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한반도] 62년 만의 유해 봉환…‘유해 발굴 서둘러야’

입력 2012.06.02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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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6월 2일 토요일, 남북의 창 이현주입니다.

먼저 남북간 주요 이슈 현장을 찾아가는 [이슈 & 한반도 ]입니다.

북한 지역에서 처음으로 발굴된 국군 전사자 유해 12구가 62년만에 고국으로 봉환됐습니다.

정부는 최고의 예우로 이들을 맞이했습니다만, 아쉬움도 적지 않은데요.

무엇보다 북한 지역에 최대 4만 구의 국군 전사자 유해가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유해발굴사업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정소라 리포터가 전해드립니다.

<리포트>

62년 만에 찾은 고국 땅에 고향의 봄’이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지난달 25일, 북한 지역에서 발굴된 첫 국군 전사자 유해 봉영식이 거행됐습니다.

21발의 조포와 진혼곡은 12명의 용사를 엄숙히 맞이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도 유족과 함께 최고의 예우를 갖췄습니다.

6.25 당시 국군으로 입대해 미 7사단 15전차대대 소속 카투사로 배속됐던 고 김용수 일병과 고 이갑수 일병,

그리고 아직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10명의 무명용사들이 먼 길을 돌아 조국의 품에 안겼습니다.

12명의 국군 전사자들은 미국이 지난 2000년에서 2004년 사이 북한 지역에서 발굴해 보관 중이던 유해가 한국군으로 최종 확인되면서 가까스로 고국 땅을 밟게 됐습니다.

북한에서 50여 년, 미국에서 10여 년을 떠돈 셈입니다. 정부는 유해 봉환을 위해 하와이로 직접 수송기를 보냈고, 오동나무 관에 입관된 12구의 유해는 20여 분 간의 봉환식을 치르고 임시 봉안될 국립 서울 현충원으로 향했습니다.

1950년 8월, 17살의 앳된 학생이었던 고 김용수 일병은 형과 함께 입대했고, 34살의 고 이갑수 일병은 3살 터울의 남매와 아내를 뒤로 하고 입대했습니다.

그리고 넉 달 뒤인 1950년 12월, 김일병과 이일병은 6.25전쟁 최대 격전지로 꼽히는 함경남도 장진호 인근 전투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피난민 10만 명이 남쪽으로 철수한 흥남철수를 목전에 둔 시점이었습니다.

전사자 통지서를 받고 마음에 묻었던 아버지를 이렇게나마 다시 만난 자녀들은 모든 게 꿈만 같습니다.

<인터뷰> 이영찬(故 이갑수 일병 아들) : "유족들의 한을 갖다 풀어주고, 또 발굴단 여러분들의 헌신적 노력을 보니까 너무나 지금 감격스럽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는 이숙자 씨는 감격에 말을 잇지 못합니다.

<인터뷰> 이숙자(故 이갑수 일병 딸) : "이제 비가 오고 그러면은 나를 업고 학교 문 앞에까지 업고 가서 이제 정문 내려주
고 출근하는 그 모습이 인제 좀 이렇게 상상이 되고... 내가 지금 마음이 어떻게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너무나 벅차고 그래요. 뭉클하고, 정말 잘 오셨다."

김해승 씨 역시 작은 아버지의 귀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인터뷰> 김해승(故 김용수 일병 조카) : "기대를 안했죠. 재작년에 DNA 채취를 가지고 작년에 돌아가셨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는 신경을 별로 안 썼죠."

암투병 중에도 동생의 유해라도 찾겠다는 일념으로 DNA 검사에 나섰던 김해승 씨의 아버지는 끝내 동생의 귀환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하지만 유가족은 이제라도 유해를 모시고 제 날짜에 제사를 지내게 된 것만으로도 고마운 마음뿐입니다.

<인터뷰> 김해승(故 김용수 일병 조카) : "우리 형제들 있을 때 빨리 찾아서 우리는 진짜 정말 다행이지요. 지금도 묻혀가지고 가족을 못 찾으신 분들... 굉장히 가슴 아플 겁니다."

지금 제가 서 있는 이곳은 강원도 양구의 수리봉입니다.

6.25전쟁 당시, 피의 능선이라 불릴 만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인데요.

그런 만큼 이곳에선 전사자가 많이 발생했고, 아직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전사자들의 유해도 많습니다.

능선마다 푸르른 초목이 전쟁의 아픔을 모두 껴안은 듯, 중부전선은 고요하기만 합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8월, 이곳에선 보름간의 치열한 전투로 국군과 미군을 합쳐 1,000여 명이 넘게 희생됐습니다.

희생자가 많았던 곳인 만큼 유해발굴 작업이 한창입니다.

