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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성 “못하면 죽을 것 같은게 음악이었죠”
입력 2014.07.28 (07:05) 연합뉴스
7년 전 인터뷰에서 휘성(32)은 음악을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다른 재주가 없어요. 저를 가장 돋보이게 하고 떳떳하게 만드는 게 음악이죠. 가족을 먹여 살리기도 하고요."

국내 알앤비(R&B) 장르의 선두 주자인 휘성은 대표적인 자수성가형 가수다.

타고난 보컬이 아닌데다가 육체적으로도 알레르기성 비염에 축농증, 스트레스를 받으면 도지는 과민성 대장증후군에 불면증과 우울증 등 걸출한 스타로 성장하기에 난관이 많았다.

가정 형편도 마음 편히 음악 할 환경은 못됐다. 면목동 단칸방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택시 운전을 했는데 집안에 안 좋은 일이 겹치며 고교 때는 대학 등록금조차 마련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남 못지않게' 무명 시절도 겪었다.

2002년 1집 타이틀곡 '안되나요'로 바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사실 그는 고3 때인 1999년 4인조 그룹 A4로 데뷔했다.

하지만 이 팀은 2집까지 낸 후 2000년 해체됐다.

그는 팀을 나오고서 죽도록 노래하는 연습벌레가 됐다.

보컬 학원에 등록해 6개월간 매일 10시간씩 화장실 가는 시간만 빼고 노래했다.

당시 학원 동료 중 빅마마의 이영현과 가수 임정희가 있었는데 이들보다 실력이 못 미친다는 생각에 주위에서 미쳤다고 할 정도로 연습을 했다.

이후 2000년 강변가요제에 출전했는데 이때 심사위원이던 가수 이상우가 휘성을 자신의 기획사 연습생으로 발탁했다.

1년 후 그는 그곳에서 만난 프로듀서 박경진과 나와 솔로 데뷔를 준비했다. 월세 8만 원 하는 인천문학경기장의 한 쪽방에서 박경진, 작사가 최갑원과 함께 살며 끼니를 음료수로 때우기도 했다. 박경진은 기획사 엠보트를 만들어 휘성의 데모 CD를 돌렸는데 그의 가능성을 알아본 YG엔터테인먼트가 공동 제작에 참여했다.

휘성이란 이름을 세상에 처음 알린 솔로 데뷔곡 '안되나요'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도 불구하고 노래가 터졌다. 같은 해 솔로 데뷔를 한 비와 신인상도 나눠가졌다.

어려움을 극복하며 돌고 돌아 성공한 케이스인 셈이다.

최근 여의도에서 만난 휘성은 "하고 싶은 걸 못하면 죽는 사람이 있고 자제력이 강한 사람이 있다"며 "난 자제력이 강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하고 싶은 걸 못하면 당장에라도 죽을 것 같았다. 나에겐 그게 음악이었다"고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이후 2집의 '위드 미'(2003), 3집의 '불치병'(2004), 4집의 '굿바이 러브'(2005)까지 잇달아 터졌다. 이 곡들을 쓴 작곡가 김도훈과 콤비를 이뤘는데 4집은 발매 한 주 만에 12만 장이 판매됐다. 수려한 테크닉보다 가사를 잘 전달하는 창법은 큰 장점이었다.

"솔로 데뷔를 하고서 스케줄이 많아 목이 감당이 안 돼 힘들었던 기억이 나요. 승부욕이 강해서 타파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죠."

인기를 끌면서도 그는 자신을 조였다. 업계에서는 '예민하다', '무서운 악바리다' 등의 평가가 흘러나왔다.

그는 "노래를 잘하고 싶었을 뿐 연예인이 됐다는 생각도 없었다"며 "그래서 2008년까지 지하철, 버스도 타고 다녔는데 주위에서는 그걸 신기해했지만 나는 그런 것엔 개의치 않았다"고 말했다.

