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독일에 묻다 ① 분단에서 통일까지
입력 2014.03.15 (07:49)
수정 2014.03.15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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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
<녹취> 발터 몸퍼(89년 당시 서베를린 시장) : “오늘 우리 독일인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민족입니다”
<녹취> 고르바초프(89년 당시 소련 서기장) : "진정한 영웅은 바로 독일 사람들 자신입니다."
1989년 11월 9일.
독일 통일은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동독과 서독의 경계였던 베를린 장벽으로 수만 명의 사람들이 뛰쳐나오자 도시는 마비됐고, 장벽을 지키는 국경수비대는 당황했다.
자유와 통일을 향한 독일 국민들의 열망이 거대한 장벽을 무너뜨렸다.
냉전시대의 상징이자 28년 동안 독일을 둘로 갈라놓았던 베를린 장벽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순간이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자, 동독과 서독 국민들은 한마음으로 환호했다.
이들은 밤낮없이 축제의 장에 흠뻑 취했다.
너나할 것 없이 샴페인을 건네고 서로를 뜨겁게 환영했으며 단체로 춤을 추며 기쁨을 함께했다.
굳게 닫혀있던 브란덴부르크 문에 모여든 사람들은 장벽 위에 올라가 자유를 만끽했다.
<녹취> 독일 국민 : (통일될 걸 예상했었나요?) 아니오. 전혀 예상 못했어요. (오늘 밤 어떻게 생각해요?) 환상적이에요. 우리가 기다려왔던 날이죠."
외신들도 베를린 장벽의 붕괴 소식을 긴급 보도로 타전했다.
장벽이 붕괴돼 독일 통일을 마무리하는데 까진 채 1년이 걸리지 않았다.
독일이 동서독으로 분단된 것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독일을 분할 관리하던 강대국들의 갈등 때문이었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서방 3개국과 소련간의 대립은 결국 1949년 5월과 10월, 서독과 동독으로 갈라서게 했다.
분단 초기에는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경계를 섰으나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출이 잇따르자 1961년 8월 13일, 동독은 단단한 콘크리트 벽돌로 베를린 장벽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자유를 찾아 장벽을 뛰어넘어 서독으로 향하던 중 동독의 국경수비대에 의해 목숨을 잃기도 했다.
1980년대 들어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국경을 열고,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개혁개방을 주장하자 동독 주민들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동독의 공산당에 대한 불만은 ‘월요시위’라는 대규모 시위로 번졌고,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기 직전까지 수 천 명에서 수십만 명이 참여해 독일 통일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성난 민심을 잠재우기 위해 동독 정치국의 샤보스키 대변인이 기자회견을 열어 여행자유화를 발표한 내용이 국경 개방 소식으로 잘못 알려져 장벽 붕괴로까지 이어졌다.
<녹취> 에셔(동독 출신 언론인) : "아침에 보니까 맙소사, 누구도 예상 못했던 (베를린)장벽 붕괴가 일어난 겁니다."
독일의 통일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동독과 서독은 분단 상황에서도 다방면에서 교류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 가운데서도 통일을 이끌어내는데 방송의 역할은 큰 비중을 차지했다.
동서독 주민들은 서로의 TV 방송을 시청할 수 있었으며, 동독 국민들은 TV를 통해 서독의 발전된 모습을 접할 수 있어 통일의 열망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
1963년 동독 정부는 통행증 협약을 통해 이산가족의 만남을 허용했으며 은퇴 고령자에 한해 서독 방문을 허가하기도 했다.
<인터뷰> 염돈재(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장) : "다양한 분야에 대해서 교류가 있었습니다. 또 보다 구체적 으로 얘기하면 동서독 간에 체결된 협정과 합의가 16개나 됐고요. 우리 돈으로 얘기해 서 한 8조원에 달하는 그런 경제 거래가 있었고요. 매년 천만 명의 동서독 주민들이 서 로 왕래하고 방문을 했습니다. 우리하고 많이 차이가 있죠."
