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인호 “신촌블루스는 끝나지 않은 나의 삶”

입력 2014.05.26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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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4월 서울 신촌의 한 작은 카페에 처음 들어온 손님들은 아마 생소한 음악에 귀가 번쩍 뜨이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1987년 민주화 항쟁을 목전에 두고 부글부글 끓고 있던 자유를 향한 열망이 유명 외국 록그룹의 이름을 딴 카페에서 연주되는 블루스 음악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기 때문.

19세기 말 미국의 흑인들이 매일의 괴로움을 기타 반주에 맞춰 토로하며 시작된 슬픔의 음악 블루스가 한국적인 한의 정서와 맞닿은 모습은 그 시절 대중에게 충격을 선사했다.

바로 신촌의 카페 '레드제플린'에서 탄생한 전설적인 블루스 그룹 '신촌블루스' 이야기다.

이후 3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신촌은 어떤 가수의 노래 가사처럼 '이태원'에 자리를 내준 '뭔가 부족한' 공간이 되어 버렸고, 레드제플린으로 이어지는 골목길 커튼이 드리워진 그녀의 '창문'은 호화로운 외국 브랜드의 간판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겉은 화려하지만 깊이는 얕아진 신촌 문화의 '부활'을 꿈꾸며 신촌블루스가 다시 나섰다.

블루스를 통한 문화 부흥의 길을 모색하는 신촌블루스의 기타 명인(名人) 엄인호를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카페에서 만났다.

"신촌은 물론 홍대까지 상업적이고 향략적인 방향으로만 가고 있어요. 진정으로 한국 대중이 오래오래 즐길 수 있는, 주변의 외국인도 '한국에 이런 음악이 있었어?'라고 놀라게 만드는 깊이 있는 음악을 선후배와 함께 만들고 싶습니다."

현재 신촌 지역 음악계의 하나의 상징이 된 신촌블루스는 1986년 4월 서울 신촌의 카페 레드제플린에서 시작됐다.

엄인호(기타), 이정선(기타), 고(故) 김현식(노래), 한영애(노래)가 모여 블루스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그룹이라는 의미로 팀명을 지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우울한(Blue) 사람들이 모였다는 뜻도 있다.

특히 당시 밴드 '풍선'과 '장끼'를 거치며 포크, 재즈, 팝, 록 등 다양한 장르에서 자유로운 연주를 뽐냈던 엄인호가 이정선과 함께 그룹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카페가 원래 주로 하드록 음악 LP를 많이 틀어줬어요. 마니아 손님이 있었지만 장사가 그리 잘 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아는 선배가 주인이었는데 가게 좀 맡아달라고 해서 나도 음악을 좋아하니 엉겁결에 맡았죠. 이후 김현식을 비롯해 알고 지내던 사람들끼리 모여 동호회처럼 연주하며 자연스럽게 신촌블루스가 됐죠."

그는 "그룹 초반에 이정선 선배가 내 자유분방한 연주를 많이 받아줬다. 선배로서 정말 많이 도와줬다"면서 "물론 시간이 지나며 나중에는 '이정선 류'의 기타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대중가요를 주름잡은 걸출한 가수들이 '객원 보컬' 체제로 운영된 신촌블루스를 거쳐간 점도 특기할 만하다. 김현식과 한영애를 비롯해 이은미, 이광조, 정경화 등 이름만으로도 무게감이 대단하다.

"신촌블루스의 대중적 인기의 가장 큰 공은 김현식과 한영애에게 있다고 생각해요. 이정선 씨와 나는 뒤에서 곡을 쓰고 연주한 사람들이죠. 두 보컬리스트가 감동을 줘서 어필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김현식이 죽고 한영애가 그룹을 떠났을 때 굉장히 아쉬웠어요. 그들의 자리를 100% 채울 수 있었던 후배는 없었던 것 같아요."

그가 문득 "김현식과 함께 술을 참 많이 마셨다. 그는 한번 마실 때 많이 마시는 스타일이었다"고 옛 시절을 떠올릴 때는 잠시 얼굴에 안타까움의 그늘이 드리워지기도 했다.

