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쌍권총’의 귀환…성적 거품 빠질까?

입력 2013.12.18 (11:30) 수정 2013.12.18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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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대학가 유행어 중에 "권총 찼다"는 표현이 있었죠. F학점을 받았다는 얘긴데, "쌍권총 찼다"는 푸념도 심심찮게 오갔습니다. 권총을 너무 많이 차서 학사경고를 받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요즘은 대학가에서 '권총 차는' 학생들을 찾기가 매우 힘듭니다. 학점이 잘 안나올 것 같으면 아예 수강철회를 해버리고, 나쁜 학점은 재수강을 해서 흔적을 지우기 때문입니다. C학점만 돼도 재수강이 필수가 되다보니, 지난해 4년제 대학 졸업생 가운데 90%가 평균 학점이 B였습니다. 이렇다보니 기업 인사 담당자들이 '가장 믿지 못할 자료'로 꼽는 게 바로 대학 성적표입니다. 온통 A학점, B학점 투성이다보니 변별력이 없다는 거죠. 이른바 '학점 인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물론 학생들을 탓할 일은 아닙니다. 오죽 취업난이 심하고 오죽 경쟁이 치열하면 이렇게까지 성적 관리에 목숨을 걸다시피 하겠습니까. 같은 과목을 두번씩, 심하면 세번씩 들어야 하는 학생들의 고충도 이만저만이 아닐 겁니다.

하지만, 이런 학점 인플레이션 현상이 우리 대학교육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는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대학 교육의 신뢰도가 저하된다는 원론적인 얘기는 차치하고라도, 당장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문제점이 학사 평가의 공정성 문제입니다. 재수강이 남발되다보니 신입생들은 재수강을 하는 3,4학년 선배들과 함께 수업을 들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같은 내용을 두번씩 듣는 선배들과 똑같이 시험을 보고 학점을 받아야 하는 겁니다. 상대평가 체제에서는 '불공정한 게임'이 될 수 밖에 없는 거죠. 결국 선배들의 재수강이 후배들의 재수강을 낳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겁니다.



뒤늦게나마 대학들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습니다. 고려대는 내년 3월부터 재수강을 할 경우 A+는 받지 못하고 A까지만, 삼수강을 할 경우에는 B까지만 학점을 받을 수 있게 학사 운영규정을 개정하고 있습니다. 또, F학점과 재수강 여부를 성적표에 반드시 표기하도록 하기로 했습니다. 연세대는 재수강 제도 폐지 여부를 놓고 지난해 총학생회와 갈등을 겪기도 했는데요, 올해부터 졸업할 때까지 재수강 횟수를 총 3번까지로 제한하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대책들이 일부 대학에서만 시행된다면 효과가 없다는 겁니다. 험난한 취업전선에서 '상대적 불이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해당 학교 학생들의 반발만 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육부와 대학교육협의회도 공동으로 대책을 마련하기로 했습니다. 다만 재수강 자체를 제한하는 것은 대학들의 자율적인 학사 관리를 방해할 수 있다고 보고, '성적 부풀리기' 등 불공정한 관행 부분만 손보기로 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성적표에 F학점과 재수강 여부를 반드시 표기하도록 하는 방안과 취업용으로 F학점 등을 지운 이중 성적표를 발급하는 것을 금지하는 방안이 추진됩니다. 교육부는 내년 3월까지 대학들의 자율적인 시정 결과를 보고받은 뒤, 제재 여부를 검토하기로 했습니다. 제대로 시행된다면 내년부터는 대학생들의 성적표에 '권총'이 다시 등장하게 될 전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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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쌍권총’의 귀환…성적 거품 빠질까?
    • 입력 2013-12-18 11:30:23
    • 수정2013-12-18 11:34:37
    취재후·사건후
한때 대학가 유행어 중에 "권총 찼다"는 표현이 있었죠. F학점을 받았다는 얘긴데, "쌍권총 찼다"는 푸념도 심심찮게 오갔습니다. 권총을 너무 많이 차서 학사경고를 받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요즘은 대학가에서 '권총 차는' 학생들을 찾기가 매우 힘듭니다. 학점이 잘 안나올 것 같으면 아예 수강철회를 해버리고, 나쁜 학점은 재수강을 해서 흔적을 지우기 때문입니다. C학점만 돼도 재수강이 필수가 되다보니, 지난해 4년제 대학 졸업생 가운데 90%가 평균 학점이 B였습니다. 이렇다보니 기업 인사 담당자들이 '가장 믿지 못할 자료'로 꼽는 게 바로 대학 성적표입니다. 온통 A학점, B학점 투성이다보니 변별력이 없다는 거죠. 이른바 '학점 인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물론 학생들을 탓할 일은 아닙니다. 오죽 취업난이 심하고 오죽 경쟁이 치열하면 이렇게까지 성적 관리에 목숨을 걸다시피 하겠습니까. 같은 과목을 두번씩, 심하면 세번씩 들어야 하는 학생들의 고충도 이만저만이 아닐 겁니다. 하지만, 이런 학점 인플레이션 현상이 우리 대학교육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는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대학 교육의 신뢰도가 저하된다는 원론적인 얘기는 차치하고라도, 당장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문제점이 학사 평가의 공정성 문제입니다. 재수강이 남발되다보니 신입생들은 재수강을 하는 3,4학년 선배들과 함께 수업을 들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같은 내용을 두번씩 듣는 선배들과 똑같이 시험을 보고 학점을 받아야 하는 겁니다. 상대평가 체제에서는 '불공정한 게임'이 될 수 밖에 없는 거죠. 결국 선배들의 재수강이 후배들의 재수강을 낳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겁니다. 뒤늦게나마 대학들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습니다. 고려대는 내년 3월부터 재수강을 할 경우 A+는 받지 못하고 A까지만, 삼수강을 할 경우에는 B까지만 학점을 받을 수 있게 학사 운영규정을 개정하고 있습니다. 또, F학점과 재수강 여부를 성적표에 반드시 표기하도록 하기로 했습니다. 연세대는 재수강 제도 폐지 여부를 놓고 지난해 총학생회와 갈등을 겪기도 했는데요, 올해부터 졸업할 때까지 재수강 횟수를 총 3번까지로 제한하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대책들이 일부 대학에서만 시행된다면 효과가 없다는 겁니다. 험난한 취업전선에서 '상대적 불이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해당 학교 학생들의 반발만 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육부와 대학교육협의회도 공동으로 대책을 마련하기로 했습니다. 다만 재수강 자체를 제한하는 것은 대학들의 자율적인 학사 관리를 방해할 수 있다고 보고, '성적 부풀리기' 등 불공정한 관행 부분만 손보기로 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성적표에 F학점과 재수강 여부를 반드시 표기하도록 하는 방안과 취업용으로 F학점 등을 지운 이중 성적표를 발급하는 것을 금지하는 방안이 추진됩니다. 교육부는 내년 3월까지 대학들의 자율적인 시정 결과를 보고받은 뒤, 제재 여부를 검토하기로 했습니다. 제대로 시행된다면 내년부터는 대학생들의 성적표에 '권총'이 다시 등장하게 될 전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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