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 든 ‘잊혀질 권리’…국내 도입시 합의 필요

입력 2014.06.06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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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잊어달라. 모든 흔적을 지워라"

지구 반대편 누리꾼들이 잠자고 있던 권리를 당당히 요구하고 나섰다. 인터넷에서 검색되는 개인정보를 지우라는, 이른바 '잊혀질 권리'를 되찾겠다는 것이다.

찻잔 속 태풍으로만 여겨졌던 잊혀질 권리가 수면 위로 전격 등장한 건 최근 유럽사법재판소(ECJ)가 이 권리를 정식으로 인정하는 판결을 내리면서다.

유럽사법재판소는 지난 5월 중순, 구글과 맞서 수년간 소송전을 벌인 스페인 국적 변호사의 손을 결국 들어줬다. 이 변호사는 2009년 구글에서 자신의 이름을 우연히 검색했다가 1998년 빚 때문에 집을 내놓았다는 기사를 보고 분개해 삭제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하자 기나긴 법정 싸움을 시작했다.

법원의 결정에 따라 구글은 유럽 누리꾼을 대상으로 삭제요청 코너를 개설했고 이 사이트에는 첫날에만 1만 2천여 건의 신청이 몰리는 등 성난 누리꾼들의 삭제요청이 쇄도했다.

다른 국가에서도 잊혀질 권리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계속 있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는 미성년자에 한해서만 잊혀질 권리를 보호하는 법안이 지난해 9월 통과되기도 했다.

그러나 가시적인 움직임은 없었다. 망자(亡者)의 디지털 자산과 관련한 '남겨질 권리', 시민의 '알 권리', 게시자의 '표현의 자유' 등도 보장돼야 한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아 잊혀질 권리는 그간 큰 힘을 받지 못했다.

국내 실정도 마찬가지. 네이버, 다음, 네이트 등 국내 포털 사업자들은 삭제 요청이 들어오면 피해사실의 개연성 등을 따져 해당 게시물에 대해 '임시 게재 중단 조치'를 하지만 1개월짜리 한시적 블라인드(가려주기) 조치에 불과하다.

한 달이 지나면 피해자와 게시자 간에 합의하거나 손해배상청구 등 법정 싸움으로 가야 한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잊혀질 권리만 강조하면 부작용이 뒤따를 수 있기 때문에 포털 사업자의 임시 게재 중단 조치는 현재로선 최선책이자 절충안이라고 강조한다.

최성진 한국인터넷기업협회 사무국장은 "잊혀질 권리도 중요하지만 알 권리, 표현의 자유 등의 가치도 팽팽히 맞서기 때문에 무엇보다 균형점을 찾는 게 중요하다"면서 "검색 사업자의 판단에 맡기기보다는 우선 사회적 논의를 통한 공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최경진 가천대 법학과 교수도 "아직 국내에서는 '잊혀질 권리' 도입 여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며 "이 권리를 도입하면 이용자 권익 신장 차원에서는 바람직하나 알 권리와 언론 출판의 자유 등을 고려해 합리적인 수준에서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도 신중한 입장이다. 유럽사법재판소의 판결에 따른 국내외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는 한편 이와 관련한 국내 정책 전반을 다시 살펴보겠다는 입장이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오는 16일 '온라인 개인정보보호 콘퍼런스'를 열고 전문가들과 잊혀질 권리에 대해 논의한다.

방통위는 이 자리에서 나온 논의 내용을 토대로 잊혀질 권리를 국내에 적용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할지, 새로운 법제화가 가능한지에 대해 검토할 예정이다.

방통위 관계자는 "현재 개정 논의 단계에 있는 사생활 침해·명예훼손성 글을 포털에서 삭제할 수 있는 법안과, 국회에 계류 중인 온라인 저작물 삭제와 관련된 이노근 의원의 법안 등을 중점적으로 살펴볼 예정"이라고 말했다.

새누리당 이노근 의원은 지난해 '포털업체는 게시글 삭제 요청이 들어오면 즉시 이를 이행해야 한다'는 내용의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을 발의한 바 있다.

