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개발 50년…101위 최빈국서 시작한 5개년 계획

입력 2012.01.11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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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12월 서울 청량리경찰서에서 '도둑질을 못하게 된 사람들'을 위한 긴급회합이 열렸다. 이들은 청량리역 철로변에 살면서 석탄을 훔쳐 생계를 유지해왔다.

정부가 청량리역 주변에 벽돌로 담을 쌓아 '도탄(盜炭)'을 방지하자 '못살겠다'며 항의 방문하고자 한 곳에 모인 것이다. 이날 석탄공사 청량리소장, 청량리역장, 동대문구청 과장 등이 참석해 취직 알선에 노력하겠다고 약속하자 '도탄배'들이 해산했다.

우리 경제의 비약적 발전을 가능하게 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수립될 당시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자화상이다.

전후 베이비붐 세대들이 기하급수적으로 태어났으나 이들을 먹여 살릴 일자리는 턱없이 부족했다. 6ㆍ25전쟁이 한반도 남쪽을 초토화했기 때문이다. 제조업 시설의 절반과 철도의 75% 이상이 파괴됐다.

1960년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79달러에 불과했다. 국가 경제력이 세계 125개 국가 중 101위로 최빈국 수준이었다.

◇"자립경제 기반 구축"…군사정부 경제제일주의 기치

5ㆍ16 군사정부는 경제재건 계획 수립에 신속하게 착수했다. 쿠데타 두 달 만인 1961년 7월22일 경제기획원을 신설했다.

기획, 예산, 외자 등 당시 3대 핵심 경제개발수단을 갖춘 경제기획원은 다시 두 달 만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시안을 만들었다.

개발계획을 재빨리 기안한 데는 '전사(前史)' 덕분이다. 자유당 말기 본격적인 의미의 한국 최초의 경제개발계획인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이 있었다. 4ㆍ19혁명 이후에는 민주당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우리 경제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군사정부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민주당 정부의 5개년 계획과 일부 혼합돼 탄생, 1962년 1월13일 세상에 공표됐다.

박정희 당시 군사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사회 경제적인 악순환을 과감히 시정하고 국민경제의 재건과 자립적 성장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장기경제개발계획의 수립이 요청된다"며 경제개발계획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군사정부가 경제계획을 서둘러 세운 데는 대내외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대내적으로 쿠데타의 정당성을 경제 재건에서 찾고자 했고, 대외적으론 미국의 원조자금이 필요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전후 경제를 재건할 자본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미국 지원에 목을 매는 상황이었다. 미국 원조 물자 등을 판매해 생긴 자금인 '대충자금'이 1950년대 중반 정부의 재정 세입을 절반을 넘어서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의 케네디 정부가 원조정책을 무상원조에서 유상원조로 전환하면서 우리 경제의 '젖줄'이 말랐다. 미 정부는 장기발전 계획을 세운 저개발국가를 중점적으로 지원하기로 했다.

박정희 당시 최고회의 의장은 아직 발표되기 전인 5개년 계획을 갖고 1961년 11월 워싱턴을 방문했으나 미 정부는 이 계획의 실현 가능성에 부정적이었다.

경제기획원이 후일 인정했듯이 제1차 계획은 완성도가 떨어졌다. 군인들이 권총 차고 회의하는 분위기 속에서 계획목표가 설정된 탓이다.

투자재원조달 방안도 비현실적이었다. 1960년 총생산액이 23억 달러인 나라가 5년간 25억 달러를 마련하는데 이 중 18억달러는 국내에서, 7억달러는 외자로 한다는 계획이었다.

미비한 통계자료를 바탕으로 계획작성 기법도 제대로 모른 채 주판과 수동계산기로 짠 계획이 정확할 리가 없었다.

◇1차 계획, 시행착오 끝에 경제성장 가능성 입증

제1차 계획의 기본 방침은 '지도받는 자본주의체제'였다. 자유기업의 원칙을 토대로 하되 기간산업은 정부가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는 방식이다. 당시 제대로 된 민간 기업이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실상 정부가 전적으로 주도하는 경제계획이었다.

원론적인 수준의 선언이고, 실행으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1차 계획의 목표엔 우리 경제발전의 주요 방향이 담겨 있었다.

농업생산력 증대에 의한 농가소득 증대와 국민경제의 구조적 불균형 시정, 전력ㆍ석탄 등 에너지 공급원 확보, 기간산업의 확충, 사회간접자본 충족, 수출증대를 주축으로 한 국제수지 개선, 기술 진흥 등이 그것이다.

