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간다] 사채, 기업을 노린다

입력 2014.01.17 (23:08) 수정 2014.01.18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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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 커멘트>

지난 정부의 불법 사금융과의 전쟁에 이어, 현 정부도 지하경제 양성화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왜곡된 지하경제의 오랜 흐름을 바꾸기는 쉽지 않습니다.

막대한 이자 챙기기에다, 기업들의 약점을 이용해 몸집을 키우고, 이제는 기업 자산까지 노리고 있는 사채시장의 실태를 취재했습니다.

기자가 간다, 최건일 기자입니다.

<리포트>

싼 이자, 당일 대출.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릴 수 없는 사람들이 급하게 쓰는 돈 사채….

물론 이자율이 높습니다.

또, 제때 갚지 못하면 상상하기 힘든 고통이 따릅니다.

<녹취> 9시 뉴스(2001.4.10) : "빌린 돈을 기한 내에 갚지 않으면 채무자를 마음대로 팔아넘길 수 있다는 이른바 신체 포기 각서가 사채업자들 사이에 공공연히 나돌고 있습니다."

소규모 사채와는 달리, 주로 기업들을 상대로 하는 사채시장은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왔습니다.

바로 '회장'이라고 불리는 큰손 전주들….

많게는 조 단위까지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는 이 큰손들은 거래 전면에 나서지 않아 그 신분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인터뷰> 양석승(대부금융협회 회장) : "사채시장도 완전히 음성적이거든요. 그런 정보는 전혀 모르고요. 저희도 그걸 알고 싶어서 해보는데 안돼요. 어디 채널에 걸리질 않아요."

과거 사채업자 사무실이 많이 입주해 명동 사채 시장의 상징으로 불리던 건물입니다.

이곳에서 정부의 금융정책을 논하며 하루 수천억 원을 움직이던 사채시장의 큰손 이야기는 이제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습니다.

1960년대 이래 국내 사채시장을 주무른 큰손은 대략 서너 명 정도.

현금 동원 능력이 가장 뛰어나 '현금 왕'이라고 불리던 단 모 회장.

내로라하는 재벌들도 단 씨에게 현금을 빌릴 만큼 현금 동원력이 뛰어나 사채시장의 대부로 통했습니다.

'광화문 곰'으로 알려진 고 모씨와 사채업계의 대모라 불린 백 할머니도 사채시장의 큰손으로 이름을 남겼습니다.

<녹취> 김영삼(전 대통령) :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뤄집니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되지 않고는 이 땅에 부정부패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없습니다."

금융실명제 시행으로 큰 위기를 맞은 사채시장.

불법자금에 대한 추적이 가능해지면서 지하경제는 점점 더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었습니다.

2000년 이후 사채시장 주무대는 벤처 붐과 함께 명동을 떠나 강남으로 옮겨졌습니다.

<인터뷰> 양석승(한국대부금융협회 회장) : "옛날에 명동에 그런 시장이 섰다 하는데 지금은 오히려 강남역 네거리 그쪽이 성행한다 그런 것이죠."

컨설팅, 캐피탈 등의 이름으로 강남에 자리 잡은 사채업자들.

이들 중 일부는 지금 기업의 약점을 이용해 몸집을 불리고 있습니다.

경기도의 한 병원 신축공사 현장에서 만난 건설업체 대표.

지난해 사채업자로부터 수억 원을 빌렸던 적이 있다며 당시 상황을 털어놓습니다.

<인터뷰> 건설업체 대표(음성변조) : "제가 작년에 일부 자본금이 모자라서 그걸 사채시장에서 조달해 보려고 사채시장을 나갔더니 완전히 사채업자들 배 불리는 행위더라고요."

2012년 마지막 날. 경기도 안양의 한 은행 지점

은행 업무 시간이 지났지만, 쪽문으로 사람들이 드나듭니다.

<녹취> 건설업체 대표(음성변조) : "큰 전주도 이런 사채업자들을 풀어서 고객을 모집해 가지고 하루 저녁에 거의 은행을 일과시간 이후로 은행을 빌려서 돈을 다 풉니다."

