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꼿꼿한 신화’ 존슨, 7회 대회 주인공

입력 2011.08.11 (07:16) 수정 2011.08.11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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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8월20일부터 29일까지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제7회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는 미국의 마이클 존슨(44·당시 32)이 세계인의 기억에 남을 레이스를 펼쳤다.



세계 남자 육상 역사에서 유일하게 한 올림픽에서 200m와 400m 금메달을 동시에 따내고 세계 선수권에서 8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존슨은 사실 1999년 세계선수권의 출전 자체가 불투명했다.



1997년 발생한 허벅지 근육 부상으로 고통을 겪던 존슨은 몸 상태가 완전치 않아 1999년 시즌에 400m에 4번밖에 나설 수 없었고 미국 국가대표 선발전에도 출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은 1997년 대회 이후 규정을 바꿔 지난 대회 챔피언에게 자동으로 차기 대회 출전권을 부여했다.



규칙 개정은 당시 세계기록을 2개나 보유하고 있던 마이클 존슨이 부상 때문에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 참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IAAF의 사전 포석이었다.



1993년 4회부터 1997년 6회 대회까지 이미 세계육상선수권대회 400m에서 3연패를 차지했고 1995년 예테보리 대회에서는 200m와 400m를 동시에 석권했던 ’최강’ 존슨은 부상의 어려움 속에서도 다행히 1999년 대회에 출전했다.



육상 팬들은 부상 때문에 좋은 성적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독특한 주법으로 유명한 존슨의 레이스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비야의 에스타디오 올림피코로 몰려들었다.



존슨은 상체를 곧바로 세우고 짧은 보폭으로 달렸다.



이는 상체를 숙이고 무릎을 높이 들어야 한다는 기존의 상식을 뒤엎는 것이었다.



마침내 세비야의 400m에 나선 존슨의 레이스는 부상에 대한 우려를 완전히 불식시켰다.



존슨은 준결승에서 가뿐히 1위를 차지하고 결선에 올랐다.



5번 레인에서 출발한 존슨이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그 뻣뻣한 주법으로 첫 번째 곡선 주로를 돌 때까지만 해도 곁에서 달리는 선수들과 속도를 맞추며 우승에 만족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모든 선수가 일렬로 늘어서게 되는 마지막 100m 직선 주로에 들어섰을 때 관중은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존슨은 2위보다 이미 5m 가까이 앞서 있었다.



마지막 직선 주로에서 폭발적인 가속을 낸 존슨은 2위와의 차이를 점점 더 벌리며 결승선을 뚫었다.



큰 차이로 이기고 있으면서도 경기 중 집중력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던 존슨은 결승선을 지나고 나서야 기록판을 흘끗 쳐다보고는 포효하기 시작했다.



43초18. 세계 기록이었다. 존슨의 나이 서른둘이었다.



세계선수권 남자 400m를 4연패 한 존슨은 "아주 오래전부터 (세계 기록을) 노렸다. 내게 세계 기록을 더 끌어내릴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며 "세비야에서는 편안한 마음을 가졌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당시 IAAF 회장이었던 프리모 네비올로는 "이번 대회 마이클 존슨의 위업을 목격한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날을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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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꼿꼿한 신화’ 존슨, 7회 대회 주인공
    • 입력 2011-08-11 07:16:06
    • 수정2011-08-11 07:36:44
    연합뉴스
 1999년 8월20일부터 29일까지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제7회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는 미국의 마이클 존슨(44·당시 32)이 세계인의 기억에 남을 레이스를 펼쳤다.

세계 남자 육상 역사에서 유일하게 한 올림픽에서 200m와 400m 금메달을 동시에 따내고 세계 선수권에서 8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존슨은 사실 1999년 세계선수권의 출전 자체가 불투명했다.

1997년 발생한 허벅지 근육 부상으로 고통을 겪던 존슨은 몸 상태가 완전치 않아 1999년 시즌에 400m에 4번밖에 나설 수 없었고 미국 국가대표 선발전에도 출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은 1997년 대회 이후 규정을 바꿔 지난 대회 챔피언에게 자동으로 차기 대회 출전권을 부여했다.

규칙 개정은 당시 세계기록을 2개나 보유하고 있던 마이클 존슨이 부상 때문에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 참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IAAF의 사전 포석이었다.

1993년 4회부터 1997년 6회 대회까지 이미 세계육상선수권대회 400m에서 3연패를 차지했고 1995년 예테보리 대회에서는 200m와 400m를 동시에 석권했던 ’최강’ 존슨은 부상의 어려움 속에서도 다행히 1999년 대회에 출전했다.

육상 팬들은 부상 때문에 좋은 성적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독특한 주법으로 유명한 존슨의 레이스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비야의 에스타디오 올림피코로 몰려들었다.

존슨은 상체를 곧바로 세우고 짧은 보폭으로 달렸다.

이는 상체를 숙이고 무릎을 높이 들어야 한다는 기존의 상식을 뒤엎는 것이었다.

마침내 세비야의 400m에 나선 존슨의 레이스는 부상에 대한 우려를 완전히 불식시켰다.

존슨은 준결승에서 가뿐히 1위를 차지하고 결선에 올랐다.

5번 레인에서 출발한 존슨이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그 뻣뻣한 주법으로 첫 번째 곡선 주로를 돌 때까지만 해도 곁에서 달리는 선수들과 속도를 맞추며 우승에 만족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모든 선수가 일렬로 늘어서게 되는 마지막 100m 직선 주로에 들어섰을 때 관중은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존슨은 2위보다 이미 5m 가까이 앞서 있었다.

마지막 직선 주로에서 폭발적인 가속을 낸 존슨은 2위와의 차이를 점점 더 벌리며 결승선을 뚫었다.

큰 차이로 이기고 있으면서도 경기 중 집중력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던 존슨은 결승선을 지나고 나서야 기록판을 흘끗 쳐다보고는 포효하기 시작했다.

43초18. 세계 기록이었다. 존슨의 나이 서른둘이었다.

세계선수권 남자 400m를 4연패 한 존슨은 "아주 오래전부터 (세계 기록을) 노렸다. 내게 세계 기록을 더 끌어내릴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며 "세비야에서는 편안한 마음을 가졌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당시 IAAF 회장이었던 프리모 네비올로는 "이번 대회 마이클 존슨의 위업을 목격한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날을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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