1988년 발매된 1집 '그대없는 거리'와 이듬해 발매된 2집 '황혼'은 당시 어두운 사회 분위기, 청춘들의 회의적인 정서와 조응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두 앨범은 한국 대중음악 명반을 꼽으면 어김없이 포함된다. 수록곡 '그대없는 거리', '골목길', '아쉬움' 등이 지금도 블루스 팬들에게 영원한 '클래식'으로 불린다.

"마니아들 사이에서 '레드제플린에 가면 죽이는 음악이 있다'는 소문이 퍼졌어요. 선풍적인 호응을 얻었죠. 보컬의 가창력이 워낙 대단하니까요. 계속 연주했다면 공연이 10년은 갔을 텐데 건물이 다른 주인에게 넘어가면서 결국 중단됐죠."

그는 "당시 사회적으로 자유를 갈망하는 분위기가 무척 강했다. 무엇인가 깊이 있는 풍성한 문화를 즐기고 싶다는 대중의 욕망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다"고 신촌블루스의 전성기를 돌아봤다.

이어 "어쩌면 음악인이나 음악 기획자들이 그런 좋은 시기를 너무 쉽게 흘려보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수익이 나면 더 좋은 음악을 만드는 데 투자해야 하는데 돈 되는 아이돌에만 몰두하니 요즘 음악이 박제화한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당시 음악계를 떠올리면 밴드 '들국화'를 빼놓을 수 없다.

함께 공연 문화를 선도하며 한 시절을 풍미했던 '들국화'에 라이벌 의식이 없었느냐 물으니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당시 들국화가 콘서트 문화를 이끌었죠. 저도 굉장히 좋아한 밴드였어요. 특히 들국화를 무척 좋아한 이유가 각 멤버들이 모두 곡을 쓰면서도 그걸 하나로 만들 줄 알아서였어요."

그는 "반면 신촌블루스는 이정선 스타일과 내 스타일이 각자 따로 존재했던 것 같다. 들국화는 세 명이 함께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굉장히 부러웠다"고 비교했다.

그는 1960~1970년대 자유와 혁명의 물결이 거세게 일던 유럽과 미국의 음악을 들으며 유년기를 보냈다.

특히 고등학교 시절인 1960년대 말 미군방송 AFKN에서 흘러나오던 음악을 들으며 본격적으로 록에 빠졌다고 했다.

'히피즘', '반전', '혁명', '우드스탁'이 그의 청년기의 키워드다.

그래서일까.

그는 여전히 장발에 편안한 티셔츠 차림이다.

"지금 돌아보면 밥 딜런과 존 레넌의 음악에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단어 뜻을 사전으로 찾아가며 그들의 가사에 심취했죠. '아 이거 가사가 정말 시구나'라며 놀라고 감탄했죠. 그때부터 저도 노래를 쓸 때 가사를 중요하게 여겼던 것 같아요."

그의 기타는 정형화하지 않은 자유로운 연주가 매력적이다. 통기타를 전자기타처럼 치고, 전자기타를 통기타처럼 친다는 평가도 받는다.

즉 장르적인 경계가 없다는 소리다.

"사실 집에서 음악을 반대해서 어린 시절에 제대로 기타를 배울 기회가 없었어요. 나중에 독립하고 통기타를 시작하면서 밴드 'C.C.R'(블루스·컨트리·로커빌리 장르 음악을 선보인 1960~70년대 미국 록밴드)의 음악을 교과서 삼아 연습했죠. 말하자면 흉내내기로 배웠는데 그러면서 나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나온 것 같아요."

그는 "처음에 이정선 선배를 만나서 어쿠스틱 기타로 활동하다가 '장끼'를 만들면서 전자기타로 갔다. 그러다보니 전자기타면서도 통기타적인 요소를 많이 집어넣었던 것 같다"고 강조했다.

"언제부터 블루스에 빠졌냐"는 우문을 던지니 "나도 모르게"라는 현답이 돌아온다.

"어렸을 때부터 들은 록, 재즈, 포크, 컨트리, 블루스 등 다양한 음악이 내 몸속에서 계속 돌다가 어느 순간 머리를 통해서 작곡으로 나온 것 같습니다."

그는 아울러 "내가 충분히 연주할 수 있는 곡을 만들어야 진짜 음악이 나온다. 작곡을 위한 작곡이 아니라 몸속에 있는 음악을 표현하는 작곡이 좋은 작곡이라고 생각한다"고 소신을 밝혔다.