은행 안엔 지점장을 비롯해 대부분의 은행 직원이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녹취> 건설업체 대표(음성변조) : "고객들하고 면담을 하는 방이 한 칸 비워져 있고, 거기는 사채업자가 고용한 직원들이 앉아서 건설업체에서 가져온 서류를 심사하는 거예요."

서류 심사가 끝나면 대기하고 있던 은행 직원이 통장을 새로 만들고, 약속된 돈을 입금해 줍니다.

<녹취> 건설업체 대표(음성변조) : "들어가서 서류를 건네주면 통장도 우리는 구경을 못해요. 통장에 돈이 얼마 찍힌다는 약정만 이뤄지고 모든 권한은 사채업자가 가지고 있는 거예요."


<인터뷰> 건설업체 대표(음성변조) : "전국 각지에서 몰려오는 건설업체, 제조업체 해 가지고 사채시장이 아수라장이더라고요."

건설업체 사장들이 사채 시장에 몰린 이유는 연말 자본금 확보 때문입니다.

<녹취> 국토교통부 관계자(음성변조) : "자본금이 미달 됐다는 것은 건설업 등록 기준이 미달 됐다는 것과 똑같거든요. 등록기준이 미달 되면 행정처분을 하도록 돼 있어요."

종합건설업 가운데 토목건축공사업은 최소 12억 원, 전문건설업도 업종마다 2억 원에서 최대 20억 원 이상의 자본금을 확보해야 합니다.

매년 연말이면 이 자본금이 최소 60일 동안 통장에 들어있다는 잔고 증명서를 심사기관에 제출해야 합니다.

이때, 자본금이 부족한 건설업체들이 앞다퉈 사채업자에게 두 달간 이 돈을 빌려 쓰는 겁니다.

퇴출을 피하기 위해 고금리의 이자를 물고 거액을 빌리는 건설업체들.

사채업자들은 이런 상황을 이용해 큰돈을 순식간에 긁어모으고 있습니다.

지난 연말, 수천억 원을 보유하고 있다는 큰손, 최 모 회장의 돈이 12월 마지막 주에 풀린다는 소문이 강남 사채시장에 파다했습니다.

취재진은 직접 사채를 빌려 보기로 했습니다.

체감온도 영하 15도.

한파가 몰아닥친 크리스마스 이튿날.

수소문 끝에 서울 서초동의 한 카페에서 사채 브로커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돈이 필요한 업체 사장들을 끌어모아서, 전주에게 안내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카페 안은 빈자리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붐볐지만, 음료를 마시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사채 브로커와 돈을 빌리러 온 건설업체 사람들입니다.

<녹취> "어디 계신지, 제가 얼굴을 잘 몰라서..."

5억 원 정도를 빌리겠다고 했더니 자세히 설명을 해줍니다.

<녹취> 사채 브로커(음성변조) : "00은행 밖에 안된데요. 만약에 법인에서 이 통장을 건들잖아요? 건들면 바로 락(지급정지)이 걸려요. 60일 정기예금 계약한 게 해지가 돼 버려요. 그러면 돈(선이자)만 없어지는 거예요."

계좌에 원하는 돈을 넣어주되 인출할 수 없는 말하자면 서류상으로만 돈을 빌려주는 것을 사채시장에선 '찍기'라고 합니다.

<녹취> 사채 브로커 : "오늘 4개 찍었어요. 4개. 237억요. (237억?) (올해도 한 2천억 풀려요?) 2천억뿐만이 아니에요. 지금 몇조 풀려고 하는데. (몇조요?) 네. 여기에 통장을 하나 개설을 하세요. 00은행 걸로 하세요. 그리고 비밀번호는 2424로 하세요."

사채 브로커는 법인 인감도장을 비롯해 이사와 감사의 도장, 그리고 이사회 결의서까지, 상당한 분량의 서류를 추가로 요구했습니다.

