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 자신은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죠’

입력 2014.06.25 (08:31) 수정 2014.06.2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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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져가던 정통사극의 불씨가 여말선초 정도전이라는 개혁가를 만나 다시 살아났다.

"정도전을 안 본 사람은 있어도, 일단 보기 시작하면 한 회라도 빼먹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KBS 1TV '정도전'은 인기를 끌었다.

이제 오는 29일 50회로 종영하는 이 드라마는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자라면 "가슴 한 켠에 불가능한 꿈을 하나쯤 품고 살아라"고 말한다. 그래야 변화가 오고 개혁이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주말이면 안방극장 앞으로 중장년의 남성들이 개근하게 하고, 청춘이 점령한 인터넷 세상에서도 뜨거운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정도전'은 국회의원 보좌관 출신이라는 특이한 이력을 가진 한 '신참' 작가의 손에서 탄생했다.

화제의 작가 정현민(43)을 최근 인터뷰했다.

공고를 졸업한 후 공장에서 노동운동을 했고 대학 졸업 후 국회로 입성, 10년간 이경재·박인상 등 여야 의원 5명을 보좌하면서 노동정책 전문가를 꿈꾸던 그는 2009년 KBS극본공모에 '덜컥' 당선되면서 진로를 틀었다. 단막극을 몇편 쓴 후 KBS 아침드라마 '사랑아 사랑아'를 거쳐 만난 게 '정도전'이다.

"사실 이전까지는 언제든 보좌관으로 돌아갈 생각도 했다"며 웃은 정 작가는 "하지만 이번 정도전을 쓰면서 작가 정체성을 확고히 했다고 본다. 드라마 작가로 이렇게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 어떻게 정도전 얘기를 하게 됐나.

▲ 처음에 정도전에 대한 집필 제안을 받고 공부할 시간을 좀 달라고 했다. 아침드라마를 막 끝낸 직후였다. 제주도로 내려가 2주 정도 올레길을 걷고 또 걸으며 정도전을 만나기 위해 생각을 했다. 그 결과 드라마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정도 자신은 있었지만 반응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 초반에는 이인임이 더 부각되는 등 정도전이 가려지기도 했다.

▲ 약간 당황도 했지만 크게 걱정은 안했다. 우리 드라마의 타이틀이 정도전이지만 그렇다고 1회부터 50회까지 모든 회를 정도전이 좌지우지해야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제목이 정도전인 이유는 정도전을 중심으로 바라보는 여말선초를 그리기 때문이지 정도전 이야기만 한다는 것은 아니다. 또한 정도전은 기본적으로 표현의 한계가 있는 성리학자인 데다 성장해가는 캐릭터인 반면, 초반에 화제를 모은 이인임이나 최영 등은 이미 그 시점에 확고히 성숙해 있던 캐릭터라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조재현 선배가 정도전 캐릭터를 아주 잘 잡아주셨다. 만일 다른 분이 했다면 아마 논란이 더 컸을 것이다.

-- 시청자가 이인임 캐릭터에 열광했다.

▲ 대본을 쓰면서 이인임이 주목받을 것이라 나름대로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센 반응이 나왔다. 나도 이 드라마를 하면서 이인임에 대해 구체적으로 공부를 했는데 한마디로 정치고수다. 어차피 드라마에는 악역이 있어야 하는데 국가관이 확실한 악역을 그리고 싶었다. 이인임은 최영과 10년 이상 연정을 펼칠 만큼 친화력도 있는 데다 14년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것을 보면 정치 드라마에 딱 어울리는 캐릭터였다. 그래서 더 공을 들이기도 했고 박영규라는 배우의 열연과 겹쳐지면서 인기를 얻은 것 같다. 국회 경험을 통해 초선부터 다선까지 많은 의원을 봤는데 그중 무게감이 있는 분들을 떠올리면서 썼다.

-- 반면 정도전 같은 인물은 국회에서 못 본 것 아닌가.

