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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델라 고난으로 점철된 개인사
입력 2013.12.06 (09:49) 수정 2013.12.06 (09:50) 연합뉴스
"1969년 5월12일 새벽, 보안경찰이 (요하네스버그 인근) 올란도 집에서 위니를 연행했다. 경찰은 (어린) 제니와 진지가 치맛자락을 붙잡고 매달리는 위니를 질질 끌고 갔다…위니마저 철창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만큼 감옥에서 괴로운 일은 없었다. 비록 겉으로는 담대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매우 불안하고 걱정이 됐다…며칠 동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죽음은 과연 내가 옳은 길을 택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하게 했다. 민족의 행복을 내 가족의 행복보다 앞세우는 게 올바른 선택인가? 내 가족은 내게 (민주화) 투쟁에 참여하도록 요청하거나 바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의 투쟁 참여는 가족에게 고통을 안겼다."

만델라의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LONG WALK to FREEDOM)에 기술된 그의 고백이다. 케이프타운 앞바다 로벤섬 교도소에 갇혀 있던 그는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장례식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만델라는 남아공 민주화 투쟁의 상징으로서, 첫 흑인 대통령으로서, 그리고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서 국내외에서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국가와 민족에 대한 헌신은 자신과 가족에게 커다란 아픔과 희생을 안겼다.

만델라는 1962년 8월에 경찰에 체포돼 구금된 뒤 27년여가 지난 1990년 2월 석방됐다. 1918년 7월생인 만델라는 43세라는 중년의 나이에 교도소에 투옥돼 노년인 71세에 다시 세상으로 돌아왔다.

이 바람에 그는 오랫동안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을 만날 수 없었고 자녀의 성장과 교육에 아버지로서의 책임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그가 출옥해 나중에 남아공의 첫 흑인 대통령으로 올랐지만, 공인으로서의 바쁜 생활 탓에 가족에게 오붓한 시간을 제대로 할애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자녀 등 가족들은 때로 서운한 감정을 표출하기도 했다.

만델라는 1944년 첫째 부인 에블린(사망)과 결혼해 두 아들과 두 딸을 낳았다. 그는 이후 1958년 에블린과 이혼하고 위니 마디키젤라와 결혼해 두 딸(제나니, 진지)을 낳았다.

그는 그러나 1996년 위니 마디키젤라와 이혼했다. 위니 마디키젤라는 만델라의 아내이면서도 민주화 투쟁에 참여해 만델라가 이끈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여성동맹(ANCYW) 위원장을 맡는 등 투사 출신 정치인이기도 했다. 그녀는 그러나 과거 경찰 스파이로 의심되는 흑인 청년 살해를 자신의 경호대원에게 지시했다는 의혹을 받는 등 논란의 대상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만델라는 1998년 7월 18일 80회 생일에 모잠비크 전 대통령 부인 그라사 마셸과 세 번째 결혼을 했다. 마셸은 당시 53세였다.

'넬슨 만델라 메모리센터'에 따르면 만델라는 에블린과 위니 마디키젤라와 결혼 생활에서 모두 6명의 자녀를 낳았으며 17명의 손자 손녀와 14명의 증손자를 뒀다.

이들 자녀 중 두 아들은 교통사고와 에이즈(후천성면역결핍증)로 숨졌고 큰 딸인 마카지웨도 어려서 사망해 지금은 품라 마카지웨(59)와 제나니(54) 진지(53)가 생존해있다.

장손격인 만들라 만델라(39)는 국회의원이면서 만델라가 태어난 이스턴케이프주(州) 음베조 마을의 추장(전통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한편 (품라) 마카지웨-제나니는 장손 만들라와 만델라 사후 묘역 장소를 놓고 법정 다툼을 벌여 국민이 눈살을 찌푸렸다.

마카지웨 등은 지난 6월 음베조에 있는 만델라 세 자녀의 유해를 쿠누로 이장하기 위한 소송을 내 승소했다. 마카지웨 등은 만델라가 생전에 자신이 죽으면 세 자녀 유해와 함께 쿠누에 묻히길 원한다는 이유에서 법정 다툼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만델라는 음베조에서 태어났지만 어머니를 따라 어린 시절 쿠누로 옮겨 살았으며 쿠누를 고향으로 여기고 있다. 만들라는 그러나 쿠누에서 약 30km 떨어진 음베조의 추장을 맡고 있다. 만들라는 지난 2011년 가족과 사전 상의 없이 자신의 아버지를 비롯한 만델라 세 자녀의 유해를 쿠누에서 음베조로 이장했다. 만들라는 소송에서 패배한 후 기자회견을 열어 마카지웨 등을 격렬하게 성토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데스먼드 투투 주교 등이 나서 제발 만델라의 명예를 훼손하지 말라고 충고하는 일이 벌어졌다.

만델라는 지난 6월 폐 감염증이 재발해 3개월 동안 입원하는 등 최근 수년 동안 병원을 찾는 일이 잦아져 고령에 따른 노쇠함을 역력히 드러냈다.