<인터뷰> 이재근(변호사) : "이런 서류들, 특히 이 중에 인감도장이나 인감증명서를 교부받은 사채업자가 이를 악용하여 제3자와의 거래행위에 사용하는 경우, 이와 관련된 기업이나 개인이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돈을 빌리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크나큰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다음날, 사채 브로커를 다시 만났습니다.

하루종일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사채 브로커들 통에 아예 난방까지 꺼버린 카페.

그 한쪽 구석에서는 5만 권 뭉텅이가 서류봉투에 담겨 누군가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두 달 빌리는데 1억 원당 540만 원.

돈을 빌리기도 전에 연리 32%의 이자로 수천만 원을 먼저 건네는 겁니다.

다른 테이블에서도 부회장이라고 불리는, 전주의 대리인쯤으로 보이는 사람이 돈을 걷어가며, 사람들을 안심시킵니다.

<녹취> "(부회장님, 얼마나 걸릴까요?) 어, 이거, 네 시 안으로 뽑아낼 테니까 그리 알고 있으면 돼."

사채 브로커들과 돈을 빌리러 온 건설업체 사장들의 무료한 기다림은 이틀째 이어집니다.

지방에서 온 한 건설업체 사장은 테이블 옆에 엎드려 잠이 들었습니다.

브로커들도 자신들의 전주에 대해 칼 안든 강도라고 말합니다.

<녹취> 사채 브로커 : "돈 놓고 돈 먹기라. 날강도가 아니고서야 이런 짓을 할 수가 있는가 칼 안든 강도다."

<녹취> "이 전주들이 돈 1,2천억 갖고 하는 사람들 아니에요. (더 많아요?) 조 단위예요. (전주 한 명이 조 단위예요?) 그럼요. 지금 해마다 2조 7천억 정도씩 연말잔고로 찍는 사람이에요."

얼마 후 한 무리가 갑자기 자리를 떠납니다.

인솔자를 앞세우고, 7,8명의 업체 사장들이 뒤를 따릅니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법률 사무소.

이곳에서 먼저 서류작업을 하게 됩니다.

서류 앞에는 각서가 붙어 있습니다.

돈이 입금된 이후엔 은행 측에 추가로 확인조차 하지 말 것과 이를 어길 시 민형사상의 책임을 지겠다는 내용입니다.

법률 사무소를 나온 일행은 또 10여 분을 걸어 한 은행 지점으로 들어갑니다.

작업은 은행 2층에서 이뤄졌습니다.

먼저, 업체 사장 명의의 통장이 개설되고, 사채업자로부터 돈이 입금됩니다.

거래가 끝날 무렵 통장과 도장은 다시 사채 브로커에게 전해집니다.

업체 사장이 받은 것은 한 장짜리 잔고증명서뿐입니다.

사채업자는 선이자로 건당 수천만 원을 챙기고, 두 달 뒤, 빌려준 원금은 물론 거기에 붙은 이자까지 모조리 가져갑니다.

그럼 은행은 왜 이 작전에 끼는 걸까?

<녹취> 사채 브로커 : "은행 지점 수신고(예금)가 엄청나게 올라가는데. 연말 자금으로만 지점 1년치 수신고 다해버려요."

은행은 수신고 실적을 올리고 또 돈을 빌린 업체가 인출을 못 하는 동안 수천억 원대 자금을 두 달간 운용해 수익도 낸다는 얘깁니다.

은행은 수지맞는 장사를 했지만, 거래 기업의 자금력을 위장해주는 이런 영업 행위는 모두 불법입니다.

<녹취> 금융감독원 관계자(음성변조) : "일반적인 감독이나 검사 기법으로는 확인하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주변에 있는 은행 임직원들 얘기 들어보면 지금 말씀하신 경우가 많이 있어요."

이처럼 손쉽게 몸집을 키워온 사채업계의 큰 손들.

이제는 막대한 자금을 무기로 또 다른 먹잇감을 찾아 나서고 있습니다.

2000년대 급성장한 상조업.

등록업체만 300개에 이르고, 시장규모는 연간 7조 원에 육박합니다.