이어 "어쩌면 요즘은 노래에 작곡가의 생각은 하나도 들어있지 않고 어떻게 대중을 현혹해 히트할 수 있을까만 고민해 곡을 만드니 오래 들을만한 음악이 나오지 않는 것 같다"면서 "들국화, 산울림, 이영훈 모두 자신의 사유를 노래에 담아 그들의 노래가 여전히 사랑받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엄인호는 이달 30~31일 신촌 CGV아트레온 무빙홀에서 새로 영입한 후배들과 함께 '신촌블루스 리바이벌 콘서트'를 펼친다. 이후 매주 금요일마다 같은 자리에서 '신촌사람들'이라는 명칭으로 선후배 뮤지션들을 모아 지속적인 재능기부 형식의 공연을 펼칠 계획이다.

사실 그의 이런 계획은 신촌블루스의 절정기이자 한국 대중음악의 가장 풍성했던 시기인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의 기억을 무기력하게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지난 10여년과도 맞닿아 있다.

"가장 힘든 부분은 후배 가수들이 신촌블루스의 곁을 모두 떠나고 결국 나만 남았다는 점이에요. 발전할 자원이 없었던 셈이죠. 너무 힘들어 한계라는 생각이 들면서 10년 전쯤에 일단 해체도 했었죠."

그는 "신촌블루스를 해체했는데도 내가 밴드를 꾸려 공연을 하면 다들 '신촌블루스'라고 부르더라"면서 "그러다 요즘 홍대 등지에서 활동하는 후배들을 만나보니 저 친구들을 좋은 방향으로 끌고가면 좋은 음악이 탄생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리바이벌 공연과 재능기부 무대를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향후 계획을 이야기하는 동안 다른 한편으로 현재 음악계에 대한 비판에 망설임이 없었다.

'사탕발림'에 치중하는 밴드, 밴드를 이용만 하려는 방송사, 돈만 추구하는 기획사 모두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최근 대중가요계는 너무 실망스럽다. 실력은 있지만 변화없이 머문 상태로 늙어가는 뮤지션들도, 너무 상업적인 것만 추구하는 가요계 자체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일침을 놓았다.

이어 "아이돌 음악 위주인 상황인데 우리의 정서가 담긴 블루스 음악으로 '이런 한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신촌사람들 무대를 장기적으로는 문화 운동으로도 확산시킬 생각"이라며 "반응이 좋으면 내년에는 역량을 결집해 신촌을 중심으로 블루스 페스티벌도 꾸릴 계획이다"라는 포부도 밝혔다.

그는 곧 후배들과 꾸린 밴드로 앨범도 발표할 예정이다.

신곡은 물론 새롭게 편곡된 신촌블루스의 유명곡도 수록된다.

특히 그가 좋아하는 다른 밴드의 노래도 그의 스타일로 편곡해 담을 계획이라고 했다.

그는 "이번에 처음으로 그 누구의 개입도 없이 내가 하고 싶은 연주를 했다. 작은 녹음실에서 옛날 느낌으로 녹음하는데 기분이 좋더라. 기대해도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과거 인터뷰에서 '창작의 가장 큰 원동력은 사랑'이라고 답한 그다. 세월이 흘러 그대로일까, 아니면 바뀌었을까.

그는 "사람이 쉽게 변하나. 지금도 사랑이다"라며 너스레를 떨다가 금세 진지한 표정으로 변화를 이야기했다.

"나도 나이를 먹었으니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죠. 너무 남녀의 애틋함과 관련된 이야기는 어느 정도 배제하고 싶어요. 이제 인생에 대한 이야기로 대중과 교감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그래도 (사랑 얘기를) 쓰게는 되겠죠. 사실 대중음악에서 남녀 이야기를 빼면 할 것이 없잖아요?(웃음)"

돌고돌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그에게 '신촌블루스'의 의미는 무엇일까.

