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산 독가촌 “밖에 나갈 엄두를 낼 수가 있나”

입력 2014.02.09 (18:02) 수정 2014.02.09 (18:05)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밖에 나갈 엄두를 낼 수가 있나. 그냥 텔레비전(TV)이나 보는 거지."

"그런데 어떻게 눈을 뚫고 여기까지 왔어?"

지난 6일 시작해 9일까지 내린 눈이 허리춤까지 쌓인 대관령 기슭의 강릉시 왕산면 왕산골 차순섭(88) 할아버지 집은 눈 속에 묻혀 고요했다.

몇 번을 소리쳐 불러도 별다른 인기척이 없다.

계곡을 가로지른 다리를 건너 성인 허리춤까지 쌓인 눈을 뚫고 도착한 기자를 보고 "이 눈에 누가 올지 알았나? 그런데 어떻게 왔어?"라며 오히려 놀라워했다.

차 할아버지가 사는 곳은 강릉에서 정선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 달리다 산골마을의 대명사이자 고랭지 채소와 감자로 유명한 왕산면 대기리로 가는 지방도 415호로 들어서고 나서 계곡을 건너 들어가는 곳.

산 아래에 집 한 채만 덩그러니 있는 말 그대로 '독가촌'(외딴집)이다.

폭설에 길이 모두 없어져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밭인지 도저히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다.

차 할아버지 집으로 가는 길옆 눈 속에 묻혀 형태조차 알 수 없는 SUV 차량이 이곳이 길임을 알려줬고, 마당 앞의 우편함은 절반 이상이 눈 속에 묻혀 있다.

마당의 눈이 나흘째 쌓인 그대로고 지붕의 눈도 무게가 힘겨워 보였다.

집 주변은 발자국조차 나지 않은 말 그대로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태였다.

마당 한구석의 개 집까지만 겨우 다닐 수 있는 토끼 길을 뚫어 놓은 실정이다.

차 할아버지는 "여기서 세 식구가 사는 데 겨우내 먹을 식량은 준비해 뒀고 화장실도 안에 있어 밖에 나갈 일이 없어 아직은 견딜만하다"며 "허리도 아프고 나이도 많아 눈은 치울 생각도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처럼 마을과 뚝 떨어져 있는 외딴 집은 제설작업 지원받기도 어려워 좀 불편하더라도 기다려야지. 그런데 아프면 큰일이지"라며 눈에 이골이 난 듯 의연한 모습이었다.

왕산지역의 나흘째 적설량은 수치상 60㎝를 조금 넘었지만 실제로는 80㎝를 훌쩍 넘을 것이라고 주민들은 설명했다.

그런데 눈은 10일까지 최고 30㎝ 이상 더 올 거라는 예보다.

강릉에서 정선을 가는 35번 국도에서 들어가는 왕산면 탑동마을도 눈 속에 묻혔다.

어제까지 마을 주민들이 힘을 합해 우선 왕래할 수 있도록 집집이 토끼 길을 뚫었으나 밤새 내린 눈으로 허사가 됐다.

마을과 좀 떨어져 있는 한 외딴집은 강아지 2마리만이 왕왕 짖으며 낯선 방문자를 경계했다.

비닐하우스가 무너질까 눈을 치우고 있던 이현규(77) 할아버지는 "우리 동네는 나이 든 노인들이 많아 아프면 큰일이어서 우선 토끼 길을 내고 있지만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팔다리, 허리가 아파 병원에 다니며 물리치료를 받아야 하는 분들이 대부분인데 당분간 꼼짝하기 힘들어졌다"고 덧붙였다.

왕산면은 골짜기 골짜기에 가옥이 떨어져 있는 곳이 많고 길이 좁은 데다 언덕이 많아 보통의 장비로는 제설작업이 쉽지 않다.

이종학 왕산면장은 "독가촌은 대부분 어르신만 사는 곳이 많아 눈을 스스로 치울 수 없는 형편이어서 사실상 고립된 상태"라며 "그러나 아프거나 급한 상태가 아니면 식량과 땔감 등 농촌 특성상 며칠 정도 견디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왕산면은 병원을 가야 하거나 급한 볼일이 있는 독가촌은 장비와 인력을 우선 지원해 폭설에 따른 문제가 없도록 치워주고 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줄기차게 쏟아졌던 폭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반짝 해가 솟으면서 그쳤다 또다시 거센 눈보라가 몰아치는 등 눈이 계속되고 있다.

트랙터를 비롯한 제설장비가 고립마을을 향해 제설작업을 계속했다.