그와 더불어 소비자 피해도 점차 커지고 있습니다.

2012년부터 지난해 6월까지 한국소비자원에 접수된 상조 관련 피해 사례는 모두 천2백여 건.

그중 가장 많은 민원이 발생한 업체는 업계 순위 9위, 회원 수만 4만 명 넘는 '그린우리상조'입니다.

잘나가던 상조회사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인터뷰> 김호승(상조뉴스 대표) : "찍기가 들어온 거죠. 70억이 찍기가 들어온 거예요. (찍기라고 하면?) 그 돈을 실질적으로 계약서상에는 1년 동안 돈을 빌려주는 거지만, 이면 계약에는 그 돈을 가져가서 회사 인수해서 잔금만 치르고 바로 거기서 돈을 빼서 가는 거죠."

2012년 2월, 사채업자 최 모 회장의 자금을 운용한다고 알려진 A캐피탈 등이 이 상조업체를 130억 원에 사들입니다.

동원된 사채는 65억 원.

이들은 인수 닷새 만에 회원들의 예치금을 빼돌려 사채 빚 65억 원을 갚았습니다.

그린우리상조는 앞서 2011년에 39억 원에 거래됐던 회삽니다.

불과 다섯 달 만에 100억 원이나 비싸게 이 상조회사를 인수한 이유는 뭘까?

<인터뷰> 김호승(상조뉴스 대표) : "현금이 있었던 게 은행에 예치가 130억 정도 돼 있었고요. 나머지는 180억 정도가 현금성 자산으로 있었죠. 주식하고 유가증권 현금으로 환원할 수 있는 자산이. 그렇게 한 310억 정도가 현금이 있었던 회사죠."

인수 후 회사 경영은 안중에도 없었고, 오직 현금만을 노린 겁니다.

상조회사를 인수한 이들이 곧바로 빼돌린 회원들의 돈은 확인된 것만 140억 원.

또 4만여 명의 회원들은 다른 상조업체에 13억 원을 받고 넘겼습니다.

<인터뷰> 전형근(서울중앙지검 형사2부장) : "무자본으로 상조회사를 인수하였고, 인수 후 서로 경쟁적으로 횡령하여 다수의 피해자를 양산하였습니다."

취재진은 현재 횡령 혐의로 수감중인 상조회사 전 대표 송 모씨를 만났습니다.

송 씨는 함께 회사를 인수했던 사채업자에게 철저히 속았다고 주장했습니다.

<녹취> 송 모씨(상조회사 전 대표/음성변조) : "000이 서울에 2월 1일 올라오면서부터 저하고 000을 철저하게 속인 거에요. 10억을 계약금 주는 부분도 속이고, 중도금 주는 부분도 속이고, 60억이 들어왔다 나간 것도 저도 수사가 종료될 때쯤에서야 '아, 이랬었구나!' 이해를..."

회사는 결국 한순간에 공중분해 되고 말았습니다.

<녹취> "(말씀 좀 묻겠습니다. 그린우리상조라는 회사가?) 진작에 나갔어요. (이사 갔어요? 언제쯤?)올 봄에 갔나? 초봄에 갔는가? 한참 됐어요."

업계에서는 사채업자가 인수한 또 다른 상조회사가 이미 여럿이고, 지금도 우량 회사를 인수하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돌고 있습니다.

<인터뷰> 김호승(상조뉴스 대표) : "(TV)틀면 나오는 상조회사 있잖아요. 그런 회사도 대표가 사채를 수십 년 해온 사람이고, 일부 두세 군데에는 사채 자금이 들어왔어요. 지금도 찍기를 하려고 그건 규모가 좀 적은데, 지금도 찍기를 하려고 돈이 기다리고 있어요. 사실은."

수십 년 세월 어두운 지하경제로 불리며 소리없이 몸집을 키워온 사채시장의 큰 손들.

