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에서 환희로’ 한국 펜싱 새역사

입력 2012.08.05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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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현희(31·성남시청)는 장비를 챙기며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 신아람(26·계룡시청)은 피스트에 1시간 넘게 앉아 하염없이 울먹였다.

이렇게 2012 런던올림픽의 한국 펜싱은 그치지 않는 눈물로 시작했다.

그러나 눈물이 마른 자리에는 환희와 영광이 만발했다.

◇신아람의 '멈춘 1초'…기대주들의 부진 = 펜싱은 대회 초반 메달 레이스에 힘을 보탤 것으로 기대받았으나 생각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최고 스타로 기대를 모았던 남현희(31·성남시청)는 중반까지 경기를 잘 풀어가고도 후반 들어 상대의 공세에 어이없이 무너져 준결승과 3~4위전에서 연달아 뼈아픈 역전패를 당했다.

상위 랭커들이 대거 포진한 남자 사브르 대표팀 선수들도 나란히 16강 문턱을 넘지 못하고 무너졌다.

대회 사흘째에는 신아람이 역대 최악의 오심 스캔들에 당했다.

여자 에페 개인전 준결승 연장전에서 신아람은 종료 1초를 남겨놓고 무려 세 번의 공격을 막아내는 동안 경기 종료가 선언되지 않아 네 번째 공격을 허용하고 패배했다.

마지막 공격만 놓고 봐도 분명히 1초가 넘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경기장 시계는 그대로 멈춰 있는 비상식적인 일이 벌어진 것이다.

'역대 올림픽 5대 오심'으로 꼽힐 정도로 황당한 사건이었으나 국제펜싱연맹(FIE)은 끝내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시간 넘게 피스트에 앉아 울먹이던 신아람은 진이 빠져 3~4위전에서도 패배하고 다시 눈물을 흘렸다.

사건의 후속 처리 과정도 매끄럽지 않아 신아람을 비롯한 펜싱 대표팀은 다시 한번 마음에 상처를 입어야 했다.

대한체육회는 FIE의 '특별상' 제의를 받아들였으나 정작 선수의 의견은 반영하지 않아 비판을 받았고 중재의 당사자가 돼야 할 대한펜싱협회는 체육회의 뒤에 숨어 손을 놓은 채 수수방관했다.

또 비밀리에 추진했던 공동 은메달도 중간에 새어나간 탓에 제대로 밀어붙여 보지도 못한 채 IOC에게 거절당한 채 비웃음만 사고 말았다.

◇역대 최고 성적 넘어 '新 효자 종목' 등극 = 그러나 어른들이 연방 '헛발질'을 하는 동안 선수들은 새로운 각오로 굳게 뭉쳐 대반격에 나섰다.

선수촌에 모여 '우리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실력으로 보여주자'고 결의를 다진 선수들은 신아람 사건이 터진 이튿날부터 놀라운 메달 레이스에 시동을 걸었다.

'맏형' 최병철(31·화성시청)은 공격적인 펜싱을 앞세워 남자 플뢰레 개인전 동메달을 목에 걸고 분위기를 일신했다.

다음날에는 남자 에페 정진선(28·화성시청)이 개인전 동메달을 따내더니 여자 사브르 개인전에 나선 김지연(24·익산시청)이 '깜짝 금메달' 소식을 전했다.

한국 여자 선수 사상 첫 금메달이자 사브르 종목 사상 첫 메달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2000년 시드니 대회의 성적(금 1개, 동 1개)을 훌쩍 넘어선 선수단은 거칠 것이 없었다.

여자 플뢰레 대표팀이 단체전 3위를 차지하더니 남자 사브르 대표팀은 단체전 정상을 석권하며 두 번째 금메달 소식을 알렸다.

마지막 날 '1초 오심'의 희생자인 신아람을 필두로 한 여자 에페 대표팀이 단체전 은메달까지 따내면서 닷새 동안 이어진 숨가쁜 메달 레이스가 끝났다.

금메달 2개와 은메달 1개, 동메달 3개를 따낸 한국은 4일까지 이탈리아(금 2개, 은 2개, 동 2개)에 이어 종합 순위 2위에 올라 있다.

총 메달 개수로는 이탈리아와 공동 1위다.

한국이 출전하지 않는 남자 플뢰레 단체전이 남아 있어 최종 결과는 지켜봐야 하지만, 출전국 중 최상위권의 성적은 지킬 전망이다.

특히 한국은 출전한 9개 종목 중에서 남자 사브르 개인전을 제외한 8개 종목에 4강 진출자를 배출해 세계 펜싱계의 '새로운 강자'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또 이날까지 한국이 따낸 17개의 메달 중 6개를 책임지면서 '새로운 효자 종목'으로 떠올랐다.