동독의 제한적인 개혁개방은 서독이 동독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경제난에 시달리던 동독은 1972년 12월, 서독과 기본 조약을 체결해 경제적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
동서독 주민의 왕래를 위한 통행료 지급이 주된 지원이었고, 민간차원의 지원과 함께 외환위기를 겪던 동독에게 차관 보증을 제공하기도 했다.
독일 분단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지 25년.
전 세계의 예술가들이 장벽에 벽화를 그려 넣은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는 베를린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남한과 북한의 경계선 DMZ, 비무장지대가 들어선 지도 올해로 61년. 한반도는 여전히 분단국가로 남아있다.
통일 독일은 통일 한반도를 열어 가는데 중요한 본보기다.
<인터뷰> 염돈재(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장) : "대한민국을 북한 주민이 동경하는 국가로 건설하는 것, 그리고 통일의 기회가 왔을 적에 신속히 통일을 할 수 있는 준비 를 갖춰놓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언젠가는 북한이 조금이라도 진정성을 보이 게 되면 그때는 우리가 즉시 대화하고, 또 지원을 할 수 있도록 대화의 문을 열어놓는 것도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서독의 경제적 지원과 꾸준한 교류가 동독의 변화를 만들어내고 결국 통일 독일로 이끈 원동력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녹취> 발터 몸퍼(89년 당시 서베를린 시장) : “오늘 우리 독일인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민족입니다”
<녹취> 고르바초프(89년 당시 소련 서기장) : "진정한 영웅은 바로 독일 사람들 자신입니다."
1989년 11월 9일.
독일 통일은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동독과 서독의 경계였던 베를린 장벽으로 수만 명의 사람들이 뛰쳐나오자 도시는 마비됐고, 장벽을 지키는 국경수비대는 당황했다.
자유와 통일을 향한 독일 국민들의 열망이 거대한 장벽을 무너뜨렸다.
냉전시대의 상징이자 28년 동안 독일을 둘로 갈라놓았던 베를린 장벽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순간이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자, 동독과 서독 국민들은 한마음으로 환호했다.
이들은 밤낮없이 축제의 장에 흠뻑 취했다.
너나할 것 없이 샴페인을 건네고 서로를 뜨겁게 환영했으며 단체로 춤을 추며 기쁨을 함께했다.
굳게 닫혀있던 브란덴부르크 문에 모여든 사람들은 장벽 위에 올라가 자유를 만끽했다.
<녹취> 독일 국민 : (통일될 걸 예상했었나요?) 아니오. 전혀 예상 못했어요. (오늘 밤 어떻게 생각해요?) 환상적이에요. 우리가 기다려왔던 날이죠."
외신들도 베를린 장벽의 붕괴 소식을 긴급 보도로 타전했다.
장벽이 붕괴돼 독일 통일을 마무리하는데 까진 채 1년이 걸리지 않았다.
독일이 동서독으로 분단된 것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독일을 분할 관리하던 강대국들의 갈등 때문이었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서방 3개국과 소련간의 대립은 결국 1949년 5월과 10월, 서독과 동독으로 갈라서게 했다.
분단 초기에는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경계를 섰으나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출이 잇따르자 1961년 8월 13일, 동독은 단단한 콘크리트 벽돌로 베를린 장벽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자유를 찾아 장벽을 뛰어넘어 서독으로 향하던 중 동독의 국경수비대에 의해 목숨을 잃기도 했다.
1980년대 들어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국경을 열고,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개혁개방을 주장하자 동독 주민들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동독의 공산당에 대한 불만은 ‘월요시위’라는 대규모 시위로 번졌고,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기 직전까지 수 천 명에서 수십만 명이 참여해 독일 통일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성난 민심을 잠재우기 위해 동독 정치국의 샤보스키 대변인이 기자회견을 열어 여행자유화를 발표한 내용이 국경 개방 소식으로 잘못 알려져 장벽 붕괴로까지 이어졌다.
<녹취> 에셔(동독 출신 언론인) : "아침에 보니까 맙소사, 누구도 예상 못했던 (베를린)장벽 붕괴가 일어난 겁니다."
독일의 통일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동독과 서독은 분단 상황에서도 다방면에서 교류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 가운데서도 통일을 이끌어내는데 방송의 역할은 큰 비중을 차지했다.