이제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그들은 막대한 이자 챙기기를 넘어 건실한 기업까지 통째로 노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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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가 간다] 사채, 기업을 노린다
    • 입력 2014-01-17 22:43:51
    • 수정2014-01-18 08:10:36
    취재파일K
<앵 커멘트>

지난 정부의 불법 사금융과의 전쟁에 이어, 현 정부도 지하경제 양성화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왜곡된 지하경제의 오랜 흐름을 바꾸기는 쉽지 않습니다.

막대한 이자 챙기기에다, 기업들의 약점을 이용해 몸집을 키우고, 이제는 기업 자산까지 노리고 있는 사채시장의 실태를 취재했습니다.

기자가 간다, 최건일 기자입니다.

<리포트>

싼 이자, 당일 대출.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릴 수 없는 사람들이 급하게 쓰는 돈 사채….

물론 이자율이 높습니다.

또, 제때 갚지 못하면 상상하기 힘든 고통이 따릅니다.

<녹취> 9시 뉴스(2001.4.10) : "빌린 돈을 기한 내에 갚지 않으면 채무자를 마음대로 팔아넘길 수 있다는 이른바 신체 포기 각서가 사채업자들 사이에 공공연히 나돌고 있습니다."

소규모 사채와는 달리, 주로 기업들을 상대로 하는 사채시장은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왔습니다.

바로 '회장'이라고 불리는 큰손 전주들….

많게는 조 단위까지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는 이 큰손들은 거래 전면에 나서지 않아 그 신분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인터뷰> 양석승(대부금융협회 회장) : "사채시장도 완전히 음성적이거든요. 그런 정보는 전혀 모르고요. 저희도 그걸 알고 싶어서 해보는데 안돼요. 어디 채널에 걸리질 않아요."

과거 사채업자 사무실이 많이 입주해 명동 사채 시장의 상징으로 불리던 건물입니다.

이곳에서 정부의 금융정책을 논하며 하루 수천억 원을 움직이던 사채시장의 큰손 이야기는 이제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습니다.

1960년대 이래 국내 사채시장을 주무른 큰손은 대략 서너 명 정도.

현금 동원 능력이 가장 뛰어나 '현금 왕'이라고 불리던 단 모 회장.

내로라하는 재벌들도 단 씨에게 현금을 빌릴 만큼 현금 동원력이 뛰어나 사채시장의 대부로 통했습니다.

'광화문 곰'으로 알려진 고 모씨와 사채업계의 대모라 불린 백 할머니도 사채시장의 큰손으로 이름을 남겼습니다.

<녹취> 김영삼(전 대통령) :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뤄집니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되지 않고는 이 땅에 부정부패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없습니다."

금융실명제 시행으로 큰 위기를 맞은 사채시장.

불법자금에 대한 추적이 가능해지면서 지하경제는 점점 더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었습니다.

2000년 이후 사채시장 주무대는 벤처 붐과 함께 명동을 떠나 강남으로 옮겨졌습니다.

<인터뷰> 양석승(한국대부금융협회 회장) : "옛날에 명동에 그런 시장이 섰다 하는데 지금은 오히려 강남역 네거리 그쪽이 성행한다 그런 것이죠."

컨설팅, 캐피탈 등의 이름으로 강남에 자리 잡은 사채업자들.

이들 중 일부는 지금 기업의 약점을 이용해 몸집을 불리고 있습니다.

경기도의 한 병원 신축공사 현장에서 만난 건설업체 대표.

지난해 사채업자로부터 수억 원을 빌렸던 적이 있다며 당시 상황을 털어놓습니다.

<인터뷰> 건설업체 대표(음성변조) : "제가 작년에 일부 자본금이 모자라서 그걸 사채시장에서 조달해 보려고 사채시장을 나갔더니 완전히 사채업자들 배 불리는 행위더라고요."

2012년 마지막 날. 경기도 안양의 한 은행 지점

은행 업무 시간이 지났지만, 쪽문으로 사람들이 드나듭니다.

<녹취> 건설업체 대표(음성변조) : "큰 전주도 이런 사채업자들을 풀어서 고객을 모집해 가지고 하루 저녁에 거의 은행을 일과시간 이후로 은행을 빌려서 돈을 다 풉니다."

