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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티김 “마지막 디너쇼…이제 콘서트로 호흡”
입력 2011.12.13 (08:39) 연합뉴스
2년 전 할리우드 배우 메릴 스트립처럼 파격적인 쇼커트 은발로 변신한 패티김(73).



12일 논현동의 소속사 사무실에서 만난 패티김은 살짝 웨이브를 준 근사한 은발 그대로였다. 그는 "얼마 전 한 신문이 ’은발도 패션’이라며 70대인 날 ’세계에서 가장 섹시하다’는 조지 클루니, 리처드 기어와 함께 실었더라. 딸들에게 그 사진을 보내주며 자랑했다"고 웃었다.



변신에 당당한 패티김은 돌이켜보면 50여년 간 국내 대중음악계에서 숱한 도전을 해왔다.



그로인해 ’해방 이후 일본 정부가 공식 초청한 최초의 한국 가수(1960년)’, ’대중 가수 최초 ’리사이틀’이란 표현 사용(62년)’, ’국내 첫 개인 이름을 내건 방송 프로그램 패티김 쇼 진행(67년)’ 등 그에겐 ’최초’란 수식어가 늘 따라다녔다.



여기에 또 하나, 패티김은 국내에서 ’디너쇼’의 시발점이 된 가수다.



1960년 초 소공동 조선호텔의 고급 클럽에서 한껏 차려입은 신사, 숙녀들이 저녁 만찬에 이어 그의 공연을 관람했다. 그는 "국내 가수로는 디너쇼 형식의 첫 공연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당시 호텔 클럽은 외교관, 장성급 등 고위직과 외국인들의 사교 클럽 같은 개념이었죠. 그곳에서 저녁 만찬에 이어 제가 공연했는데 이때 디너쇼란 타이틀은 붙지 않았어요. 그러나 식사를 하고 공연을 보는 디너쇼 형식을 띄었죠."



그가 디너쇼란 타이틀을 내걸고 연 첫 공연은 1960년대 말 워커힐호텔의 그랜드볼룸 개관 때다. 그는 "이후 1960-70년대 신라호텔, 하얏트호텔 등 여러 호텔이 볼룸을 오픈할 때마다 가장 먼저 공연 섭외가 왔다"고 웃었다.



그 덕에 ’디너쇼의 여왕’으로 불렸지만 그는 올해 결단을 하나 내렸다.



"5년 전부터 계획한 일인데 올해 서울(21-22일 그랜드하얏트호텔), 부산(24-25일 롯데호텔), 대구(29-30일 인터불고호텔) 공연을 끝으로 더 이상 디너쇼를 열지 않겠다"는 것.



"당시에는 노래를 부르고 싶어도 공연할 만한 장소가 없었죠. 체육관은 저와 맞지 않아 초청하는 호텔마다 공연했더니 티켓이 비싼 가수로 인식됐어요.

하지만 이제 중소 도시에 예쁜 극장이 많이 개관했죠. 전 일부 관객에 한정된 디너쇼보다 누구나 즐길 수 있고 다채로운 연출이 가능한 콘서트가 더 좋아요. 많은 후배 가수가 디너쇼를 여니 이제 슬슬 자리를 내줘야죠."



그는 또 자신의 무대에 대한 자존감도 결심의 배경이 됐다고 했다. 그는 과거에도 디너쇼를 열 때면 호텔에 깐깐한 계약 조건을 내걸기로 유명했다.



"공연하기 전 테이블 위에 식기가 치워져야 한다는 계약 조건을 내걸었죠. 웨이터가 쟁그랑 소리를 내며 서빙을 하면 제 노래를 경청하려는 관객에게 실례라고 생각했어요. 클래식 공연 때도 오케스트라의 한 곡이 끝나야 뒤늦게 온 관객을 입장시키잖아요. 패티김의 자존심이었던 거죠. 하하."



디너쇼는 마지막이지만 그는 2년에 한번씩 여는 전국투어에 한층 공들일 계획이다.



