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연 “잠잘 때도 대본 쥐고 있었죠”

입력 2013.12.09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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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었어요. 제 연기 인생에서 처음입니다. 잠잘 때조차 대본을 쥐고 있었죠."

방은진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집으로 가는 길'에서 주인공 정연 역으로 분한 전도연은 9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의 한 카페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도연의 영화 복귀는 '카운트다운'(2011) 이후 2년 만이다.

오는 11일 개봉하는 '집으로 가는 길'은 프랑스 오를리 공항에서 마약 운반범으로 체포돼 대서양의 어느 외딴 섬에 있는 마르티니크 교도소에 갇혔던 한 한국인 주부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드라마다.

"이야기가 재밌고, 흥미로워서 선택했어요. 읽으면서 화가 났죠.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분개했어요.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는 그냥 하나의 사건으로 생각했는데, 나중에는 가족 이야기라는 생각이 강했어요. 너무 집으로 가고 싶어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요."

영화는 자국민 보호라는 대사관의 중요임무를 방기했다는 지적을 받은 주불 대사관의 치부를 작심한 듯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영화를 보는 내내 국민 세금으로 일하는 고위 공직자들의 무사안일과 보신에 격분하게 된다.

전도연이 출연을 결심한 이유에는 이런 공분이 컸다.

"영화 '도가니'를 보면서 화가 난 건, 그 영화를 보는 순간에도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어요. 그 점이 너무 끔찍했습니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보면서도 그런 분노를 느꼈어요."

촬영은 쉽지 않았다. 도미니카, 파리 등 해외 촬영 일정이 길었다. 한 달간에 이르는 강행군이었다. 재촬영을 할 수 없는 데 따른 부담감도 컸다.

게다가 현장에선 영어와 프랑스어 등 5개 국어가 뒤죽박죽 사용됐다.

언어의 '도가니' 속에서 그는 "멀미를 느낄 정도"로 혼돈 상태에 휩싸였다.

"프랑스어, 불어…정말, 처음에는 이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다행히 연기할 때 언어적인 부분은 장애가 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로케이션에 따른 촬영 시간은 제한됐는데 찍을 분량이 많아 부담스러웠어요. 감정 신을 하나라도 놓칠까 노심초사했어요. 잠잘 때조차 대본을 쥐고 있었어요. 이렇게 너덜너덜해진 대본이 여태껏 없었어요. 긴장 많이 했습니다."

처음으로 너덜너덜해 질 정도로 대본을 봤다던 그는 영화에서 '명연'을 선보인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아줌마, 두려움과 긴장감에 떠는, 하지만 이 일만 끝내면 목돈을 만질 수 있다는 기대감에 찬 눈빛, 망망대해에 가로막혀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절망감 서린 표정, 머리가 빠질 정도로 기력이 쇠한 연약한 몸….

전도연은 영화 연기에서 보여줄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보여주며 극의 중심을 탄탄하게 잡고 간다.

특히 법정 장면은 압권이다.

2년간 수감 생활을 하면서 처음으로 발언권을 얻은 30대 주부는 오열 대신 치솟는 감정을 꾹꾹 누르며 읊조리듯 말한다.

"모든 장면이 감정적으로 어려웠지만, 마지막 법정 장면이 가장 힘들었어요. 2년이란 고통스러운 시간을 통해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여린 여자가 아니라 단단해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떨었어요. 떨림이 지나쳐 서 있기조차 힘들었죠. 게다가 전부 외국인이잖아요. 그분들이 주는 눈길이 부담스러웠어요."

정연은 처음부터 끝까지 감정을 크게 발산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의 하이라이트에서만큼은 감정을 마음껏 발산하는 게 더 영화적이지 않았을까?

"어떤 일을 겪으면 상처와 고통을 통해 저 자신이 다져지는 측면이 있어요. 설움을 당하고 고통을 겪으면 '나는 정말 불쌍한 여자야?'라고만 생각할까요? (2년간의 옥고를 통해) 철없는 아줌마에서 좀 더 단단해져 있지 않을까요? 작은 사건들이 하나하나 쌓여서 사람은 성숙해지지 않을까요?"

정연에 대한 이 같은 해석에는 온갖 곡절을 겪은 전도연의 삶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예전에는 아등바등했던 문제들도 살다 보니 별것 아니다"라는 깨달음이다. 그리고 시행착오를 통해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배우는 "과정"이라는 신념도 강하게 작용했다.

"나이가 들면서 편안해지는 것 같아요. 그전에는 어떤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되면, 아등바등했는데, 살다 보니 그 정도 문제는 중요하지 않은 거예요. 지금이 좋아요."

'접속'(1997)으로 영화계에 등장한 전도연은 14편의 영화를 찍으며 우리나라 여배우로는 처음으로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도 받았고, 국내 최고 여배우라는 상찬도 누렸다. 그러나 추종에 가까운 칭찬도 어느 순간 독이 됐다.

"큰 상을 받으면 더 좋은 작품으로 작업할 기회가 많을 거로 생각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어요. 전도연이 이런 거 하겠어? 그렇게 생각하셨던 분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속상했죠. 저는 상을 받은 게 제 연기 인생에서 하나의 과정이라고 봤는데 다른 분들은 제 연기 인생의 절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런 부분이 힘들었어요."

전도연은 박흥식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협녀'(2014년 예정)에 출연한다. 고려 말 당대 최고의 여고수 설랑 역을 맡아 '내 마음의 풍금'(1999) 이후 14년 만에 이병헌과 호흡을 맞춘다.