"신촌블루스는 나의 인생 자체입니다. 그리고 분명히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지요. 이제는 신촌블루스 특유의 향기는 있으면서도 젊은 친구들과 함께하는 만큼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폭넓은 음악을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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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엄인호 “신촌블루스는 끝나지 않은 나의 삶”
    • 입력 2014-05-26 08:15:35
    연합뉴스
1986년 4월 서울 신촌의 한 작은 카페에 처음 들어온 손님들은 아마 생소한 음악에 귀가 번쩍 뜨이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1987년 민주화 항쟁을 목전에 두고 부글부글 끓고 있던 자유를 향한 열망이 유명 외국 록그룹의 이름을 딴 카페에서 연주되는 블루스 음악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기 때문. 19세기 말 미국의 흑인들이 매일의 괴로움을 기타 반주에 맞춰 토로하며 시작된 슬픔의 음악 블루스가 한국적인 한의 정서와 맞닿은 모습은 그 시절 대중에게 충격을 선사했다. 바로 신촌의 카페 '레드제플린'에서 탄생한 전설적인 블루스 그룹 '신촌블루스' 이야기다. 이후 3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신촌은 어떤 가수의 노래 가사처럼 '이태원'에 자리를 내준 '뭔가 부족한' 공간이 되어 버렸고, 레드제플린으로 이어지는 골목길 커튼이 드리워진 그녀의 '창문'은 호화로운 외국 브랜드의 간판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겉은 화려하지만 깊이는 얕아진 신촌 문화의 '부활'을 꿈꾸며 신촌블루스가 다시 나섰다. 블루스를 통한 문화 부흥의 길을 모색하는 신촌블루스의 기타 명인(名人) 엄인호를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카페에서 만났다. "신촌은 물론 홍대까지 상업적이고 향략적인 방향으로만 가고 있어요. 진정으로 한국 대중이 오래오래 즐길 수 있는, 주변의 외국인도 '한국에 이런 음악이 있었어?'라고 놀라게 만드는 깊이 있는 음악을 선후배와 함께 만들고 싶습니다." 현재 신촌 지역 음악계의 하나의 상징이 된 신촌블루스는 1986년 4월 서울 신촌의 카페 레드제플린에서 시작됐다. 엄인호(기타), 이정선(기타), 고(故) 김현식(노래), 한영애(노래)가 모여 블루스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그룹이라는 의미로 팀명을 지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우울한(Blue) 사람들이 모였다는 뜻도 있다. 특히 당시 밴드 '풍선'과 '장끼'를 거치며 포크, 재즈, 팝, 록 등 다양한 장르에서 자유로운 연주를 뽐냈던 엄인호가 이정선과 함께 그룹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카페가 원래 주로 하드록 음악 LP를 많이 틀어줬어요. 마니아 손님이 있었지만 장사가 그리 잘 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아는 선배가 주인이었는데 가게 좀 맡아달라고 해서 나도 음악을 좋아하니 엉겁결에 맡았죠. 이후 김현식을 비롯해 알고 지내던 사람들끼리 모여 동호회처럼 연주하며 자연스럽게 신촌블루스가 됐죠." 그는 "그룹 초반에 이정선 선배가 내 자유분방한 연주를 많이 받아줬다. 선배로서 정말 많이 도와줬다"면서 "물론 시간이 지나며 나중에는 '이정선 류'의 기타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대중가요를 주름잡은 걸출한 가수들이 '객원 보컬' 체제로 운영된 신촌블루스를 거쳐간 점도 특기할 만하다. 김현식과 한영애를 비롯해 이은미, 이광조, 정경화 등 이름만으로도 무게감이 대단하다. "신촌블루스의 대중적 인기의 가장 큰 공은 김현식과 한영애에게 있다고 생각해요. 이정선 씨와 나는 뒤에서 곡을 쓰고 연주한 사람들이죠. 두 보컬리스트가 감동을 줘서 어필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김현식이 죽고 한영애가 그룹을 떠났을 때 굉장히 아쉬웠어요. 