여기서 주목할 대목은 70대에도 하루 2회 공연까지 소화 가능한 그의 에너지. 사실 해외 팝스타 중에도 패티김처럼 공연하는 가수는 손에 꼽을 정도다. 엘튼 존, 밥 딜런, 다이애나 로스는 60대이고, 케니 로저스가 패티김과 동갑내기다. 후배 가수들은 패티김이 콘서트에서 와이어를 타는 모습에 혀를 내두르며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



그는 "부모님께 받은 유전 덕에 건강한데다 꾸준히 체력 관리를 했기 때문"이라며 "흔히들 말하는 관록, 노하우에서 나온 성대 관리도 비결"이라고 설명했다.



"10-20대에는 고음을 지르며 ’나 이렇게 높이 올라간다’고 자랑했죠. 하지만 20여년이 지나 성대를 컨트롤하는 방법을 터득했어요. 그리고 50대 이후부터는 성대 관리에 신경 썼죠. 공연 전에는 지금도 매일 한시간 이상씩 연습해요. 이번 디너쇼를 위해 지난달 중순부터 연습을 시작했죠."



그는 앞으로 자기 대표곡으로 채운 뮤지컬을 제작하고 싶다고 했다. ’초우’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그대 없이는 못살아’ 등 다양한 장르, 노랫말의 음악을 불렀기에 한편의 스토리로 연출하기 가능할 법하다.



그는 "뮤지컬 ’맘마미아’의 곡들처럼 다양한 세대가 아는 내 노래가 꽤 많다"며 "그 음악들 안에 내 삶의 스토리를 녹여내고 싶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 음악들을 만들어준 작곡가 고(故) 박춘석, 고(故) 길옥윤에 대한 애틋한 마음도 표시했다. 박춘석은 데뷔곡을 만들어줬고 길옥윤과는 부부의 연을 맺기도 했다.



"제 인생에 큰 획을 그어준 두 분이죠. 두 분이 주신 제 노래들은 50여 년이 지나 여전히 불리고 50년 후에도 남을 곡이 있을 겁니다. 가수로서는 그 이상의 축복이 없죠."



두 작곡가의 빼어난 곡들과 풍성한 가창력, 우아한 무대 매너 덕에 그는 1960-70년대부터 일본과 미국 등 해외 공연에도 나섰다. 지금 세계로 뻗어나간 K팝 한류의 원조인 셈이다.



"시대가 많이 흘러 잊혔지, 전 확실히 원조랍니다. 호호. 사실 미국 무대에는 저보다 자매 그룹 ’김시스터즈’가 먼저 나갔는데 춤을 추고, 악기를 다루는 엔터테이너로 사랑받았죠. 솔로 보컬리스트로는 제가 처음이었죠."



인터뷰를 한 사무실에는 당시 젊은 날의 흑백 사진이 즐비했다. 각선미를 한껏 드러낸 사진들도 눈에 띄었다. ’그땐 그랬지’란 생각이 들까.



"혼자 속으로 얘기지만 ’나 지금도 괜찮은데’라고 마인드 컨트롤을 해요. 40-50년 전 사진을 봐도 ’나 아직도 봐줄 만 하다’고 위로하죠. 하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강조한 그는 여전히 새로운 도전에 거침이 없어 보였다. 지난해 미국에서 행글라이딩에 도전해 화제가 된 그는 "스카이다이빙에 도전해보고 싶다"고 했다.



"행글라이딩은 72세가 되는 제 생일에 딸 카밀라 부부가 선물로 예약해줬죠. 사실 제가 스키, 워터 스키, 로프 점프 등 안 해본 게 없거든요. 오래전 한번은 큰 사고가 날 뻔해 하반신 불구가 될 뻔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스카이다이빙은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할 것 같아요. 가족의 만류도 있고 한쪽 눈 망막 수술을 한 적이 있는데 의사가 위험하다네요."



그는 이어 카밀라 이야기를 하며 표정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카밀라가 내년 4월 출산을 앞뒀기 때문. 그는 큰딸에게서 7살 손자, 4살 손녀를 둬 세 번째 손주를 기다리고 있다.



"손자, 손녀가 ’ㄹ’ 발음이 어려워 ’함머니’라고 부르는 게 너무 좋아요. 하지만 혹시라도 길에서 누군가 절 ’할머니’라고 부르면 아마 야단맞을 걸요. 하하. 제 기분은 전혀 할머니가 아니거든요. 나이란 마음먹기에 따라 정해지는데 지금 전 20년을 뚝 떨어뜨려 53살로 살아가고 있답니다."
  • 패티김 “마지막 디너쇼…이제 콘서트로 호흡”
    • 입력 2011-12-13 08:39:29
    연합뉴스
2년 전 할리우드 배우 메릴 스트립처럼 파격적인 쇼커트 은발로 변신한 패티김(73).



