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포착] ‘눈물을 희망으로…’ 134cm ‘작은 거인’

입력 2012.03.19 (09:04) 수정 2012.03.19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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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흔히 다른 사람보다 몸집은 작아도 대단한 업적을 이뤄낸 사람을 작은 거인이라고 부르죠.

오늘 소개해드릴 주인공에게도 잘 어울리는 말이 아닐까 싶은데요.

척추장애로 키가 134cm에서 멈췄지만, 수많은 역경을 딛고 국제사회복지사로 활동중인 김해영씨 이야기입니다.

어릴 때부터 장애로 인해 앉아있는 것조차 힘들고, 남의집살이를 할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지만, 배우고 싶다는 의지 하나로 직업훈련원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다는데요.

이제는 아프리카를 비롯해 세계 곳곳을 누비며 수많은 이웃들을 돕는 희망전도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김기흥 기자, 작은 거인 김해영씨를 만나보셨다고요.

<리포트>

네, 그렇습니다.

첫 아이가 딸이라 화가 난 아버지는 만취해 아이를 방바닥에 내던졌습니다.

척추를 다친 갓난아기의 키는 더디게 자랐습니다.

공부는 초등학교가 전부였습니다.

아버지의 자살, 정신질환을 앓는 어머니 대신 동생 넷을 키우기 위해 남의 집 식모살이를 시작했습니다.

겨우 열 네살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눈물을 희망으로 쏘아올린 그녀를 이야기가 지금부터 시작됩니다.

가난과 장애가 좌절이 아닌 희망의 출발점이었다고 말하는 김해영 씨.

배움에 목말랐던 어린 소녀는, 어느새 어른이 되어 모교를 찾았습니다.

<인터뷰> 김해영 (국제사회복지사) : "여기는 제가 15세에 처음 편물기술을 배운 학교에요."

아홉 살 때부터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고, 열네 살 땐 식모 일까지 했다는 그녀는, 중졸, 고졸이라는 학력이 무척이나 갖고 싶었다고 하는데요.

<인터뷰> 김해영 (국제사회복지사) : "한국에서 유일하게 다닌 직업학교, 교육시설이에요. 그 후에는 학교를 다니지 못했어요. 그래서 이 학교가 저한테는 삶의 전환점이 됐고, 밑거름이 되는 기술을 가르쳐줬죠."

살기 위해 공부했다는 해영씨는 직업훈련원에 들어가 편물기술을 배웠고, 국내외 기능대회에서 수상, 그 실력을 인정받았는데요.

2년 전엔 명문 컬럼비아 대학원까지 졸업한 해영씨.

세상은 그녀를 장애인이라는 틀 안에 가뒀지만, 그녀의 도전엔 틀이 없었습니다.

<인터뷰> 김해영 (국제사회복지사) : "이 세상은 저를 장애인으로 분류했어요. 척추장애인 김해영. 그게 아니에요. 그냥 김해영이에요. 그냥 나라는 한 사람인 거예요. 이전에도 이후에도 (똑같은) 한 사람인데 너무 많은 타이틀을 걸어서 본다는 거죠. 지금은 컬럼비아에서 석사과정을 한 김해영. 그거 아니에요. 저는 초등학교 졸업했을 때나 지금이나 저라는 사람은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장애인이 아닌 한 사람의 여성으로 봐준 은사를 만나러 온 해영씨.

척추장애로 오래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들었던 그녀에게 선생님의 격려는 늘 힘이 됐다고 하는데요.

<인터뷰> 김순희 (김해영씨 은사) : "어릴 때부터 (고통을) 초월한 것 같아요. 남의 집 살면서도 배우겠다는 욕망을 (늘 갖고 있었기 때문에) 얘는 그 시간 하나하나도 놓치지 않고 뭐든지 해야겠다는 생각만 머리에 잔뜩 들어 있었어요. 남이 다 자는 시간에도 일하고 있었어요."

<인터뷰> 김해영 (국제사회복지사) : "선생님, 원장님 같은 어른들이 제 뒤에서 오늘날의 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받쳐 주셨기 때문에 가능했지 그냥 됐겠습니까."

