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의 딸’ 어디에…

입력 2011.11.21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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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 신숙자(육성녹음) : "언제 만나게 될 지 기약할 수 없고 또 다시 당신에게 소식을 전하게 될 기회가 있을까 짐작할 수 없으니 무슨 말부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녹취> 오혜원(육성녹음) : "아빠! 나는 혜원이에요. 며칠 전에 아버지와 함께 생일을 즐겁게 보내는 꿈을 꾸었어요. 아버지! 부디 몸 건강하세요! 너무 오래간만에 아빠라고 소리내어 부르니 울음이 납니다."

<녹취> 오규원(육성녹음) : "아빠! 나는 규원이에요. 보고싶어요 아빠! 아버지와 만나는 날 나는 무엇을 선물할까요? 아빠 안녕!"

1991년 1월 11일 25년 동안 헤어져 만나지 못하는 가족이 있습니다.

<녹취> 오길남(신숙자 씨 남편) : "짐승 꼴이라도 좋으니 꼭 살아있어 주기를..."

엄마와 두 딸은 북한에 있고 북한을 탈출한 아버지는 남한에 있습니다.

<녹취> 오길남(신숙자 씨 남편) : "내가 건강을 유지해가지고 있는 한 두 딸을 가슴에 안아볼 수 있지 않겠나..."

<앵커 멘트>

독일 분단의 상징, 베를린 장벽입니다.

신숙자씨와 두 딸 오혜원, 규원 씨는 26년 전 이곳 베를린 장벽을 넘어 북한으로 갔는데요.

이후 통일된 독일과 달리 아직도 분단된 조국에서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고 있는 오길남 박사의 사연을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지난달 말 독일의 베를린 공항.

<녹취> 오길남 : "(독일 얼마만에 다시 오신 거예요?) 26년 만입니다. (오시니까 어떠세요?) 감개무량합니다."

취재진과 함께 찾아간 곳은 독일 북부의 항구도시 킬.

<녹취> 오길남 : "70년대 중반부터 여기에 생활을 했잖아요. 여기에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구나."

서울대 졸업 후 유학을 와 경제학도로서 꿈을 키웠던 곳입니다.

파독 간호사였던 신숙자 씨를 만나 첫 보금자리를 꾸민 집도 그대로였습니다.

<녹취> 오길남 : "예,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이 집도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독일 주민에게 길을 물어 딸들의 흔적도 찾았습니다.

<녹취> 오길남 : "엄마는 밖에 일하고 아빠는 학교 공부하러 가고 애들은 여기서 놀잖아."

하지만, 그 시절 조국에서 벌어진 한 사건이 인생 전환의 시발점이 됐다고 말합니다.

<녹취> 오길남 : "갑자기 한국 군인에 의해서 광주시민 봉기가 진압되는 과정을 여기에서 접하게 된 거에요. 자랑스러운 코리아에서 저런 일들이 벌어진다고 (혜원이가) 울잖아."

70년대 김대중 납치 사건과 유신 독재 등에 저항하기 위한 '민주사회건설협의회' 이른바 '민건'에서 반정부 활동을 하다가 한국의 혼란스런 정치적 상황이 맞물려 북으로 가는 잘못된 결정을 했다는 겁니다.

이후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으로 돌아갈지 고민하던 오씨는 북한의 공작원을 만나게 됐다고 합니다.

북한 공작원을 만나도록 한 사람은 함께 민건 활동을 했던 재독 교포, 김종한씨였다고 주장합니다.

<녹취> 오길남 : "(북한 공작원이) 공화국에 오셔가지고 우리 같은 민족끼리 도와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오랫동안 외국에서 공부했고...(라고 했습니다.)"

부인의 강한 반대에도 가족을 데리고 들어간 북한.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습니다.

<녹취> 오길남 : "내가 잘못한 거죠. 그래도. 사람이 배운다는 게 뭔데 속지 않아야 되지요."

