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성폭행하면 군대 안 간다고?

입력 2013.11.15 (09:26) 수정 2013.11.28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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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남성 A 씨. 교도소에서 6개월을 산 성폭행 전과자입니다. 내년이면 군대에 갑니다. A 씨는 어떤 군 생활을 상상할까요.
지난 월요일이었다면 24개월 공익 근무요원(보충역)으로 복무하는 자신을 떠올렸을 겁니다. 지하철이나 병원에서 '공익' 모자를 쓰고 있는 모습이겠죠.
그런데 화요일에는 갑자기 '면제자' 신분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지금은? 군대를 가는 건지, 안 가도 되는 건지. A 씨 자신도, 심지어 병무청조차도 모릅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지난 화요일, 병무청이 '병무 비전 1318 로드맵'이란 아주 두꺼운 자료집을 내놨습니다. 박근혜 정부 5년 동안 추진할 '100개의 과제'(왜 꼭 100개를 채워야 하는 지 모르겠지만...)가 잔뜩 들어 있었습니다.

내용 중에는 내년부터 강도와 폭행 등 강력범과 성폭력 특별법 위반자들에 대해 4년 동안 보충역 소집을 유예하겠다는 방안이 들어 있었습니다. 소입 유예가 4년을 넘겨 5년째가 되면 '소집 면제', 즉 '군 복무 면제'가 됩니다.

규정을 볼까요?
강도나 강간, 폭행 등으로 1년6개월 이상의 징역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은 제2국민역에 편입돼 병역을 면제받습니다. 하지만 6월 이상, 1년6개월 미만의 징역형이나, 또는 1년 이상 징역형을 선고받은 뒤 집행유예 상태라면 공익(보충역)으로 근무합니다. A 씨가 여기에 해당하죠.



그런데 병무청 방침대로라면 A 씨는 내년에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됩니다. 이런 내용이 알려지자 여론이 들끓었습니다. KBS 뉴스에만 3000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습니다. 대부분 "강력범에게 왜 군 복무를 면제해 주느냐"는 반응이었습니다. 일부는 "군에 안 가려고 범죄를 더 저지르면 어떻하느냐"는 걱정도 했습니다. 뉴스를 접한 필부필부 대부분은 '군 복무 면제'를 곧 '혜택'으로 받아들였고, 강력범이 그런 혜택을 받을 '자격'이 되느냐고 되물은 겁니다.

병무청은 억울하다는 입장입니다. 지난 5월에 대구에서 한 여대생이 살해됐습니다. 범인은 공익 근무요원 24살 조 모 씨. 그런데 조 씨는 과거 미성년자 성추행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앞에서 설명해 드린 규정에 따라 2011년에 수형 생활을 마친 뒤 지하철역 공익 근무요원으로 근무해 온 겁니다.

전에도 비슷한 일이 꽤 많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병무청은 동네북이 됐습니다. "공익 요원을 왜 제대로 관리 못 하느냐", "왜 병원이나 지하철처럼 여자와 노약자가 많은 곳에 막무가내 배치하느냐"는 비난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사회 복지시설로부터는 "복무 태도가 전혀 안 돼 있는 그런 사람을 왜 보내주느냐"는 원성도 쏟아졌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병무청이 짜낸 묘수는 이랬습니다.

"면제 범위를 넓여서 아예 강력범들을 병역자원에서 제외키시자!"

책임지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 바로 책임질 일 자체를 없앤 것입니다.



강력범을 군에 보내느냐, 그러지 말아야 하느냐, 뭐가 옳은 지는 사실 알기 어렵습니다. 병역 이행을 '군에서 썩는 것'으로, 병역 면제자를 '신(神)의 아들'로 보는 국민 정서는 여전하고, 또 '예외없는 병역'이라는 병무 행정의 대원칙도 지켜져야 합니다.

반면에 '공익'의 모자를 신뢰하는 일반 시민들이 강력범죄 전력자로부터 어떤 잠재적 피해에 노출될 지에 대해서도 고민이 필요한 게 사실입니다.