동서독 주민들은 서로의 TV 방송을 시청할 수 있었으며, 동독 국민들은 TV를 통해 서독의 발전된 모습을 접할 수 있어 통일의 열망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
1963년 동독 정부는 통행증 협약을 통해 이산가족의 만남을 허용했으며 은퇴 고령자에 한해 서독 방문을 허가하기도 했다.
<인터뷰> 염돈재(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장) : "다양한 분야에 대해서 교류가 있었습니다. 또 보다 구체적 으로 얘기하면 동서독 간에 체결된 협정과 합의가 16개나 됐고요. 우리 돈으로 얘기해 서 한 8조원에 달하는 그런 경제 거래가 있었고요. 매년 천만 명의 동서독 주민들이 서 로 왕래하고 방문을 했습니다. 우리하고 많이 차이가 있죠."
동독의 제한적인 개혁개방은 서독이 동독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경제난에 시달리던 동독은 1972년 12월, 서독과 기본 조약을 체결해 경제적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
동서독 주민의 왕래를 위한 통행료 지급이 주된 지원이었고, 민간차원의 지원과 함께 외환위기를 겪던 동독에게 차관 보증을 제공하기도 했다.
독일 분단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지 25년.
전 세계의 예술가들이 장벽에 벽화를 그려 넣은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는 베를린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남한과 북한의 경계선 DMZ, 비무장지대가 들어선 지도 올해로 61년. 한반도는 여전히 분단국가로 남아있다.
통일 독일은 통일 한반도를 열어 가는데 중요한 본보기다.
<인터뷰> 염돈재(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장) : "대한민국을 북한 주민이 동경하는 국가로 건설하는 것, 그리고 통일의 기회가 왔을 적에 신속히 통일을 할 수 있는 준비 를 갖춰놓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언젠가는 북한이 조금이라도 진정성을 보이 게 되면 그때는 우리가 즉시 대화하고, 또 지원을 할 수 있도록 대화의 문을 열어놓는 것도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서독의 경제적 지원과 꾸준한 교류가 동독의 변화를 만들어내고 결국 통일 독일로 이끈 원동력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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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정2014-03-15 10:06:36
<리포트>
<녹취> 발터 몸퍼(89년 당시 서베를린 시장) : “오늘 우리 독일인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민족입니다”
<녹취> 고르바초프(89년 당시 소련 서기장) : "진정한 영웅은 바로 독일 사람들 자신입니다."
1989년 11월 9일.
독일 통일은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동독과 서독의 경계였던 베를린 장벽으로 수만 명의 사람들이 뛰쳐나오자 도시는 마비됐고, 장벽을 지키는 국경수비대는 당황했다.
자유와 통일을 향한 독일 국민들의 열망이 거대한 장벽을 무너뜨렸다.
냉전시대의 상징이자 28년 동안 독일을 둘로 갈라놓았던 베를린 장벽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순간이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자, 동독과 서독 국민들은 한마음으로 환호했다.
이들은 밤낮없이 축제의 장에 흠뻑 취했다.
너나할 것 없이 샴페인을 건네고 서로를 뜨겁게 환영했으며 단체로 춤을 추며 기쁨을 함께했다.
굳게 닫혀있던 브란덴부르크 문에 모여든 사람들은 장벽 위에 올라가 자유를 만끽했다.
<녹취> 독일 국민 : (통일될 걸 예상했었나요?) 아니오. 전혀 예상 못했어요. (오늘 밤 어떻게 생각해요?) 환상적이에요. 우리가 기다려왔던 날이죠."
외신들도 베를린 장벽의 붕괴 소식을 긴급 보도로 타전했다.
장벽이 붕괴돼 독일 통일을 마무리하는데 까진 채 1년이 걸리지 않았다.
독일이 동서독으로 분단된 것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독일을 분할 관리하던 강대국들의 갈등 때문이었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서방 3개국과 소련간의 대립은 결국 1949년 5월과 10월, 서독과 동독으로 갈라서게 했다.