지난 2008년에는 목을 많이 쓴 탓인지 성대 낭종 제거 수술도 받았다.

평소 책을 다독했는데 음악 방송 대기실에서까지 자기계발서를 탐독하는 모습이 눈에 띄곤 했다.

"자기계발서에서 길을 찾고서 지금은 명상책으로 넘어갔다"고 웃는다.

2006년 봄 그는 YG엔터테인먼트·엠보트와의 계약 만료로 작곡가 박근태가 운영하는 오렌지쇼크로 이적했다.

이때부터 그는 슬픈 알앤비를 넘어 솔(Soul), 슬로 잼, 네오-솔 등 장르의 폭을 넓혔고 프로듀서로서의 역량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5집의 '사랑은 맛있다♡'(2007)에선 랩을 시도했고 '별이 지다'가 담긴 6집의 첫 번째 미니앨범(2008)에선 자작곡을 수록하며 흑인 음악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두 장의 앨범은 전작에 비해 만족스러운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이때부터 국내 가요계가 아이돌 가수로 세대교체가 된 영향도 있었다.

그는 "'별이 지다'를 끝으로 '가수 생활을 접을까' 진지하게 고민했다"며 "이어서 낸 '인섬니아'(2009)를 마지막으로 프로듀서로 전향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 노래가 정말 큰 사랑을 받았다"고 말했다.

실제 그는 이즈음 다른 가수들의 음반에 참여하며 작사·작곡가로 빛을 발했다.

윤하의 '비밀번호 486', 아이비의 '유혹의 소나타', 이효리의 '헤이 미스터 빅' 등의 가사를 썼다.

섬세하면서도 직설적이고 재치있는 노랫말이 강점이었다.

작사를 시작으로 작곡가로도 폭을 넓혀 올해만 엠블랙의 '남자답게', 에일리의 '노래가 늘었어', 임창정의 '마지막 악수' 등을 만들었다.

현재 에일리의 음반 프로듀서로도 주목받고 있다.

2009년 박근태와 결별한 그는 '결혼까지 생각했어'(2010), '가슴 시린 이야기'(2011) 등을 다시 히트시킨 뒤 2011년 입대했다.

그 사이 미국 유명 프로듀서 로드니 저킨스와 손잡고 현지 진출도 준비했는데 입대와 함께 좌절됐다.

논산훈련소 조교로 복무하고서 지난해 제대한 그는 에일리의 소속사 YMC엔터테인먼트에 새 둥지를 틀었지만 다시 가요계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고 한다.

"언젠가 콘서트 준비를 하면서 한쪽에 쌍꺼풀이 생기더니 군대에서도 마음고생을 해 다른 한쪽에 쌍꺼풀이 생기더라"고 웃었다.

그러나 제대 몇 개월 뒤 KBS 2TV '불후의 명곡'과 JTBC '히든 싱어'에 출연하며 그의 과거 명곡들이 재조명 받는 행운이 따랐다.

멜론, 엠넷닷컴 등 각종차트 100위권에 10여 년 전 곡인 '안되나요'를 비롯해 대표곡 10여 곡이 진입하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휘성은 "솔직히 신기했다"며 "당시 그 프로그램에서 내 노래를 불러준 분들이 너무 잘해줘 그런 것이었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이런 반향에 힘을 얻었지만 제대 후 처음 선보일 앨범에 대한 부담은 되레 커졌다.

다시 김도훈과 손잡고 몇 개월간 작업실에서 먹고 자며 작업했다.

음악에 함몰되다 보니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지난 5월 발표한 앨범 수록곡 '돈벌어야돼'에서 직접 쓴 가사가 이 같은 심경을 대변해준다.

'음악은 내 꿈이야 내 삶의 유일한 행복의 길이야, 티비 속 저 아이들도 이런 생각을 하겠지, 어릴 적 나처럼 말이야, 음악은 이젠 내게 일이야, 헤드폰을 머리에 쓰는 것마저도 일이야, 뮤직은 내게 휴식이었는데, 언젠가부터 내게 숙직을 시키네~.'

