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특급, 美·日 찍고 ‘17년만 귀향’

입력 2011.12.13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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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일본에서 뛴 ‘코리언 특급’ 박찬호(38)가 13일 한국야구위원회(KBO) 이사회의 결정으로 내년 시즌 한국프로야구 마운드에 오를 수 있게 됐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아시아 출신 선수로는 통산 최다승을 기록한 박찬호가 한국프로야구 무대에 선 적은 아직 없다.



박찬호는 공주고와 한양대를 졸업하고 1994년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



LA다저스를 시작으로 텍사스(2002년~2005년)-샌디에이고(2005~2006년)-뉴욕 메츠(2007년)-다저스(2008년)-필라델피아(2009년)-뉴욕 양키스·피츠버그(2010년)에서 뛰었다.



올해는 일본 오릭스 버펄로스 유니폼을 입었다.



박찬호는 강속구를 던지는 것으로 유명했지만 제구력 등 안정적인 투구에서는 임선동(전 현대)이나 조성민(전 한화) 등 당시 ’최고’로 꼽히던 동기들보다 약간 낮은 평가를 받았다.



다저스와 입단 계약을 맺을 때도 개척자로서의 가치가 주목받는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낯선 환경에서 묵묵히 실력을 갈고 닦으며 화려하게 선수 인생을 수놓았다.



구단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데뷔 첫해부터 곧장 메이저리그에서 뛴 박찬호는 첫 2년 동안은 승수를 올리지 못했지만 1996년 5승(5패)을 기록하면서 서서히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97년 14승(8패)을 쌓아 처음으로 두자릿수 승리를 달성했고, 이후 2001년까지 5년 연속 두 자리 승수를 올리면서 정상급 선발 투수로 자리를 굳혔다.



특히 2000년에는 한 시즌 개인 최다인 18승(10패)을 올리고 삼진 217개를 잡아내면서 평균자책점 3.27을 기록하는 등 최고의 해를 보냈다.



박찬호는 2001년 시즌을 마치고 자유계약선수(FA)로 텍사스 레인저스와 5년간 6천500만 달러를 받는 대형 계약을 성사시켜 선수 인생의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인생 최고의 시기에 시련이 닥치면서 부진과 재기를 거듭했다.



2002년 9승(8패)에 그치면서 주춤했고 이듬해에는 허리 부상 여파로 고작 7경기에 출전해 1승(3패)을 거두는 데 그쳤다.



2004년에도 4승(7패)밖에 올리지 못해 ’먹튀’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었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 옮긴 2005년 마침내 통산 100승 고지를 밟고 시즌 12승을 거두면서 부활하는 듯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2006년 샌디에이고에서 7승을 올린 것을 마지막으로 매년 팀을 옮겨 다녀야 했다.



3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잔 부상이 많아져 좋은 흐름이 끊긴 것이 여러 차례였다.



뉴욕 메츠로 옮긴 2007년에는 한 경기에 등판에 4이닝 동안 무려 7점이나 내주며 패전 투수가 되고는 더는 기회를 잡지 못했다.



다저스로 돌아간 2008년에는 4승을 올리는 것에 만족했다.



7년 만에 돌아온 친정팀 다저스는 박찬호 선수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박찬호는 다저스에서 본격적으로 중간 계투 보직을 맡기 시작해 평균자책점 3.40의 좋은 성적을 냈다.



하지만 선발 투수 자리를 포기할 수 없었던 박찬호가 먼저 팀을 떠났다.



선발 투수로 재기하고자 이듬해 필라델피아로 팀을 옮겼다.



그러나 박찬호는 결국 선발진에 끼어들지 못하고 중간 계투로 주로 나서며 3승을 올렸다.



계투진의 일원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처음으로 월드시리즈 무대를 밟는 감격을 누린 박찬호는 이번엔 첫 우승의 꿈을 좇아 메이저리그 최고 명문구단인 뉴욕 양키스의 줄무늬 유니폼을 입었다.



다시 찾은 뉴욕은 여전히 박찬호에게 ’약속의 땅’이 아니었다.