분단 초기에는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경계를 섰으나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출이 잇따르자 1961년 8월 13일, 동독은 단단한 콘크리트 벽돌로 베를린 장벽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자유를 찾아 장벽을 뛰어넘어 서독으로 향하던 중 동독의 국경수비대에 의해 목숨을 잃기도 했다.
1980년대 들어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국경을 열고,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개혁개방을 주장하자 동독 주민들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동독의 공산당에 대한 불만은 ‘월요시위’라는 대규모 시위로 번졌고,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기 직전까지 수 천 명에서 수십만 명이 참여해 독일 통일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성난 민심을 잠재우기 위해 동독 정치국의 샤보스키 대변인이 기자회견을 열어 여행자유화를 발표한 내용이 국경 개방 소식으로 잘못 알려져 장벽 붕괴로까지 이어졌다.
<녹취> 에셔(동독 출신 언론인) : "아침에 보니까 맙소사, 누구도 예상 못했던 (베를린)장벽 붕괴가 일어난 겁니다."
독일의 통일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동독과 서독은 분단 상황에서도 다방면에서 교류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 가운데서도 통일을 이끌어내는데 방송의 역할은 큰 비중을 차지했다.
동서독 주민들은 서로의 TV 방송을 시청할 수 있었으며, 동독 국민들은 TV를 통해 서독의 발전된 모습을 접할 수 있어 통일의 열망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
1963년 동독 정부는 통행증 협약을 통해 이산가족의 만남을 허용했으며 은퇴 고령자에 한해 서독 방문을 허가하기도 했다.
<인터뷰> 염돈재(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장) : "다양한 분야에 대해서 교류가 있었습니다. 또 보다 구체적 으로 얘기하면 동서독 간에 체결된 협정과 합의가 16개나 됐고요. 우리 돈으로 얘기해 서 한 8조원에 달하는 그런 경제 거래가 있었고요. 매년 천만 명의 동서독 주민들이 서 로 왕래하고 방문을 했습니다. 우리하고 많이 차이가 있죠."
동독의 제한적인 개혁개방은 서독이 동독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경제난에 시달리던 동독은 1972년 12월, 서독과 기본 조약을 체결해 경제적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
동서독 주민의 왕래를 위한 통행료 지급이 주된 지원이었고, 민간차원의 지원과 함께 외환위기를 겪던 동독에게 차관 보증을 제공하기도 했다.
독일 분단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지 25년.
전 세계의 예술가들이 장벽에 벽화를 그려 넣은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는 베를린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남한과 북한의 경계선 DMZ, 비무장지대가 들어선 지도 올해로 61년. 한반도는 여전히 분단국가로 남아있다.
통일 독일은 통일 한반도를 열어 가는데 중요한 본보기다.
<인터뷰> 염돈재(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장) : "대한민국을 북한 주민이 동경하는 국가로 건설하는 것, 그리고 통일의 기회가 왔을 적에 신속히 통일을 할 수 있는 준비 를 갖춰놓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언젠가는 북한이 조금이라도 진정성을 보이 게 되면 그때는 우리가 즉시 대화하고, 또 지원을 할 수 있도록 대화의 문을 열어놓는 것도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서독의 경제적 지원과 꾸준한 교류가 동독의 변화를 만들어내고 결국 통일 독일로 이끈 원동력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녹취> 발터 몸퍼(89년 당시 서베를린 시장) : “오늘 우리 독일인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민족입니다”
<녹취> 고르바초프(89년 당시 소련 서기장) : "진정한 영웅은 바로 독일 사람들 자신입니다."
1989년 11월 9일.
독일 통일은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동독과 서독의 경계였던 베를린 장벽으로 수만 명의 사람들이 뛰쳐나오자 도시는 마비됐고, 장벽을 지키는 국경수비대는 당황했다.
자유와 통일을 향한 독일 국민들의 열망이 거대한 장벽을 무너뜨렸다.
냉전시대의 상징이자 28년 동안 독일을 둘로 갈라놓았던 베를린 장벽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순간이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자, 동독과 서독 국민들은 한마음으로 환호했다.
이들은 밤낮없이 축제의 장에 흠뻑 취했다.