12일 논현동의 소속사 사무실에서 만난 패티김은 살짝 웨이브를 준 근사한 은발 그대로였다. 그는 "얼마 전 한 신문이 ’은발도 패션’이라며 70대인 날 ’세계에서 가장 섹시하다’는 조지 클루니, 리처드 기어와 함께 실었더라. 딸들에게 그 사진을 보내주며 자랑했다"고 웃었다.



변신에 당당한 패티김은 돌이켜보면 50여년 간 국내 대중음악계에서 숱한 도전을 해왔다.



그로인해 ’해방 이후 일본 정부가 공식 초청한 최초의 한국 가수(1960년)’, ’대중 가수 최초 ’리사이틀’이란 표현 사용(62년)’, ’국내 첫 개인 이름을 내건 방송 프로그램 패티김 쇼 진행(67년)’ 등 그에겐 ’최초’란 수식어가 늘 따라다녔다.



여기에 또 하나, 패티김은 국내에서 ’디너쇼’의 시발점이 된 가수다.



1960년 초 소공동 조선호텔의 고급 클럽에서 한껏 차려입은 신사, 숙녀들이 저녁 만찬에 이어 그의 공연을 관람했다. 그는 "국내 가수로는 디너쇼 형식의 첫 공연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당시 호텔 클럽은 외교관, 장성급 등 고위직과 외국인들의 사교 클럽 같은 개념이었죠. 그곳에서 저녁 만찬에 이어 제가 공연했는데 이때 디너쇼란 타이틀은 붙지 않았어요. 그러나 식사를 하고 공연을 보는 디너쇼 형식을 띄었죠."



그가 디너쇼란 타이틀을 내걸고 연 첫 공연은 1960년대 말 워커힐호텔의 그랜드볼룸 개관 때다. 그는 "이후 1960-70년대 신라호텔, 하얏트호텔 등 여러 호텔이 볼룸을 오픈할 때마다 가장 먼저 공연 섭외가 왔다"고 웃었다.



그 덕에 ’디너쇼의 여왕’으로 불렸지만 그는 올해 결단을 하나 내렸다.



"5년 전부터 계획한 일인데 올해 서울(21-22일 그랜드하얏트호텔), 부산(24-25일 롯데호텔), 대구(29-30일 인터불고호텔) 공연을 끝으로 더 이상 디너쇼를 열지 않겠다"는 것.



"당시에는 노래를 부르고 싶어도 공연할 만한 장소가 없었죠. 체육관은 저와 맞지 않아 초청하는 호텔마다 공연했더니 티켓이 비싼 가수로 인식됐어요.

하지만 이제 중소 도시에 예쁜 극장이 많이 개관했죠. 전 일부 관객에 한정된 디너쇼보다 누구나 즐길 수 있고 다채로운 연출이 가능한 콘서트가 더 좋아요. 많은 후배 가수가 디너쇼를 여니 이제 슬슬 자리를 내줘야죠."



그는 또 자신의 무대에 대한 자존감도 결심의 배경이 됐다고 했다. 그는 과거에도 디너쇼를 열 때면 호텔에 깐깐한 계약 조건을 내걸기로 유명했다.



"공연하기 전 테이블 위에 식기가 치워져야 한다는 계약 조건을 내걸었죠. 웨이터가 쟁그랑 소리를 내며 서빙을 하면 제 노래를 경청하려는 관객에게 실례라고 생각했어요. 클래식 공연 때도 오케스트라의 한 곡이 끝나야 뒤늦게 온 관객을 입장시키잖아요. 패티김의 자존심이었던 거죠. 하하."



디너쇼는 마지막이지만 그는 2년에 한번씩 여는 전국투어에 한층 공들일 계획이다.



