지는 병입니다. 김 할아버지 역시 진폐증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녹취>김갑선(강제징용 노동자/89살) : "(어떨 때 아프신가요?) 지금은 아프다는 느낌은 없어요. 그냥 괴롭지, 폐활량이 떨어지니까." 초대 관장인 이정호 씨는 이런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사재를 털어 탄광을 기념관으로 바꾸는 일에 나섰습니다. <녹취>故 이정호 씨(1990년 日 간사이TV 촬영) : "우리들은 조선에서 와서 일본에서 아무 것도 없이, 더군다나 선거권도 없고 생활이 유복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이대로 죽는 것은 아쉽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정호 씨의 가족들은 순순히 그 뜻을 이어 받았습니다. <녹취>이용식(2대 관장-故 이정호 씨 아들) : "아버지는 이 박물관이 내 무덤이다, 무덤을 만드는 대신 박물관을 만들어 달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1983년부터 3년 동안 자료 조사를 한 뒤, 갱도 확장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대부분 직접 손으로 넓혀야 하는 어려운 공사, 꼬박 3년이 걸렸습니다. <녹취>이순연(故 이정호 씨 딸) : "(힘든 일이다, 계속 유지하는 것도 무리라고 생각한 적이 있을 것 같은데요?) 진폐증으로 숨진 광부들을 위해 반드시 이 역사를 남길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가족이 하나가 돼 했습니다." 하지만 지역 사회의 반대는 완강했습니다. 기념관으로 이어지는 진입로를 내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다며 거세게 반대했습니다. 험난하고 외로운 싸움의 순간, 일본 내 양심 있는학자와 시민단체들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녹취>나카무라 히사시(日 단바기념관 이사장) : "일본인은 (강제징용을) 잊고 싶죠. 하지만 중요한 역사적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잊지 않고 이를 잘 보고 생각하는 것이 일본 장래를 위해 중요합니다." 지난 1989년 기념관이 처음 문을 열자, 일본 사회의 관심은 높았습니다. 첫 해 관람객 2만 명, 이정호 씨 가족은 입장료 수입만으로도 운영해 나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사회의 우경화 바람 속에 관람객 수는 급격히 줄기 시작했고,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 씨 가족은 교토시 등 일본 지자체와 정부에게 수 백 차례의 지원 요청을 했지만 단 한 푼의 지원금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20년 동안 20만 명이 방문했지만 쌓인 적자는 40억 원, 결국 기념관은 2009년 5월, 폐관을 맞게 됩니다. 폐관 소식이 전해지자 한-일 양국에서 기념관을 살리자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바다 건너 일본에서 전해진 안타까운 소식에 국내에서 가장 활발히 움직인 것은 다름 아닌 고등학생들입니다. <녹취>송수연(성동글로벌경영고 3학년) : "저희가 학교 댄스 동아리거든요. 저희가 할 수 있는 게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춰서 사람들 모아서 단바망간기념관을 알릴 수 있는 계기라고 생각해서 하게 됐어요." <녹취>최진경(시민) : "그냥 말로만 이런 일제 만행들을 들었지 직접 이런 사진들이랑 이런 걸 보니까 참 마음이 아프네요." 기념관의 사연을 접한 뒤,직접 행사장으로 와 돕겠다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녹취>신석호(중앙고 2학년) : "독도가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알아 가지고 도우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망간박물관도 최대한 사람들이 많이 알아서 이제 전 국민적으로 도움을 줘 가지고 우리나라 역사를 바로 알 수 있는 장소들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게 제 바람입니다." 여기에 한 고등학교 선생님의 열정과 노력은 기념관을 살리는 데 큰 밑거름이 되고 있습니다. <녹취>황의중(성동글로벌경영고 국어교사) : "일본에 한 5년 동안 파견을 갔다 왔어요. 그래서 파견을 가서 봤더니 우리 재일동포에 대한 현실이 너무 우리 사회에 제대로 알려지지가 않고 있어서 그 분들의 삶과 역사를 좀 알리고 싶다." 국회에서도 망간기념관의 사연을 알리는 작은 후원행사가 열렸습니다. <녹취>이용식(2대 관장) : "여러분들의 기부금이 모였지만 단바 망간 기념관의 갱도 내부를 보수공사 하는 게 굉장히 많은 돈이 들어서 아직도 많은 자금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폐관 2년이 흘러 드디어 오는 26일, 기념관은 다시 문을 엽니다. 하지만 여전히 망간기념관을 아는 사람은 너무나 적습니다. 그나마 최근 들어 일부 정치인들이 적극 나서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엄두도 못 내는 시설 보수와 유지를 위해서라도 지금부터가 더 중요한 때라고 한-일 양국 관계자들은 강조합니다. <녹취>카츠무라 마코토(리츠메이칸대학 교수) : "이용식 관장의 마음을 움직여 재개관하게 된 것은 한국의 시민사회 움직임이 원동력이었고, 이를 전한 것은 재일조선인, 재일동포의 힘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재개관 소식이 알려지면서, 최근 단바 망간 기념관에는 관람객들이 조금씩 찾고 있습니다. <녹취>양현희(오사카 거주 재일동포) : "(직접 와서 보시니까 어떠세요?) 마음이 뭐랄까 찡한...(찡해요?) 네" <녹취>김성수(오사카 거주 재일동포) : "저는 동굴이라고 해서 큰 곳을 생각했는데, 이런 곳에서 일을 했다고는 생각 못 했습니다." 단바 망간 기념관 2대 관장 이용식 씨는 지난 20년 기념관의 역사를 책으로 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녹취>이용식(2대 관장) : "지금 한류 붐으로 일본과 한국은 아주 사이가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매우 얄팍한 화해입니다. 정말로 일본이 아시아와 화해하고 싶다면, 아시아에 대해 일본이 해 온 가해의 역사를 알고, 그걸 바탕으로 화해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단바망간, 과거 속에 내일이 있네 단바망간, 고통 속에 희망이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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