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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후] 통장님 ‘해외연수 보내드립니다’
입력 2014.01.07 (15:03) 수정 2014.01.08 (11:21) 취재후·사건후
어릴 적 동네 통장님은 제 취학통지서를 집으로 가져다 주셨습니다. 아버지의 민방위 소집통지서를 가지고 왔고, 연말이면 이웃돕기성금, 비가 많이 와 어디에 물난리가 났다고 하면 며칠 후 어김없이 찾아와 수재의연금 같은 것도 걷어갔습니다. 아주 가끔은 우리 집에 전입신고가 돼 있는 삼촌들이 실제로 함께 살고 있는지 확인을 해가기도 했습니다. 두꺼운 비닐로 코팅돼 있던 종이 주민등록증이 플라스틱주민증으로 바뀔 즈음에는 몇 번이고 찾아와 열 손가락 지문 날인을 종용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렇게 동네 통장은 잊을 만하면 찾아와 우리 가족이, 그리고 제가 이 공동체의 변함없는 구성원임을 일깨워주는 존재였습니다.

요즘은 통장을 직접 만날 기회가 크게 줄었습니다. 옛날처럼 이장이나 통장을 끼지 않고도 각종 민원을 직접 처리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아이들의 취학통지서 등 각종 통지서, 고지서도 인터넷으로 확인하고 발급받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장과 통장은 몇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행정의 가장 작은 조직 단위로 건재합니다. 전국이통장연합회가 생길 정도로 이장·통장들의 조직력과 결속력은 오히려 커졌습니다. 주민들과 직접 접촉하는 빈도는 줄었으나 행정의 최일선에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정책과 결정을 일사불란하게 주민들에게 전달하는 역할도 여전합니다. 폭설이나 태풍 같은 천재지변, 구제역 파동 같은 재난 상황에선 그 존재가치가 더욱 빛을 발합니다.

이런 일을 하는 이장·통장은 돈을 얼마나 받을까요. 한 달에 월정수당 20만 원, 회의수당 4만 원을 받습니다. 상여금으로 일 년에 40만 원을 받으니 한 달에 현금으로 27만 원쯤 받는 셈입니다. 봉사직이기 때문에 보수나 급여라고 볼 수는 없고, 활동에 대한 실비 보상 수준인데 정부 상한선이 그 정도이니 많은 액수는 결코 아니죠. 그런데 지방자치가 활성화되면서 이장.통장에게는 현금 말고도 이래저래 지원되는 것들이 제법 생겼습니다.

자녀장학금, 상해보험 이런 건 기본입니다. 2012년 10월 기준으로 전국 기초지자체 228곳 가운데 173개 지자체가 이장·통장을 대상으로 단체상해보험에 가입해 보험료를 내주고 있습니다. 주로 몸으로 뛰는 일을 하다 보니 더러 사고가 생기는데 이걸 보상해주기 위해섭니다. 쓰레기봉투나 책, 교통카드 같은 걸 공짜로 주기도 하고 이통장협의회에 워크숍 비용을 지원하기도 합니다. 여기까진 그래도 이해할 만합니다.



하는 사람은 봉사지만 일 맡기는 사람 마음은 뭐라도 얹어주고 싶은 게 인지상정입니다. 그런데 지자체마다 경쟁적으로 이런 지원을 늘리다보니 해외연수비를 지원하는 지자체도 생겨났습니다. 2012년에 전국 44개 지자체가 이장.통장들에게 해외연수비를 지원했습니다. 아직 취합이 안됐지만 지난해에는 더 늘었을 겁니다. 지자체들은 관내 이장·통장을 모두 다 보내줄 순 없으니 대상을 정해야 하는데, 대부분 이통장협의회가 알아서 합니다. 협의회는 순번을 정해놓고 돌아가면서 가게 합니다. 지자체는 그저 수 천만 원씩 되는 예산을 협의회에 지원하기만 합니다. '나눠먹기' 인거죠.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아니다 싶습니다. 선출직 단체장의 선심성 예산집행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바로 이 대목입니다.

