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Q 210 ‘실패한 천재’ 김웅용, 대학교수 꿈 이뤘다

입력 2014.01.13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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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Q 210의 명석한 두뇌에 6살 때 미적분을 풀어 주목받았으나 지방대학에 입학하면서 '실패한 천재'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녔던 김웅용(51)씨가 대학 교단에 서고 싶었던 오랜 꿈을 이뤘다.

세간이 혹평했던 실패한 천재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가기 위해 묵묵히 노력해 그 결실을 이룬 것이다.

충북개발공사는 김웅용 사업처장이 신한대 교양학부 교수로 임용돼 이직한다고 13일 밝혔다.

김 처장은 경기북부개발연구원 부원장 직도 맡았다.

그는 충북개발공사에서 근무하면서도 1993년부터 연세대와 성균관대 등 11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대학 교단에 서기 위한 훈련을 했고, 1994년부터 2004년까지는 카이스트 건설환경공학과 대우 교수로 대학원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1988년 이후 전공인 토목공학 관련 논문 100여 편을 국내외 학술지에 발표하는 등 왕성한 연구 실적도 쌓아왔다.

5살 때 4개 국어를 구사하고 6살 때 일본 후지TV에 출연, 미적분을 풀어내 세계를 놀라게 했던 그는 8살 때인 1970년 미국항공우주국(NASA) 초청으로 미국에 건너가 콜로라도주립대 대학원에서 석·박사를 마치고 1974년부터 5년간 나사 선임연구원으로 일하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1980년 IQ 210으로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린 뒤 10년간 세계에서 가장 높은 IQ 소유자로 기록되는 등 이미 '천재'임을 입증받기도 했다.

그러나 10대의 어린 나이에 홀로 지내야 했던 미국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1978년 돌연 귀국해 1981년 지방대인 충북대에 입학하자 '실패한 천재'라는 혹평이 쏟아졌다.

잘못된 영재 교육의 폐단을 꼽을 때 언론은 으레 그를 거론했다.

그는 그러나 결코 세상이 평가하는 것처럼 '실패한 인생'을 살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연구한 실적을 논문으로 꾸준히 발표하면서 2006년 '마르퀴즈 후즈 후 인 더 월드(Marquis Who's Who In The World)'를 비롯해 세계 3대 인명사전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2012년 8월에는 '슈퍼스칼러(Super Scholar)'라는 미국의 비영리단체가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10인을 빌표하면서 스티븐 호킹 등과 나란히 그의 이름을 올려 또 한 번 화제가 됐다. 이 단체는 그가 세계에서 세 번째로 IQ가 높다고 발표했다.

대학교수를 희망했지만 지방대 출신을 받아주지 않는 관행 탓에 2006년 충북개발공사에 입사, 준공무원으로 일하면서도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그는 결국 대학 교단에 서겠다는 오랜 꿈을 이뤘다.

김 처장은 "머리가 좋은 천재로 주목받거나 유명해지고 싶지 않다"며 원하는 일을 즐겁게 하면서 가족, 이웃과 따뜻하게 소통하는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오랜 꿈이었던 대학 교단에 정식으로 서게 돼 설렌다"며 "후학들을 가르치는데 열정을 다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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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Q 210 ‘실패한 천재’ 김웅용, 대학교수 꿈 이뤘다
    • 입력 2014-01-13 17:16:59
    연합뉴스
IQ 210의 명석한 두뇌에 6살 때 미적분을 풀어 주목받았으나 지방대학에 입학하면서 '실패한 천재'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녔던 김웅용(51)씨가 대학 교단에 서고 싶었던 오랜 꿈을 이뤘다. 세간이 혹평했던 실패한 천재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가기 위해 묵묵히 노력해 그 결실을 이룬 것이다. 충북개발공사는 김웅용 사업처장이 신한대 교양학부 교수로 임용돼 이직한다고 13일 밝혔다. 김 처장은 경기북부개발연구원 부원장 직도 맡았다. 그는 충북개발공사에서 근무하면서도 1993년부터 연세대와 성균관대 등 11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대학 교단에 서기 위한 훈련을 했고, 1994년부터 2004년까지는 카이스트 건설환경공학과 대우 교수로 대학원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1988년 이후 전공인 토목공학 관련 논문 100여 편을 국내외 학술지에 발표하는 등 왕성한 연구 실적도 쌓아왔다. 5살 때 4개 국어를 구사하고 6살 때 일본 후지TV에 출연, 미적분을 풀어내 세계를 놀라게 했던 그는 8살 때인 1970년 미국항공우주국(NASA) 초청으로 미국에 건너가 콜로라도주립대 대학원에서 석·박사를 마치고 1974년부터 5년간 나사 선임연구원으로 일하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1980년 IQ 210으로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린 뒤 10년간 세계에서 가장 높은 IQ 소유자로 기록되는 등 이미 '천재'임을 입증받기도 했다. 그러나 10대의 어린 나이에 홀로 지내야 했던 미국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1978년 돌연 귀국해 1981년 지방대인 충북대에 입학하자 '실패한 천재'라는 혹평이 쏟아졌다. 잘못된 영재 교육의 폐단을 꼽을 때 언론은 으레 그를 거론했다. 그는 그러나 결코 세상이 평가하는 것처럼 '실패한 인생'을 살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연구한 실적을 논문으로 꾸준히 발표하면서 2006년 '마르퀴즈 후즈 후 인 더 월드(Marquis Who's Who In The World)'를 비롯해 세계 3대 인명사전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2012년 8월에는 '슈퍼스칼러(Super Scholar)'라는 미국의 비영리단체가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10인을 빌표하면서 스티븐 호킹 등과 나란히 그의 이름을 올려 또 한 번 화제가 됐다. 이 단체는 그가 세계에서 세 번째로 IQ가 높다고 발표했다. 대학교수를 희망했지만 지방대 출신을 받아주지 않는 관행 탓에 2006년 충북개발공사에 입사, 준공무원으로 일하면서도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그는 결국 대학 교단에 서겠다는 오랜 꿈을 이뤘다. 김 처장은 "머리가 좋은 천재로 주목받거나 유명해지고 싶지 않다"며 원하는 일을 즐겁게 하면서 가족, 이웃과 따뜻하게 소통하는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오랜 꿈이었던 대학 교단에 정식으로 서게 돼 설렌다"며 "후학들을 가르치는데 열정을 다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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