◇투자로 빚은 '한국형 펜싱'…2016년 올림픽 전망도 '반짝' = 이런 선전의 배경에는 부쩍 늘어난 투자가 있다는 것이 선수와 지도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2003년 대한펜싱협회장으로 조정남 회장이 취임하면서 SK 텔레콤의 지원을 받으며 경쟁력을 향상시켰고, 2009년 손길승 회장이 취임하면서 연간 지원 규모가 12억원으로 뛰어올랐다.

지원이 늘면서 해외 전지훈련과 국제대회 경험을 쌓은 선수들은 서서히 종주국인 유럽 강호들에 대한 두려움을 떨칠 수 있었다.

여기에 지도자들의 열정이 더해지면서 유럽과는 다른 '한국형 펜싱'이 뿌리를 내렸다.

2009년 대표팀 총감독 자리에 앉은 김용율 감독을 비롯한 지도자들은 체격이 좋은 유럽 선수들과의 대결에서 경쟁력을 갖추려면 빠른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화두를 내세워 선수들을 조련했다.

이번 대회에서 보이듯이 움직임이 많지 않고 팔놀림으로 승부를 하는 유럽 선수들에 비해 한국 선수들은 끊임없이 앞뒤로 움직이며 상대의 리듬을 흔들고 역습으로 차곡차곡 포인트를 쌓는다.

이런 능력을 키우려면 남들보다 두 배 이상 움직이면서도 속도를 잃지 않을 강인한 체력이 필수다.

선수와 코치들은 휴일을 반납한 채 선수촌에서 지독한 훈련을 거듭해 이런 체력을 만들어냈다.

이번에 메달을 딴 선수들은 하나같이 "지난 1년 동안 외출이나 외박을 거의 하지 못했다"고 혹독한 훈련의 모습을 공개했다.

선수들이 런던올림픽을 거치면서 자리를 잡은 덕에 한국 펜싱의 '전성시대'는 앞으로도 한동안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김지연과 구본길(23·국민체육진흥공단), 신아람 등 스타덤에 오른 선수들은 대부분 20대 초·중반의 나이로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도 절정의 기량을 유지할 수 있어 전망을 밝힌다.