그들의 자리를 100% 채울 수 있었던 후배는 없었던 것 같아요." 그가 문득 "김현식과 함께 술을 참 많이 마셨다. 그는 한번 마실 때 많이 마시는 스타일이었다"고 옛 시절을 떠올릴 때는 잠시 얼굴에 안타까움의 그늘이 드리워지기도 했다. 1988년 발매된 1집 '그대없는 거리'와 이듬해 발매된 2집 '황혼'은 당시 어두운 사회 분위기, 청춘들의 회의적인 정서와 조응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두 앨범은 한국 대중음악 명반을 꼽으면 어김없이 포함된다. 수록곡 '그대없는 거리', '골목길', '아쉬움' 등이 지금도 블루스 팬들에게 영원한 '클래식'으로 불린다. "마니아들 사이에서 '레드제플린에 가면 죽이는 음악이 있다'는 소문이 퍼졌어요. 선풍적인 호응을 얻었죠. 보컬의 가창력이 워낙 대단하니까요. 계속 연주했다면 공연이 10년은 갔을 텐데 건물이 다른 주인에게 넘어가면서 결국 중단됐죠." 그는 "당시 사회적으로 자유를 갈망하는 분위기가 무척 강했다. 무엇인가 깊이 있는 풍성한 문화를 즐기고 싶다는 대중의 욕망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다"고 신촌블루스의 전성기를 돌아봤다. 이어 "어쩌면 음악인이나 음악 기획자들이 그런 좋은 시기를 너무 쉽게 흘려보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수익이 나면 더 좋은 음악을 만드는 데 투자해야 하는데 돈 되는 아이돌에만 몰두하니 요즘 음악이 박제화한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당시 음악계를 떠올리면 밴드 '들국화'를 빼놓을 수 없다. 함께 공연 문화를 선도하며 한 시절을 풍미했던 '들국화'에 라이벌 의식이 없었느냐 물으니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당시 들국화가 콘서트 문화를 이끌었죠. 저도 굉장히 좋아한 밴드였어요. 특히 들국화를 무척 좋아한 이유가 각 멤버들이 모두 곡을 쓰면서도 그걸 하나로 만들 줄 알아서였어요." 그는 "반면 신촌블루스는 이정선 스타일과 내 스타일이 각자 따로 존재했던 것 같다. 들국화는 세 명이 함께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굉장히 부러웠다"고 비교했다. 그는 1960~1970년대 자유와 혁명의 물결이 거세게 일던 유럽과 미국의 음악을 들으며 유년기를 보냈다. 특히 고등학교 시절인 1960년대 말 미군방송 AFKN에서 흘러나오던 음악을 들으며 본격적으로 록에 빠졌다고 했다. '히피즘', '반전', '혁명', '우드스탁'이 그의 청년기의 키워드다. 그래서일까. 그는 여전히 장발에 편안한 티셔츠 차림이다. "지금 돌아보면 밥 딜런과 존 레넌의 음악에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단어 뜻을 사전으로 찾아가며 그들의 가사에 심취했죠. '아 이거 가사가 정말 시구나'라며 놀라고 감탄했죠. 그때부터 저도 노래를 쓸 때 가사를 중요하게 여겼던 것 같아요." 그의 기타는 정형화하지 않은 자유로운 연주가 매력적이다. 통기타를 전자기타처럼 치고, 전자기타를 통기타처럼 친다는 평가도 받는다. 즉 장르적인 경계가 없다는 소리다. "사실 집에서 음악을 반대해서 어린 시절에 제대로 기타를 배울 기회가 없었어요. 나중에 독립하고 통기타를 시작하면서 밴드 'C.C.R'(블루스·컨트리·로커빌리 장르 음악을 선보인 1960~70년대 미국 록밴드)의 음악을 교과서 삼아 연습했죠. 말하자면 흉내내기로 배웠는데 그러면서 나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나온 것 같아요." 그는 "처음에 이정선 선배를 만나서 어쿠스틱 기타로 활동하다가 '장끼'를 만들면서 전자기타로 갔다. 그러다보니 전자기타면서도 통기타적인 요소를 많이 집어넣었던 것 같다"고 강조했다. "언제부터 블루스에 빠졌냐"는 우문을 던지니 "나도 모르게"라는 현답이 돌아온다. "어렸을 때부터 들은 록, 재즈, 포크, 컨트리, 블루스 등 다양한 음악이 내 몸속에서 계속 돌다가 어느 순간 머리를 통해서 작곡으로 나온 것 같습니다." 그는 아울러 "내가 충분히 연주할 수 있는 곡을 만들어야 진짜 음악이 나온다. 작곡을 위한 작곡이 아니라 몸속에 있는 음악을 표현하는 작곡이 좋은 작곡이라고 생각한다"고 소신을 밝혔다. 