<인터뷰> 이용석(유해발굴감식단 조사과장) : "이 유해는 지난 60년 간 이렇게 남아서 우리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60여년 만에 참전국의 유학생들도 윗세대가 지킨 이국의 산하를 찾았습니다.

총탄 자국이 선명한 철모와 녹슨 기름통, 총알은 전쟁의 참상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인터뷰> 아만다, 시에나(홍익대/미국) : "전투 현장에 와서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한 분들의 유해를 보니 무척 영광스럽습니다. 정말 값진 경험입니다."

평화와 자유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이름 모를 용사가 아직도 조국과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인터뷰> 마아든(한국외대/에티오피아/6.25 참전용사 손자) : "수천 명에 이르는 전사자 유해를 발굴하는 일은 엄청난 비용과 노력이 들어가는 작업일텐데요. 참 감동적입니다."

<인터뷰> 이규원 소령(유해발굴감식단 공보장교) :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 바쳐서 나라를 구한 호국 용사들의 유해를 국가가 잘 거두지 못한다면 나중에 또 다른 위기가 처했을 때 젊은 용사들이 목숨을 바쳐 싸울 수 없기 때문에 유해 발굴 사업은 대단히 중요한 사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부는 6.25 전쟁 50주년이던 지난 2000년 4월, 처음으로 6.25 전사자 유해 발굴에 나섰습니다.

한시적으로 추진됐던 사업은 지난 2007년 유해발굴감식단이 정식 창설되면서 본격화됐습니다.

3년 동안의 전쟁 중 사망하거나 실종된 국군은 총 16만 2400여 명,

이 중 현충원에 안장된 전사자는 2만 9200여 명에 불과합니다.

정부는 지난 2000년 3월부터 올해 5월까지 전사자 유해 발굴 사업을 벌여 총 7430구를 추가로 수습했지만 나머지 12만 5천구는 소재 파악조차 되지 않고 있습니다.

또 수습된 유해 중 신원이 확인 돼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경우도 79구에 불과할 뿐, 나머지는 모두 ‘무명용사’로 남아 있습니다.

<녹취> (유엔군 사령관) : "유엔군은 더 큰 가치를 위해 스스로 위험한 길에 뛰어드는 것을 마다하지 않습니
다. 유엔군은 자유, 민주주의, 정의라는 공통된 가치를 지킬 뿐만 아니라 자유의 이상을 전 세계 시민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지난 2003년 JPAC, 미 합동전쟁포로 실종자 확인사령부를 창설했습니다.

이들은 과거 미국이 참여한 전쟁의 실종자와 미수습 전사자를 찾기 위해 전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6.25전쟁도 예외는 아닙니다. 지난 1993년, 미국은 북한과 5년간 30여 차례에 걸친 회담 끝에 ‘북한 지역 내 유해발굴협정’을 체결하고, 1996년부터는 북한에 직접 들어가 유해 발굴을 시작했습니다.

지난 2005년까지 총 226구의 유해를 발굴했고, 미국은 유해를 옮겨오는 대가로 북한에 우리 돈 약 330여 억 원을 지불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 47년 만에야 시작된 국군 전사자 유해 발굴, 정부는 증언과 기록에 의지해 격전지 부근을 중점적으로 유해 발굴에 나서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록은 정확하지 않고, 이를 증언해 줄 참전용사와 지역 주민들은 대부분 여든이 넘은 고령이라 유해발굴사업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또 발굴된 유해의 경우 신원을 확인하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시신의 유전자와 유족이 미리 제출한 유전자를 일일이 대조하는 방식으로 신원을 확인하고 있지만, 유해발굴감식단에 등록된 유전자 샘플은 만 8500여 명이 불과해어렵게 유해를 찾는다고 해도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지난 2007년, 남북은 6.25 전사자 유해 공동발굴에 합의했습니다.

전사자 유해를 수습하는 일은 이념을 떠나 인도주의적인 문제라는 데 뜻을 같이 한 것입니다.

하지만 남북관계 악화로 공동 유해발굴은 단 한차례도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습니다.

<인터뷰> 박신한(유해발굴감식단장) :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에 있는 전사자에 대해서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매년 자료를 수집하고 있고 매년 공동 발굴 할 수 있도록 예산을 편성하고 있습니다. "

현재 북한 지역과 비무장지대에는 국군 전사자 유해 3~4만여 구가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 지역의 유해발굴은 북한 당국의 허가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정부는 지난해까지 적군인 북한군과 중공군의 유해 951구도 발굴했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북한군 전사자의 유해 인도도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유해는 현재 파주시 적성면에 위치한 적군 묘지에 안장돼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일상이 된 자유와 평화는 60여 년 전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참전용사들의 희생 덕분입니다.

