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폭 아들, 美 육상 대표로 만든 ‘모정’

입력 2012.07.18 (10:04) 수정 2012.07.18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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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 런던 올림픽에 나서는 미국 육상 대표 라이언 베일리(23)는 지난 몇년을 되돌아 볼 때마다 자신이 국가대표가 됐다는 것이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베일리는 "그대로 조직폭력배 생활을 계속했을 경우 감옥에 있거나 죽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가끔 놀란다"라고 말했다.



AP통신은 18일 일반적인 선수들과는 확연히 다른 길을 걸은 베일리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미국 오리건 주에서 유년기를 보내는 동안 베일리는 어머니와 차 안에서 살았다.



섬유근육통을 앓던 어머니는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었고, 아버지는 가족을 떠난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다. 결국 베일리는 학교를 그만두고 조직폭력배의 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아들이 조직폭력배였을 때도 어머니는 아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당시 차 안에서 발견한 올림픽 기념 주화를 가장 아꼈다. 베일리는 그 주화가 단순한 ‘짝퉁’ 기념품일 뿐이라 생각했지만 어머니에게는 세상 전부와도 같은 것이었다.



베일리는 "어머니는 올림픽 주화를 보면서 ‘언젠간 너도 올림픽에 나갈 거야’라고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늘 그렇게 믿으셨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전에 베일리는 조직폭력배 생활을 청산해야 했고, 엄청난 고통을 참아내야만 했다.



피칠갑을 할 만큼 조직원들에게 심하게 두드려 맞기도 했고, 칼로 등과 어깨를 세 차례나 찔리기도 했다.



그렇게 어두운 과거를 청산한 베일리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 운동이라는 한줄기 ‘빛’을 보게 됐다.



195㎝, 80㎏의 건장한 체구인 베일리는 먼저 축구를 택했다.



축구 선수로서 여러 개 포지션을 소화했다. 날이 갈수록 실력도 좋아져 축구 장학금을 받을 수도 있었던 그에게 육상은 눈에 ‘식은 죽 먹기’였다.



학교 육상부의 기록을 보며 자신이 그 기록을 얼마나 쉽게 경신할 수 있을지를 자신만만하게 말하고 다녔다.



그 말을 전해들은 당시 육상부 코치 존 파크스는 베일리가 트랙을 돌 때 몰래 시간을 쟀다.



현재 베일리의 매니저를 맡고 있는 파크스는 "그때 베일리는 마치 얼음 위를 미끄러지는 듯 굉장히 부드러웠다"고 회고했다.



결국 파크스는 베일리를 축구팀에서 빼내 10종 경기 선수로 발탁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우사인 볼트(자메이카·195㎝)가 등장하지 않았을 때라 키 큰 선수가 보기 드물었기 때문이다.



발가락이 부러지는 등 순탄치만은 않았던 고등학교 육상부 시절을 보낸 베일리는 대학에 진학한 뒤 2009년 대학선수권대회 100m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마침내 전도유망한 육상선수로 거듭났다.



베일리는 "나는 아직까지도 ‘네가 육상선수가 될 거라곤 꿈에도 몰랐다’는 말을 듣는다"며 "하지만 난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내가 해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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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폭 아들, 美 육상 대표로 만든 ‘모정’
    • 입력 2012-07-18 10:04:26
    • 수정2012-07-18 10:26:24
    연합뉴스
 2012 런던 올림픽에 나서는 미국 육상 대표 라이언 베일리(23)는 지난 몇년을 되돌아 볼 때마다 자신이 국가대표가 됐다는 것이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베일리는 "그대로 조직폭력배 생활을 계속했을 경우 감옥에 있거나 죽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가끔 놀란다"라고 말했다.

AP통신은 18일 일반적인 선수들과는 확연히 다른 길을 걸은 베일리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미국 오리건 주에서 유년기를 보내는 동안 베일리는 어머니와 차 안에서 살았다.

섬유근육통을 앓던 어머니는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었고, 아버지는 가족을 떠난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다. 결국 베일리는 학교를 그만두고 조직폭력배의 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아들이 조직폭력배였을 때도 어머니는 아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당시 차 안에서 발견한 올림픽 기념 주화를 가장 아꼈다. 베일리는 그 주화가 단순한 ‘짝퉁’ 기념품일 뿐이라 생각했지만 어머니에게는 세상 전부와도 같은 것이었다.

베일리는 "어머니는 올림픽 주화를 보면서 ‘언젠간 너도 올림픽에 나갈 거야’라고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늘 그렇게 믿으셨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전에 베일리는 조직폭력배 생활을 청산해야 했고, 엄청난 고통을 참아내야만 했다.

피칠갑을 할 만큼 조직원들에게 심하게 두드려 맞기도 했고, 칼로 등과 어깨를 세 차례나 찔리기도 했다.

그렇게 어두운 과거를 청산한 베일리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 운동이라는 한줄기 ‘빛’을 보게 됐다.

195㎝, 80㎏의 건장한 체구인 베일리는 먼저 축구를 택했다.

축구 선수로서 여러 개 포지션을 소화했다. 날이 갈수록 실력도 좋아져 축구 장학금을 받을 수도 있었던 그에게 육상은 눈에 ‘식은 죽 먹기’였다.

학교 육상부의 기록을 보며 자신이 그 기록을 얼마나 쉽게 경신할 수 있을지를 자신만만하게 말하고 다녔다.

그 말을 전해들은 당시 육상부 코치 존 파크스는 베일리가 트랙을 돌 때 몰래 시간을 쟀다.

현재 베일리의 매니저를 맡고 있는 파크스는 "그때 베일리는 마치 얼음 위를 미끄러지는 듯 굉장히 부드러웠다"고 회고했다.

결국 파크스는 베일리를 축구팀에서 빼내 10종 경기 선수로 발탁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우사인 볼트(자메이카·195㎝)가 등장하지 않았을 때라 키 큰 선수가 보기 드물었기 때문이다.

발가락이 부러지는 등 순탄치만은 않았던 고등학교 육상부 시절을 보낸 베일리는 대학에 진학한 뒤 2009년 대학선수권대회 100m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마침내 전도유망한 육상선수로 거듭났다.

베일리는 "나는 아직까지도 ‘네가 육상선수가 될 거라곤 꿈에도 몰랐다’는 말을 듣는다"며 "하지만 난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내가 해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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