경제학자로서 활동은 커녕 김일성 주체사상 교육을 받고 평양의 칠보산 연락소에서 대남 방송요원으로 일했다는 오씨.

다른 유학생 2명을 포섭해 북으로 데려오라는 지령을 받으면서 탈출 기회를 얻게 됐습니다.

하지만 탈북은 곧 가족들과의 기약없는 이별.

<녹취> 오길남 : "(제가 부인에게) 어떻게 당신은 나보고 매정하게 나가라 그러냐 (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오길남 : "(그러자 부인이) '정신 좀 바짝 차려라 당신이 나가야 당신도 살고 가족도 사는 길이다 나가라' 막 나가라 그래요."

오씨 부부 외에도 당시 북한의 대남 방송 요원들은 대부분 남한 출신 입북자였습니다.

독일이나 프랑스 유학중 입북한 인사들이 많았고 지난 1969년 납북된 KAL기 여승무원들과 독일 주재 한국 대사관 재직 중 입북한 경우 등 대부분 명문대 출신 엘리트로 가족들까지 함께 입북했습니다.

결국 신씨의 희생이 유학생 입북 공작의 실체를 알리고 검은 고리를 끊은 겁니다.

오씨의 탈북 이후 세모녀는 어떻게 됐을까? 가족의 송환을 촉구하는 오씨에게 재독 작곡가 윤이상씨가 건네준 세 모녀의 편지와 사진입니다.

오씨가 탈출한 이듬해엔 남편을 원망하진 않는다면서도 돌아올 것을 권유하고, 그 다음해엔 더 강한 어조로 돌아오길 바란다고 썼습니다.

도심지보다 더 좋은 곳에 살고 아이들도 철이 빨리 든다며 그럭저럭 별일 없이 지낸다는 신씨.

본인과 뜻과는 다른 편지를 강압에 의해 쓴 것으로 보입니다.

확인 결과 편지 속 사진의 배경은 함경남도 요덕군 15호 관리소, 이른바 요덕 수용소로 이곳에서 신씨 모녀를 직접 만났다고 한 탈북자는 증언합니다.

<인터뷰> 탈북자(요덕수용소 출신) : "기숙사(보위부 합숙소) 맞은 편 산 밑에서 찍은 사진이란 말이에요. 내 여기와서 지금 사진을 보니깐..."

신씨는 매우 병색이 짙은 모습이었고.

<녹취> 탈북자 : "혜원이 엄마는 일도 못하지 사람이 몸에 기운이라는 게 하나도 없어요."

혜원, 규원씨도 어린 나이에 매우 힘든 나날을 보냈다고 합니다.

<녹취> 탈북자 : "불쌍해요. 왜 말로 다 표현을 못해요. 겨울에 눈이 처음에 우리가 나무해주기 전에 겨울이 눈이 이렇게 오는데 그 요만한 아이들 둘이 올라가서 산에 나무를 해요."


<녹취> 탈북자 : "(신숙자씨는) 계속 우는 거예요. 그저 애들 혜원이 규원이만 보면은..."

평양 거주설 등 여러가지 추측이 있지만 요덕수용소 이후 행적은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바다를 품에 안은 한국의 미항 통영, 수많은 예술인들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이 곳에 있는 신숙자씨의 모교에서 생활기록부를 찾아봤습니다.

<녹취> 박영출(통영초 교감) : "모든 면에 근면하며 언어가 명료하고 웃음으로 사는 여성다운 성격이다."

중학교 동창생은 신씨의 사진이 담긴 졸업 앨범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김순자(동창생) : "보고 싶다 숙자야 너하고 나하고 다니던 통영여중학교 교정에 왔다 너하고 나하고 다시 이 마당에 섰으면 얼마나 좋을까 기다릴께 꼭 돌아와."

독일 베를린에 있는 북한 대사관 앞.

<녹취> 김태진 대표 :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오길남씨의 가족 신숙자, 오혜원, 오규원을 한국으로 돌려보낼 것을 촉구한다."

이 곳 대사관은 지난 1985년 오길남씨와 가족들이 위조된 여권을 받아들고 북한으로 갔던 곳입니다.