▲ 그래서 예전에 혁명 운동을 한 분들을 만났다.(웃음)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을 한 분들을 만나 혁명가는 어떤 정체성을 갖고 있나 살폈다. 그분들이 당시 불가능을 꿈꾸었던, 그 느낌을 받으려 노력했다. 나 역시 노동운동을 했기 때문에 그런 정서가 낯설지는 않다.

-- 노동운동을 하려다 드라마 작가가 됐다.

▲ 보좌관 생활을 하면서 노동정책 전문가를 꿈꿨다. 국회라는 곳이 갖가지 의견이 모이고 그것을 조정해주는 곳이라 보람을 많이 느꼈다. 그 일을 계속 하다 오십이 넘으면 지방 노동위에서 일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좌관 9년차, 매너리즘에 빠져 들쯤 주변의 권유로 여의도 방송작가교육원에 등록하게 됐다. 일주일에 한 번씩 다니는 것이고 국회 바로 옆이라 힐링하는 기분으로 나갔다. KBS극본공모에 당선되지 않았으면 여기까지 안 왔을 것이다. 운이 좋게 잘 풀리면서 정도전까지 하게 됐다.

그동안은 대본을 쓰면서도 내가 진짜 작가인가 의문이 들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정도전'을 통해 드라마 한편이 이렇게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구나 놀라게 됐다. 역사서적이 많이 팔린다는 소식을 듣는 것도 반가웠고, 그동안 TV 사극을 보지 않던 사람들을 끌어들였다는 데 보람을 느꼈다.

물론 드라마 작가 세계도 대단히 냉엄한 곳이라 앞으로도 쉽지 않은 길이겠지만 '정도전'을 계기로 내가 드라마 작가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생각은 든다.

-- 시청자는 현실에도 정도전 같은 인물이 있기를 바란다.

▲ 사람들이 현실에 대한 불만이 많은 것 같다.(웃음)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고 했으니 우리 사회 누군가가 이미 정도전일 수도 있다. 오지 않는 메시아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또 정치에 대한 맹목적인 불신은 국민에게 손해라고 본다. 사람들이 현실에는 정도전이 없다며 절망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미우나 고우나 기댈 곳을 정치'라는 대사를 쓰기도 했는데 분명히 우리 사회에도 훌륭한 분들이 있을 것이고 우리는 그런 분들을 찾아내야 한다. 정도전 같은 인물은 결코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이 드라마를 정치적인 텍스트로만 보지 않기를 바란다. 일상에 대한 작은 반란을 통해 우리 나름의 일상을 극복하는 것도 정도전이 말하는 '불가능한 꿈을 품는' 것이라 본다.

-- 사실과 허구의 안배는 어떻게 했나.

▲ 물론 드라마니까 허구가 굉장히 많다. 하지만 정통사극인 만큼 주요 사건과 사건 사이를 채워갈 때 징검다리 개념 정도로만 내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을 각색의 원칙으로 삼았다. 대단히 조심스러운 작업이었고 진실을 찾아가는 작업이었다. 기본적으로는 사료에 의존하지만 사료 자체가 승자에 의해 쓰인 것인 만큼 오류일 수도 있다고 본다.

-- 마지막 대본을 넘기면서 후회는 없었나.

▲ 조금 더 치열했어야, 치밀했어야 했다고 본다. 하지만 계획했던 이야기는 거의 다 했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대하사극 제작여건이 정말 힘들다. 배우가 고액의 개런티를 받는 것도 아니고 먼 지방으로 로케이션을 다녀야하고 말을 타다 낙상의 위험도 있다. 그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배우와 스태프가 정말 열심히 해줬다. 정말 감사드린다.

-- 차기작 계획은.