"부담감 때문에 더 잘해야지 라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제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지금 '협녀'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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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도연 “잠잘 때도 대본 쥐고 있었죠”
    • 입력 2013-12-09 17:55:04
    연합뉴스
"시나리오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었어요. 제 연기 인생에서 처음입니다. 잠잘 때조차 대본을 쥐고 있었죠." 방은진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집으로 가는 길'에서 주인공 정연 역으로 분한 전도연은 9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의 한 카페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도연의 영화 복귀는 '카운트다운'(2011) 이후 2년 만이다. 오는 11일 개봉하는 '집으로 가는 길'은 프랑스 오를리 공항에서 마약 운반범으로 체포돼 대서양의 어느 외딴 섬에 있는 마르티니크 교도소에 갇혔던 한 한국인 주부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드라마다. "이야기가 재밌고, 흥미로워서 선택했어요. 읽으면서 화가 났죠.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분개했어요.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는 그냥 하나의 사건으로 생각했는데, 나중에는 가족 이야기라는 생각이 강했어요. 너무 집으로 가고 싶어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요." 영화는 자국민 보호라는 대사관의 중요임무를 방기했다는 지적을 받은 주불 대사관의 치부를 작심한 듯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영화를 보는 내내 국민 세금으로 일하는 고위 공직자들의 무사안일과 보신에 격분하게 된다. 전도연이 출연을 결심한 이유에는 이런 공분이 컸다. "영화 '도가니'를 보면서 화가 난 건, 그 영화를 보는 순간에도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어요. 그 점이 너무 끔찍했습니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보면서도 그런 분노를 느꼈어요." 촬영은 쉽지 않았다. 도미니카, 파리 등 해외 촬영 일정이 길었다. 한 달간에 이르는 강행군이었다. 재촬영을 할 수 없는 데 따른 부담감도 컸다. 게다가 현장에선 영어와 프랑스어 등 5개 국어가 뒤죽박죽 사용됐다. 언어의 '도가니' 속에서 그는 "멀미를 느낄 정도"로 혼돈 상태에 휩싸였다. "프랑스어, 불어…정말, 처음에는 이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다행히 연기할 때 언어적인 부분은 장애가 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로케이션에 따른 촬영 시간은 제한됐는데 찍을 분량이 많아 부담스러웠어요. 감정 신을 하나라도 놓칠까 노심초사했어요. 잠잘 때조차 대본을 쥐고 있었어요. 이렇게 너덜너덜해진 대본이 여태껏 없었어요. 긴장 많이 했습니다." 처음으로 너덜너덜해 질 정도로 대본을 봤다던 그는 영화에서 '명연'을 선보인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아줌마, 두려움과 긴장감에 떠는, 하지만 이 일만 끝내면 목돈을 만질 수 있다는 기대감에 찬 눈빛, 망망대해에 가로막혀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절망감 서린 표정, 머리가 빠질 정도로 기력이 쇠한 연약한 몸…. 전도연은 영화 연기에서 보여줄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보여주며 극의 중심을 탄탄하게 잡고 간다. 특히 법정 장면은 압권이다. 2년간 수감 생활을 하면서 처음으로 발언권을 얻은 30대 주부는 오열 대신 치솟는 감정을 꾹꾹 누르며 읊조리듯 말한다. "모든 장면이 감정적으로 어려웠지만, 마지막 법정 장면이 가장 힘들었어요. 2년이란 고통스러운 시간을 통해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여린 여자가 아니라 단단해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떨었어요. 떨림이 지나쳐 서 있기조차 힘들었죠. 게다가 전부 외국인이잖아요. 그분들이 주는 눈길이 부담스러웠어요." 정연은 처음부터 끝까지 감정을 크게 발산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의 하이라이트에서만큼은 감정을 마음껏 발산하는 게 더 영화적이지 않았을까? "어떤 일을 겪으면 상처와 고통을 통해 저 자신이 다져지는 측면이 있어요. 설움을 당하고 고통을 겪으면 '나는 정말 불쌍한 여자야?'라고만 생각할까요? (2년간의 옥고를 통해) 철없는 아줌마에서 좀 더 단단해져 있지 않을까요? 작은 사건들이 하나하나 쌓여서 사람은 성숙해지지 않을까요?" 정연에 대한 이 같은 해석에는 온갖 곡절을 겪은 전도연의 삶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예전에는 아등바등했던 문제들도 살다 보니 별것 아니다"라는 깨달음이다. 그리고 시행착오를 통해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배우는 "과정"이라는 신념도 강하게 작용했다. "나이가 들면서 편안해지는 것 같아요. 그전에는 어떤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되면, 아등바등했는데, 살다 보니 그 정도 문제는 중요하지 않은 거예요. 지금이 좋아요." '접속'(1997)으로 영화계에 등장한 전도연은 14편의 영화를 찍으며 우리나라 여배우로는 처음으로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도 받았고, 국내 최고 여배우라는 상찬도 누렸다. 그러나 추종에 가까운 칭찬도 어느 순간 독이 됐다. "큰 상을 받으면 더 좋은 작품으로 작업할 기회가 많을 거로 생각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어요. 전도연이 이런 거 하겠어? 그렇게 생각하셨던 분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속상했죠. 저는 상을 받은 게 제 연기 인생에서 하나의 과정이라고 봤는데 다른 분들은 제 연기 인생의 절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런 부분이 힘들었어요." 전도연은 박흥식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협녀'(2014년 예정)에 출연한다. 고려 말 당대 최고의 여고수 설랑 역을 맡아 '내 마음의 풍금'(1999) 이후 14년 만에 이병헌과 호흡을 맞춘다. "부담감 때문에 더 잘해야지 라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제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지금 '협녀'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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