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사도, 아시아사도 아닌 ‘중앙유라시아’ 역사

입력 2014.06.10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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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사'나 '동아시아사'를 들어본 적은 있어도 '유라시아사'는 꽤 생소한 말이다. 유럽과 아시아가 고대부터 끊임없는 관계를 맺어 온 점을 고려하면 이는 다분히 서양중심적 역사관이 낳은 결과인 듯하다.

중앙유라시아 연구에 평생 몰두해 온 크리스토퍼 백위드 미국 인디애나대 종신교수는 서양 학계의 이 같은 현실에 이렇게 일갈한다. 2009년 출간된 저서 '중앙유라시아 세계사' 중에서다.

"중앙유라시아를 연구하는 젊은 학자들이 최근 괄목할 발전을 이뤘음에도 상황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비교하자면 세계의 다른 지역, 특히 서유럽이나 북아메리카는 어떤 것이든 너무 지나친 관심의 대상이 되는 반면, 중앙유라시아 연구에서 대부분의 주요 주제들은 소홀히 다뤄졌고 어떤 것들은 거의 완전히 방치돼 있다."('책을 펴내며' 중)

벡위드 교수는 한국에는 역사언어학자로 알려졌지만, 주요 연구 분야는 티베트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유라시아사다. 그는 이 지역 역사는 물론 언어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활발한 저술활동을 해 왔다.

서양 학자치고는 이례적으로 고구려와 일본어의 관계에 관한 책을 쓰기도 한 그는 역사언어학뿐 아니라 기술사, 역사, 고고학, 문화사, 종교학, 신화학 등 폭넓은 영역에 걸쳐 학문적 관심을 두고 중앙유라시아를 연구하는 학자로 유명하다.

최근 번역돼 나온 '중앙유라시아 세계사'는 애초 '중앙유라시아 역사 스케치' 정도로 생각하고 집필에 착수한 책이지만, 중앙유라시아사 전체를 포괄하면서 이 지역에 '문화복합체'를 형성한 심층 문화요소를 집중 탐구한 저작이다.

예상할 수 있다시피 저자는 이른바 '변두리 유목민들의 땅' 정도로 인식된 중앙유라시아에 관해 여러 가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이를테면 동서양 간 문명교류의 통로로 알려진 실크로드에 관한 이해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실크로드를 중국-로마 간 황무지를 관통하는 '길'이 아닌 중앙유라시아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발현된 경제체제 자체로 본다. 따라서 실크로드의 주체는 그 길의 동서 극단인 중국과 로마가 아니라 이 지역에서 살며 국가를 이룬 사람들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처럼 중앙유라시아인들이 만든 실크로드 문명은 중국과 서양 세력이 잠식하면서 원래 모습을 잃었고, 19세기 이 지역을 침탈한 서구 세력이 과거 모습을 실크로드라는 이름으로 윤색하면서 유라시아 유목민들을 '약탈자'로 깎아내렸다.

저자는 중앙유라시아를 중심으로 유라시아 각 지역이 연결되는 역사적 고리를 제시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유라시아의 동쪽 날개 끝에 위치한 고구려가 중앙유라시아의 여러 지역과 교류하며 하나의 제국으로 기능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고구려의 주몽 신화처럼 신의 아들로 알에서 태어난 주인공이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고, 위기에 부닥치자 탈출해 새로운 왕국을 세우는 건국신화가 유라시아의 스텝 지역 전역에서 발견되는 점도 저자의 관심사다.

그는 당시 신무기였던 전차가 스텝을 따라 유라시아 전역에 보급됐고, 이 과정에서 몇몇 눈에 띄는 문화적 요소가 전파된 점에도 주목한다. 주군이 죽으면 휘하 전사들이 무장한 채 함께 순장되던 풍습인 '코미타투스'(comitatus)가 그 예다.

역사의 물리적 증거인 고고학적 유물뿐 아니라 언어학을 통해 옛 역사에 접근하는 그의 방식은 평양의 옛 발음이 '피아르나', 연개소문은 '우르 갑 소문'이었다는 흥미로운 주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런 특정한 주제들뿐 아니라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통사적 접근을 통해 중앙유라시아가 주변 열강에 종속되는 과정, 냉전과 소련 해체, 중국 팽창 등을 거치면서 나날이 축소되는 이 지역의 모습까지 일목요연하게 다뤘다.