국군 전사자 유해 수습은 이념과 정치적 논리에서 벗어나 인도주의 관점에서 풀어야 할 문제인 만큼 남북이 대화의 창을 열어 6.25 전사자 유해 발굴 문제에 적극 나서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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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06-02 10:21:40
    남북의 창
<앵커 멘트>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6월 2일 토요일, 남북의 창 이현주입니다. 먼저 남북간 주요 이슈 현장을 찾아가는 [이슈 & 한반도 ]입니다. 북한 지역에서 처음으로 발굴된 국군 전사자 유해 12구가 62년만에 고국으로 봉환됐습니다. 정부는 최고의 예우로 이들을 맞이했습니다만, 아쉬움도 적지 않은데요. 무엇보다 북한 지역에 최대 4만 구의 국군 전사자 유해가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유해발굴사업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정소라 리포터가 전해드립니다. <리포트> 62년 만에 찾은 고국 땅에 고향의 봄’이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지난달 25일, 북한 지역에서 발굴된 첫 국군 전사자 유해 봉영식이 거행됐습니다. 21발의 조포와 진혼곡은 12명의 용사를 엄숙히 맞이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도 유족과 함께 최고의 예우를 갖췄습니다. 6.25 당시 국군으로 입대해 미 7사단 15전차대대 소속 카투사로 배속됐던 고 김용수 일병과 고 이갑수 일병, 그리고 아직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10명의 무명용사들이 먼 길을 돌아 조국의 품에 안겼습니다. 12명의 국군 전사자들은 미국이 지난 2000년에서 2004년 사이 북한 지역에서 발굴해 보관 중이던 유해가 한국군으로 최종 확인되면서 가까스로 고국 땅을 밟게 됐습니다. 북한에서 50여 년, 미국에서 10여 년을 떠돈 셈입니다. 정부는 유해 봉환을 위해 하와이로 직접 수송기를 보냈고, 오동나무 관에 입관된 12구의 유해는 20여 분 간의 봉환식을 치르고 임시 봉안될 국립 서울 현충원으로 향했습니다. 1950년 8월, 17살의 앳된 학생이었던 고 김용수 일병은 형과 함께 입대했고, 34살의 고 이갑수 일병은 3살 터울의 남매와 아내를 뒤로 하고 입대했습니다. 그리고 넉 달 뒤인 1950년 12월, 김일병과 이일병은 6.25전쟁 최대 격전지로 꼽히는 함경남도 장진호 인근 전투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피난민 10만 명이 남쪽으로 철수한 흥남철수를 목전에 둔 시점이었습니다. 전사자 통지서를 받고 마음에 묻었던 아버지를 이렇게나마 다시 만난 자녀들은 모든 게 꿈만 같습니다. <인터뷰> 이영찬(故 이갑수 일병 아들) : "유족들의 한을 갖다 풀어주고, 또 발굴단 여러분들의 헌신적 노력을 보니까 너무나 지금 감격스럽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는 이숙자 씨는 감격에 말을 잇지 못합니다. <인터뷰> 이숙자(故 이갑수 일병 딸) : "이제 비가 오고 그러면은 나를 업고 학교 문 앞에까지 업고 가서 이제 정문 내려주 고 출근하는 그 모습이 인제 좀 이렇게 상상이 되고... 내가 지금 마음이 어떻게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너무나 벅차고 그래요. 뭉클하고, 정말 잘 오셨다." 김해승 씨 역시 작은 아버지의 귀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인터뷰> 김해승(故 김용수 일병 조카) : "기대를 안했죠. 재작년에 DNA 채취를 가지고 작년에 돌아가셨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는 신경을 별로 안 썼죠." 암투병 중에도 동생의 유해라도 찾겠다는 일념으로 DNA 검사에 나섰던 김해승 씨의 아버지는 끝내 동생의 귀환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하지만 유가족은 이제라도 유해를 모시고 제 날짜에 제사를 지내게 된 것만으로도 고마운 마음뿐입니다. <인터뷰> 김해승(故 김용수 일병 조카) : "우리 형제들 있을 때 빨리 찾아서 우리는 진짜 정말 다행이지요. 지금도 묻혀가지고 가족을 못 찾으신 분들... 굉장히 가슴 아플 겁니다." 지금 제가 서 있는 이곳은 강원도 양구의 수리봉입니다. 6.25전쟁 당시, 피의 능선이라 불릴 만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인데요. 그런 만큼 이곳에선 전사자가 많이 발생했고, 아직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전사자들의 유해도 많습니다. 능선마다 푸르른 초목이 전쟁의 아픔을 모두 껴안은 듯, 중부전선은 고요하기만 합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8월, 이곳에선 보름간의 치열한 전투로 국군과 미군을 합쳐 1,000여 명이 넘게 희생됐습니다. 희생자가 많았던 곳인 만큼 유해발굴 작업이 한창입니다. <인터뷰> 이용석(유해발굴감식단 조사과장) : "이 유해는 지난 60년 간 이렇게 남아서 우리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60여년 만에 참전국의 유학생들도 윗세대가 지킨 이국의 산하를 찾았습니다. 총탄 자국이 선명한 철모와 녹슨 기름통, 총알은 전쟁의 참상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인터뷰> 아만다, 시에나(홍익대/미국) : "전투 현장에 와서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한 분들의 유해를 보니 무척 영광스럽습니다. 