그는 "음악을 처음 시작할 때는 장르를 만드는 게 꿈이었지만 그럴 자신이 없다고 느낀 순간도 경험했다"며 "그럼에도 음악은 여전히 내가 사는 유일한 길인데 이젠 나이도 들어가니 '그게 돈까지 벌어주면 얼마나 좋을까'란 솔직한 마음을 써봤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지난 12년간 한결같은 건 보컬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발라드 정서에 강한 끌림을 갖고 있죠. 실제 '나는 가수다'에서도 성악 발성에 기반해 폭발력 있는 성량으로 발라드를 잘 부른 가수가 높은 점수를 받았고요. 하지만 전 발라드를 그리 좋아하지 않아 '사랑은 맛있다' 이후부터 '그런 걸 못하면 끝까지 노래할 수 없겠구나'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최근에 지르지 않고 스타일리시하게 노래한 정기고 씨의 음악이 받아들여지는 걸 보고 반가운 현상이라고 여겼어요."

그는 이번 앨범에서 정기고, 프라이머리의 음악처럼 출근길, 퇴근길에 부담없이 들을 수 있는 스타일리시한 음악을 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악을 쓰는 노래보다 말동무가 되는 음악"이라며 "그러나 타이틀곡이 아쉬웠고 결국 이 부분을 어필하진 못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그는 데뷔 이래 처음으로 새로운 영역에 도전한다.

다음 달 충무아트홀에서 막이 오르는 뮤지컬 '조로'에서 조로 역을 맡았다.

과제가 주어지면 한 가지에 몰두하는 성격답게 지금은 밤낮으로 이 작품에만 매달려 있다고 한다.

하반기에 선보일 음반 작업도 해놨다.

그는 이날, 이 자리에 오기까지 응원해준 가족들에 대한 애틋함도 내비쳤다.

지난 5월 그는 '불후의 명곡' 가족특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고(故)김정호의 '하얀나비'를 듀엣해 우승을 차지하며 큰 감동을 줬다.

"전 타고 났단 소리를 못 들었지만, 아버지는 타고난 목소리여서 꿈이 가수였죠. 가세가 기울어 꿈이고 뭐고 포기하고 먹고 살길만 생각하며 사시다 보니…. 아버지와 TV에서 같이 노래한 게 처음이었는데 그날 소원을 이루신 것 같아 뭉클했어요."

그는 "가수 휘성이 되고선 스트레스 탓인지, 걱정을 끼치는 게 싫어서인지 집안에서 말을 잘 안 하는 무뚝뚝한 아들이었다"며 "분명 좋은 아들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가수 휘성으로는 성공한 삶인지 물었다.

"전 성공했다기보다 열등감, 자격지심, 호기심, 모험심 덕에 살아남았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아요. 하하."
  • 휘성 “못하면 죽을 것 같은게 음악이었죠”
    • 입력 2014-07-28 07:05:47
    연합뉴스
7년 전 인터뷰에서 휘성(32)은 음악을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다른 재주가 없어요. 저를 가장 돋보이게 하고 떳떳하게 만드는 게 음악이죠. 가족을 먹여 살리기도 하고요."

국내 알앤비(R&B) 장르의 선두 주자인 휘성은 대표적인 자수성가형 가수다.

타고난 보컬이 아닌데다가 육체적으로도 알레르기성 비염에 축농증, 스트레스를 받으면 도지는 과민성 대장증후군에 불면증과 우울증 등 걸출한 스타로 성장하기에 난관이 많았다.

가정 형편도 마음 편히 음악 할 환경은 못됐다. 면목동 단칸방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택시 운전을 했는데 집안에 안 좋은 일이 겹치며 고교 때는 대학 등록금조차 마련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남 못지않게' 무명 시절도 겪었다.