은행 안엔 지점장을 비롯해 대부분의 은행 직원이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녹취> 건설업체 대표(음성변조) : "고객들하고 면담을 하는 방이 한 칸 비워져 있고, 거기는 사채업자가 고용한 직원들이 앉아서 건설업체에서 가져온 서류를 심사하는 거예요."

서류 심사가 끝나면 대기하고 있던 은행 직원이 통장을 새로 만들고, 약속된 돈을 입금해 줍니다.

<녹취> 건설업체 대표(음성변조) : "들어가서 서류를 건네주면 통장도 우리는 구경을 못해요. 통장에 돈이 얼마 찍힌다는 약정만 이뤄지고 모든 권한은 사채업자가 가지고 있는 거예요."


<인터뷰> 건설업체 대표(음성변조) : "전국 각지에서 몰려오는 건설업체, 제조업체 해 가지고 사채시장이 아수라장이더라고요."

건설업체 사장들이 사채 시장에 몰린 이유는 연말 자본금 확보 때문입니다.

<녹취> 국토교통부 관계자(음성변조) : "자본금이 미달 됐다는 것은 건설업 등록 기준이 미달 됐다는 것과 똑같거든요. 등록기준이 미달 되면 행정처분을 하도록 돼 있어요."

종합건설업 가운데 토목건축공사업은 최소 12억 원, 전문건설업도 업종마다 2억 원에서 최대 20억 원 이상의 자본금을 확보해야 합니다.

매년 연말이면 이 자본금이 최소 60일 동안 통장에 들어있다는 잔고 증명서를 심사기관에 제출해야 합니다.

이때, 자본금이 부족한 건설업체들이 앞다퉈 사채업자에게 두 달간 이 돈을 빌려 쓰는 겁니다.

퇴출을 피하기 위해 고금리의 이자를 물고 거액을 빌리는 건설업체들.

사채업자들은 이런 상황을 이용해 큰돈을 순식간에 긁어모으고 있습니다.

지난 연말, 수천억 원을 보유하고 있다는 큰손, 최 모 회장의 돈이 12월 마지막 주에 풀린다는 소문이 강남 사채시장에 파다했습니다.

취재진은 직접 사채를 빌려 보기로 했습니다.

체감온도 영하 15도.

한파가 몰아닥친 크리스마스 이튿날.

수소문 끝에 서울 서초동의 한 카페에서 사채 브로커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돈이 필요한 업체 사장들을 끌어모아서, 전주에게 안내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카페 안은 빈자리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붐볐지만, 음료를 마시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사채 브로커와 돈을 빌리러 온 건설업체 사람들입니다.

<녹취> "어디 계신지, 제가 얼굴을 잘 몰라서..."

5억 원 정도를 빌리겠다고 했더니 자세히 설명을 해줍니다.

<녹취> 사채 브로커(음성변조) : "00은행 밖에 안된데요. 만약에 법인에서 이 통장을 건들잖아요? 건들면 바로 락(지급정지)이 걸려요. 60일 정기예금 계약한 게 해지가 돼 버려요. 그러면 돈(선이자)만 없어지는 거예요."

계좌에 원하는 돈을 넣어주되 인출할 수 없는 말하자면 서류상으로만 돈을 빌려주는 것을 사채시장에선 '찍기'라고 합니다.

<녹취> 사채 브로커 : "오늘 4개 찍었어요. 4개. 237억요. (237억?) (올해도 한 2천억 풀려요?) 2천억뿐만이 아니에요. 지금 몇조 풀려고 하는데. (몇조요?) 네. 여기에 통장을 하나 개설을 하세요. 00은행 걸로 하세요. 그리고 비밀번호는 2424로 하세요."

사채 브로커는 법인 인감도장을 비롯해 이사와 감사의 도장, 그리고 이사회 결의서까지, 상당한 분량의 서류를 추가로 요구했습니다.

