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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둘레·가족직업까지…공공기관 취업생 신상털기
입력 2014.01.26 (08:13) 연합뉴스
취업준비생 백모(27)씨는 요즘 이력서를 쓰다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경우가 많다.

가족관계와 몸무게 등 지원자가 회사에 필요한 인재인지 심사하는데 전혀 필요 없을법한 정보까지 이력서에 적으라는 회사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백씨는 "출신학교와 학점, 자격증, 토익점수 등은 물어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정보들은 왜 묻는지 모르겠다"며 "몸무게가 다소 많이 나가는데, 통념상 게으른 사람으로 낙인찍혀 전형 과정에서 불이익을 받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까지 든다"고 말했다.

◇"바지 사이즈가 채용과 무슨 상관?"

26일 각 공공기관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채용정보를 검토해보니 백씨의 사례처럼 채용에 필수적인지 의문이 생기는 개인정보를 지원자들에게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규직 전환이 가능한 인턴사원을 모집하고 있는 한국철도공사(코레일)는 입사지원서에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생년월일, 현주소, 주민등록지, 전화번호, 휴대폰, 이메일주소를 필수로 입력하게 하고 있다.

그런데 입사지원서에는 신체조건(신장·체중), 시력, 혈액형, 상의사이즈, 허리사이즈, 신발사이즈, 장애, 장애내용, 장애등급, 결혼여부를 적어넣는 '신상자료'란도 만들어져 있다.

인턴 성적이 좋아 정규직으로 채용될 경우 운전·차량부문은 물론 사무영업과 토목·건축부문 지원자도 색맹이나 적록색약 등 색각이상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시력 외에 허리사이즈나 결혼 여부까지 지원 단계에서 밝혀야 하는지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이에 대해 코레일 측은 인턴사원 합격 후 피복 지급을 위한 자료로 신상자료를 쓰고 있다며, 필수 입력사항이 아닌데다 장애사항도 평가에 전혀 불이익이 없다고 강조했다.

가족관계를 지나치게 상세히 묻는 곳도 많다.

간호사를 채용 중인 대한적십자사 서울남부혈액원 이력서에는 가족의 성명과 연령, 직업·직장·직위를 넣는 칸도 있다.

특히 대한적십자사는 응시자에게 '개인정보 수집·이용 동의서'를 작성하도록 하면서 제출 후 만 3년 또는 입사지원서 삭제를 요청할 때까지 개인정보를 보유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동의하지 않으면 이력서를 접수할 수 없다.

지원자가 추후 다시 지원할 가능성 등을 고려해 개인정보 삭제를 요청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구직자 정보를 3년간 갖고 있겠다는 뜻이다.

한국거래소 파생연구센터에서도 연구원을 뽑으면서 가족사항을 묻는다. 가족의 관계, 성명, 연령, 직업, 근무처, 직위, 동거여부까지 써넣도록 하고 있다.

한국특허정보원도 각 부문 신입사원 공채를 진행하면서 지원자의 가족사항, 특 가족과의 관계, 성명, 연령, 근무회사명, 직위, 동거여부를 적어넣게 했다.

◇"학력·나이 차별 철폐 다음은 과도한 정보수집 금지"

구직자들은 최근 몇 년 사이 을(乙)의 위치에 있는 지원자들을 힘들게 하는 차별이 채용 과정에서 많이 줄었다고 입을 모은다.

학력제한이나 나이제한이 없어진 점, 특성화고교 등 고교졸업자 채용과 지방 인재 채용이 늘어난 점이 그 예다.

하지만 지원자들을 갑(甲)의 위치에서 바라보는 회사들의 불합리한 태도는 여전하다는 목소리가 크다.

특히 일각에서는 채용 관련 정보를 수년간 보유하는 것과 관련해 직원이 아닌 구직자의 개인정보조차 회사의 '자산'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도 나온다.

동종업계 인사업무 담당자들 사이에 구직자들의 정보나 일명 '블랙리스트'를 공유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까지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다.

취업준비생 김모(26·여)씨는 "한 회사에서 인턴을 하다가 상사와 다투고 퇴사했는데, 이후로 동종업계에 입사지원서를 내면 1단계에서부터 탈락했다"며 "기업끼리 입사지원서를 공유하고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필터링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 답답하다"고 전했다.

직장인 오모(29)씨는 "입사원서에 부모형제의 이름, 직업, 학력부터 내 출생지까지 물어봐서 어이없었다"며 "대부분 기업이 입사지원서를 본인에게 돌려주지 않는데, 다른회사 인사부와 공유해 지원자를 '걸러내기' 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채용된 사람이 아니라 지원 단계에 있는 구직자들에게까지 필수적이지 않은 정보를 묻는 것도 기업이 회사의 권위를 남용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윤철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소비자정의센터 팀장은 "이력서에 가족관계, 부모님 직업, 신체적 특징 등 업무상 불필요한 정보를 요구하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윤 팀장은 "더 큰 문제는 채용되지 않은 응시자들의 정보가 폐기되지 않고 유출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라며 "자율에 맡기기 어렵다면 기업이나 공공기관이 무리한 정보 취득에 나서지 않도록 고용노동부가 이를 제도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가인권위원장을 지낸 안경환 서울대 법과대학 명예교수는 "직원이 아닌 응시자에게는 채용에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만 요구하는 것이 맞다"며 "응시자에게 요구하는 그 많은 정보가 과연 채용에 필요한 정보인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 허리둘레·가족직업까지…공공기관 취업생 신상털기
    • 입력 2014-01-26 08:13:56
    연합뉴스
취업준비생 백모(27)씨는 요즘 이력서를 쓰다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경우가 많다.