▲ 아직은 없다. 다만 바로 다음 작품으로 정치사극은 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복제가 염려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정치적 색채가 가미된 작품들을 앞으로도 계속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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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도전, 자신은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죠’
    • 입력 2014-06-25 08:31:43
    • 수정2014-06-25 08:35:28
    연합뉴스
꺼져가던 정통사극의 불씨가 여말선초 정도전이라는 개혁가를 만나 다시 살아났다.

"정도전을 안 본 사람은 있어도, 일단 보기 시작하면 한 회라도 빼먹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KBS 1TV '정도전'은 인기를 끌었다.

이제 오는 29일 50회로 종영하는 이 드라마는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자라면 "가슴 한 켠에 불가능한 꿈을 하나쯤 품고 살아라"고 말한다. 그래야 변화가 오고 개혁이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주말이면 안방극장 앞으로 중장년의 남성들이 개근하게 하고, 청춘이 점령한 인터넷 세상에서도 뜨거운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정도전'은 국회의원 보좌관 출신이라는 특이한 이력을 가진 한 '신참' 작가의 손에서 탄생했다.

화제의 작가 정현민(43)을 최근 인터뷰했다.

공고를 졸업한 후 공장에서 노동운동을 했고 대학 졸업 후 국회로 입성, 10년간 이경재·박인상 등 여야 의원 5명을 보좌하면서 노동정책 전문가를 꿈꾸던 그는 2009년 KBS극본공모에 '덜컥' 당선되면서 진로를 틀었다. 단막극을 몇편 쓴 후 KBS 아침드라마 '사랑아 사랑아'를 거쳐 만난 게 '정도전'이다.

"사실 이전까지는 언제든 보좌관으로 돌아갈 생각도 했다"며 웃은 정 작가는 "하지만 이번 정도전을 쓰면서 작가 정체성을 확고히 했다고 본다. 드라마 작가로 이렇게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 어떻게 정도전 얘기를 하게 됐나.

▲ 처음에 정도전에 대한 집필 제안을 받고 공부할 시간을 좀 달라고 했다. 아침드라마를 막 끝낸 직후였다. 제주도로 내려가 2주 정도 올레길을 걷고 또 걸으며 정도전을 만나기 위해 생각을 했다. 그 결과 드라마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정도 자신은 있었지만 반응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 초반에는 이인임이 더 부각되는 등 정도전이 가려지기도 했다.

▲ 약간 당황도 했지만 크게 걱정은 안했다. 우리 드라마의 타이틀이 정도전이지만 그렇다고 1회부터 50회까지 모든 회를 정도전이 좌지우지해야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제목이 정도전인 이유는 정도전을 중심으로 바라보는 여말선초를 그리기 때문이지 정도전 이야기만 한다는 것은 아니다. 또한 정도전은 기본적으로 표현의 한계가 있는 성리학자인 데다 성장해가는 캐릭터인 반면, 초반에 화제를 모은 이인임이나 최영 등은 이미 그 시점에 확고히 성숙해 있던 캐릭터라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조재현 선배가 정도전 캐릭터를 아주 잘 잡아주셨다. 만일 다른 분이 했다면 아마 논란이 더 컸을 것이다.

-- 시청자가 이인임 캐릭터에 열광했다.

▲ 대본을 쓰면서 이인임이 주목받을 것이라 나름대로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센 반응이 나왔다. 나도 이 드라마를 하면서 이인임에 대해 구체적으로 공부를 했는데 한마디로 정치고수다. 어차피 드라마에는 악역이 있어야 하는데 국가관이 확실한 악역을 그리고 싶었다. 이인임은 최영과 10년 이상 연정을 펼칠 만큼 친화력도 있는 데다 14년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것을 보면 정치 드라마에 딱 어울리는 캐릭터였다. 그래서 더 공을 들이기도 했고 박영규라는 배우의 열연과 겹쳐지면서 인기를 얻은 것 같다. 국회 경험을 통해 초선부터 다선까지 많은 의원을 봤는데 그중 무게감이 있는 분들을 떠올리면서 썼다.