계획이 급조된 데다 1962~1963년 흉작과 화폐개혁에 따른 혼란까지 겹친 탓에 1차 계획은 목표를 수정해야 했다. 성장률과 투자율 목표치를 낮췄다. 수입 대체적 공업화 전략을 폐기하고 대외 지향적인 공업화 전략을 채택했다.

시행착오를 거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1차 계획은 목표한 경제성장률을 초과달성해 우리 경제의 성장과 자립의 가능성을 입증했다.

특히 경제계획 자체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 계획 수립과 실천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쌓게 했다.

1차 계획 당시 축적된 기술과 자신감은 이후 2~7차 계획이 결실을 볼 수 있게 한 밑거름이 됐다.

1966년 대일본 청구권 자금과 월남 파병에 따른 수입이 들어오면서 외화자금의 숨통을 튼 우리 경제는 제2차 5개년 계획(1967~1971년) 때부터 승승장구했다.

이 시기 '개발연대'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는 경부고속도로, 포항종합제철소(현 포스코)가 건설되고 새마을운동이 전개됐다. 연평균 9.6%란 경제성장률을 달성하면서 실업률은 5.0%로 내렸다.

제3차 계획(1972~1976년)은 우리 경제의 체질 전환을 시도했다. 기존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화가 추진됐다. 철강, 화학, 비철금속, 기계, 조선, 전자 등이 전략산업으로 선정됐다. '국민소득 1천달러, 수출 100억달러'가 3차 계획 당시 캐치프레이즈였다.

제4차 계획(1977~1981년)부터 명목상으로 나마 소득분배, 생활환경개선 등 사회개발에 눈을 돌렸다. 경제성장률은 제2차 석유파동으로 크게 꺾였다.

제5차 계획(1982~1986년)에 들어선 정책 이름이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으로 바뀐다. 경제개발에 사회가 추가되고 개발이 발전으로 대체됐다. 경제개발 과정에서 파생된 사회 전반의 문제에도 관심을 두겠다는 의지가 담겼다.

제6차 계획(1987~1992년)에선 시장경제질서의 창달과 정부기능의 재정립을 목표로 삼았고, 제7차 계획(1992~1996년)은 김영삼 정부 들어 '신경제 5개년 계획'으로 대체돼 집행된다.

◇한국경제에 명암 드리운 5개년 계획

케임브리지대 장하준 교수는 자신이 출생한 1963년 때부터 40년 남짓 한국의 1인당 소득이 구매력 기준으로 약 14배 증가했는데, 같은 결과를 달성하는 데 영국은 2세기, 미국은 1.5세기가 걸렸다고 평가했다.

1961년 당시 수출은 4천100만달러, 수입은 3억1천600만달러로, 무역 규모가 3억달러를 간신히 넘었다. 수출은 미미했고, 수입 대부분은 대외원조였다. 지난해 12월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무역 1조달러 고지를 넘어섰을 때 수출은 5천153억달러, 수입 4천855억달러였다.

5개년 계획이 우리 경제의 압축성장을 가능하게 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산이 높으면 골도 깊은 법이다.

계획 자체가 불균형 성장전략을 취한 탓에 우리 경제의 고질적인 부문 간 불균형 문제가 이때부터 잉태됐다.

수출 진흥을 위해서라면 차관, 세제, 금융, 원자재 등 각종 특혜 부여를 마다하지 않았다. 시장의 공정거래 질서가 확립되기 어려웠고 일부 기업에 경제력이 집중돼 독과점 폐해가 생겼다. 수출과 내수, 지역 간 불균형 발전 문제가 불거졌다.

성장 제일주의는 분배 문제를 소홀히 했다. 공장 근로자들은 산업역군으로 칭송받았지만, 저임금에 세계 최장 시간의 노동을 감수해야 했다.

제조업을 육성하고자 '관치 금융'을 한 탓에 금융 발전이 실물보다 뒤졌다.