이장·통장은 지방자치법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공무원은 아니지만 지방자치단체가 그 하부조직으로 이장·통장을 둘 수 있다고 돼있습니다. 지방자치법은 딱 거기까집니다. 이장.통장을 둘 수 있게만 해놓고, 운영이나 지원에 관한 모든 것들은 조례로 정해 운영하도록 지자체에 위임했습니다. 이 때문에 지자체별로 지원수준이나 지원내용은 천차만별입니다. 당연합니다. 다양성은 지방자치의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장·통장들의 요구를 선출직 단체장이 뿌리치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를 걸러줘야 할 지방의회도 동네 구석구석을 책임지고 있는 이장·통장들의 눈치를 보기는 마찬가집니다. 한마디로 '표' 관리를 하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누가 봐도 합리적이지 않은 방식의 해외연수지원 같은 정책이 지자체 사이에 유행처럼 번지고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상위법 제정 움직임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18대 국회에서 '이.통장 지원에 관한 법률'제정이 추진됐으나 지금의 안전행정부 반대로 국회에 계류돼 있다 자동 폐기됐습니다. 안전행정부가 이 법안에 반대한 속내는 알 수 없지만 지방자치시대에 지방 조례로 할 수 있는 것을 굳이 법률을 만들어 자치를 제한하고 통제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뻔한 결론 같지만 답은 역시 자치에서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지방의원들이 선출직 단체장과 같은 이유로 선심성 예산집행을 견제할 수 없다면 시민사회가 그 역할을 대신해야 합니다. 하지만 지방자치 초기에 활발하던 시민사회단체들의 예산 감시활동도 최근엔 부쩍 축소된 듯합니다.

자치가 꽃을 피우기 위해선 합리적인 정책결정 구조가 마련돼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다양한 의견부터 모아져야 하는데 제 주변을 둘러봐도 자기가 사는 지방의 행정을 그다지 눈 여겨 보는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관심이 있어야 눈에도 보이고 생각도 많아지는데 말입니다. 그래야 예산 집행도 감시하고, 조례 개정도 요구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당사자의 가치관과 역할은 더 중요하겠죠. 살아있는 지방자치의 최일선에 있을 지, 과거처럼 행정의 말단에 머무를 지는 여전히 이장, 통장들의 몫입니다. 여러분의 동네 이장, 통장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 [취재후] 통장님 ‘해외연수 보내드립니다’
    • 입력 2014-01-07 15:03:30
    • 수정2014-01-08 11:21:15
    취재후·사건후
어릴 적 동네 통장님은 제 취학통지서를 집으로 가져다 주셨습니다. 아버지의 민방위 소집통지서를 가지고 왔고, 연말이면 이웃돕기성금, 비가 많이 와 어디에 물난리가 났다고 하면 며칠 후 어김없이 찾아와 수재의연금 같은 것도 걷어갔습니다. 아주 가끔은 우리 집에 전입신고가 돼 있는 삼촌들이 실제로 함께 살고 있는지 확인을 해가기도 했습니다. 두꺼운 비닐로 코팅돼 있던 종이 주민등록증이 플라스틱주민증으로 바뀔 즈음에는 몇 번이고 찾아와 열 손가락 지문 날인을 종용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렇게 동네 통장은 잊을 만하면 찾아와 우리 가족이, 그리고 제가 이 공동체의 변함없는 구성원임을 일깨워주는 존재였습니다.

요즘은 통장을 직접 만날 기회가 크게 줄었습니다. 옛날처럼 이장이나 통장을 끼지 않고도 각종 민원을 직접 처리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아이들의 취학통지서 등 각종 통지서, 고지서도 인터넷으로 확인하고 발급받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장과 통장은 몇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행정의 가장 작은 조직 단위로 건재합니다. 전국이통장연합회가 생길 정도로 이장·통장들의 조직력과 결속력은 오히려 커졌습니다. 주민들과 직접 접촉하는 빈도는 줄었으나 행정의 최일선에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정책과 결정을 일사불란하게 주민들에게 전달하는 역할도 여전합니다. 폭설이나 태풍 같은 천재지변, 구제역 파동 같은 재난 상황에선 그 존재가치가 더욱 빛을 발합니다.