가족관계와 몸무게 등 지원자가 회사에 필요한 인재인지 심사하는데 전혀 필요 없을법한 정보까지 이력서에 적으라는 회사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백씨는 "출신학교와 학점, 자격증, 토익점수 등은 물어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정보들은 왜 묻는지 모르겠다"며 "몸무게가 다소 많이 나가는데, 통념상 게으른 사람으로 낙인찍혀 전형 과정에서 불이익을 받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까지 든다"고 말했다.

◇"바지 사이즈가 채용과 무슨 상관?"

26일 각 공공기관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채용정보를 검토해보니 백씨의 사례처럼 채용에 필수적인지 의문이 생기는 개인정보를 지원자들에게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규직 전환이 가능한 인턴사원을 모집하고 있는 한국철도공사(코레일)는 입사지원서에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생년월일, 현주소, 주민등록지, 전화번호, 휴대폰, 이메일주소를 필수로 입력하게 하고 있다.

그런데 입사지원서에는 신체조건(신장·체중), 시력, 혈액형, 상의사이즈, 허리사이즈, 신발사이즈, 장애, 장애내용, 장애등급, 결혼여부를 적어넣는 '신상자료'란도 만들어져 있다.

인턴 성적이 좋아 정규직으로 채용될 경우 운전·차량부문은 물론 사무영업과 토목·건축부문 지원자도 색맹이나 적록색약 등 색각이상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시력 외에 허리사이즈나 결혼 여부까지 지원 단계에서 밝혀야 하는지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이에 대해 코레일 측은 인턴사원 합격 후 피복 지급을 위한 자료로 신상자료를 쓰고 있다며, 필수 입력사항이 아닌데다 장애사항도 평가에 전혀 불이익이 없다고 강조했다.

가족관계를 지나치게 상세히 묻는 곳도 많다.

간호사를 채용 중인 대한적십자사 서울남부혈액원 이력서에는 가족의 성명과 연령, 직업·직장·직위를 넣는 칸도 있다.

특히 대한적십자사는 응시자에게 '개인정보 수집·이용 동의서'를 작성하도록 하면서 제출 후 만 3년 또는 입사지원서 삭제를 요청할 때까지 개인정보를 보유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동의하지 않으면 이력서를 접수할 수 없다.

지원자가 추후 다시 지원할 가능성 등을 고려해 개인정보 삭제를 요청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구직자 정보를 3년간 갖고 있겠다는 뜻이다.

한국거래소 파생연구센터에서도 연구원을 뽑으면서 가족사항을 묻는다. 가족의 관계, 성명, 연령, 직업, 근무처, 직위, 동거여부까지 써넣도록 하고 있다.

한국특허정보원도 각 부문 신입사원 공채를 진행하면서 지원자의 가족사항, 특 가족과의 관계, 성명, 연령, 근무회사명, 직위, 동거여부를 적어넣게 했다.

◇"학력·나이 차별 철폐 다음은 과도한 정보수집 금지"

구직자들은 최근 몇 년 사이 을(乙)의 위치에 있는 지원자들을 힘들게 하는 차별이 채용 과정에서 많이 줄었다고 입을 모은다.

학력제한이나 나이제한이 없어진 점, 특성화고교 등 고교졸업자 채용과 지방 인재 채용이 늘어난 점이 그 예다.

하지만 지원자들을 갑(甲)의 위치에서 바라보는 회사들의 불합리한 태도는 여전하다는 목소리가 크다.

특히 일각에서는 채용 관련 정보를 수년간 보유하는 것과 관련해 직원이 아닌 구직자의 개인정보조차 회사의 '자산'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도 나온다.

동종업계 인사업무 담당자들 사이에 구직자들의 정보나 일명 '블랙리스트'를 공유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까지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다.

취업준비생 김모(26·여)씨는 "한 회사에서 인턴을 하다가 상사와 다투고 퇴사했는데, 이후로 동종업계에 입사지원서를 내면 1단계에서부터 탈락했다"며 "기업끼리 입사지원서를 공유하고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필터링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 답답하다"고 전했다.

직장인 오모(29)씨는 "입사원서에 부모형제의 이름, 직업, 학력부터 내 출생지까지 물어봐서 어이없었다"며 "대부분 기업이 입사지원서를 본인에게 돌려주지 않는데, 다른회사 인사부와 공유해 지원자를 '걸러내기' 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채용된 사람이 아니라 지원 단계에 있는 구직자들에게까지 필수적이지 않은 정보를 묻는 것도 기업이 회사의 권위를 남용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윤철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소비자정의센터 팀장은 "이력서에 가족관계, 부모님 직업, 신체적 특징 등 업무상 불필요한 정보를 요구하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윤 팀장은 "더 큰 문제는 채용되지 않은 응시자들의 정보가 폐기되지 않고 유출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라며 "자율에 맡기기 어렵다면 기업이나 공공기관이 무리한 정보 취득에 나서지 않도록 고용노동부가 이를 제도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가인권위원장을 지낸 안경환 서울대 법과대학 명예교수는 "직원이 아닌 응시자에게는 채용에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만 요구하는 것이 맞다"며 "응시자에게 요구하는 그 많은 정보가 과연 채용에 필요한 정보인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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