-- 반면 정도전 같은 인물은 국회에서 못 본 것 아닌가.

▲ 그래서 예전에 혁명 운동을 한 분들을 만났다.(웃음)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을 한 분들을 만나 혁명가는 어떤 정체성을 갖고 있나 살폈다. 그분들이 당시 불가능을 꿈꾸었던, 그 느낌을 받으려 노력했다. 나 역시 노동운동을 했기 때문에 그런 정서가 낯설지는 않다.

-- 노동운동을 하려다 드라마 작가가 됐다.

▲ 보좌관 생활을 하면서 노동정책 전문가를 꿈꿨다. 국회라는 곳이 갖가지 의견이 모이고 그것을 조정해주는 곳이라 보람을 많이 느꼈다. 그 일을 계속 하다 오십이 넘으면 지방 노동위에서 일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좌관 9년차, 매너리즘에 빠져 들쯤 주변의 권유로 여의도 방송작가교육원에 등록하게 됐다. 일주일에 한 번씩 다니는 것이고 국회 바로 옆이라 힐링하는 기분으로 나갔다. KBS극본공모에 당선되지 않았으면 여기까지 안 왔을 것이다. 운이 좋게 잘 풀리면서 정도전까지 하게 됐다.

그동안은 대본을 쓰면서도 내가 진짜 작가인가 의문이 들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정도전'을 통해 드라마 한편이 이렇게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구나 놀라게 됐다. 역사서적이 많이 팔린다는 소식을 듣는 것도 반가웠고, 그동안 TV 사극을 보지 않던 사람들을 끌어들였다는 데 보람을 느꼈다.

물론 드라마 작가 세계도 대단히 냉엄한 곳이라 앞으로도 쉽지 않은 길이겠지만 '정도전'을 계기로 내가 드라마 작가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생각은 든다.

-- 시청자는 현실에도 정도전 같은 인물이 있기를 바란다.

▲ 사람들이 현실에 대한 불만이 많은 것 같다.(웃음)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고 했으니 우리 사회 누군가가 이미 정도전일 수도 있다. 오지 않는 메시아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또 정치에 대한 맹목적인 불신은 국민에게 손해라고 본다. 사람들이 현실에는 정도전이 없다며 절망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미우나 고우나 기댈 곳을 정치'라는 대사를 쓰기도 했는데 분명히 우리 사회에도 훌륭한 분들이 있을 것이고 우리는 그런 분들을 찾아내야 한다. 정도전 같은 인물은 결코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이 드라마를 정치적인 텍스트로만 보지 않기를 바란다. 일상에 대한 작은 반란을 통해 우리 나름의 일상을 극복하는 것도 정도전이 말하는 '불가능한 꿈을 품는' 것이라 본다.

-- 사실과 허구의 안배는 어떻게 했나.

▲ 물론 드라마니까 허구가 굉장히 많다. 하지만 정통사극인 만큼 주요 사건과 사건 사이를 채워갈 때 징검다리 개념 정도로만 내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을 각색의 원칙으로 삼았다. 대단히 조심스러운 작업이었고 진실을 찾아가는 작업이었다. 기본적으로는 사료에 의존하지만 사료 자체가 승자에 의해 쓰인 것인 만큼 오류일 수도 있다고 본다.

-- 마지막 대본을 넘기면서 후회는 없었나.

▲ 조금 더 치열했어야, 치밀했어야 했다고 본다. 하지만 계획했던 이야기는 거의 다 했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대하사극 제작여건이 정말 힘들다. 배우가 고액의 개런티를 받는 것도 아니고 먼 지방으로 로케이션을 다녀야하고 말을 타다 낙상의 위험도 있다. 그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배우와 스태프가 정말 열심히 해줬다. 정말 감사드린다.

-- 차기작 계획은.

▲ 아직은 없다. 다만 바로 다음 작품으로 정치사극은 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복제가 염려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정치적 색채가 가미된 작품들을 앞으로도 계속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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