이런 일을 하는 이장·통장은 돈을 얼마나 받을까요. 한 달에 월정수당 20만 원, 회의수당 4만 원을 받습니다. 상여금으로 일 년에 40만 원을 받으니 한 달에 현금으로 27만 원쯤 받는 셈입니다. 봉사직이기 때문에 보수나 급여라고 볼 수는 없고, 활동에 대한 실비 보상 수준인데 정부 상한선이 그 정도이니 많은 액수는 결코 아니죠. 그런데 지방자치가 활성화되면서 이장.통장에게는 현금 말고도 이래저래 지원되는 것들이 제법 생겼습니다.

자녀장학금, 상해보험 이런 건 기본입니다. 2012년 10월 기준으로 전국 기초지자체 228곳 가운데 173개 지자체가 이장·통장을 대상으로 단체상해보험에 가입해 보험료를 내주고 있습니다. 주로 몸으로 뛰는 일을 하다 보니 더러 사고가 생기는데 이걸 보상해주기 위해섭니다. 쓰레기봉투나 책, 교통카드 같은 걸 공짜로 주기도 하고 이통장협의회에 워크숍 비용을 지원하기도 합니다. 여기까진 그래도 이해할 만합니다.



하는 사람은 봉사지만 일 맡기는 사람 마음은 뭐라도 얹어주고 싶은 게 인지상정입니다. 그런데 지자체마다 경쟁적으로 이런 지원을 늘리다보니 해외연수비를 지원하는 지자체도 생겨났습니다. 2012년에 전국 44개 지자체가 이장.통장들에게 해외연수비를 지원했습니다. 아직 취합이 안됐지만 지난해에는 더 늘었을 겁니다. 지자체들은 관내 이장·통장을 모두 다 보내줄 순 없으니 대상을 정해야 하는데, 대부분 이통장협의회가 알아서 합니다. 협의회는 순번을 정해놓고 돌아가면서 가게 합니다. 지자체는 그저 수 천만 원씩 되는 예산을 협의회에 지원하기만 합니다. '나눠먹기' 인거죠.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아니다 싶습니다. 선출직 단체장의 선심성 예산집행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바로 이 대목입니다.

이장·통장은 지방자치법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공무원은 아니지만 지방자치단체가 그 하부조직으로 이장·통장을 둘 수 있다고 돼있습니다. 지방자치법은 딱 거기까집니다. 이장.통장을 둘 수 있게만 해놓고, 운영이나 지원에 관한 모든 것들은 조례로 정해 운영하도록 지자체에 위임했습니다. 이 때문에 지자체별로 지원수준이나 지원내용은 천차만별입니다. 당연합니다. 다양성은 지방자치의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장·통장들의 요구를 선출직 단체장이 뿌리치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를 걸러줘야 할 지방의회도 동네 구석구석을 책임지고 있는 이장·통장들의 눈치를 보기는 마찬가집니다. 한마디로 '표' 관리를 하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누가 봐도 합리적이지 않은 방식의 해외연수지원 같은 정책이 지자체 사이에 유행처럼 번지고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상위법 제정 움직임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18대 국회에서 '이.통장 지원에 관한 법률'제정이 추진됐으나 지금의 안전행정부 반대로 국회에 계류돼 있다 자동 폐기됐습니다. 안전행정부가 이 법안에 반대한 속내는 알 수 없지만 지방자치시대에 지방 조례로 할 수 있는 것을 굳이 법률을 만들어 자치를 제한하고 통제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뻔한 결론 같지만 답은 역시 자치에서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지방의원들이 선출직 단체장과 같은 이유로 선심성 예산집행을 견제할 수 없다면 시민사회가 그 역할을 대신해야 합니다. 하지만 지방자치 초기에 활발하던 시민사회단체들의 예산 감시활동도 최근엔 부쩍 축소된 듯합니다.

자치가 꽃을 피우기 위해선 합리적인 정책결정 구조가 마련돼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다양한 의견부터 모아져야 하는데 제 주변을 둘러봐도 자기가 사는 지방의 행정을 그다지 눈 여겨 보는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관심이 있어야 눈에도 보이고 생각도 많아지는데 말입니다. 그래야 예산 집행도 감시하고, 조례 개정도 요구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당사자의 가치관과 역할은 더 중요하겠죠. 살아있는 지방자치의 최일선에 있을 지, 과거처럼 행정의 말단에 머무를 지는 여전히 이장, 통장들의 몫입니다. 여러분의 동네 이장, 통장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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