이곳에서 2년 넘게 시위를 벌이는 독일 여성 게르다 에르히씨.

통일 전 옛 동독 주민으로서 북한의 인권 상황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며 신씨 모녀 송환 운동에 나섰습니다.

<인터뷰> 게르다 에르히 : "우리는 1989년 1월 19일 당시 대통령이 베를린 장벽이 100년간 존재할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로부터 불과 10개월 후에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신씨 모녀를 위한 독일인들의 서명 운동과 언론의 관심도 확대되고 있습니다.

<인터뷰> 미하엘 레(독일 기자) : "굉장히 슬픈 일이고 독일 정계와 독일 외교계가 어떻게든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하지만, 신숙자씨 모녀 구출운동은 오씨 입북을 둘러싼 진실 논쟁과 해묵은 이념 갈등으로도 번지고 있습니다.

<녹취> 재독교포 간담회 : "윤이상씨나 김종한씨...그런 말씀 하시면 안됩니다."

<인터뷰> 정용수(베를린 한인회장) : "어린 딸과 부인을 이북에다 버리고 당신 혼자 나와서 이것에 교민들이 굉장히 반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그래도 우리 교민들은 그것을 보지 말고 (신숙자씨와 두딸만 보자)"

통영에선 윤이상씨의 행적을 둘러싼 공방이 뜨겁습니다,

올해 열린 윤이상 국제음악콩쿠르는 극심한 갈등 속에 개최됐고 통영에 온 윤씨의 부인 이수자씨와 딸은 행사 참석을 포기했습니다.

핵심 쟁점은 오길남씨 가족의 입북에 윤이상씨가 직접 관여했는지 여부.

<인터뷰> 오길남 : "한국으로 돌아갈 걸 준비하던 차에 (윤이상씨가 보낸 편지가) 계기가 되어서 한국에 들어가는 건 포기하고 (입북했습니다)"

하지만, 윤씨 측은 이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김홍종(통영 예총 연합회장) : "윤이상 선생의 육필 원고에 보면 이렇게 담겨 있습니다. 나는 오길남이가 이북에 간 지도 모른다."

또 다른 쟁점은 윤씨의 친북 행적.

지난 1967년 동백림 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윤씨는 수차례 북한을 방문한 사실 등이 이미 확인된 바 있습니다.

<녹취> 윤이상(90년 평양 방문 당시) : "윤이상은 해외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우리 조국의 분단의 설움을 뼈저리게 느끼고..."

<녹취> 북한 방송 아나운서 :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 윤이상 선생은 선물을 드렸습니다."

취재진은 사실 확인을 위해 오씨에게 북한 공작원을 만나도록 했다는 김종한씨를 전화로 인터뷰했습니다.

<녹취> 김종한 : "돌아가신 윤이상씨 그 사람을 위해서 그 가족을 위해서 노력한 사람인데 오히려 엉뚱한 이런 식으로 저런 식으로 얘기를 하고 아주 좋지 않은...자식을 위해서라도 조용히 있는게 좋아요."

자신도 오씨 가족을 북한에 보낸 적이 없다는 김씨.

<녹취> "(그것을 확인해주시긴 어려운 거군요?) 그 사람이 얘기하는 것을 다시 물으려고 할 것 같으면 여기 묘지에 묻혀있는 윤이상씨한테 의사를 물어봐요."

과연 윤씨가 오씨를 북한에 보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는지 진실을 확인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세계적 작곡가로서 윤이상씨의 업적과 행적을 분리해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고 음악제 행사를 중단해야 한다는 요구도 나옵니다.

여전한 이념 갈등과 소모적 논쟁.

북한에 26년 동안 갇혀 있는 신숙자씨 모녀에게는 좀 더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이런 가운데 한국에서도 확산되는 구명 운동 열기. 서울 광화문에 젊은이들이 나섰습니다.