<인터뷰> 이재근(변호사) : "이런 서류들, 특히 이 중에 인감도장이나 인감증명서를 교부받은 사채업자가 이를 악용하여 제3자와의 거래행위에 사용하는 경우, 이와 관련된 기업이나 개인이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돈을 빌리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크나큰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다음날, 사채 브로커를 다시 만났습니다.

하루종일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사채 브로커들 통에 아예 난방까지 꺼버린 카페.

그 한쪽 구석에서는 5만 권 뭉텅이가 서류봉투에 담겨 누군가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두 달 빌리는데 1억 원당 540만 원.

돈을 빌리기도 전에 연리 32%의 이자로 수천만 원을 먼저 건네는 겁니다.

다른 테이블에서도 부회장이라고 불리는, 전주의 대리인쯤으로 보이는 사람이 돈을 걷어가며, 사람들을 안심시킵니다.

<녹취> "(부회장님, 얼마나 걸릴까요?) 어, 이거, 네 시 안으로 뽑아낼 테니까 그리 알고 있으면 돼."

사채 브로커들과 돈을 빌리러 온 건설업체 사장들의 무료한 기다림은 이틀째 이어집니다.

지방에서 온 한 건설업체 사장은 테이블 옆에 엎드려 잠이 들었습니다.

브로커들도 자신들의 전주에 대해 칼 안든 강도라고 말합니다.

<녹취> 사채 브로커 : "돈 놓고 돈 먹기라. 날강도가 아니고서야 이런 짓을 할 수가 있는가 칼 안든 강도다."

<녹취> "이 전주들이 돈 1,2천억 갖고 하는 사람들 아니에요. (더 많아요?) 조 단위예요. (전주 한 명이 조 단위예요?) 그럼요. 지금 해마다 2조 7천억 정도씩 연말잔고로 찍는 사람이에요."

얼마 후 한 무리가 갑자기 자리를 떠납니다.

인솔자를 앞세우고, 7,8명의 업체 사장들이 뒤를 따릅니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법률 사무소.

이곳에서 먼저 서류작업을 하게 됩니다.

서류 앞에는 각서가 붙어 있습니다.

돈이 입금된 이후엔 은행 측에 추가로 확인조차 하지 말 것과 이를 어길 시 민형사상의 책임을 지겠다는 내용입니다.

법률 사무소를 나온 일행은 또 10여 분을 걸어 한 은행 지점으로 들어갑니다.

작업은 은행 2층에서 이뤄졌습니다.

먼저, 업체 사장 명의의 통장이 개설되고, 사채업자로부터 돈이 입금됩니다.

거래가 끝날 무렵 통장과 도장은 다시 사채 브로커에게 전해집니다.

업체 사장이 받은 것은 한 장짜리 잔고증명서뿐입니다.

사채업자는 선이자로 건당 수천만 원을 챙기고, 두 달 뒤, 빌려준 원금은 물론 거기에 붙은 이자까지 모조리 가져갑니다.

그럼 은행은 왜 이 작전에 끼는 걸까?

<녹취> 사채 브로커 : "은행 지점 수신고(예금)가 엄청나게 올라가는데. 연말 자금으로만 지점 1년치 수신고 다해버려요."

은행은 수신고 실적을 올리고 또 돈을 빌린 업체가 인출을 못 하는 동안 수천억 원대 자금을 두 달간 운용해 수익도 낸다는 얘깁니다.

은행은 수지맞는 장사를 했지만, 거래 기업의 자금력을 위장해주는 이런 영업 행위는 모두 불법입니다.

<녹취> 금융감독원 관계자(음성변조) : "일반적인 감독이나 검사 기법으로는 확인하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주변에 있는 은행 임직원들 얘기 들어보면 지금 말씀하신 경우가 많이 있어요."

이처럼 손쉽게 몸집을 키워온 사채업계의 큰 손들.

이제는 막대한 자금을 무기로 또 다른 먹잇감을 찾아 나서고 있습니다.

2000년대 급성장한 상조업.

