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근 “포수 이만수 덕에 원년 우승”

입력 2012.06.04 (16:30) 수정 2012.06.04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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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된 장비도 맘껏 뛸 수 있는 운동장도 없이 해가 질 때까지 돌멩이를 강에 던지는 것이 전부였지만 나는 야구를 하는 게 즐거웠다.”








1959년 재일동포학생야구단 선발

1960년 대학춘계연맹전 우수투수상 수상

1962년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




그라운드를 평정한 최고의 야구선수



1975년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 우승

1982년 한국시리즈 원년 우승을 시작으로 총 4회 우승




올해의 감독상 4회 수상에 빛나는 최고의 야구감독



최고의 선수에서 최고의 감독으로.



한국 야구계 황금기를 이끈 野神 김성근. 그의 50년 야구인생을 회고해본다.



◆ 재일동포학생야구단으로 한국 땅을 밟다 ◆






“재일동포학생야구단으로 우리나라에 안 왔으면 내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을 거예요.”



1942년 김성근은 일본 교토에서 재일동포 2세로 태어난다. 야구가 국민스포츠였던 일본에서 자란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야구를 좋아했다.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제대로 된 야구 방망이 조차 없었지만 그는 주먹야구를 하며 야구선수의 꿈을 키워나간다.



그리고 1957년 교토의 가쓰라 고등학교 입학한 김성근은 타고난 강한 어깨로 투수로서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2년 뒤 일본 고교야구대회 예선전에 등판한 그는 빠른 투구로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경기를 눈여겨 본 재일동포 야구협회 이사 최태황에 의해 재일동포학생야구단에 선발된다.



모국에서 자신의 능력을 펼치고 싶었던 김성근은 8월 한국으로 떠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밟는 조국의 땅에서 그는 자신의 역량을 맘껏 펼친다.



그리고 모국방문경기에서 한국고교 간판스타들을 제압하며 팀을 승리로 이끈 김성근은 한국 야구계의 주목을 받는다.



◆ 국가대표선수 김성근! 1960년대 한국 야구계를 평정하다 ◆









1959년 재일동포학생야구단 승리의 주역이었던 김성근은 이듬해 동아대학교에 전격 스카우트 된다.



그는 그 해 가을 대학춘계연맹전에서 우수투수상을 수상할 정도로 두각을 나타내며 한국 야구계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다.



하지만 한국말을 전혀 할 줄 몰랐던 그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한국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일본으로 돌아가게 된다.



일본 사회인야구단에 입단하여 야구와의 인연을 이어가던 김성근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



한국 교통부 실업 야구단의 입단 제의를 받은 것이다.



다시 한 번 모국에서 활약하고 싶었던 김성근은 1961년 한국으로 건너온다.



그리고 이듬해 1월 제4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로 선발된다.



위력적인 강속구로 타자들을 위협했던 그는 당시 김응룡, 백인천 등 스타플레이어들과 함께 한국을 준우승으로 이끈다.



대회를 마치고 금의환향한 그는 기업은행 실업 야구단의 창단멤버로 이적한다.



타자 몸쪽에 박히는 강한 투구와 완벽한 제구력에 타자들은 속수무책이었다.



1963년 11월 그는 모든 투수들에게 꿈의 기록인 노히트·노런을 달성하며 매 경기 완투승을 장식한다.



타자를 제압하는 김성근의 경기에 관중들은 열광했고 그는 선수로서 황금기를 맞이한다.



◆ 최고의 선수에서 감독으로의 변신! ◆






강속구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김성근에게 시련이 닥친다. 연이은 등판에 그의 어깨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한 것이다.



1968년 김성근은 짧은 선수생활을 마감한다. 그의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그리고 야구감독이라는 새로운 길을 찾는다.



1969년 마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시작으로 기업은행 실업 야구단 감독을 맡으며 김성근은 지도자의 길을 걷는다.



김성근은 일명 지옥훈련으로 선수들의 실력을 한 단계 끌어올린다. 그는 팀을 승리로 이끄는데 전력을 다한다.



1973년 지도력은 인정받은 그는 제11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대표팀 코치로 발탁된다. 2년 뒤 그는 한국의 우승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 지도자로서의 입지를 굳힌다.



이듬해 고교야구 감독이라는 의외의 선택을 한다. 그는 탄탄한 팀 운영능력과 지도력으로 충암고와 신일고를 차례로 전국대회 우승의 자리에 올려놓는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하자 그는 프로야구팀 OB베어스 코치로 전격 스카우트된다. 김성근은 경기에 대한 철저한 데이터 수집을 바탕으로 선수들을 훈련시켰고 파격적인 신인선수 발굴로 팀 전력을 보강했다. 그의 이런 노력으로 OB베어스는 그 해 한국시리즈 원년우승을 거머쥔다.