<인터뷰> 인수연(한동대학교) : "그 인식에 있어서 이념도 색깔도 존재할 수 없다라는 것이 저희 청년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입니다."

통영에서 시작된 서명운동은 서울에 이어 광주광역시까지 전국으로 확산됐고.

<인터뷰> 이원재(광주 기독교단협의회 회장) : "여기에 정치가 개입할 수도 없고 여야를 떠나서 누가 됐든간에 사람이라면 이일은 동참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봐요."

국내 서명자 수는 10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인터뷰> 방수열(통영현대교회 목사) : "만약에 내 가족이 그런데 있다면 이건 뭐 이념을 떠나서 무조건 구하려고 하는게 그게 인지상정이고 그게 사람된 도리가 아니겠어요?"

미국 현지 시각으로 지난 18일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 앞에서 열린 오길남씨 가족 조기 송환 집회.

<녹취> '내 부인과 딸을...'

전 세계에 퍼져나간 온라인 서명까지 국내외 16만 여명의 청원서가 뉴욕 유엔본부에 제출됐습니다.

<인터뷰> 김미영(북한인권운동단체 대표) : "(서독에서는) 동독에 있는 우리 주민들도 인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가난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생각으로 대동독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로 통일이 아주 쉬워졌죠."

북한에 죄없이 갇힌 엄마와 두딸, 그녀들은 과연 돌아올 수 있을까?

돌아온다면 그 때는 언제일까?

그 답은 우리 사회의 관심,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녹취> 오혜원(육성녹음) : "조국에도 훌륭한 아버지가 계신데 아버지 사랑이 그립습니다. 아버지! 부디 몸 건강하세요! 너무 오래간만에 아빠라고 소리내어 부르니 울음이 납니다."