서울대 강광하 교수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란 저서에서 "정부주도형 성장을 계속하는 과정에서 경제주체들로 하여금 정부의존적인 태도를 보이게 하였으며 시장기능 활성화를 더디게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특히 목표 달성에 급급한 나머지 경제정책이 갖는 부정적인 효과를 상쇄하려는 노력이 부족해 시장왜곡 등 새로운 문제를 일으켰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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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01-11 06:40:09
    연합뉴스
1960년 12월 서울 청량리경찰서에서 '도둑질을 못하게 된 사람들'을 위한 긴급회합이 열렸다. 이들은 청량리역 철로변에 살면서 석탄을 훔쳐 생계를 유지해왔다. 정부가 청량리역 주변에 벽돌로 담을 쌓아 '도탄(盜炭)'을 방지하자 '못살겠다'며 항의 방문하고자 한 곳에 모인 것이다. 이날 석탄공사 청량리소장, 청량리역장, 동대문구청 과장 등이 참석해 취직 알선에 노력하겠다고 약속하자 '도탄배'들이 해산했다. 우리 경제의 비약적 발전을 가능하게 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수립될 당시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자화상이다. 전후 베이비붐 세대들이 기하급수적으로 태어났으나 이들을 먹여 살릴 일자리는 턱없이 부족했다. 6ㆍ25전쟁이 한반도 남쪽을 초토화했기 때문이다. 제조업 시설의 절반과 철도의 75% 이상이 파괴됐다. 1960년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79달러에 불과했다. 국가 경제력이 세계 125개 국가 중 101위로 최빈국 수준이었다. ◇"자립경제 기반 구축"…군사정부 경제제일주의 기치 5ㆍ16 군사정부는 경제재건 계획 수립에 신속하게 착수했다. 쿠데타 두 달 만인 1961년 7월22일 경제기획원을 신설했다. 기획, 예산, 외자 등 당시 3대 핵심 경제개발수단을 갖춘 경제기획원은 다시 두 달 만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시안을 만들었다. 개발계획을 재빨리 기안한 데는 '전사(前史)' 덕분이다. 자유당 말기 본격적인 의미의 한국 최초의 경제개발계획인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이 있었다. 4ㆍ19혁명 이후에는 민주당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우리 경제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군사정부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민주당 정부의 5개년 계획과 일부 혼합돼 탄생, 1962년 1월13일 세상에 공표됐다. 박정희 당시 군사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사회 경제적인 악순환을 과감히 시정하고 국민경제의 재건과 자립적 성장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장기경제개발계획의 수립이 요청된다"며 경제개발계획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군사정부가 경제계획을 서둘러 세운 데는 대내외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대내적으로 쿠데타의 정당성을 경제 재건에서 찾고자 했고, 대외적으론 미국의 원조자금이 필요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전후 경제를 재건할 자본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미국 지원에 목을 매는 상황이었다. 미국 원조 물자 등을 판매해 생긴 자금인 '대충자금'이 1950년대 중반 정부의 재정 세입을 절반을 넘어서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의 케네디 정부가 원조정책을 무상원조에서 유상원조로 전환하면서 우리 경제의 '젖줄'이 말랐다. 미 정부는 장기발전 계획을 세운 저개발국가를 중점적으로 지원하기로 했다. 박정희 당시 최고회의 의장은 아직 발표되기 전인 5개년 계획을 갖고 1961년 11월 워싱턴을 방문했으나 미 정부는 이 계획의 실현 가능성에 부정적이었다. 경제기획원이 후일 인정했듯이 제1차 계획은 완성도가 떨어졌다. 군인들이 권총 차고 회의하는 분위기 속에서 계획목표가 설정된 탓이다. 투자재원조달 방안도 비현실적이었다. 1960년 총생산액이 23억 달러인 나라가 5년간 25억 달러를 마련하는데 이 중 18억달러는 국내에서, 7억달러는 외자로 한다는 계획이었다. 미비한 통계자료를 바탕으로 계획작성 기법도 제대로 모른 채 주판과 수동계산기로 짠 계획이 정확할 리가 없었다. ◇1차 계획, 시행착오 끝에 경제성장 가능성 입증 제1차 계획의 기본 방침은 '지도받는 자본주의체제'였다. 