포털업계 관계자는 "잊혀질 권리를 강조한 이 의원의 개정안이 통과되면 국내 포털업계에 작지 않은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본다"며 "법 개정을 하더라도 구글 등 외국계 포털업체도 함께 구속할 수 있는 방향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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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개 든 ‘잊혀질 권리’…국내 도입시 합의 필요
    • 입력 2014-06-06 10:02:36
    연합뉴스
"날 잊어달라. 모든 흔적을 지워라" 지구 반대편 누리꾼들이 잠자고 있던 권리를 당당히 요구하고 나섰다. 인터넷에서 검색되는 개인정보를 지우라는, 이른바 '잊혀질 권리'를 되찾겠다는 것이다. 찻잔 속 태풍으로만 여겨졌던 잊혀질 권리가 수면 위로 전격 등장한 건 최근 유럽사법재판소(ECJ)가 이 권리를 정식으로 인정하는 판결을 내리면서다. 유럽사법재판소는 지난 5월 중순, 구글과 맞서 수년간 소송전을 벌인 스페인 국적 변호사의 손을 결국 들어줬다. 이 변호사는 2009년 구글에서 자신의 이름을 우연히 검색했다가 1998년 빚 때문에 집을 내놓았다는 기사를 보고 분개해 삭제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하자 기나긴 법정 싸움을 시작했다. 법원의 결정에 따라 구글은 유럽 누리꾼을 대상으로 삭제요청 코너를 개설했고 이 사이트에는 첫날에만 1만 2천여 건의 신청이 몰리는 등 성난 누리꾼들의 삭제요청이 쇄도했다. 다른 국가에서도 잊혀질 권리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계속 있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는 미성년자에 한해서만 잊혀질 권리를 보호하는 법안이 지난해 9월 통과되기도 했다. 그러나 가시적인 움직임은 없었다. 망자(亡者)의 디지털 자산과 관련한 '남겨질 권리', 시민의 '알 권리', 게시자의 '표현의 자유' 등도 보장돼야 한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아 잊혀질 권리는 그간 큰 힘을 받지 못했다. 국내 실정도 마찬가지. 네이버, 다음, 네이트 등 국내 포털 사업자들은 삭제 요청이 들어오면 피해사실의 개연성 등을 따져 해당 게시물에 대해 '임시 게재 중단 조치'를 하지만 1개월짜리 한시적 블라인드(가려주기) 조치에 불과하다. 한 달이 지나면 피해자와 게시자 간에 합의하거나 손해배상청구 등 법정 싸움으로 가야 한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잊혀질 권리만 강조하면 부작용이 뒤따를 수 있기 때문에 포털 사업자의 임시 게재 중단 조치는 현재로선 최선책이자 절충안이라고 강조한다. 최성진 한국인터넷기업협회 사무국장은 "잊혀질 권리도 중요하지만 알 권리, 표현의 자유 등의 가치도 팽팽히 맞서기 때문에 무엇보다 균형점을 찾는 게 중요하다"면서 "검색 사업자의 판단에 맡기기보다는 우선 사회적 논의를 통한 공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최경진 가천대 법학과 교수도 "아직 국내에서는 '잊혀질 권리' 도입 여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며 "이 권리를 도입하면 이용자 권익 신장 차원에서는 바람직하나 알 권리와 언론 출판의 자유 등을 고려해 합리적인 수준에서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도 신중한 입장이다. 유럽사법재판소의 판결에 따른 국내외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는 한편 이와 관련한 국내 정책 전반을 다시 살펴보겠다는 입장이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오는 16일 '온라인 개인정보보호 콘퍼런스'를 열고 전문가들과 잊혀질 권리에 대해 논의한다. 방통위는 이 자리에서 나온 논의 내용을 토대로 잊혀질 권리를 국내에 적용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할지, 새로운 법제화가 가능한지에 대해 검토할 예정이다. 방통위 관계자는 "현재 개정 논의 단계에 있는 사생활 침해·명예훼손성 글을 포털에서 삭제할 수 있는 법안과, 국회에 계류 중인 온라인 저작물 삭제와 관련된 이노근 의원의 법안 등을 중점적으로 살펴볼 예정"이라고 말했다. 새누리당 이노근 의원은 지난해 '포털업체는 게시글 삭제 요청이 들어오면 즉시 이를 이행해야 한다'는 내용의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을 발의한 바 있다. 포털업계 관계자는 "잊혀질 권리를 강조한 이 의원의 개정안이 통과되면 국내 포털업계에 작지 않은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본다"며 "법 개정을 하더라도 구글 등 외국계 포털업체도 함께 구속할 수 있는 방향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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