OB베어스 우승의 주역 김성근! 그는 4년 뒤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하며 한국 야구계의 중심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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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근 “포수 이만수 덕에 원년 우승”
    • 입력 2012-06-04 16:30:51
    • 수정2012-06-04 19:41:37
    스포츠인
“제대로 된 장비도 맘껏 뛸 수 있는 운동장도 없이 해가 질 때까지 돌멩이를 강에 던지는 것이 전부였지만 나는 야구를 하는 게 즐거웠다.”



1959년 재일동포학생야구단 선발
1960년 대학춘계연맹전 우수투수상 수상
1962년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


그라운드를 평정한 최고의 야구선수

1975년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 우승
1982년 한국시리즈 원년 우승을 시작으로 총 4회 우승


올해의 감독상 4회 수상에 빛나는 최고의 야구감독

최고의 선수에서 최고의 감독으로.

한국 야구계 황금기를 이끈 野神 김성근. 그의 50년 야구인생을 회고해본다.

◆ 재일동포학생야구단으로 한국 땅을 밟다 ◆


“재일동포학생야구단으로 우리나라에 안 왔으면 내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을 거예요.”

1942년 김성근은 일본 교토에서 재일동포 2세로 태어난다. 야구가 국민스포츠였던 일본에서 자란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야구를 좋아했다.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제대로 된 야구 방망이 조차 없었지만 그는 주먹야구를 하며 야구선수의 꿈을 키워나간다.

그리고 1957년 교토의 가쓰라 고등학교 입학한 김성근은 타고난 강한 어깨로 투수로서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2년 뒤 일본 고교야구대회 예선전에 등판한 그는 빠른 투구로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경기를 눈여겨 본 재일동포 야구협회 이사 최태황에 의해 재일동포학생야구단에 선발된다.

모국에서 자신의 능력을 펼치고 싶었던 김성근은 8월 한국으로 떠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밟는 조국의 땅에서 그는 자신의 역량을 맘껏 펼친다.

그리고 모국방문경기에서 한국고교 간판스타들을 제압하며 팀을 승리로 이끈 김성근은 한국 야구계의 주목을 받는다.

◆ 국가대표선수 김성근! 1960년대 한국 야구계를 평정하다 ◆




1959년 재일동포학생야구단 승리의 주역이었던 김성근은 이듬해 동아대학교에 전격 스카우트 된다.

그는 그 해 가을 대학춘계연맹전에서 우수투수상을 수상할 정도로 두각을 나타내며 한국 야구계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다.

하지만 한국말을 전혀 할 줄 몰랐던 그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한국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일본으로 돌아가게 된다.

일본 사회인야구단에 입단하여 야구와의 인연을 이어가던 김성근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

한국 교통부 실업 야구단의 입단 제의를 받은 것이다.

다시 한 번 모국에서 활약하고 싶었던 김성근은 1961년 한국으로 건너온다.

그리고 이듬해 1월 제4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로 선발된다.

위력적인 강속구로 타자들을 위협했던 그는 당시 김응룡, 백인천 등 스타플레이어들과 함께 한국을 준우승으로 이끈다.

대회를 마치고 금의환향한 그는 기업은행 실업 야구단의 창단멤버로 이적한다.

타자 몸쪽에 박히는 강한 투구와 완벽한 제구력에 타자들은 속수무책이었다.

1963년 11월 그는 모든 투수들에게 꿈의 기록인 노히트·노런을 달성하며 매 경기 완투승을 장식한다.

타자를 제압하는 김성근의 경기에 관중들은 열광했고 그는 선수로서 황금기를 맞이한다.

◆ 최고의 선수에서 감독으로의 변신! ◆


강속구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김성근에게 시련이 닥친다. 연이은 등판에 그의 어깨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한 것이다.

1968년 김성근은 짧은 선수생활을 마감한다. 그의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그리고 야구감독이라는 새로운 길을 찾는다.

1969년 마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시작으로 기업은행 실업 야구단 감독을 맡으며 김성근은 지도자의 길을 걷는다.

김성근은 일명 지옥훈련으로 선수들의 실력을 한 단계 끌어올린다. 그는 팀을 승리로 이끄는데 전력을 다한다.

1973년 지도력은 인정받은 그는 제11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대표팀 코치로 발탁된다. 2년 뒤 그는 한국의 우승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 지도자로서의 입지를 굳힌다.

이듬해 고교야구 감독이라는 의외의 선택을 한다. 그는 탄탄한 팀 운영능력과 지도력으로 충암고와 신일고를 차례로 전국대회 우승의 자리에 올려놓는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하자 그는 프로야구팀 OB베어스 코치로 전격 스카우트된다. 김성근은 경기에 대한 철저한 데이터 수집을 바탕으로 선수들을 훈련시켰고 파격적인 신인선수 발굴로 팀 전력을 보강했다. 그의 이런 노력으로 OB베어스는 그 해 한국시리즈 원년우승을 거머쥔다.

OB베어스 우승의 주역 김성근! 그는 4년 뒤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하며 한국 야구계의 중심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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