자유기업의 원칙을 토대로 하되 기간산업은 정부가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는 방식이다. 당시 제대로 된 민간 기업이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실상 정부가 전적으로 주도하는 경제계획이었다. 원론적인 수준의 선언이고, 실행으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1차 계획의 목표엔 우리 경제발전의 주요 방향이 담겨 있었다. 농업생산력 증대에 의한 농가소득 증대와 국민경제의 구조적 불균형 시정, 전력ㆍ석탄 등 에너지 공급원 확보, 기간산업의 확충, 사회간접자본 충족, 수출증대를 주축으로 한 국제수지 개선, 기술 진흥 등이 그것이다. 계획이 급조된 데다 1962~1963년 흉작과 화폐개혁에 따른 혼란까지 겹친 탓에 1차 계획은 목표를 수정해야 했다. 성장률과 투자율 목표치를 낮췄다. 수입 대체적 공업화 전략을 폐기하고 대외 지향적인 공업화 전략을 채택했다. 시행착오를 거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1차 계획은 목표한 경제성장률을 초과달성해 우리 경제의 성장과 자립의 가능성을 입증했다. 특히 경제계획 자체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 계획 수립과 실천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쌓게 했다. 1차 계획 당시 축적된 기술과 자신감은 이후 2~7차 계획이 결실을 볼 수 있게 한 밑거름이 됐다. 1966년 대일본 청구권 자금과 월남 파병에 따른 수입이 들어오면서 외화자금의 숨통을 튼 우리 경제는 제2차 5개년 계획(1967~1971년) 때부터 승승장구했다. 이 시기 '개발연대'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는 경부고속도로, 포항종합제철소(현 포스코)가 건설되고 새마을운동이 전개됐다. 연평균 9.6%란 경제성장률을 달성하면서 실업률은 5.0%로 내렸다. 제3차 계획(1972~1976년)은 우리 경제의 체질 전환을 시도했다. 기존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화가 추진됐다. 철강, 화학, 비철금속, 기계, 조선, 전자 등이 전략산업으로 선정됐다. '국민소득 1천달러, 수출 100억달러'가 3차 계획 당시 캐치프레이즈였다. 제4차 계획(1977~1981년)부터 명목상으로 나마 소득분배, 생활환경개선 등 사회개발에 눈을 돌렸다. 경제성장률은 제2차 석유파동으로 크게 꺾였다. 제5차 계획(1982~1986년)에 들어선 정책 이름이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으로 바뀐다. 경제개발에 사회가 추가되고 개발이 발전으로 대체됐다. 경제개발 과정에서 파생된 사회 전반의 문제에도 관심을 두겠다는 의지가 담겼다. 제6차 계획(1987~1992년)에선 시장경제질서의 창달과 정부기능의 재정립을 목표로 삼았고, 제7차 계획(1992~1996년)은 김영삼 정부 들어 '신경제 5개년 계획'으로 대체돼 집행된다. ◇한국경제에 명암 드리운 5개년 계획 케임브리지대 장하준 교수는 자신이 출생한 1963년 때부터 40년 남짓 한국의 1인당 소득이 구매력 기준으로 약 14배 증가했는데, 같은 결과를 달성하는 데 영국은 2세기, 미국은 1.5세기가 걸렸다고 평가했다. 1961년 당시 수출은 4천100만달러, 수입은 3억1천600만달러로, 무역 규모가 3억달러를 간신히 넘었다. 수출은 미미했고, 수입 대부분은 대외원조였다. 지난해 12월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무역 1조달러 고지를 넘어섰을 때 수출은 5천153억달러, 수입 4천855억달러였다. 5개년 계획이 우리 경제의 압축성장을 가능하게 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산이 높으면 골도 깊은 법이다. 계획 자체가 불균형 성장전략을 취한 탓에 우리 경제의 고질적인 부문 간 불균형 문제가 이때부터 잉태됐다. 수출 진흥을 위해서라면 차관, 세제, 금융, 원자재 등 각종 특혜 부여를 마다하지 않았다. 시장의 공정거래 질서가 확립되기 어려웠고 일부 기업에 경제력이 집중돼 독과점 폐해가 생겼다. 수출과 내수, 지역 간 불균형 발전 문제가 불거졌다. 성장 제일주의는 분배 문제를 소홀히 했다. 공장 근로자들은 산업역군으로 칭송받았지만, 저임금에 세계 최장 시간의 노동을 감수해야 했다. 제조업을 육성하고자 '관치 금융'을 한 탓에 금융 발전이 실물보다 뒤졌다. 서울대 강광하 교수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란 저서에서 "정부주도형 성장을 계속하는 과정에서 경제주체들로 하여금 정부의존적인 태도를 보이게 하였으며 시장기능 활성화를 더디게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특히 목표 달성에 급급한 나머지 경제정책이 갖는 부정적인 효과를 상쇄하려는 노력이 부족해 시장왜곡 등 새로운 문제를 일으켰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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