<녹취> 오규원(육성녹음) : "아버지는 알지 않아요. 내가 빨리 커야 어머니 힘도 덜어드리는데 안타까워요. 그러나 이제는 물도 긷고 나무도 잘 듭니다. 보고 싶어요. 아빠! 아버지와 만나는 날 나는 무엇을 선물할까요? 아빠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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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영의 딸’ 어디에…
    • 입력 2011-11-21 08:25:05
    취재파일K
<녹취> 신숙자(육성녹음) : "언제 만나게 될 지 기약할 수 없고 또 다시 당신에게 소식을 전하게 될 기회가 있을까 짐작할 수 없으니 무슨 말부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녹취> 오혜원(육성녹음) : "아빠! 나는 혜원이에요. 며칠 전에 아버지와 함께 생일을 즐겁게 보내는 꿈을 꾸었어요. 아버지! 부디 몸 건강하세요! 너무 오래간만에 아빠라고 소리내어 부르니 울음이 납니다." <녹취> 오규원(육성녹음) : "아빠! 나는 규원이에요. 보고싶어요 아빠! 아버지와 만나는 날 나는 무엇을 선물할까요? 아빠 안녕!" 1991년 1월 11일 25년 동안 헤어져 만나지 못하는 가족이 있습니다. <녹취> 오길남(신숙자 씨 남편) : "짐승 꼴이라도 좋으니 꼭 살아있어 주기를..." 엄마와 두 딸은 북한에 있고 북한을 탈출한 아버지는 남한에 있습니다. <녹취> 오길남(신숙자 씨 남편) : "내가 건강을 유지해가지고 있는 한 두 딸을 가슴에 안아볼 수 있지 않겠나..." <앵커 멘트> 독일 분단의 상징, 베를린 장벽입니다. 신숙자씨와 두 딸 오혜원, 규원 씨는 26년 전 이곳 베를린 장벽을 넘어 북한으로 갔는데요. 이후 통일된 독일과 달리 아직도 분단된 조국에서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고 있는 오길남 박사의 사연을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지난달 말 독일의 베를린 공항. <녹취> 오길남 : "(독일 얼마만에 다시 오신 거예요?) 26년 만입니다. (오시니까 어떠세요?) 감개무량합니다." 취재진과 함께 찾아간 곳은 독일 북부의 항구도시 킬. <녹취> 오길남 : "70년대 중반부터 여기에 생활을 했잖아요. 여기에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구나." 서울대 졸업 후 유학을 와 경제학도로서 꿈을 키웠던 곳입니다. 파독 간호사였던 신숙자 씨를 만나 첫 보금자리를 꾸민 집도 그대로였습니다. <녹취> 오길남 : "예,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이 집도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독일 주민에게 길을 물어 딸들의 흔적도 찾았습니다. <녹취> 오길남 : "엄마는 밖에 일하고 아빠는 학교 공부하러 가고 애들은 여기서 놀잖아." 하지만, 그 시절 조국에서 벌어진 한 사건이 인생 전환의 시발점이 됐다고 말합니다. <녹취> 오길남 : "갑자기 한국 군인에 의해서 광주시민 봉기가 진압되는 과정을 여기에서 접하게 된 거에요. 자랑스러운 코리아에서 저런 일들이 벌어진다고 (혜원이가) 울잖아." 70년대 김대중 납치 사건과 유신 독재 등에 저항하기 위한 '민주사회건설협의회' 이른바 '민건'에서 반정부 활동을 하다가 한국의 혼란스런 정치적 상황이 맞물려 북으로 가는 잘못된 결정을 했다는 겁니다. 이후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으로 돌아갈지 고민하던 오씨는 북한의 공작원을 만나게 됐다고 합니다. 북한 공작원을 만나도록 한 사람은 함께 민건 활동을 했던 재독 교포, 김종한씨였다고 주장합니다. <녹취> 오길남 : "(북한 공작원이) 공화국에 오셔가지고 우리 같은 민족끼리 도와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오랫동안 외국에서 공부했고...(라고 했습니다.)" 부인의 강한 반대에도 가족을 데리고 들어간 북한.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습니다. <녹취> 오길남 : "내가 잘못한 거죠. 그래도. 사람이 배운다는 게 뭔데 속지 않아야 되지요." 경제학자로서 활동은 커녕 김일성 주체사상 교육을 받고 평양의 칠보산 연락소에서 대남 방송요원으로 일했다는 오씨. 다른 유학생 2명을 포섭해 북으로 데려오라는 지령을 받으면서 탈출 기회를 얻게 됐습니다. 하지만 탈북은 곧 가족들과의 기약없는 이별. <녹취> 오길남 : "(제가 부인에게) 어떻게 당신은 나보고 매정하게 나가라 그러냐 (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오길남 : "(그러자 부인이) '정신 좀 바짝 차려라 당신이 나가야 당신도 살고 가족도 사는 길이다 나가라' 막 나가라 그래요." 