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의 달 기획] 펜 대신 총 든 6·25 소년병들 “희생 기억해달라”

입력 2014.06.25 (01:15) 수정 2014.06.25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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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 살고 있는 윤한수(79) 씨는 16살 나이에 6.25전쟁에 참전했다.

때는 우리 군이 전쟁 한 달여 만에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 국토의 대부분을 잃었던 1950년 8월. 병력이 턱없이 부족해 군이 대규모로 강제 징집을 하던 상황이었다.

윤 씨는 “그땐 강제로 군에 가든지 제 발로 가든지 안 갈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기왕 갈 거라면 자원해서 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2대 독자였던 윤 씨는 차마 부모에게 알리지 못한 채 학교 추천을 받아 입대했고 일주일 간의 기본훈련을 마친 뒤 바로 전장에 투입됐다.

까까머리 중학생이 겪어야 했던 전쟁의 참혹함은 윤 씨 뇌리에 그대로 각인됐다.

윤 씨는 “사람의 팔다리가 끊어지고 옆에 있던 전우가 총 맞아 죽고, 전쟁이란 게 그렇게 잔혹한 건지 몰랐다. 너무나 충격적이고 비참한 광경들이었다. 처음엔 너무 겁이 나 발도 안 떨어졌다”고 말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윤 씨는 4년 뒤 제대해 귀향했지만 정상적인 생활은 할 수가 없었다. 20살이 됐지만 학교에선 그에게 다시 중학교 3학년으로 복학하라고 했고, 결국 그는 복학을 포기한 채 생활전선에 나섰다.

윤 씨는 “중학교 졸업장이 없다보니 변변한 직업을 구하지도 못했다. 평생 이런 일, 저런 일 하면서 고생 많이 했다. 그렇다보니 자식들 뒷바라지도 제대로 못해 준 것 같아 미안하다”고 한탄했다.

지금 윤 씨는 ‘6.25참전 소년·소녀병전우회’ 부회장 겸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윤 씨와 비슷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은 전국적으로 3만 명에 달한다.


<사진1. 6.25전쟁 당시 소년병 모습>

국방부에 따르면, 한국전쟁에 참전한 소년·소녀병(이하 소년병)이 2만9천여 명으로 집계됐다. 당시 1개 사단이 7천~8천명 수준이었던 걸 감안하면 3개 사단에 해당하는 병력이다.

소년병은 한국전쟁 당시 징집 연령엔 못 미치지만 정규군으로 입대해 군번을 부여받은 14~17세의 학생들을 일컫는다.

이들 가운데 2천500여 명이 전장에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전우회 측은 현재 전국적으로 6~7천명이 생존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소년병은 학도의용군과는 차이가 있다.

의용군은 학생신분의 비정규군으로, 1951년 2월28일 문교부 장관이 학생복귀령을 내리면서 해산해 학교로 돌아갔지만, 소년병은 군번이 부여된 정규군이었기 때문에 정전 후에도 한참이 지나서야 제대명령을 받고 가정으로 복귀했다.



문제는 60년이 넘도록 이들에 대한 처우가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소년병 생존자들은 현재 정부로부터 월 17만원 정도의 참전수당만 받을 뿐 더 이상의 예우는 받지 못하고 있다.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년병에 대한 존재를 정부로부터 공식 인정받은 것도 지난 2008년으로, 얼마 되지 않는다.

국가유공자로 지정되면 국립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고 연금도 지금보다 더 많이 받을 수 있다.

소년병 생존자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는 소년병전우회는 소년병들에 대해 국가가 적절히 예우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우선 관련 법 제정이 시급하다는 게 이들의 입장이다.

6.25참전 소년병의 국가유공자 인정을 골자로 한 ‘국가유공자 예우 및 지원에 관한 일부개정법률안’이 16대~18대 국회에 제출됐지만 모두 자동 폐기됐다.

마땅히 적용할 만한 법률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다.

소년병들의 참전은 자발적 의사에 의한 것이었고 이들에 대한 보상을 따로 할 경우 또 다른 6.25참전 유공자와 형평성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게,국방부의 입장이다.

하지만 6.25전쟁에 참전한 '재일학도 의용군'도 국가유공자로 인정받고 있어 소년병만 외면당하고 있다는 것이 생존자들의 주장이다.

일본에 거주하던 청년과 학생 642명이 자진 입대해 참전한 '재일학도 의용군'은 1968년부터 국가유공자로 지정됐다.


<사진3.낙동강 전투 사진.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


몇년째 정부와 소년병 생존자들 간 입장차가 좁혀지지 않자 최근에는 소년병 생존자 5명이 국가를 상대로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6.25당시 아동을 대상으로 한 징집 행위가 법치주의에 위반된다는 것이 주된 이유다.

이들은 또 강제 징집으로 아동의 권리를 침해한 상태에 대해 아무런 입법 조치도 하지 않는 국회의 ‘부작위(마땅히 해야 할 것으로 기대되는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 역시 위헌 사유에 해당된다고 밝혔다.

앞선 2012년 10월에는 ‘6.25참전 소년·소녀병 보상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에 제출됐지만 아직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소년병 생존자들은 네 번째 제출된 법안이 이번 19대 국회에서 처리될지 주목하고 있다.

