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처럼 스러진 예인 공옥진

입력 2012.07.09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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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히고 맺힌 한을 풀었습니다..이젠 죽어도 소원이 없습니다"

지난 2010년 6월 27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열린 '한국의 명인 명무전' 공연에서 고 공옥진 여사는 소원을 묻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밝혔다.

1998년 뇌졸중으로 한차례 쓰러진 뒤 투병생활을 하다 힘들고 어렵게 오른 무대였기에 감회는 더 새로웠다.

그로부터 2년 후 그는 더 이상 무대에 오르지 못하고 이날 79세를 끝으로 세상을 떠났다.

전통무용에 해학적인 동물 춤을 접목해 `1인 창무극'의 대가로 수십년간 서민들을 울리고 웃긴 예술가였지만 그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1931년 전남 영광에서 판소리 명창 공대일 선생의 4남매 중 둘째로 태어나 아버지에게 창을 배우고 10세를 전후해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무용가 최승희의 집에서 하녀로 일했다.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링컨센터에서 단독공연을 하기도 했고 일본, 영국 등지에서의 공연을 통해 가장 서민적인 한국예술을 선보인 것으로 평가받아 왔다.

이처럼 독특한 형식의 춤으로 세계에서 가장 한국적인 예술로 극찬을 받았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그의 진가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세계적으로도 예술성을 인정받은 병신춤을 1인 창무극으로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1998년 무형문화재로 지정해달라고 신청했지만, 고증자료 미비 등을 이유로 등록되지 않았고, 제자들도 하나 둘 떠나기 시작했다.

2010년 5월에야 심청가 부분만 전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됐지만, 그의 몸은 이미 쇠약해져 있었다.

세간의 무관심은 생활고로 이어졌다.

1998년 뇌졸중으로 한차례 쓰러졌고, 2004년 공연을 마치고 나오다 두 번째로 쓰러져 왼쪽 몸이 마비됐다.

2007년 국민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돼 매달 43만원의 생활비를 받아 근근이 생활해 왔지만, 춤을 향한 열정만은 식지 않았다.

기나긴 투병생활에도 공 여사는 2010년 마지막 무대에서 흰 한복을 곱게 입고, 15분간 살풀이춤을 공연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공 여사의 마지막을 지켜본 제자 한현선씨는 11일 "함박꽃처럼 예쁘게 가셨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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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꽃처럼 스러진 예인 공옥진
    • 입력 2012-07-09 17:36:22
    연합뉴스
"맺히고 맺힌 한을 풀었습니다..이젠 죽어도 소원이 없습니다" 지난 2010년 6월 27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열린 '한국의 명인 명무전' 공연에서 고 공옥진 여사는 소원을 묻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밝혔다. 1998년 뇌졸중으로 한차례 쓰러진 뒤 투병생활을 하다 힘들고 어렵게 오른 무대였기에 감회는 더 새로웠다. 그로부터 2년 후 그는 더 이상 무대에 오르지 못하고 이날 79세를 끝으로 세상을 떠났다. 전통무용에 해학적인 동물 춤을 접목해 `1인 창무극'의 대가로 수십년간 서민들을 울리고 웃긴 예술가였지만 그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1931년 전남 영광에서 판소리 명창 공대일 선생의 4남매 중 둘째로 태어나 아버지에게 창을 배우고 10세를 전후해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무용가 최승희의 집에서 하녀로 일했다.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링컨센터에서 단독공연을 하기도 했고 일본, 영국 등지에서의 공연을 통해 가장 서민적인 한국예술을 선보인 것으로 평가받아 왔다. 이처럼 독특한 형식의 춤으로 세계에서 가장 한국적인 예술로 극찬을 받았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그의 진가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세계적으로도 예술성을 인정받은 병신춤을 1인 창무극으로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1998년 무형문화재로 지정해달라고 신청했지만, 고증자료 미비 등을 이유로 등록되지 않았고, 제자들도 하나 둘 떠나기 시작했다. 2010년 5월에야 심청가 부분만 전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됐지만, 그의 몸은 이미 쇠약해져 있었다. 세간의 무관심은 생활고로 이어졌다. 1998년 뇌졸중으로 한차례 쓰러졌고, 2004년 공연을 마치고 나오다 두 번째로 쓰러져 왼쪽 몸이 마비됐다. 2007년 국민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돼 매달 43만원의 생활비를 받아 근근이 생활해 왔지만, 춤을 향한 열정만은 식지 않았다. 기나긴 투병생활에도 공 여사는 2010년 마지막 무대에서 흰 한복을 곱게 입고, 15분간 살풀이춤을 공연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공 여사의 마지막을 지켜본 제자 한현선씨는 11일 "함박꽃처럼 예쁘게 가셨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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