오씨 부부 외에도 당시 북한의 대남 방송 요원들은 대부분 남한 출신 입북자였습니다. 독일이나 프랑스 유학중 입북한 인사들이 많았고 지난 1969년 납북된 KAL기 여승무원들과 독일 주재 한국 대사관 재직 중 입북한 경우 등 대부분 명문대 출신 엘리트로 가족들까지 함께 입북했습니다. 결국 신씨의 희생이 유학생 입북 공작의 실체를 알리고 검은 고리를 끊은 겁니다. 오씨의 탈북 이후 세모녀는 어떻게 됐을까? 가족의 송환을 촉구하는 오씨에게 재독 작곡가 윤이상씨가 건네준 세 모녀의 편지와 사진입니다. 오씨가 탈출한 이듬해엔 남편을 원망하진 않는다면서도 돌아올 것을 권유하고, 그 다음해엔 더 강한 어조로 돌아오길 바란다고 썼습니다. 도심지보다 더 좋은 곳에 살고 아이들도 철이 빨리 든다며 그럭저럭 별일 없이 지낸다는 신씨. 본인과 뜻과는 다른 편지를 강압에 의해 쓴 것으로 보입니다. 확인 결과 편지 속 사진의 배경은 함경남도 요덕군 15호 관리소, 이른바 요덕 수용소로 이곳에서 신씨 모녀를 직접 만났다고 한 탈북자는 증언합니다. <인터뷰> 탈북자(요덕수용소 출신) : "기숙사(보위부 합숙소) 맞은 편 산 밑에서 찍은 사진이란 말이에요. 내 여기와서 지금 사진을 보니깐..." 신씨는 매우 병색이 짙은 모습이었고. <녹취> 탈북자 : "혜원이 엄마는 일도 못하지 사람이 몸에 기운이라는 게 하나도 없어요." 혜원, 규원씨도 어린 나이에 매우 힘든 나날을 보냈다고 합니다. <녹취> 탈북자 : "불쌍해요. 왜 말로 다 표현을 못해요. 겨울에 눈이 처음에 우리가 나무해주기 전에 겨울이 눈이 이렇게 오는데 그 요만한 아이들 둘이 올라가서 산에 나무를 해요." <녹취> 탈북자 : "(신숙자씨는) 계속 우는 거예요. 그저 애들 혜원이 규원이만 보면은..." 평양 거주설 등 여러가지 추측이 있지만 요덕수용소 이후 행적은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바다를 품에 안은 한국의 미항 통영, 수많은 예술인들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이 곳에 있는 신숙자씨의 모교에서 생활기록부를 찾아봤습니다. <녹취> 박영출(통영초 교감) : "모든 면에 근면하며 언어가 명료하고 웃음으로 사는 여성다운 성격이다." 중학교 동창생은 신씨의 사진이 담긴 졸업 앨범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김순자(동창생) : "보고 싶다 숙자야 너하고 나하고 다니던 통영여중학교 교정에 왔다 너하고 나하고 다시 이 마당에 섰으면 얼마나 좋을까 기다릴께 꼭 돌아와." 독일 베를린에 있는 북한 대사관 앞. <녹취> 김태진 대표 :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오길남씨의 가족 신숙자, 오혜원, 오규원을 한국으로 돌려보낼 것을 촉구한다." 이 곳 대사관은 지난 1985년 오길남씨와 가족들이 위조된 여권을 받아들고 북한으로 갔던 곳입니다. 이곳에서 2년 넘게 시위를 벌이는 독일 여성 게르다 에르히씨. 통일 전 옛 동독 주민으로서 북한의 인권 상황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며 신씨 모녀 송환 운동에 나섰습니다. <인터뷰> 게르다 에르히 : "우리는 1989년 1월 19일 당시 대통령이 베를린 장벽이 100년간 존재할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로부터 불과 10개월 후에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신씨 모녀를 위한 독일인들의 서명 운동과 언론의 관심도 확대되고 있습니다. <인터뷰> 미하엘 레(독일 기자) : "굉장히 슬픈 일이고 독일 정계와 독일 외교계가 어떻게든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하지만, 신숙자씨 모녀 구출운동은 오씨 입북을 둘러싼 진실 논쟁과 해묵은 이념 갈등으로도 번지고 있습니다. <녹취> 재독교포 간담회 : "윤이상씨나 김종한씨...그런 말씀 하시면 안됩니다." <인터뷰> 정용수(베를린 한인회장) : "어린 딸과 부인을 이북에다 버리고 당신 혼자 나와서 이것에 교민들이 굉장히 반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그래도 우리 교민들은 그것을 보지 말고 (신숙자씨와 두딸만 보자)" 통영에선 윤이상씨의 행적을 둘러싼 공방이 뜨겁습니다, 올해 열린 윤이상 국제음악콩쿠르는 극심한 갈등 속에 개최됐고 통영에 온 윤씨의 부인 이수자씨와 딸은 행사 참석을 포기했습니다. 