만델라는 27년의 투옥 기간에 로벤섬에서 18년 동안 복역하면서 약 13년을 채석장에서 일해 이후 폐결핵을 앓는 등 호흡기성 질환으로 고생했다.
  • 만델라 고난으로 점철된 개인사
    • 입력 2013-12-06 09:49:52
    • 수정2013-12-06 09:50:12
    연합뉴스
"1969년 5월12일 새벽, 보안경찰이 (요하네스버그 인근) 올란도 집에서 위니를 연행했다. 경찰은 (어린) 제니와 진지가 치맛자락을 붙잡고 매달리는 위니를 질질 끌고 갔다…위니마저 철창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만큼 감옥에서 괴로운 일은 없었다. 비록 겉으로는 담대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매우 불안하고 걱정이 됐다…며칠 동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죽음은 과연 내가 옳은 길을 택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하게 했다. 민족의 행복을 내 가족의 행복보다 앞세우는 게 올바른 선택인가? 내 가족은 내게 (민주화) 투쟁에 참여하도록 요청하거나 바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의 투쟁 참여는 가족에게 고통을 안겼다."

만델라의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LONG WALK to FREEDOM)에 기술된 그의 고백이다. 케이프타운 앞바다 로벤섬 교도소에 갇혀 있던 그는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장례식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만델라는 남아공 민주화 투쟁의 상징으로서, 첫 흑인 대통령으로서, 그리고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서 국내외에서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국가와 민족에 대한 헌신은 자신과 가족에게 커다란 아픔과 희생을 안겼다.

만델라는 1962년 8월에 경찰에 체포돼 구금된 뒤 27년여가 지난 1990년 2월 석방됐다. 1918년 7월생인 만델라는 43세라는 중년의 나이에 교도소에 투옥돼 노년인 71세에 다시 세상으로 돌아왔다.

이 바람에 그는 오랫동안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을 만날 수 없었고 자녀의 성장과 교육에 아버지로서의 책임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그가 출옥해 나중에 남아공의 첫 흑인 대통령으로 올랐지만, 공인으로서의 바쁜 생활 탓에 가족에게 오붓한 시간을 제대로 할애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자녀 등 가족들은 때로 서운한 감정을 표출하기도 했다.

만델라는 1944년 첫째 부인 에블린(사망)과 결혼해 두 아들과 두 딸을 낳았다. 그는 이후 1958년 에블린과 이혼하고 위니 마디키젤라와 결혼해 두 딸(제나니, 진지)을 낳았다.

그는 그러나 1996년 위니 마디키젤라와 이혼했다. 위니 마디키젤라는 만델라의 아내이면서도 민주화 투쟁에 참여해 만델라가 이끈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여성동맹(ANCYW) 위원장을 맡는 등 투사 출신 정치인이기도 했다. 그녀는 그러나 과거 경찰 스파이로 의심되는 흑인 청년 살해를 자신의 경호대원에게 지시했다는 의혹을 받는 등 논란의 대상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만델라는 1998년 7월 18일 80회 생일에 모잠비크 전 대통령 부인 그라사 마셸과 세 번째 결혼을 했다. 마셸은 당시 53세였다.

'넬슨 만델라 메모리센터'에 따르면 만델라는 에블린과 위니 마디키젤라와 결혼 생활에서 모두 6명의 자녀를 낳았으며 17명의 손자 손녀와 14명의 증손자를 뒀다.

이들 자녀 중 두 아들은 교통사고와 에이즈(후천성면역결핍증)로 숨졌고 큰 딸인 마카지웨도 어려서 사망해 지금은 품라 마카지웨(59)와 제나니(54) 진지(53)가 생존해있다.

장손격인 만들라 만델라(39)는 국회의원이면서 만델라가 태어난 이스턴케이프주(州) 음베조 마을의 추장(전통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한편 (품라) 마카지웨-제나니는 장손 만들라와 만델라 사후 묘역 장소를 놓고 법정 다툼을 벌여 국민이 눈살을 찌푸렸다.

마카지웨 등은 지난 6월 음베조에 있는 만델라 세 자녀의 유해를 쿠누로 이장하기 위한 소송을 내 승소했다. 마카지웨 등은 만델라가 생전에 자신이 죽으면 세 자녀 유해와 함께 쿠누에 묻히길 원한다는 이유에서 법정 다툼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만델라는 음베조에서 태어났지만 어머니를 따라 어린 시절 쿠누로 옮겨 살았으며 쿠누를 고향으로 여기고 있다. 만들라는 그러나 쿠누에서 약 30km 떨어진 음베조의 추장을 맡고 있다. 만들라는 지난 2011년 가족과 사전 상의 없이 자신의 아버지를 비롯한 만델라 세 자녀의 유해를 쿠누에서 음베조로 이장했다. 만들라는 소송에서 패배한 후 기자회견을 열어 마카지웨 등을 격렬하게 성토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데스먼드 투투 주교 등이 나서 제발 만델라의 명예를 훼손하지 말라고 충고하는 일이 벌어졌다.

만델라는 지난 6월 폐 감염증이 재발해 3개월 동안 입원하는 등 최근 수년 동안 병원을 찾는 일이 잦아져 고령에 따른 노쇠함을 역력히 드러냈다.

만델라는 27년의 투옥 기간에 로벤섬에서 18년 동안 복역하면서 약 13년을 채석장에서 일해 이후 폐결핵을 앓는 등 호흡기성 질환으로 고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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