저자는 "밑바닥까지 훑어서 지나치게 개념화되고 전문화된 주제에 대해 글을 쓰느니 말할 수 없이 방치됐던 중앙유라시아학 책 한 권, 논문 한 편 쓰는 것이 낫다"며 "중앙유라시아 역사와 관련한 주제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접근에 대해 여전히 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미국출판협회(AAP)로부터 세계사·전기 부문 최고의 책(PROSE Award)으로 선정된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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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럽사도, 아시아사도 아닌 ‘중앙유라시아’ 역사
    • 입력 2014-06-10 07:21:12
    연합뉴스
'유럽사'나 '동아시아사'를 들어본 적은 있어도 '유라시아사'는 꽤 생소한 말이다. 유럽과 아시아가 고대부터 끊임없는 관계를 맺어 온 점을 고려하면 이는 다분히 서양중심적 역사관이 낳은 결과인 듯하다. 중앙유라시아 연구에 평생 몰두해 온 크리스토퍼 백위드 미국 인디애나대 종신교수는 서양 학계의 이 같은 현실에 이렇게 일갈한다. 2009년 출간된 저서 '중앙유라시아 세계사' 중에서다. "중앙유라시아를 연구하는 젊은 학자들이 최근 괄목할 발전을 이뤘음에도 상황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비교하자면 세계의 다른 지역, 특히 서유럽이나 북아메리카는 어떤 것이든 너무 지나친 관심의 대상이 되는 반면, 중앙유라시아 연구에서 대부분의 주요 주제들은 소홀히 다뤄졌고 어떤 것들은 거의 완전히 방치돼 있다."('책을 펴내며' 중) 벡위드 교수는 한국에는 역사언어학자로 알려졌지만, 주요 연구 분야는 티베트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유라시아사다. 그는 이 지역 역사는 물론 언어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활발한 저술활동을 해 왔다. 서양 학자치고는 이례적으로 고구려와 일본어의 관계에 관한 책을 쓰기도 한 그는 역사언어학뿐 아니라 기술사, 역사, 고고학, 문화사, 종교학, 신화학 등 폭넓은 영역에 걸쳐 학문적 관심을 두고 중앙유라시아를 연구하는 학자로 유명하다. 최근 번역돼 나온 '중앙유라시아 세계사'는 애초 '중앙유라시아 역사 스케치' 정도로 생각하고 집필에 착수한 책이지만, 중앙유라시아사 전체를 포괄하면서 이 지역에 '문화복합체'를 형성한 심층 문화요소를 집중 탐구한 저작이다. 예상할 수 있다시피 저자는 이른바 '변두리 유목민들의 땅' 정도로 인식된 중앙유라시아에 관해 여러 가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이를테면 동서양 간 문명교류의 통로로 알려진 실크로드에 관한 이해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실크로드를 중국-로마 간 황무지를 관통하는 '길'이 아닌 중앙유라시아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발현된 경제체제 자체로 본다. 따라서 실크로드의 주체는 그 길의 동서 극단인 중국과 로마가 아니라 이 지역에서 살며 국가를 이룬 사람들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처럼 중앙유라시아인들이 만든 실크로드 문명은 중국과 서양 세력이 잠식하면서 원래 모습을 잃었고, 19세기 이 지역을 침탈한 서구 세력이 과거 모습을 실크로드라는 이름으로 윤색하면서 유라시아 유목민들을 '약탈자'로 깎아내렸다. 저자는 중앙유라시아를 중심으로 유라시아 각 지역이 연결되는 역사적 고리를 제시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유라시아의 동쪽 날개 끝에 위치한 고구려가 중앙유라시아의 여러 지역과 교류하며 하나의 제국으로 기능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고구려의 주몽 신화처럼 신의 아들로 알에서 태어난 주인공이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고, 위기에 부닥치자 탈출해 새로운 왕국을 세우는 건국신화가 유라시아의 스텝 지역 전역에서 발견되는 점도 저자의 관심사다. 그는 당시 신무기였던 전차가 스텝을 따라 유라시아 전역에 보급됐고, 이 과정에서 몇몇 눈에 띄는 문화적 요소가 전파된 점에도 주목한다. 주군이 죽으면 휘하 전사들이 무장한 채 함께 순장되던 풍습인 '코미타투스'(comitatus)가 그 예다. 역사의 물리적 증거인 고고학적 유물뿐 아니라 언어학을 통해 옛 역사에 접근하는 그의 방식은 평양의 옛 발음이 '피아르나', 연개소문은 '우르 갑 소문'이었다는 흥미로운 주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런 특정한 주제들뿐 아니라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통사적 접근을 통해 중앙유라시아가 주변 열강에 종속되는 과정, 냉전과 소련 해체, 중국 팽창 등을 거치면서 나날이 축소되는 이 지역의 모습까지 일목요연하게 다뤘다. 저자는 "밑바닥까지 훑어서 지나치게 개념화되고 전문화된 주제에 대해 글을 쓰느니 말할 수 없이 방치됐던 중앙유라시아학 책 한 권, 논문 한 편 쓰는 것이 낫다"며 "중앙유라시아 역사와 관련한 주제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접근에 대해 여전히 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미국출판협회(AAP)로부터 세계사·전기 부문 최고의 책(PROSE Award)으로 선정된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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