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띄는 15대 국회 입성 의원들, 우리 정치 중심축으로 부상

입력 2014.07.16 (13:28)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15대 국회(1996.5.30~2000.5.29)를 통해 정치권에 입성한 의원들이 현재 우리 정치의 핵심축으로 자리를 잡고 있어 눈길을 끈다.

국회에 들어온지 18년 정도가 지난 지금 15대 출신 의원들은 행정부와 입법부, 지자체 등에서 주요 요직을 맡아 우리나라를 이끄는 중심 세력으로 성장했다.

15대 국회 입성의원 중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박근혜 대통령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 1997년 당시 한나라당에 입당해 제15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이회창 후보를 지원하는 유세를 하며 정계에 입문했다.

그후 박 대통령은 이듬해 4월 치러진 대구 달성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돼 15대 국회에 입성, 본격적인 정치를 시작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도 박 대통령과 국회 입문 동기다.

김 대표는 김영삼 전 대통령 계파인'상도동계'로 활동하며 통일민주당과 민주자유당 총무국장, 의사국장 등을 두루 거친 후 1996년 15대 총선에서 부산 남구을에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 처음 금배지를 달았다.

국가 의전서열 순위 2위인 정의화 국회의장도 당시 신한국당 공천을 받아 부산 중구.동구에서 당선돼 15대 국회에 입성했다.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도 15대 국회에 들어와 박근혜 대통령과 국회 동기다. 김 실장은 당시 경남 거제에서 당선됐다.

정치권에서는 박 대통령과 김 실장이 15대 국회에 들어온 이후 가깝게 지내온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져 대통령과 비서실장으로 호흡을 맞추고 있다는 게 정설이다.

차기 새누리당 대권주자로 거론되는 남경필 경기지사도 15대 당시 수원 팔달에서 당선된뒤 이 지역에서 내리 5선을 기록했다.

남 지사는 부친인 남평우 전 의원의 사망으로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는데, 당시 남 지사의 나이는 34세에 불과했다.

이밖에 홍준표 경남지사도 검사로 재직중이던 1993년 슬롯머신 사건을 수사하면서 거물들을 옳아맸고, 그의 이야기가 드라마로 재탄생 하면서 '모래시계'검사로 이름이 날리며 15대 국회의원 선거에 신한국당 후보로 서울 송파갑에 출마해 당선됐다.

이외에도 이명박 정부의 핵심 실세였던 이재오 의원과, 김문수 전 경기지사, 황우여 교육부장관 후보자도 15대 국회를 통해 정치를 시작했다.

야당은 여당만큼은 아니지만 주요 인물들이 15대 국회에 입성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먼저 김한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총재로 있던 새정치국민회의 비례대표로 금배지를 달았다. 당시 김 대표는 소설가와 방송인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정동영 전 의원도 15대 총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전주 덕진구에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정 전 의원은 이후 승승장구하며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당시 여당 후보로 출마했지만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에게 큰 표 차이로 낙선했다.

민주당 대표를 역임한 정세균 의원도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전북 진안ㆍ무주ㆍ장수에 출마해 당선됐고, 판사 출신인 추미애 의원도 15대 국회에 들어와 대표적인 여성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정치권에서는 15대 국회 입성의원들의 전성시대를 두고 당시 '개혁공천'이 큰 역할을 했다는데 이견이 없다.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은 15대 총선 1년 전인 1995년 6월 지방선거에서 패배, 지역정치구조가 여소야대가 됨에 따라 정권 심판론이 확산됐고, 문민정부 집권 4년차에 치러지는 선거로 여당에 결코 유리한 환경이 아니었다.

이때 신한국당은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주도로 기성 정치권의 틀을 깨는 과감한 세대교체를 추진했고, 이를 통해 신한국당은 지역구 122석과 전국구 18석 등 과반에 육박하는 140석을 확보하며 선전했다.

새누리당 관계자는 "지금도 15대 공천은 개혁공천 모델로 각 선거때마다 얘기가 나오고 있다"며 "결국 15대 처럼 정치쇄신 등을 통해 유능한 외부인사를 영입해야 국민들이 평가를 해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 15대 국회의원들은 당시 IMF환란을 극복하고자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등 기업구조조정.정부조직개편관련 법률을 정비했다.

또 1999년 1월 7일 'IMF환란원인규명과경제위기진상 조사를 위한 국정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외환위기를 초래한 경제정책, 종합금융사감독부실과 기아사태.한보사건 등에 대한 국정조사를 실시하는 등 IMF극복에 온 힘을 쏟았다.

정치분야에서는 1998년 4월 '정치개혁입법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2000년 2월 9일 국회의원정수의 축소 조정(273인), 연중 상시개원체제, 예산결산특별위원회의 상설화, 전원위원회 제도와 인사청문회 제도도입 등 정치개혁입법을 마련하였다.