너나할 것 없이 샴페인을 건네고 서로를 뜨겁게 환영했으며 단체로 춤을 추며 기쁨을 함께했다.
굳게 닫혀있던 브란덴부르크 문에 모여든 사람들은 장벽 위에 올라가 자유를 만끽했다.
<녹취> 독일 국민 : (통일될 걸 예상했었나요?) 아니오. 전혀 예상 못했어요. (오늘 밤 어떻게 생각해요?) 환상적이에요. 우리가 기다려왔던 날이죠."
외신들도 베를린 장벽의 붕괴 소식을 긴급 보도로 타전했다.
장벽이 붕괴돼 독일 통일을 마무리하는데 까진 채 1년이 걸리지 않았다.
독일이 동서독으로 분단된 것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독일을 분할 관리하던 강대국들의 갈등 때문이었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서방 3개국과 소련간의 대립은 결국 1949년 5월과 10월, 서독과 동독으로 갈라서게 했다.
분단 초기에는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경계를 섰으나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출이 잇따르자 1961년 8월 13일, 동독은 단단한 콘크리트 벽돌로 베를린 장벽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자유를 찾아 장벽을 뛰어넘어 서독으로 향하던 중 동독의 국경수비대에 의해 목숨을 잃기도 했다.
1980년대 들어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국경을 열고,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개혁개방을 주장하자 동독 주민들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동독의 공산당에 대한 불만은 ‘월요시위’라는 대규모 시위로 번졌고,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기 직전까지 수 천 명에서 수십만 명이 참여해 독일 통일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성난 민심을 잠재우기 위해 동독 정치국의 샤보스키 대변인이 기자회견을 열어 여행자유화를 발표한 내용이 국경 개방 소식으로 잘못 알려져 장벽 붕괴로까지 이어졌다.
<녹취> 에셔(동독 출신 언론인) : "아침에 보니까 맙소사, 누구도 예상 못했던 (베를린)장벽 붕괴가 일어난 겁니다."
독일의 통일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동독과 서독은 분단 상황에서도 다방면에서 교류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 가운데서도 통일을 이끌어내는데 방송의 역할은 큰 비중을 차지했다.
동서독 주민들은 서로의 TV 방송을 시청할 수 있었으며, 동독 국민들은 TV를 통해 서독의 발전된 모습을 접할 수 있어 통일의 열망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
1963년 동독 정부는 통행증 협약을 통해 이산가족의 만남을 허용했으며 은퇴 고령자에 한해 서독 방문을 허가하기도 했다.
<인터뷰> 염돈재(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장) : "다양한 분야에 대해서 교류가 있었습니다. 또 보다 구체적 으로 얘기하면 동서독 간에 체결된 협정과 합의가 16개나 됐고요. 우리 돈으로 얘기해 서 한 8조원에 달하는 그런 경제 거래가 있었고요. 매년 천만 명의 동서독 주민들이 서 로 왕래하고 방문을 했습니다. 우리하고 많이 차이가 있죠."
동독의 제한적인 개혁개방은 서독이 동독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경제난에 시달리던 동독은 1972년 12월, 서독과 기본 조약을 체결해 경제적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
동서독 주민의 왕래를 위한 통행료 지급이 주된 지원이었고, 민간차원의 지원과 함께 외환위기를 겪던 동독에게 차관 보증을 제공하기도 했다.
독일 분단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지 25년.
전 세계의 예술가들이 장벽에 벽화를 그려 넣은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는 베를린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남한과 북한의 경계선 DMZ, 비무장지대가 들어선 지도 올해로 61년. 한반도는 여전히 분단국가로 남아있다.
통일 독일은 통일 한반도를 열어 가는데 중요한 본보기다.
<인터뷰> 염돈재(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장) : "대한민국을 북한 주민이 동경하는 국가로 건설하는 것, 그리고 통일의 기회가 왔을 적에 신속히 통일을 할 수 있는 준비 를 갖춰놓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언젠가는 북한이 조금이라도 진정성을 보이 게 되면 그때는 우리가 즉시 대화하고, 또 지원을 할 수 있도록 대화의 문을 열어놓는 것도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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