핵심 쟁점은 오길남씨 가족의 입북에 윤이상씨가 직접 관여했는지 여부. <인터뷰> 오길남 : "한국으로 돌아갈 걸 준비하던 차에 (윤이상씨가 보낸 편지가) 계기가 되어서 한국에 들어가는 건 포기하고 (입북했습니다)" 하지만, 윤씨 측은 이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김홍종(통영 예총 연합회장) : "윤이상 선생의 육필 원고에 보면 이렇게 담겨 있습니다. 나는 오길남이가 이북에 간 지도 모른다." 또 다른 쟁점은 윤씨의 친북 행적. 지난 1967년 동백림 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윤씨는 수차례 북한을 방문한 사실 등이 이미 확인된 바 있습니다. <녹취> 윤이상(90년 평양 방문 당시) : "윤이상은 해외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우리 조국의 분단의 설움을 뼈저리게 느끼고..." <녹취> 북한 방송 아나운서 :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 윤이상 선생은 선물을 드렸습니다." 취재진은 사실 확인을 위해 오씨에게 북한 공작원을 만나도록 했다는 김종한씨를 전화로 인터뷰했습니다. <녹취> 김종한 : "돌아가신 윤이상씨 그 사람을 위해서 그 가족을 위해서 노력한 사람인데 오히려 엉뚱한 이런 식으로 저런 식으로 얘기를 하고 아주 좋지 않은...자식을 위해서라도 조용히 있는게 좋아요." 자신도 오씨 가족을 북한에 보낸 적이 없다는 김씨. <녹취> "(그것을 확인해주시긴 어려운 거군요?) 그 사람이 얘기하는 것을 다시 물으려고 할 것 같으면 여기 묘지에 묻혀있는 윤이상씨한테 의사를 물어봐요." 과연 윤씨가 오씨를 북한에 보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는지 진실을 확인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세계적 작곡가로서 윤이상씨의 업적과 행적을 분리해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고 음악제 행사를 중단해야 한다는 요구도 나옵니다. 여전한 이념 갈등과 소모적 논쟁. 북한에 26년 동안 갇혀 있는 신숙자씨 모녀에게는 좀 더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이런 가운데 한국에서도 확산되는 구명 운동 열기. 서울 광화문에 젊은이들이 나섰습니다. <인터뷰> 인수연(한동대학교) : "그 인식에 있어서 이념도 색깔도 존재할 수 없다라는 것이 저희 청년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입니다." 통영에서 시작된 서명운동은 서울에 이어 광주광역시까지 전국으로 확산됐고. <인터뷰> 이원재(광주 기독교단협의회 회장) : "여기에 정치가 개입할 수도 없고 여야를 떠나서 누가 됐든간에 사람이라면 이일은 동참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봐요." 국내 서명자 수는 10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인터뷰> 방수열(통영현대교회 목사) : "만약에 내 가족이 그런데 있다면 이건 뭐 이념을 떠나서 무조건 구하려고 하는게 그게 인지상정이고 그게 사람된 도리가 아니겠어요?" 미국 현지 시각으로 지난 18일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 앞에서 열린 오길남씨 가족 조기 송환 집회. <녹취> '내 부인과 딸을...' 전 세계에 퍼져나간 온라인 서명까지 국내외 16만 여명의 청원서가 뉴욕 유엔본부에 제출됐습니다. <인터뷰> 김미영(북한인권운동단체 대표) : "(서독에서는) 동독에 있는 우리 주민들도 인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가난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생각으로 대동독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로 통일이 아주 쉬워졌죠." 북한에 죄없이 갇힌 엄마와 두딸, 그녀들은 과연 돌아올 수 있을까? 돌아온다면 그 때는 언제일까? 그 답은 우리 사회의 관심,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녹취> 오혜원(육성녹음) : "조국에도 훌륭한 아버지가 계신데 아버지 사랑이 그립습니다. 아버지! 부디 몸 건강하세요! 너무 오래간만에 아빠라고 소리내어 부르니 울음이 납니다." <녹취> 오규원(육성녹음) : "아버지는 알지 않아요. 내가 빨리 커야 어머니 힘도 덜어드리는데 안타까워요. 그러나 이제는 물도 긷고 나무도 잘 듭니다. 보고 싶어요. 아빠! 아버지와 만나는 날 나는 무엇을 선물할까요? 아빠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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