이어 "어쩌면 요즘은 노래에 작곡가의 생각은 하나도 들어있지 않고 어떻게 대중을 현혹해 히트할 수 있을까만 고민해 곡을 만드니 오래 들을만한 음악이 나오지 않는 것 같다"면서 "들국화, 산울림, 이영훈 모두 자신의 사유를 노래에 담아 그들의 노래가 여전히 사랑받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엄인호는 이달 30~31일 신촌 CGV아트레온 무빙홀에서 새로 영입한 후배들과 함께 '신촌블루스 리바이벌 콘서트'를 펼친다. 이후 매주 금요일마다 같은 자리에서 '신촌사람들'이라는 명칭으로 선후배 뮤지션들을 모아 지속적인 재능기부 형식의 공연을 펼칠 계획이다. 사실 그의 이런 계획은 신촌블루스의 절정기이자 한국 대중음악의 가장 풍성했던 시기인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의 기억을 무기력하게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지난 10여년과도 맞닿아 있다. "가장 힘든 부분은 후배 가수들이 신촌블루스의 곁을 모두 떠나고 결국 나만 남았다는 점이에요. 발전할 자원이 없었던 셈이죠. 너무 힘들어 한계라는 생각이 들면서 10년 전쯤에 일단 해체도 했었죠." 그는 "신촌블루스를 해체했는데도 내가 밴드를 꾸려 공연을 하면 다들 '신촌블루스'라고 부르더라"면서 "그러다 요즘 홍대 등지에서 활동하는 후배들을 만나보니 저 친구들을 좋은 방향으로 끌고가면 좋은 음악이 탄생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리바이벌 공연과 재능기부 무대를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향후 계획을 이야기하는 동안 다른 한편으로 현재 음악계에 대한 비판에 망설임이 없었다. '사탕발림'에 치중하는 밴드, 밴드를 이용만 하려는 방송사, 돈만 추구하는 기획사 모두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최근 대중가요계는 너무 실망스럽다. 실력은 있지만 변화없이 머문 상태로 늙어가는 뮤지션들도, 너무 상업적인 것만 추구하는 가요계 자체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일침을 놓았다. 이어 "아이돌 음악 위주인 상황인데 우리의 정서가 담긴 블루스 음악으로 '이런 한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신촌사람들 무대를 장기적으로는 문화 운동으로도 확산시킬 생각"이라며 "반응이 좋으면 내년에는 역량을 결집해 신촌을 중심으로 블루스 페스티벌도 꾸릴 계획이다"라는 포부도 밝혔다. 그는 곧 후배들과 꾸린 밴드로 앨범도 발표할 예정이다. 신곡은 물론 새롭게 편곡된 신촌블루스의 유명곡도 수록된다. 특히 그가 좋아하는 다른 밴드의 노래도 그의 스타일로 편곡해 담을 계획이라고 했다. 그는 "이번에 처음으로 그 누구의 개입도 없이 내가 하고 싶은 연주를 했다. 작은 녹음실에서 옛날 느낌으로 녹음하는데 기분이 좋더라. 기대해도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과거 인터뷰에서 '창작의 가장 큰 원동력은 사랑'이라고 답한 그다. 세월이 흘러 그대로일까, 아니면 바뀌었을까. 그는 "사람이 쉽게 변하나. 지금도 사랑이다"라며 너스레를 떨다가 금세 진지한 표정으로 변화를 이야기했다. "나도 나이를 먹었으니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죠. 너무 남녀의 애틋함과 관련된 이야기는 어느 정도 배제하고 싶어요. 이제 인생에 대한 이야기로 대중과 교감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그래도 (사랑 얘기를) 쓰게는 되겠죠. 사실 대중음악에서 남녀 이야기를 빼면 할 것이 없잖아요?(웃음)" 돌고돌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그에게 '신촌블루스'의 의미는 무엇일까. "신촌블루스는 나의 인생 자체입니다. 그리고 분명히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지요. 이제는 신촌블루스 특유의 향기는 있으면서도 젊은 친구들과 함께하는 만큼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폭넓은 음악을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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