박찬호는 부상과 부진이 겹치면서 27경기에 나와 2승(1패), 평균자책점 5.60에 그쳤고, 결국 구단에서 방출 대기 조치를 당했다.



자칫 소속팀 없이 시즌을 마쳐야 할 위기에까지 몰렸던 박찬호는 가까스로 피츠버그와 계약하면서 메이저리그에 잔류했다.



그리고 지난해 10월 플로리다 말린스와의 방문경기에서 구원승으로 통산 124승을 거둬 일본인 투수 노모 히데오(통산 123승)가 보유했던 아시아 출신 선수 최다승 기록을 갈아치웠다.



박찬호는 메이저리그에서 17시즌을 활약하는 동안 개인 통산 476경기에 등판해 124승98패 2세이브, 평균자책점 4.36의 성적을 남겼다.



선수 생활의 황혼기를 맞아 종착역을 고민하던 박찬호는 지난해 12월 일본 진출을 선택했다.



오릭스와 1년간 연봉 120만 달러, 옵션 100만 달러 등 총 220만 달러에 계약했다.



하지만 올 시즌 성적은 고작 7경기 출장에 1승5패, 평균자책점 4.29로 초라했다.



지난 4월 일본 무대 데뷔전에서 6⅔이닝 동안 3실점으로 패전 투수가 됐고, 이후 6차례 더 출장했으나 성적이 들쭉날쭉해 믿음을 심어 주지 못했다.



2군을 오가며 어려운 시즌을 보내던 박찬호는 여름 들어 허벅지 부상 등이 겹쳐 6월 이후로는 아예 1군 경기에 모습을 드러내지도 못했다.



박찬호는 결국 지난 10월 말 오릭스로부터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고 방출됐다.



그는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한국 프로야구에서 하고 싶다는 뜻을 드러냈다.



박찬호가 한국에서 뛰려면 내년 신인드래프트를 거쳐야 해 2013년부터나 가능했다.



하지만 KBO는 규약에 예외규정을 두기로 하면서 박찬호의 바람대로 당장 내년부터 뛸 수 있게 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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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리안특급, 美·日 찍고 ‘17년만 귀향’
    • 입력 2011-12-13 11:21:34
    연합뉴스
미국과 일본에서 뛴 ‘코리언 특급’ 박찬호(38)가 13일 한국야구위원회(KBO) 이사회의 결정으로 내년 시즌 한국프로야구 마운드에 오를 수 있게 됐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아시아 출신 선수로는 통산 최다승을 기록한 박찬호가 한국프로야구 무대에 선 적은 아직 없다.

박찬호는 공주고와 한양대를 졸업하고 1994년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

LA다저스를 시작으로 텍사스(2002년~2005년)-샌디에이고(2005~2006년)-뉴욕 메츠(2007년)-다저스(2008년)-필라델피아(2009년)-뉴욕 양키스·피츠버그(2010년)에서 뛰었다.

올해는 일본 오릭스 버펄로스 유니폼을 입었다.

박찬호는 강속구를 던지는 것으로 유명했지만 제구력 등 안정적인 투구에서는 임선동(전 현대)이나 조성민(전 한화) 등 당시 ’최고’로 꼽히던 동기들보다 약간 낮은 평가를 받았다.

다저스와 입단 계약을 맺을 때도 개척자로서의 가치가 주목받는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낯선 환경에서 묵묵히 실력을 갈고 닦으며 화려하게 선수 인생을 수놓았다.

구단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데뷔 첫해부터 곧장 메이저리그에서 뛴 박찬호는 첫 2년 동안은 승수를 올리지 못했지만 1996년 5승(5패)을 기록하면서 서서히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97년 14승(8패)을 쌓아 처음으로 두자릿수 승리를 달성했고, 이후 2001년까지 5년 연속 두 자리 승수를 올리면서 정상급 선발 투수로 자리를 굳혔다.

특히 2000년에는 한 시즌 개인 최다인 18승(10패)을 올리고 삼진 217개를 잡아내면서 평균자책점 3.27을 기록하는 등 최고의 해를 보냈다.