정말 값진 경험입니다." 평화와 자유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이름 모를 용사가 아직도 조국과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인터뷰> 마아든(한국외대/에티오피아/6.25 참전용사 손자) : "수천 명에 이르는 전사자 유해를 발굴하는 일은 엄청난 비용과 노력이 들어가는 작업일텐데요. 참 감동적입니다." <인터뷰> 이규원 소령(유해발굴감식단 공보장교) :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 바쳐서 나라를 구한 호국 용사들의 유해를 국가가 잘 거두지 못한다면 나중에 또 다른 위기가 처했을 때 젊은 용사들이 목숨을 바쳐 싸울 수 없기 때문에 유해 발굴 사업은 대단히 중요한 사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부는 6.25 전쟁 50주년이던 지난 2000년 4월, 처음으로 6.25 전사자 유해 발굴에 나섰습니다. 한시적으로 추진됐던 사업은 지난 2007년 유해발굴감식단이 정식 창설되면서 본격화됐습니다. 3년 동안의 전쟁 중 사망하거나 실종된 국군은 총 16만 2400여 명, 이 중 현충원에 안장된 전사자는 2만 9200여 명에 불과합니다. 정부는 지난 2000년 3월부터 올해 5월까지 전사자 유해 발굴 사업을 벌여 총 7430구를 추가로 수습했지만 나머지 12만 5천구는 소재 파악조차 되지 않고 있습니다. 또 수습된 유해 중 신원이 확인 돼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경우도 79구에 불과할 뿐, 나머지는 모두 ‘무명용사’로 남아 있습니다. <녹취> (유엔군 사령관) : "유엔군은 더 큰 가치를 위해 스스로 위험한 길에 뛰어드는 것을 마다하지 않습니 다. 유엔군은 자유, 민주주의, 정의라는 공통된 가치를 지킬 뿐만 아니라 자유의 이상을 전 세계 시민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지난 2003년 JPAC, 미 합동전쟁포로 실종자 확인사령부를 창설했습니다. 이들은 과거 미국이 참여한 전쟁의 실종자와 미수습 전사자를 찾기 위해 전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6.25전쟁도 예외는 아닙니다. 지난 1993년, 미국은 북한과 5년간 30여 차례에 걸친 회담 끝에 ‘북한 지역 내 유해발굴협정’을 체결하고, 1996년부터는 북한에 직접 들어가 유해 발굴을 시작했습니다. 지난 2005년까지 총 226구의 유해를 발굴했고, 미국은 유해를 옮겨오는 대가로 북한에 우리 돈 약 330여 억 원을 지불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 47년 만에야 시작된 국군 전사자 유해 발굴, 정부는 증언과 기록에 의지해 격전지 부근을 중점적으로 유해 발굴에 나서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록은 정확하지 않고, 이를 증언해 줄 참전용사와 지역 주민들은 대부분 여든이 넘은 고령이라 유해발굴사업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또 발굴된 유해의 경우 신원을 확인하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시신의 유전자와 유족이 미리 제출한 유전자를 일일이 대조하는 방식으로 신원을 확인하고 있지만, 유해발굴감식단에 등록된 유전자 샘플은 만 8500여 명이 불과해어렵게 유해를 찾는다고 해도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지난 2007년, 남북은 6.25 전사자 유해 공동발굴에 합의했습니다. 전사자 유해를 수습하는 일은 이념을 떠나 인도주의적인 문제라는 데 뜻을 같이 한 것입니다. 하지만 남북관계 악화로 공동 유해발굴은 단 한차례도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습니다. <인터뷰> 박신한(유해발굴감식단장) :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에 있는 전사자에 대해서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매년 자료를 수집하고 있고 매년 공동 발굴 할 수 있도록 예산을 편성하고 있습니다. " 현재 북한 지역과 비무장지대에는 국군 전사자 유해 3~4만여 구가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 지역의 유해발굴은 북한 당국의 허가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정부는 지난해까지 적군인 북한군과 중공군의 유해 951구도 발굴했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북한군 전사자의 유해 인도도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유해는 현재 파주시 적성면에 위치한 적군 묘지에 안장돼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일상이 된 자유와 평화는 60여 년 전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참전용사들의 희생 덕분입니다. 국군 전사자 유해 수습은 이념과 정치적 논리에서 벗어나 인도주의 관점에서 풀어야 할 문제인 만큼 남북이 대화의 창을 열어 6.25 전사자 유해 발굴 문제에 적극 나서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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