주위의 믿음과 함께 성장한 그녀는 스물여섯 살이 되자, 아프리카의 극빈국인 보츠와나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합니다.

<인터뷰> 김해영 (국제사회복지사) : "같이 공사도 하고 식당, 건물도 지으면서 공부와 일을 병행하며 같이 나아갔던 것 같아요."

황량한 사막 위에 세워진 직업학교에서 편물기술을 가르쳤는데요.

검은 피부의 제자들 덕분에 내내 행복했다고 합니다.

<인터뷰> "한국에서는 가족도 친구들도 누가 나를 예쁘다고 했겠어요. 심지어는 귀엽다는 소리도 못 들어 봤었어요. 그런데 그 곳에서는 얘들이 ‘어머 너무 예뻐요’ 라며 난리가 아닌 거예요. 아침마다 나가면 머리 예쁘다고 얼마나 쓰다듬었는지 머리가 다 빠진 것 같아요."

14년 동안 가르친 제자들 중엔 가슴에 묻은 제자도 있다고 하는데요.

<인터뷰> "우리 학교 왔을 때 17세였는데, 22세 때 결혼식을 앞두고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금방 일어나야 될 텐데 아프다는 소식 듣고 몇 주 지나고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22세에 아들 둘을 남겨두고 죽은 저의 제자 마하디가 가장 가슴 아픈 일이었어요."

아프리카 오지마을에서 준 것보다 오히려 받은 것이 많다는 해영씨.

<인터뷰> "희망을 전해주러 간 것이 아니라 그 땅에서 제 인생에서 저의 희망을 찾아 나온 것을 알게 됐어요."

다음 날,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책의 출판기념회를 준비 중인 해영씨.

47년간의 도전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하는데요.

행사를 돕기 위해 동생 종균씨가 나섰습니다.

한때는 작은 키의 누나가 부끄러운 적도 있었다고 하는데요.
<인터뷰> 김종균 (김해영씨 동생) : "(어렸을 때엔 누나를) 무시한 거죠. 누나라고 안 부르고 이름만 불렀었거든요. 그런데 철이 들면서 아니구나 싶더라고요. 지금은 떳떳하게 사람들한테 누나라고 해요."

인생의 전환점이 돼주었던 모교에서 열린 출판기념회. 행사장에서는 오랜만에 반가운 이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연락이 두절됐던 친척들과 20년 만에 마주할 수 있었는데요.

<인터뷰> 김현균 (사촌오빠) : "(신문기사를 보고) 찾아보라고 했더니 우리 아이가 이메일을 그 기자에게 보냈는데 그 기자가 연락을 줬더라고요. 그래서 전화번호를 알았어요."

고통의 세월을 딛고 일어선 해영씨에게 마음의 지원자가 또 늘었습니다.

도전하며 살아온 그녀의 삶은 주변 사람들에게 늘 귀감이 되곤 했는데요.

<인터뷰 > 최영숙 (김해영씨 은사) : :"신문에 표현되기 전에 제가 (해영이를) 작은 거인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어요. 예전에는 제가 해영이의 선생이었지만 지금은 해영이가 저의 선생님이라고 생각해요."

<녹취> 출판기념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삶에 대한 고통을 책을 읽으며 치유했다는 해영씨는, 역시 책을 통해 희망을 전해주고 싶다고 합니다.

경제적 어려움도, 신체적 불편함도 넘어선 오늘이 있기까지, 원동력이 되어 준 건 바로 열정이었다고 말하는 그녀.

(초등학교 졸업의) 식모살이를 하던 소녀에서 세계를 무대로 뛰는 국제사회복지사가 된 자신의 이야기가, 희망의 씨앗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요.

<인터뷰> 김해영 (국제사회복지사) : " 큰 꿈도 오늘이 모여 된 것이고, 멀리 가는 길도 한 걸음부터 가는 거잖아요. 이렇게 많은 분들이 인정해 주고 용기 준 것을 발판 삼아 다시 한 번 뛰어 올라야겠죠."

134센티미터의 거인 김해영씨는 살아 있는 한 도전을 멈추지 않을 거라고 합니다.