생존자 모두 80대 전후의 노인들이어서 관련 법 제정이 시급하다는 입장이지만 낙관할 순 없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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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국의 달 기획] 펜 대신 총 든 6·25 소년병들 “희생 기억해달라”
    • 입력 2014-06-25 01:15:10
    • 수정2014-06-25 15:22:53
    정치
대구에 살고 있는 윤한수(79) 씨는 16살 나이에 6.25전쟁에 참전했다.

때는 우리 군이 전쟁 한 달여 만에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 국토의 대부분을 잃었던 1950년 8월. 병력이 턱없이 부족해 군이 대규모로 강제 징집을 하던 상황이었다.

윤 씨는 “그땐 강제로 군에 가든지 제 발로 가든지 안 갈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기왕 갈 거라면 자원해서 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2대 독자였던 윤 씨는 차마 부모에게 알리지 못한 채 학교 추천을 받아 입대했고 일주일 간의 기본훈련을 마친 뒤 바로 전장에 투입됐다.

까까머리 중학생이 겪어야 했던 전쟁의 참혹함은 윤 씨 뇌리에 그대로 각인됐다.

윤 씨는 “사람의 팔다리가 끊어지고 옆에 있던 전우가 총 맞아 죽고, 전쟁이란 게 그렇게 잔혹한 건지 몰랐다. 너무나 충격적이고 비참한 광경들이었다. 처음엔 너무 겁이 나 발도 안 떨어졌다”고 말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윤 씨는 4년 뒤 제대해 귀향했지만 정상적인 생활은 할 수가 없었다. 20살이 됐지만 학교에선 그에게 다시 중학교 3학년으로 복학하라고 했고, 결국 그는 복학을 포기한 채 생활전선에 나섰다.

윤 씨는 “중학교 졸업장이 없다보니 변변한 직업을 구하지도 못했다. 평생 이런 일, 저런 일 하면서 고생 많이 했다. 그렇다보니 자식들 뒷바라지도 제대로 못해 준 것 같아 미안하다”고 한탄했다.

지금 윤 씨는 ‘6.25참전 소년·소녀병전우회’ 부회장 겸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윤 씨와 비슷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은 전국적으로 3만 명에 달한다.


<사진1. 6.25전쟁 당시 소년병 모습>

국방부에 따르면, 한국전쟁에 참전한 소년·소녀병(이하 소년병)이 2만9천여 명으로 집계됐다. 당시 1개 사단이 7천~8천명 수준이었던 걸 감안하면 3개 사단에 해당하는 병력이다.

소년병은 한국전쟁 당시 징집 연령엔 못 미치지만 정규군으로 입대해 군번을 부여받은 14~17세의 학생들을 일컫는다.

이들 가운데 2천500여 명이 전장에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전우회 측은 현재 전국적으로 6~7천명이 생존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소년병은 학도의용군과는 차이가 있다.

의용군은 학생신분의 비정규군으로, 1951년 2월28일 문교부 장관이 학생복귀령을 내리면서 해산해 학교로 돌아갔지만, 소년병은 군번이 부여된 정규군이었기 때문에 정전 후에도 한참이 지나서야 제대명령을 받고 가정으로 복귀했다.



문제는 60년이 넘도록 이들에 대한 처우가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소년병 생존자들은 현재 정부로부터 월 17만원 정도의 참전수당만 받을 뿐 더 이상의 예우는 받지 못하고 있다.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년병에 대한 존재를 정부로부터 공식 인정받은 것도 지난 2008년으로, 얼마 되지 않는다.

국가유공자로 지정되면 국립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고 연금도 지금보다 더 많이 받을 수 있다.

소년병 생존자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는 소년병전우회는 소년병들에 대해 국가가 적절히 예우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우선 관련 법 제정이 시급하다는 게 이들의 입장이다.

6.25참전 소년병의 국가유공자 인정을 골자로 한 ‘국가유공자 예우 및 지원에 관한 일부개정법률안’이 16대~18대 국회에 제출됐지만 모두 자동 폐기됐다.

마땅히 적용할 만한 법률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다.

소년병들의 참전은 자발적 의사에 의한 것이었고 이들에 대한 보상을 따로 할 경우 또 다른 6.25참전 유공자와 형평성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게,국방부의 입장이다.

하지만 6.25전쟁에 참전한 '재일학도 의용군'도 국가유공자로 인정받고 있어 소년병만 외면당하고 있다는 것이 생존자들의 주장이다.

일본에 거주하던 청년과 학생 642명이 자진 입대해 참전한 '재일학도 의용군'은 1968년부터 국가유공자로 지정됐다.


<사진3.낙동강 전투 사진.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


몇년째 정부와 소년병 생존자들 간 입장차가 좁혀지지 않자 최근에는 소년병 생존자 5명이 국가를 상대로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6.25당시 아동을 대상으로 한 징집 행위가 법치주의에 위반된다는 것이 주된 이유다.

이들은 또 강제 징집으로 아동의 권리를 침해한 상태에 대해 아무런 입법 조치도 하지 않는 국회의 ‘부작위(마땅히 해야 할 것으로 기대되는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 역시 위헌 사유에 해당된다고 밝혔다.

앞선 2012년 10월에는 ‘6.25참전 소년·소녀병 보상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에 제출됐지만 아직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소년병 생존자들은 네 번째 제출된 법안이 이번 19대 국회에서 처리될지 주목하고 있다.

생존자 모두 80대 전후의 노인들이어서 관련 법 제정이 시급하다는 입장이지만 낙관할 순 없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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