왕산면 안반데기 마을을 비롯한 강동면, 성산면, 구정면, 연곡면 등 폭설로 시내버스가 운행하지 않거나 회차해 고립된 가운데 차씨 할아버지 집처럼 고령의 어르신들이 사는 강릉 산골마을 독가촌 대부분은 아직 깊은 눈 속에 묻혀 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왕산 독가촌 “밖에 나갈 엄두를 낼 수가 있나”
    • 입력 2014-02-09 18:02:42
    • 수정2014-02-09 18:05:11
    연합뉴스
"밖에 나갈 엄두를 낼 수가 있나. 그냥 텔레비전(TV)이나 보는 거지." "그런데 어떻게 눈을 뚫고 여기까지 왔어?" 지난 6일 시작해 9일까지 내린 눈이 허리춤까지 쌓인 대관령 기슭의 강릉시 왕산면 왕산골 차순섭(88) 할아버지 집은 눈 속에 묻혀 고요했다. 몇 번을 소리쳐 불러도 별다른 인기척이 없다. 계곡을 가로지른 다리를 건너 성인 허리춤까지 쌓인 눈을 뚫고 도착한 기자를 보고 "이 눈에 누가 올지 알았나? 그런데 어떻게 왔어?"라며 오히려 놀라워했다. 차 할아버지가 사는 곳은 강릉에서 정선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 달리다 산골마을의 대명사이자 고랭지 채소와 감자로 유명한 왕산면 대기리로 가는 지방도 415호로 들어서고 나서 계곡을 건너 들어가는 곳. 산 아래에 집 한 채만 덩그러니 있는 말 그대로 '독가촌'(외딴집)이다. 폭설에 길이 모두 없어져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밭인지 도저히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다. 차 할아버지 집으로 가는 길옆 눈 속에 묻혀 형태조차 알 수 없는 SUV 차량이 이곳이 길임을 알려줬고, 마당 앞의 우편함은 절반 이상이 눈 속에 묻혀 있다. 마당의 눈이 나흘째 쌓인 그대로고 지붕의 눈도 무게가 힘겨워 보였다. 집 주변은 발자국조차 나지 않은 말 그대로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태였다. 마당 한구석의 개 집까지만 겨우 다닐 수 있는 토끼 길을 뚫어 놓은 실정이다. 차 할아버지는 "여기서 세 식구가 사는 데 겨우내 먹을 식량은 준비해 뒀고 화장실도 안에 있어 밖에 나갈 일이 없어 아직은 견딜만하다"며 "허리도 아프고 나이도 많아 눈은 치울 생각도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처럼 마을과 뚝 떨어져 있는 외딴 집은 제설작업 지원받기도 어려워 좀 불편하더라도 기다려야지. 그런데 아프면 큰일이지"라며 눈에 이골이 난 듯 의연한 모습이었다. 왕산지역의 나흘째 적설량은 수치상 60㎝를 조금 넘었지만 실제로는 80㎝를 훌쩍 넘을 것이라고 주민들은 설명했다. 그런데 눈은 10일까지 최고 30㎝ 이상 더 올 거라는 예보다. 강릉에서 정선을 가는 35번 국도에서 들어가는 왕산면 탑동마을도 눈 속에 묻혔다. 어제까지 마을 주민들이 힘을 합해 우선 왕래할 수 있도록 집집이 토끼 길을 뚫었으나 밤새 내린 눈으로 허사가 됐다. 마을과 좀 떨어져 있는 한 외딴집은 강아지 2마리만이 왕왕 짖으며 낯선 방문자를 경계했다. 비닐하우스가 무너질까 눈을 치우고 있던 이현규(77) 할아버지는 "우리 동네는 나이 든 노인들이 많아 아프면 큰일이어서 우선 토끼 길을 내고 있지만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팔다리, 허리가 아파 병원에 다니며 물리치료를 받아야 하는 분들이 대부분인데 당분간 꼼짝하기 힘들어졌다"고 덧붙였다. 왕산면은 골짜기 골짜기에 가옥이 떨어져 있는 곳이 많고 길이 좁은 데다 언덕이 많아 보통의 장비로는 제설작업이 쉽지 않다. 이종학 왕산면장은 "독가촌은 대부분 어르신만 사는 곳이 많아 눈을 스스로 치울 수 없는 형편이어서 사실상 고립된 상태"라며 "그러나 아프거나 급한 상태가 아니면 식량과 땔감 등 농촌 특성상 며칠 정도 견디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왕산면은 병원을 가야 하거나 급한 볼일이 있는 독가촌은 장비와 인력을 우선 지원해 폭설에 따른 문제가 없도록 치워주고 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줄기차게 쏟아졌던 폭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반짝 해가 솟으면서 그쳤다 또다시 거센 눈보라가 몰아치는 등 눈이 계속되고 있다. 트랙터를 비롯한 제설장비가 고립마을을 향해 제설작업을 계속했다. 왕산면 안반데기 마을을 비롯한 강동면, 성산면, 구정면, 연곡면 등 폭설로 시내버스가 운행하지 않거나 회차해 고립된 가운데 차씨 할아버지 집처럼 고령의 어르신들이 사는 강릉 산골마을 독가촌 대부분은 아직 깊은 눈 속에 묻혀 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