도전은 그녀를 설레게 하는, 유일한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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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제포착] ‘눈물을 희망으로…’ 134cm ‘작은 거인’
    • 입력 2012-03-19 09:04:06
    • 수정2012-03-19 11: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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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흔히 다른 사람보다 몸집은 작아도 대단한 업적을 이뤄낸 사람을 작은 거인이라고 부르죠. 오늘 소개해드릴 주인공에게도 잘 어울리는 말이 아닐까 싶은데요. 척추장애로 키가 134cm에서 멈췄지만, 수많은 역경을 딛고 국제사회복지사로 활동중인 김해영씨 이야기입니다. 어릴 때부터 장애로 인해 앉아있는 것조차 힘들고, 남의집살이를 할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지만, 배우고 싶다는 의지 하나로 직업훈련원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다는데요. 이제는 아프리카를 비롯해 세계 곳곳을 누비며 수많은 이웃들을 돕는 희망전도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김기흥 기자, 작은 거인 김해영씨를 만나보셨다고요. <리포트> 네, 그렇습니다. 첫 아이가 딸이라 화가 난 아버지는 만취해 아이를 방바닥에 내던졌습니다. 척추를 다친 갓난아기의 키는 더디게 자랐습니다. 공부는 초등학교가 전부였습니다. 아버지의 자살, 정신질환을 앓는 어머니 대신 동생 넷을 키우기 위해 남의 집 식모살이를 시작했습니다. 겨우 열 네살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눈물을 희망으로 쏘아올린 그녀를 이야기가 지금부터 시작됩니다. 가난과 장애가 좌절이 아닌 희망의 출발점이었다고 말하는 김해영 씨. 배움에 목말랐던 어린 소녀는, 어느새 어른이 되어 모교를 찾았습니다. <인터뷰> 김해영 (국제사회복지사) : "여기는 제가 15세에 처음 편물기술을 배운 학교에요." 아홉 살 때부터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고, 열네 살 땐 식모 일까지 했다는 그녀는, 중졸, 고졸이라는 학력이 무척이나 갖고 싶었다고 하는데요. <인터뷰> 김해영 (국제사회복지사) : "한국에서 유일하게 다닌 직업학교, 교육시설이에요. 그 후에는 학교를 다니지 못했어요. 그래서 이 학교가 저한테는 삶의 전환점이 됐고, 밑거름이 되는 기술을 가르쳐줬죠." 살기 위해 공부했다는 해영씨는 직업훈련원에 들어가 편물기술을 배웠고, 국내외 기능대회에서 수상, 그 실력을 인정받았는데요. 2년 전엔 명문 컬럼비아 대학원까지 졸업한 해영씨. 세상은 그녀를 장애인이라는 틀 안에 가뒀지만, 그녀의 도전엔 틀이 없었습니다. <인터뷰> 김해영 (국제사회복지사) : "이 세상은 저를 장애인으로 분류했어요. 척추장애인 김해영. 그게 아니에요. 그냥 김해영이에요. 그냥 나라는 한 사람인 거예요. 이전에도 이후에도 (똑같은) 한 사람인데 너무 많은 타이틀을 걸어서 본다는 거죠. 지금은 컬럼비아에서 석사과정을 한 김해영. 그거 아니에요. 저는 초등학교 졸업했을 때나 지금이나 저라는 사람은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장애인이 아닌 한 사람의 여성으로 봐준 은사를 만나러 온 해영씨. 척추장애로 오래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들었던 그녀에게 선생님의 격려는 늘 힘이 됐다고 하는데요. <인터뷰> 김순희 (김해영씨 은사) : "어릴 때부터 (고통을) 초월한 것 같아요. 남의 집 살면서도 배우겠다는 욕망을 (늘 갖고 있었기 때문에) 얘는 그 시간 하나하나도 놓치지 않고 뭐든지 해야겠다는 생각만 머리에 잔뜩 들어 있었어요. 