지도자들은 올림픽을 마친 뒤에는 유럽 선수들에 밀리지 않을 만한 힘과 손기술을 다듬어 4년 뒤에도 정상을 지키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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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물에서 환희로’ 한국 펜싱 새역사
    • 입력 2012-08-05 10:32:18
    연합뉴스
남현희(31·성남시청)는 장비를 챙기며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 신아람(26·계룡시청)은 피스트에 1시간 넘게 앉아 하염없이 울먹였다. 이렇게 2012 런던올림픽의 한국 펜싱은 그치지 않는 눈물로 시작했다. 그러나 눈물이 마른 자리에는 환희와 영광이 만발했다. ◇신아람의 '멈춘 1초'…기대주들의 부진 = 펜싱은 대회 초반 메달 레이스에 힘을 보탤 것으로 기대받았으나 생각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최고 스타로 기대를 모았던 남현희(31·성남시청)는 중반까지 경기를 잘 풀어가고도 후반 들어 상대의 공세에 어이없이 무너져 준결승과 3~4위전에서 연달아 뼈아픈 역전패를 당했다. 상위 랭커들이 대거 포진한 남자 사브르 대표팀 선수들도 나란히 16강 문턱을 넘지 못하고 무너졌다. 대회 사흘째에는 신아람이 역대 최악의 오심 스캔들에 당했다. 여자 에페 개인전 준결승 연장전에서 신아람은 종료 1초를 남겨놓고 무려 세 번의 공격을 막아내는 동안 경기 종료가 선언되지 않아 네 번째 공격을 허용하고 패배했다. 마지막 공격만 놓고 봐도 분명히 1초가 넘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경기장 시계는 그대로 멈춰 있는 비상식적인 일이 벌어진 것이다. '역대 올림픽 5대 오심'으로 꼽힐 정도로 황당한 사건이었으나 국제펜싱연맹(FIE)은 끝내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시간 넘게 피스트에 앉아 울먹이던 신아람은 진이 빠져 3~4위전에서도 패배하고 다시 눈물을 흘렸다. 사건의 후속 처리 과정도 매끄럽지 않아 신아람을 비롯한 펜싱 대표팀은 다시 한번 마음에 상처를 입어야 했다. 대한체육회는 FIE의 '특별상' 제의를 받아들였으나 정작 선수의 의견은 반영하지 않아 비판을 받았고 중재의 당사자가 돼야 할 대한펜싱협회는 체육회의 뒤에 숨어 손을 놓은 채 수수방관했다. 또 비밀리에 추진했던 공동 은메달도 중간에 새어나간 탓에 제대로 밀어붙여 보지도 못한 채 IOC에게 거절당한 채 비웃음만 사고 말았다. ◇역대 최고 성적 넘어 '新 효자 종목' 등극 = 그러나 어른들이 연방 '헛발질'을 하는 동안 선수들은 새로운 각오로 굳게 뭉쳐 대반격에 나섰다. 선수촌에 모여 '우리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실력으로 보여주자'고 결의를 다진 선수들은 신아람 사건이 터진 이튿날부터 놀라운 메달 레이스에 시동을 걸었다. '맏형' 최병철(31·화성시청)은 공격적인 펜싱을 앞세워 남자 플뢰레 개인전 동메달을 목에 걸고 분위기를 일신했다. 다음날에는 남자 에페 정진선(28·화성시청)이 개인전 동메달을 따내더니 여자 사브르 개인전에 나선 김지연(24·익산시청)이 '깜짝 금메달' 소식을 전했다. 한국 여자 선수 사상 첫 금메달이자 사브르 종목 사상 첫 메달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2000년 시드니 대회의 성적(금 1개, 동 1개)을 훌쩍 넘어선 선수단은 거칠 것이 없었다. 여자 플뢰레 대표팀이 단체전 3위를 차지하더니 남자 사브르 대표팀은 단체전 정상을 석권하며 두 번째 금메달 소식을 알렸다. 마지막 날 '1초 오심'의 희생자인 신아람을 필두로 한 여자 에페 대표팀이 단체전 은메달까지 따내면서 닷새 동안 이어진 숨가쁜 메달 레이스가 끝났다. 금메달 2개와 은메달 1개, 동메달 3개를 따낸 한국은 4일까지 이탈리아(금 2개, 은 2개, 동 2개)에 이어 종합 순위 2위에 올라 있다. 총 메달 개수로는 이탈리아와 공동 1위다. 한국이 출전하지 않는 남자 플뢰레 단체전이 남아 있어 최종 결과는 지켜봐야 하지만, 출전국 중 최상위권의 성적은 지킬 전망이다. 특히 한국은 출전한 9개 종목 중에서 남자 사브르 개인전을 제외한 8개 종목에 4강 진출자를 배출해 세계 펜싱계의 '새로운 강자'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또 이날까지 한국이 따낸 17개의 메달 중 6개를 책임지면서 '새로운 효자 종목'으로 떠올랐다. ◇투자로 빚은 '한국형 펜싱'…2016년 올림픽 전망도 '반짝' = 이런 선전의 배경에는 부쩍 늘어난 투자가 있다는 것이 선수와 지도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2003년 대한펜싱협회장으로 조정남 회장이 취임하면서 SK 텔레콤의 지원을 받으며 경쟁력을 향상시켰고, 2009년 손길승 회장이 취임하면서 연간 지원 규모가 12억원으로 뛰어올랐다. 지원이 늘면서 해외 전지훈련과 국제대회 경험을 쌓은 선수들은 서서히 종주국인 유럽 강호들에 대한 두려움을 떨칠 수 있었다. 여기에 지도자들의 열정이 더해지면서 유럽과는 다른 '한국형 펜싱'이 뿌리를 내렸다. 2009년 대표팀 총감독 자리에 앉은 김용율 감독을 비롯한 지도자들은 체격이 좋은 유럽 선수들과의 대결에서 경쟁력을 갖추려면 빠른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화두를 내세워 선수들을 조련했다. 이번 대회에서 보이듯이 움직임이 많지 않고 팔놀림으로 승부를 하는 유럽 선수들에 비해 한국 선수들은 끊임없이 앞뒤로 움직이며 상대의 리듬을 흔들고 역습으로 차곡차곡 포인트를 쌓는다. 이런 능력을 키우려면 남들보다 두 배 이상 움직이면서도 속도를 잃지 않을 강인한 체력이 필수다. 선수와 코치들은 휴일을 반납한 채 선수촌에서 지독한 훈련을 거듭해 이런 체력을 만들어냈다. 이번에 메달을 딴 선수들은 하나같이 "지난 1년 동안 외출이나 외박을 거의 하지 못했다"고 혹독한 훈련의 모습을 공개했다. 선수들이 런던올림픽을 거치면서 자리를 잡은 덕에 한국 펜싱의 '전성시대'는 앞으로도 한동안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김지연과 구본길(23·국민체육진흥공단), 신아람 등 스타덤에 오른 선수들은 대부분 20대 초·중반의 나이로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도 절정의 기량을 유지할 수 있어 전망을 밝힌다. 지도자들은 올림픽을 마친 뒤에는 유럽 선수들에 밀리지 않을 만한 힘과 손기술을 다듬어 4년 뒤에도 정상을 지키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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