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영화] 꿀과 상처 ‘허니’

입력 2013.09.16 (08:39) 수정 2013.09.16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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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를 대표하는 감독 중 한 명인 세미 카플라노글루는 시인의 인생을 담은 3부작을 만들었다.

제작 시기는 주인공 일생의 역순이다.

마치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산딸기'(1957)처럼 카플라노글루 감독은 주인공 유수프의 과거를 하나씩 더듬어간다.

'에그'(2007)는 장년기를, '밀크'(2008)는 청년기를, 그리고 오는 26일 개봉하는 '허니'(2012)는 유년기를 그렸다.

초등학생 유수프(보라 알타스)는 책을 읽을 때마다 말을 더듬는다. 무던히 노력하지만 잘 고쳐지지 않는다.

가끔 배울 부분을 예상해 미리 외워가기도 하지만 다른 페이지를 읽으라는 선생님의 지시에 낙담만 커간다.

친구들과도 잘 뒤섞이지 못하는 유수프의 유일한 친구는 아버지 야쿱(에르달 베식시오글루).

아들은 아버지 앞에서 책을 읽고, 아버지는 아들의 작은 가슴에 용기를 심어준다.

벌이 점점 사라지던 어느 날, 양봉업자 아버지는 밀원지를 찾아 이웃마을로 향한 후 돌아오지 않는다.

엄마 제흐라(튤린 오젠)와 유수프는 야쿱을 찾아 이웃 마을로 향한다.

유년은 대부분 달콤한 기억이다.

하지만, 모든 이에게 그런 건 아니다.

주인공 유수프에게 유년은 꿀의 달콤함과 말더듬증의 상처가 공생하는 곳이다.

아버지는 소년의 안식처로, 학교는 쓰라림의 장소다.

영화는 유수프와 아버지의 관계에 치중한다.

묘사는 세밀하지 않다. 느릿느릿 소년을 관통하는 세월과 전원생활이라는 큰 그림 속에서 마치 원경처럼 아버지의 모습은 그려진다.

분명히 단출한 이야기다. 전개도 밋밋하고 느리다.

눈치 빠른 관객이라면 숲으로 들어와서 나무를 타는 야쿱의 모습을 보고 이야기의 얼개를 예측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두커니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창문을 통해 지켜보는 유수프의 뒷모습과 두 손 가득 물을 담아와 발작증세로 쓰러진 아버지의 몸에 가만히 뿌리는 아들의 정성스러움, 그리고 푸른밤 나무에 기댄 채 새근새근 잠든 유수프의 모습은 오랫동안 마음에 남을 만하다.

영화의 단순한 이야기 밑에는 깊은 정서가 흐른다.

수면은 잔잔하지만, 그 아래는 소용돌이치듯 격렬하다.

그 격렬함은 말더듬이에서 시인이 될 아이의 꿈과 상처가 소용돌이의 결을 따라 뒤섞여 있다.

그리고 그러한 유년의 희망과 절망, 기쁨과 서글픔은 그의 마음속에서 비벼져 먼 훗날 조탁된 시어로 탄생할 거다.

'에그'에서 시인이 된 유수프의 손끝에서 말이다.

'허니'는 시인이 된 한 소년의 꿈과 상실을 그린 작품이다.

"꿀과 상처로 가득 찬"(로르카) 한 소년의 기억이다. 그 시절 그 소년의 힘차지만 쓸쓸한 박동.

지난 2010년 제60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금곰상을 받았다.

9월26일 개봉. 전체관람가. 상영시간 1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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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영화] 꿀과 상처 ‘허니’
    • 입력 2013-09-16 08:39:15
    • 수정2013-09-16 08:45:11
    연합뉴스
터키를 대표하는 감독 중 한 명인 세미 카플라노글루는 시인의 인생을 담은 3부작을 만들었다.

제작 시기는 주인공 일생의 역순이다.

마치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산딸기'(1957)처럼 카플라노글루 감독은 주인공 유수프의 과거를 하나씩 더듬어간다.

'에그'(2007)는 장년기를, '밀크'(2008)는 청년기를, 그리고 오는 26일 개봉하는 '허니'(2012)는 유년기를 그렸다.

초등학생 유수프(보라 알타스)는 책을 읽을 때마다 말을 더듬는다. 무던히 노력하지만 잘 고쳐지지 않는다.

가끔 배울 부분을 예상해 미리 외워가기도 하지만 다른 페이지를 읽으라는 선생님의 지시에 낙담만 커간다.

친구들과도 잘 뒤섞이지 못하는 유수프의 유일한 친구는 아버지 야쿱(에르달 베식시오글루).

아들은 아버지 앞에서 책을 읽고, 아버지는 아들의 작은 가슴에 용기를 심어준다.

벌이 점점 사라지던 어느 날, 양봉업자 아버지는 밀원지를 찾아 이웃마을로 향한 후 돌아오지 않는다.

엄마 제흐라(튤린 오젠)와 유수프는 야쿱을 찾아 이웃 마을로 향한다.

유년은 대부분 달콤한 기억이다.

하지만, 모든 이에게 그런 건 아니다.

주인공 유수프에게 유년은 꿀의 달콤함과 말더듬증의 상처가 공생하는 곳이다.

아버지는 소년의 안식처로, 학교는 쓰라림의 장소다.

영화는 유수프와 아버지의 관계에 치중한다.

묘사는 세밀하지 않다. 느릿느릿 소년을 관통하는 세월과 전원생활이라는 큰 그림 속에서 마치 원경처럼 아버지의 모습은 그려진다.

분명히 단출한 이야기다. 전개도 밋밋하고 느리다.

눈치 빠른 관객이라면 숲으로 들어와서 나무를 타는 야쿱의 모습을 보고 이야기의 얼개를 예측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두커니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창문을 통해 지켜보는 유수프의 뒷모습과 두 손 가득 물을 담아와 발작증세로 쓰러진 아버지의 몸에 가만히 뿌리는 아들의 정성스러움, 그리고 푸른밤 나무에 기댄 채 새근새근 잠든 유수프의 모습은 오랫동안 마음에 남을 만하다.

영화의 단순한 이야기 밑에는 깊은 정서가 흐른다.

수면은 잔잔하지만, 그 아래는 소용돌이치듯 격렬하다.

그 격렬함은 말더듬이에서 시인이 될 아이의 꿈과 상처가 소용돌이의 결을 따라 뒤섞여 있다.

그리고 그러한 유년의 희망과 절망, 기쁨과 서글픔은 그의 마음속에서 비벼져 먼 훗날 조탁된 시어로 탄생할 거다.

'에그'에서 시인이 된 유수프의 손끝에서 말이다.

'허니'는 시인이 된 한 소년의 꿈과 상실을 그린 작품이다.

"꿀과 상처로 가득 찬"(로르카) 한 소년의 기억이다. 그 시절 그 소년의 힘차지만 쓸쓸한 박동.

지난 2010년 제60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금곰상을 받았다.

9월26일 개봉. 전체관람가. 상영시간 1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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