등록업체만 300개에 이르고, 시장규모는 연간 7조 원에 육박합니다.

그와 더불어 소비자 피해도 점차 커지고 있습니다.

2012년부터 지난해 6월까지 한국소비자원에 접수된 상조 관련 피해 사례는 모두 천2백여 건.

그중 가장 많은 민원이 발생한 업체는 업계 순위 9위, 회원 수만 4만 명 넘는 '그린우리상조'입니다.

잘나가던 상조회사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인터뷰> 김호승(상조뉴스 대표) : "찍기가 들어온 거죠. 70억이 찍기가 들어온 거예요. (찍기라고 하면?) 그 돈을 실질적으로 계약서상에는 1년 동안 돈을 빌려주는 거지만, 이면 계약에는 그 돈을 가져가서 회사 인수해서 잔금만 치르고 바로 거기서 돈을 빼서 가는 거죠."

2012년 2월, 사채업자 최 모 회장의 자금을 운용한다고 알려진 A캐피탈 등이 이 상조업체를 130억 원에 사들입니다.

동원된 사채는 65억 원.

이들은 인수 닷새 만에 회원들의 예치금을 빼돌려 사채 빚 65억 원을 갚았습니다.

그린우리상조는 앞서 2011년에 39억 원에 거래됐던 회삽니다.

불과 다섯 달 만에 100억 원이나 비싸게 이 상조회사를 인수한 이유는 뭘까?

<인터뷰> 김호승(상조뉴스 대표) : "현금이 있었던 게 은행에 예치가 130억 정도 돼 있었고요. 나머지는 180억 정도가 현금성 자산으로 있었죠. 주식하고 유가증권 현금으로 환원할 수 있는 자산이. 그렇게 한 310억 정도가 현금이 있었던 회사죠."

인수 후 회사 경영은 안중에도 없었고, 오직 현금만을 노린 겁니다.

상조회사를 인수한 이들이 곧바로 빼돌린 회원들의 돈은 확인된 것만 140억 원.

또 4만여 명의 회원들은 다른 상조업체에 13억 원을 받고 넘겼습니다.

<인터뷰> 전형근(서울중앙지검 형사2부장) : "무자본으로 상조회사를 인수하였고, 인수 후 서로 경쟁적으로 횡령하여 다수의 피해자를 양산하였습니다."

취재진은 현재 횡령 혐의로 수감중인 상조회사 전 대표 송 모씨를 만났습니다.

송 씨는 함께 회사를 인수했던 사채업자에게 철저히 속았다고 주장했습니다.

<녹취> 송 모씨(상조회사 전 대표/음성변조) : "000이 서울에 2월 1일 올라오면서부터 저하고 000을 철저하게 속인 거에요. 10억을 계약금 주는 부분도 속이고, 중도금 주는 부분도 속이고, 60억이 들어왔다 나간 것도 저도 수사가 종료될 때쯤에서야 '아, 이랬었구나!' 이해를..."

회사는 결국 한순간에 공중분해 되고 말았습니다.

<녹취> "(말씀 좀 묻겠습니다. 그린우리상조라는 회사가?) 진작에 나갔어요. (이사 갔어요? 언제쯤?)올 봄에 갔나? 초봄에 갔는가? 한참 됐어요."

업계에서는 사채업자가 인수한 또 다른 상조회사가 이미 여럿이고, 지금도 우량 회사를 인수하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돌고 있습니다.

<인터뷰> 김호승(상조뉴스 대표) : "(TV)틀면 나오는 상조회사 있잖아요. 그런 회사도 대표가 사채를 수십 년 해온 사람이고, 일부 두세 군데에는 사채 자금이 들어왔어요. 지금도 찍기를 하려고 그건 규모가 좀 적은데, 지금도 찍기를 하려고 돈이 기다리고 있어요. 사실은."

수십 년 세월 어두운 지하경제로 불리며 소리없이 몸집을 키워온 사채시장의 큰 손들.

이제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그들은 막대한 이자 챙기기를 넘어 건실한 기업까지 통째로 노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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