여기서 주목할 대목은 70대에도 하루 2회 공연까지 소화 가능한 그의 에너지. 사실 해외 팝스타 중에도 패티김처럼 공연하는 가수는 손에 꼽을 정도다. 엘튼 존, 밥 딜런, 다이애나 로스는 60대이고, 케니 로저스가 패티김과 동갑내기다. 후배 가수들은 패티김이 콘서트에서 와이어를 타는 모습에 혀를 내두르며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



그는 "부모님께 받은 유전 덕에 건강한데다 꾸준히 체력 관리를 했기 때문"이라며 "흔히들 말하는 관록, 노하우에서 나온 성대 관리도 비결"이라고 설명했다.



"10-20대에는 고음을 지르며 ’나 이렇게 높이 올라간다’고 자랑했죠. 하지만 20여년이 지나 성대를 컨트롤하는 방법을 터득했어요. 그리고 50대 이후부터는 성대 관리에 신경 썼죠. 공연 전에는 지금도 매일 한시간 이상씩 연습해요. 이번 디너쇼를 위해 지난달 중순부터 연습을 시작했죠."



그는 앞으로 자기 대표곡으로 채운 뮤지컬을 제작하고 싶다고 했다. ’초우’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그대 없이는 못살아’ 등 다양한 장르, 노랫말의 음악을 불렀기에 한편의 스토리로 연출하기 가능할 법하다.



그는 "뮤지컬 ’맘마미아’의 곡들처럼 다양한 세대가 아는 내 노래가 꽤 많다"며 "그 음악들 안에 내 삶의 스토리를 녹여내고 싶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 음악들을 만들어준 작곡가 고(故) 박춘석, 고(故) 길옥윤에 대한 애틋한 마음도 표시했다. 박춘석은 데뷔곡을 만들어줬고 길옥윤과는 부부의 연을 맺기도 했다.



"제 인생에 큰 획을 그어준 두 분이죠. 두 분이 주신 제 노래들은 50여 년이 지나 여전히 불리고 50년 후에도 남을 곡이 있을 겁니다. 가수로서는 그 이상의 축복이 없죠."



두 작곡가의 빼어난 곡들과 풍성한 가창력, 우아한 무대 매너 덕에 그는 1960-70년대부터 일본과 미국 등 해외 공연에도 나섰다. 지금 세계로 뻗어나간 K팝 한류의 원조인 셈이다.



"시대가 많이 흘러 잊혔지, 전 확실히 원조랍니다. 호호. 사실 미국 무대에는 저보다 자매 그룹 ’김시스터즈’가 먼저 나갔는데 춤을 추고, 악기를 다루는 엔터테이너로 사랑받았죠. 솔로 보컬리스트로는 제가 처음이었죠."



인터뷰를 한 사무실에는 당시 젊은 날의 흑백 사진이 즐비했다. 각선미를 한껏 드러낸 사진들도 눈에 띄었다. ’그땐 그랬지’란 생각이 들까.



"혼자 속으로 얘기지만 ’나 지금도 괜찮은데’라고 마인드 컨트롤을 해요. 40-50년 전 사진을 봐도 ’나 아직도 봐줄 만 하다’고 위로하죠. 하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강조한 그는 여전히 새로운 도전에 거침이 없어 보였다. 지난해 미국에서 행글라이딩에 도전해 화제가 된 그는 "스카이다이빙에 도전해보고 싶다"고 했다.



"행글라이딩은 72세가 되는 제 생일에 딸 카밀라 부부가 선물로 예약해줬죠. 사실 제가 스키, 워터 스키, 로프 점프 등 안 해본 게 없거든요. 오래전 한번은 큰 사고가 날 뻔해 하반신 불구가 될 뻔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스카이다이빙은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할 것 같아요. 가족의 만류도 있고 한쪽 눈 망막 수술을 한 적이 있는데 의사가 위험하다네요."



그는 이어 카밀라 이야기를 하며 표정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카밀라가 내년 4월 출산을 앞뒀기 때문. 그는 큰딸에게서 7살 손자, 4살 손녀를 둬 세 번째 손주를 기다리고 있다.



"손자, 손녀가 ’ㄹ’ 발음이 어려워 ’함머니’라고 부르는 게 너무 좋아요. 하지만 혹시라도 길에서 누군가 절 ’할머니’라고 부르면 아마 야단맞을 걸요. 하하. 제 기분은 전혀 할머니가 아니거든요. 나이란 마음먹기에 따라 정해지는데 지금 전 20년을 뚝 떨어뜨려 53살로 살아가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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