박찬호는 2001년 시즌을 마치고 자유계약선수(FA)로 텍사스 레인저스와 5년간 6천500만 달러를 받는 대형 계약을 성사시켜 선수 인생의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인생 최고의 시기에 시련이 닥치면서 부진과 재기를 거듭했다.

2002년 9승(8패)에 그치면서 주춤했고 이듬해에는 허리 부상 여파로 고작 7경기에 출전해 1승(3패)을 거두는 데 그쳤다.

2004년에도 4승(7패)밖에 올리지 못해 ’먹튀’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었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 옮긴 2005년 마침내 통산 100승 고지를 밟고 시즌 12승을 거두면서 부활하는 듯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2006년 샌디에이고에서 7승을 올린 것을 마지막으로 매년 팀을 옮겨 다녀야 했다.

3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잔 부상이 많아져 좋은 흐름이 끊긴 것이 여러 차례였다.

뉴욕 메츠로 옮긴 2007년에는 한 경기에 등판에 4이닝 동안 무려 7점이나 내주며 패전 투수가 되고는 더는 기회를 잡지 못했다.

다저스로 돌아간 2008년에는 4승을 올리는 것에 만족했다.

7년 만에 돌아온 친정팀 다저스는 박찬호 선수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박찬호는 다저스에서 본격적으로 중간 계투 보직을 맡기 시작해 평균자책점 3.40의 좋은 성적을 냈다.

하지만 선발 투수 자리를 포기할 수 없었던 박찬호가 먼저 팀을 떠났다.

선발 투수로 재기하고자 이듬해 필라델피아로 팀을 옮겼다.

그러나 박찬호는 결국 선발진에 끼어들지 못하고 중간 계투로 주로 나서며 3승을 올렸다.

계투진의 일원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처음으로 월드시리즈 무대를 밟는 감격을 누린 박찬호는 이번엔 첫 우승의 꿈을 좇아 메이저리그 최고 명문구단인 뉴욕 양키스의 줄무늬 유니폼을 입었다.

다시 찾은 뉴욕은 여전히 박찬호에게 ’약속의 땅’이 아니었다.

박찬호는 부상과 부진이 겹치면서 27경기에 나와 2승(1패), 평균자책점 5.60에 그쳤고, 결국 구단에서 방출 대기 조치를 당했다.

자칫 소속팀 없이 시즌을 마쳐야 할 위기에까지 몰렸던 박찬호는 가까스로 피츠버그와 계약하면서 메이저리그에 잔류했다.

그리고 지난해 10월 플로리다 말린스와의 방문경기에서 구원승으로 통산 124승을 거둬 일본인 투수 노모 히데오(통산 123승)가 보유했던 아시아 출신 선수 최다승 기록을 갈아치웠다.

박찬호는 메이저리그에서 17시즌을 활약하는 동안 개인 통산 476경기에 등판해 124승98패 2세이브, 평균자책점 4.36의 성적을 남겼다.

선수 생활의 황혼기를 맞아 종착역을 고민하던 박찬호는 지난해 12월 일본 진출을 선택했다.

오릭스와 1년간 연봉 120만 달러, 옵션 100만 달러 등 총 220만 달러에 계약했다.

하지만 올 시즌 성적은 고작 7경기 출장에 1승5패, 평균자책점 4.29로 초라했다.

지난 4월 일본 무대 데뷔전에서 6⅔이닝 동안 3실점으로 패전 투수가 됐고, 이후 6차례 더 출장했으나 성적이 들쭉날쭉해 믿음을 심어 주지 못했다.

2군을 오가며 어려운 시즌을 보내던 박찬호는 여름 들어 허벅지 부상 등이 겹쳐 6월 이후로는 아예 1군 경기에 모습을 드러내지도 못했다.

박찬호는 결국 지난 10월 말 오릭스로부터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고 방출됐다.

그는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한국 프로야구에서 하고 싶다는 뜻을 드러냈다.

박찬호가 한국에서 뛰려면 내년 신인드래프트를 거쳐야 해 2013년부터나 가능했다.

하지만 KBO는 규약에 예외규정을 두기로 하면서 박찬호의 바람대로 당장 내년부터 뛸 수 있게 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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