다만, 하루 아침에 손바닥을 뒤집은 병무청의 '변심'에는 입맛이 참 씁니다. 강력범 군 면제 방침을 내놓을 때 "국민의 여론을 수렴해서...", 이를 철회할 때도 "국민의 반대 여론을 고려해서"라는 설명을 달았기 때문입니다. 병무청이 말하는 '국민'이 병무청장인지, 언론인지, 인터넷 댓글인지 불명확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병무 비전 1318 로드맵' 표지에는 "희망의 새 시대, 병역이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한 과제"라고 적혀 있습니다. '강력범 군 면제' 방안이 백지화된 날, 로드맵 가운데 중요 사항 몇가지(연예인.체육인 등 사회지도층에 대한 병역 사항 집중 관리 등)도 하루 아침에 '없던 일', 또는 '추진이 불투명한 일'이 됐습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병역 문제에는 모두의 깊은 내면을 건드리는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병무청의 지혜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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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성폭행하면 군대 안 간다고?
    • 입력 2013-11-15 09:26:30
    • 수정2013-11-28 16:17:29
    취재후·사건후
20대 남성 A 씨. 교도소에서 6개월을 산 성폭행 전과자입니다. 내년이면 군대에 갑니다. A 씨는 어떤 군 생활을 상상할까요.
지난 월요일이었다면 24개월 공익 근무요원(보충역)으로 복무하는 자신을 떠올렸을 겁니다. 지하철이나 병원에서 '공익' 모자를 쓰고 있는 모습이겠죠.
그런데 화요일에는 갑자기 '면제자' 신분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지금은? 군대를 가는 건지, 안 가도 되는 건지. A 씨 자신도, 심지어 병무청조차도 모릅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지난 화요일, 병무청이 '병무 비전 1318 로드맵'이란 아주 두꺼운 자료집을 내놨습니다. 박근혜 정부 5년 동안 추진할 '100개의 과제'(왜 꼭 100개를 채워야 하는 지 모르겠지만...)가 잔뜩 들어 있었습니다.

내용 중에는 내년부터 강도와 폭행 등 강력범과 성폭력 특별법 위반자들에 대해 4년 동안 보충역 소집을 유예하겠다는 방안이 들어 있었습니다. 소입 유예가 4년을 넘겨 5년째가 되면 '소집 면제', 즉 '군 복무 면제'가 됩니다.

규정을 볼까요?
강도나 강간, 폭행 등으로 1년6개월 이상의 징역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은 제2국민역에 편입돼 병역을 면제받습니다. 하지만 6월 이상, 1년6개월 미만의 징역형이나, 또는 1년 이상 징역형을 선고받은 뒤 집행유예 상태라면 공익(보충역)으로 근무합니다. A 씨가 여기에 해당하죠.



그런데 병무청 방침대로라면 A 씨는 내년에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됩니다. 이런 내용이 알려지자 여론이 들끓었습니다. KBS 뉴스에만 3000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습니다. 대부분 "강력범에게 왜 군 복무를 면제해 주느냐"는 반응이었습니다. 일부는 "군에 안 가려고 범죄를 더 저지르면 어떻하느냐"는 걱정도 했습니다. 뉴스를 접한 필부필부 대부분은 '군 복무 면제'를 곧 '혜택'으로 받아들였고, 강력범이 그런 혜택을 받을 '자격'이 되느냐고 되물은 겁니다.

병무청은 억울하다는 입장입니다. 지난 5월에 대구에서 한 여대생이 살해됐습니다. 범인은 공익 근무요원 24살 조 모 씨. 그런데 조 씨는 과거 미성년자 성추행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앞에서 설명해 드린 규정에 따라 2011년에 수형 생활을 마친 뒤 지하철역 공익 근무요원으로 근무해 온 겁니다.

전에도 비슷한 일이 꽤 많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병무청은 동네북이 됐습니다. "공익 요원을 왜 제대로 관리 못 하느냐", "왜 병원이나 지하철처럼 여자와 노약자가 많은 곳에 막무가내 배치하느냐"는 비난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사회 복지시설로부터는 "복무 태도가 전혀 안 돼 있는 그런 사람을 왜 보내주느냐"는 원성도 쏟아졌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병무청이 짜낸 묘수는 이랬습니다.

"면제 범위를 넓여서 아예 강력범들을 병역자원에서 제외키시자!"

책임지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 바로 책임질 일 자체를 없앤 것입니다.



강력범을 군에 보내느냐, 그러지 말아야 하느냐, 뭐가 옳은 지는 사실 알기 어렵습니다. 병역 이행을 '군에서 썩는 것'으로, 병역 면제자를 '신(神)의 아들'로 보는 국민 정서는 여전하고, 또 '예외없는 병역'이라는 병무 행정의 대원칙도 지켜져야 합니다.

반면에 '공익'의 모자를 신뢰하는 일반 시민들이 강력범죄 전력자로부터 어떤 잠재적 피해에 노출될 지에 대해서도 고민이 필요한 게 사실입니다.

다만, 하루 아침에 손바닥을 뒤집은 병무청의 '변심'에는 입맛이 참 씁니다. 강력범 군 면제 방침을 내놓을 때 "국민의 여론을 수렴해서...", 이를 철회할 때도 "국민의 반대 여론을 고려해서"라는 설명을 달았기 때문입니다. 병무청이 말하는 '국민'이 병무청장인지, 언론인지, 인터넷 댓글인지 불명확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병무 비전 1318 로드맵' 표지에는 "희망의 새 시대, 병역이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한 과제"라고 적혀 있습니다. '강력범 군 면제' 방안이 백지화된 날, 로드맵 가운데 중요 사항 몇가지(연예인.체육인 등 사회지도층에 대한 병역 사항 집중 관리 등)도 하루 아침에 '없던 일', 또는 '추진이 불투명한 일'이 됐습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병역 문제에는 모두의 깊은 내면을 건드리는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병무청의 지혜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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