남이 다 자는 시간에도 일하고 있었어요." <인터뷰> 김해영 (국제사회복지사) : "선생님, 원장님 같은 어른들이 제 뒤에서 오늘날의 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받쳐 주셨기 때문에 가능했지 그냥 됐겠습니까." 주위의 믿음과 함께 성장한 그녀는 스물여섯 살이 되자, 아프리카의 극빈국인 보츠와나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합니다. <인터뷰> 김해영 (국제사회복지사) : "같이 공사도 하고 식당, 건물도 지으면서 공부와 일을 병행하며 같이 나아갔던 것 같아요." 황량한 사막 위에 세워진 직업학교에서 편물기술을 가르쳤는데요. 검은 피부의 제자들 덕분에 내내 행복했다고 합니다. <인터뷰> "한국에서는 가족도 친구들도 누가 나를 예쁘다고 했겠어요. 심지어는 귀엽다는 소리도 못 들어 봤었어요. 그런데 그 곳에서는 얘들이 ‘어머 너무 예뻐요’ 라며 난리가 아닌 거예요. 아침마다 나가면 머리 예쁘다고 얼마나 쓰다듬었는지 머리가 다 빠진 것 같아요." 14년 동안 가르친 제자들 중엔 가슴에 묻은 제자도 있다고 하는데요. <인터뷰> "우리 학교 왔을 때 17세였는데, 22세 때 결혼식을 앞두고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금방 일어나야 될 텐데 아프다는 소식 듣고 몇 주 지나고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22세에 아들 둘을 남겨두고 죽은 저의 제자 마하디가 가장 가슴 아픈 일이었어요." 아프리카 오지마을에서 준 것보다 오히려 받은 것이 많다는 해영씨. <인터뷰> "희망을 전해주러 간 것이 아니라 그 땅에서 제 인생에서 저의 희망을 찾아 나온 것을 알게 됐어요." 다음 날,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책의 출판기념회를 준비 중인 해영씨. 47년간의 도전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하는데요. 행사를 돕기 위해 동생 종균씨가 나섰습니다. 한때는 작은 키의 누나가 부끄러운 적도 있었다고 하는데요. <인터뷰> 김종균 (김해영씨 동생) : "(어렸을 때엔 누나를) 무시한 거죠. 누나라고 안 부르고 이름만 불렀었거든요. 그런데 철이 들면서 아니구나 싶더라고요. 지금은 떳떳하게 사람들한테 누나라고 해요." 인생의 전환점이 돼주었던 모교에서 열린 출판기념회. 행사장에서는 오랜만에 반가운 이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연락이 두절됐던 친척들과 20년 만에 마주할 수 있었는데요. <인터뷰> 김현균 (사촌오빠) : "(신문기사를 보고) 찾아보라고 했더니 우리 아이가 이메일을 그 기자에게 보냈는데 그 기자가 연락을 줬더라고요. 그래서 전화번호를 알았어요." 고통의 세월을 딛고 일어선 해영씨에게 마음의 지원자가 또 늘었습니다. 도전하며 살아온 그녀의 삶은 주변 사람들에게 늘 귀감이 되곤 했는데요. <인터뷰 > 최영숙 (김해영씨 은사) : :"신문에 표현되기 전에 제가 (해영이를) 작은 거인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어요. 예전에는 제가 해영이의 선생이었지만 지금은 해영이가 저의 선생님이라고 생각해요." <녹취> 출판기념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삶에 대한 고통을 책을 읽으며 치유했다는 해영씨는, 역시 책을 통해 희망을 전해주고 싶다고 합니다. 경제적 어려움도, 신체적 불편함도 넘어선 오늘이 있기까지, 원동력이 되어 준 건 바로 열정이었다고 말하는 그녀. (초등학교 졸업의) 식모살이를 하던 소녀에서 세계를 무대로 뛰는 국제사회복지사가 된 자신의 이야기가, 희망의 씨앗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요. <인터뷰> 김해영 (국제사회복지사) : " 큰 꿈도 오늘이 모여 된 것이고, 멀리 가는 길도 한 걸음부터 가는 거잖아요. 이렇게 많은 분들이 인정해 주고 용기 준 것을 발판 삼아 다시 한 번 뛰어 올라야겠죠." 134센티미터의 거인 김해영씨는 살아 있는 한 도전을 멈추지 않을 거라고 합니다. 도전은 그녀를 설레게 하는, 유일한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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