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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보니아 재판’의 역설…투쟁의 구심으로 서다
입력 2013.12.06 (11:20) 수정 2013.12.06 (11:20) 연합뉴스
넬슨 만델라가 과거 백인정권 치하에서 민주화 투쟁의 중심인물로 국내외에서 부상한 것은 역설적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리보니아 재판을 통해서였다.

만델라는 지난 1964년 6월 11일 수도 프리토리아 법원에서 월터 시술루 등 당시 민주화 투쟁을 이끌던 '아프리카민족회의'(ANC. 현 남아공 집권당) 지도급 인사 7명과 함께 내란 등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이튿날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이 재판은 1963년 7월 요하네스버그 리보니아 지역의 한 농장 은신처에서 월터 시술루 등 ANC 지도부가 백인 정권 경찰에 대거 검거된 데 이어 같은 해 10월부터 진행돼 '리보니아 재판'이라고 불렸다.

당시 만델라는 이미 프리토리아의 한 법원에 수감돼 복역 중이었다. ANC 지도부로 이미 수배 대상이었던 그는 1962년 8월 경찰에 체포돼 잠입·탈출 등 혐의로 5년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그는 리보니아에서 체포된 동료 인사들과 함께 내란 혐의로 별도로 재판을 받아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은 것이다.

리보니아 재판은 그러나 나중에 남아공을 변화시킨 재판으로 불린다.

만델라 등 피고인들은 재판 과정을 통해 오히려 백인 소수 정권이 인권을 유린한 범죄인이며 자신들은 아프리카인의 정당한 생존을 위한 정의로운 싸움을 하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특히 만델라가 1964년 4월 20일 법정에서 약 4시간 동안 한 진술은 결코 잊힐 수 없는 역사적인 기록으로 남아있다.

"ANC 투쟁은 아프리카인들의 투쟁이다. 이 투쟁은 아프리카인이 직접 겪은 고통과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생존권을 위한 투쟁이다……나는 백인이 지배하는 사회에 맞서 싸웠고 또한 흑인이 지배하는 사회에도 반대해 싸웠다. 나는 모든 사람이 함께 조화를 이루고 동등한 기회를 누리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사회에 대한 이상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 사회야말로 내가 살아가는 목적이고 이루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그런 이상을 위해 나는 죽을 준비가 돼 있다."

만델라의 진술은 당시 언론을 통해 해외에서도 널리 알려졌고 이후 만델라 석방을 위한 움직임도 더욱 폭넓게 진행됐다.

또한 그는 남아공 민주화 투쟁의 구심점으로 널리 인식되기 시작했다.

한편 만델라는 종신형을 선고받아 케이프타운 앞바다에 있는 로벤섬 교도소에 수감돼 그곳에서 18년 동안 복역했다. 이후 1982년 3월 케이프타운의 폴스무어 교도소로 이감됐으며 1988년 빅터 퍼스터 교도소로 다시 옮겨졌다가 1990년 2월 석방됐다. 27년간의 죄수생활을 마치고 출감했을 당시 그의 나이는 71세였다.
  • ‘리보니아 재판’의 역설…투쟁의 구심으로 서다
    • 입력 2013-12-06 11:20:27
    • 수정2013-12-06 11:20:43
    연합뉴스
넬슨 만델라가 과거 백인정권 치하에서 민주화 투쟁의 중심인물로 국내외에서 부상한 것은 역설적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리보니아 재판을 통해서였다.

만델라는 지난 1964년 6월 11일 수도 프리토리아 법원에서 월터 시술루 등 당시 민주화 투쟁을 이끌던 '아프리카민족회의'(ANC. 현 남아공 집권당) 지도급 인사 7명과 함께 내란 등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이튿날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이 재판은 1963년 7월 요하네스버그 리보니아 지역의 한 농장 은신처에서 월터 시술루 등 ANC 지도부가 백인 정권 경찰에 대거 검거된 데 이어 같은 해 10월부터 진행돼 '리보니아 재판'이라고 불렸다.

당시 만델라는 이미 프리토리아의 한 법원에 수감돼 복역 중이었다. ANC 지도부로 이미 수배 대상이었던 그는 1962년 8월 경찰에 체포돼 잠입·탈출 등 혐의로 5년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그는 리보니아에서 체포된 동료 인사들과 함께 내란 혐의로 별도로 재판을 받아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은 것이다.

리보니아 재판은 그러나 나중에 남아공을 변화시킨 재판으로 불린다.

만델라 등 피고인들은 재판 과정을 통해 오히려 백인 소수 정권이 인권을 유린한 범죄인이며 자신들은 아프리카인의 정당한 생존을 위한 정의로운 싸움을 하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특히 만델라가 1964년 4월 20일 법정에서 약 4시간 동안 한 진술은 결코 잊힐 수 없는 역사적인 기록으로 남아있다.

"ANC 투쟁은 아프리카인들의 투쟁이다. 이 투쟁은 아프리카인이 직접 겪은 고통과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생존권을 위한 투쟁이다……나는 백인이 지배하는 사회에 맞서 싸웠고 또한 흑인이 지배하는 사회에도 반대해 싸웠다. 나는 모든 사람이 함께 조화를 이루고 동등한 기회를 누리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사회에 대한 이상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 사회야말로 내가 살아가는 목적이고 이루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그런 이상을 위해 나는 죽을 준비가 돼 있다."

만델라의 진술은 당시 언론을 통해 해외에서도 널리 알려졌고 이후 만델라 석방을 위한 움직임도 더욱 폭넓게 진행됐다.

또한 그는 남아공 민주화 투쟁의 구심점으로 널리 인식되기 시작했다.

한편 만델라는 종신형을 선고받아 케이프타운 앞바다에 있는 로벤섬 교도소에 수감돼 그곳에서 18년 동안 복역했다. 이후 1982년 3월 케이프타운의 폴스무어 교도소로 이감됐으며 1988년 빅터 퍼스터 교도소로 다시 옮겨졌다가 1990년 2월 석방됐다. 27년간의 죄수생활을 마치고 출감했을 당시 그의 나이는 7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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