하지만 15대 국회는 1996년 12월 26일 노동법 개정안과 안기부법을 날치기로 통과시켜 국민들의 비난을 샀고, 공약 이행률 최저라는 오명도 남겼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눈에 띄는 15대 국회 입성 의원들, 우리 정치 중심축으로 부상
    • 입력 2014-07-16 13:28:04
    정치
15대 국회(1996.5.30~2000.5.29)를 통해 정치권에 입성한 의원들이 현재 우리 정치의 핵심축으로 자리를 잡고 있어 눈길을 끈다. 국회에 들어온지 18년 정도가 지난 지금 15대 출신 의원들은 행정부와 입법부, 지자체 등에서 주요 요직을 맡아 우리나라를 이끄는 중심 세력으로 성장했다. 15대 국회 입성의원 중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박근혜 대통령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 1997년 당시 한나라당에 입당해 제15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이회창 후보를 지원하는 유세를 하며 정계에 입문했다. 그후 박 대통령은 이듬해 4월 치러진 대구 달성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돼 15대 국회에 입성, 본격적인 정치를 시작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도 박 대통령과 국회 입문 동기다. 김 대표는 김영삼 전 대통령 계파인'상도동계'로 활동하며 통일민주당과 민주자유당 총무국장, 의사국장 등을 두루 거친 후 1996년 15대 총선에서 부산 남구을에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 처음 금배지를 달았다. 국가 의전서열 순위 2위인 정의화 국회의장도 당시 신한국당 공천을 받아 부산 중구.동구에서 당선돼 15대 국회에 입성했다.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도 15대 국회에 들어와 박근혜 대통령과 국회 동기다. 김 실장은 당시 경남 거제에서 당선됐다. 정치권에서는 박 대통령과 김 실장이 15대 국회에 들어온 이후 가깝게 지내온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져 대통령과 비서실장으로 호흡을 맞추고 있다는 게 정설이다. 차기 새누리당 대권주자로 거론되는 남경필 경기지사도 15대 당시 수원 팔달에서 당선된뒤 이 지역에서 내리 5선을 기록했다. 남 지사는 부친인 남평우 전 의원의 사망으로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는데, 당시 남 지사의 나이는 34세에 불과했다. 이밖에 홍준표 경남지사도 검사로 재직중이던 1993년 슬롯머신 사건을 수사하면서 거물들을 옳아맸고, 그의 이야기가 드라마로 재탄생 하면서 '모래시계'검사로 이름이 날리며 15대 국회의원 선거에 신한국당 후보로 서울 송파갑에 출마해 당선됐다. 이외에도 이명박 정부의 핵심 실세였던 이재오 의원과, 김문수 전 경기지사, 황우여 교육부장관 후보자도 15대 국회를 통해 정치를 시작했다. 야당은 여당만큼은 아니지만 주요 인물들이 15대 국회에 입성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먼저 김한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총재로 있던 새정치국민회의 비례대표로 금배지를 달았다. 당시 김 대표는 소설가와 방송인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정동영 전 의원도 15대 총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전주 덕진구에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정 전 의원은 이후 승승장구하며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당시 여당 후보로 출마했지만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에게 큰 표 차이로 낙선했다. 민주당 대표를 역임한 정세균 의원도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전북 진안ㆍ무주ㆍ장수에 출마해 당선됐고, 판사 출신인 추미애 의원도 15대 국회에 들어와 대표적인 여성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정치권에서는 15대 국회 입성의원들의 전성시대를 두고 당시 '개혁공천'이 큰 역할을 했다는데 이견이 없다.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은 15대 총선 1년 전인 1995년 6월 지방선거에서 패배, 지역정치구조가 여소야대가 됨에 따라 정권 심판론이 확산됐고, 문민정부 집권 4년차에 치러지는 선거로 여당에 결코 유리한 환경이 아니었다. 이때 신한국당은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주도로 기성 정치권의 틀을 깨는 과감한 세대교체를 추진했고, 이를 통해 신한국당은 지역구 122석과 전국구 18석 등 과반에 육박하는 140석을 확보하며 선전했다. 새누리당 관계자는 "지금도 15대 공천은 개혁공천 모델로 각 선거때마다 얘기가 나오고 있다"며 "결국 15대 처럼 정치쇄신 등을 통해 유능한 외부인사를 영입해야 국민들이 평가를 해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 15대 국회의원들은 당시 IMF환란을 극복하고자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등 기업구조조정.정부조직개편관련 법률을 정비했다. 또 1999년 1월 7일 'IMF환란원인규명과경제위기진상 조사를 위한 국정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외환위기를 초래한 경제정책, 종합금융사감독부실과 기아사태.한보사건 등에 대한 국정조사를 실시하는 등 IMF극복에 온 힘을 쏟았다. 정치분야에서는 1998년 4월 '정치개혁입법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2000년 2월 9일 국회의원정수의 축소 조정(273인), 연중 상시개원체제, 예산결산특별위원회의 상설화, 전원위원회 제도와 인사청문회 제도도입 등 정치개혁입법을 마련하였다. 하지만 15대 국회는 1996년 12월 26일 노동법 개정안과 안기부법을 날치기로 통과시켜 국민들의 비난을 샀고, 공약 이행률 최저라는 오명도 남겼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