2002년 1집 타이틀곡 '안되나요'로 바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사실 그는 고3 때인 1999년 4인조 그룹 A4로 데뷔했다.

하지만 이 팀은 2집까지 낸 후 2000년 해체됐다.

그는 팀을 나오고서 죽도록 노래하는 연습벌레가 됐다.

보컬 학원에 등록해 6개월간 매일 10시간씩 화장실 가는 시간만 빼고 노래했다.

당시 학원 동료 중 빅마마의 이영현과 가수 임정희가 있었는데 이들보다 실력이 못 미친다는 생각에 주위에서 미쳤다고 할 정도로 연습을 했다.

이후 2000년 강변가요제에 출전했는데 이때 심사위원이던 가수 이상우가 휘성을 자신의 기획사 연습생으로 발탁했다.

1년 후 그는 그곳에서 만난 프로듀서 박경진과 나와 솔로 데뷔를 준비했다. 월세 8만 원 하는 인천문학경기장의 한 쪽방에서 박경진, 작사가 최갑원과 함께 살며 끼니를 음료수로 때우기도 했다. 박경진은 기획사 엠보트를 만들어 휘성의 데모 CD를 돌렸는데 그의 가능성을 알아본 YG엔터테인먼트가 공동 제작에 참여했다.

휘성이란 이름을 세상에 처음 알린 솔로 데뷔곡 '안되나요'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도 불구하고 노래가 터졌다. 같은 해 솔로 데뷔를 한 비와 신인상도 나눠가졌다.

어려움을 극복하며 돌고 돌아 성공한 케이스인 셈이다.

최근 여의도에서 만난 휘성은 "하고 싶은 걸 못하면 죽는 사람이 있고 자제력이 강한 사람이 있다"며 "난 자제력이 강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하고 싶은 걸 못하면 당장에라도 죽을 것 같았다. 나에겐 그게 음악이었다"고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이후 2집의 '위드 미'(2003), 3집의 '불치병'(2004), 4집의 '굿바이 러브'(2005)까지 잇달아 터졌다. 이 곡들을 쓴 작곡가 김도훈과 콤비를 이뤘는데 4집은 발매 한 주 만에 12만 장이 판매됐다. 수려한 테크닉보다 가사를 잘 전달하는 창법은 큰 장점이었다.

"솔로 데뷔를 하고서 스케줄이 많아 목이 감당이 안 돼 힘들었던 기억이 나요. 승부욕이 강해서 타파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죠."

인기를 끌면서도 그는 자신을 조였다. 업계에서는 '예민하다', '무서운 악바리다' 등의 평가가 흘러나왔다.

그는 "노래를 잘하고 싶었을 뿐 연예인이 됐다는 생각도 없었다"며 "그래서 2008년까지 지하철, 버스도 타고 다녔는데 주위에서는 그걸 신기해했지만 나는 그런 것엔 개의치 않았다"고 말했다.

지난 2008년에는 목을 많이 쓴 탓인지 성대 낭종 제거 수술도 받았다.

평소 책을 다독했는데 음악 방송 대기실에서까지 자기계발서를 탐독하는 모습이 눈에 띄곤 했다.

"자기계발서에서 길을 찾고서 지금은 명상책으로 넘어갔다"고 웃는다.

2006년 봄 그는 YG엔터테인먼트·엠보트와의 계약 만료로 작곡가 박근태가 운영하는 오렌지쇼크로 이적했다.

이때부터 그는 슬픈 알앤비를 넘어 솔(Soul), 슬로 잼, 네오-솔 등 장르의 폭을 넓혔고 프로듀서로서의 역량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5집의 '사랑은 맛있다♡'(2007)에선 랩을 시도했고 '별이 지다'가 담긴 6집의 첫 번째 미니앨범(2008)에선 자작곡을 수록하며 흑인 음악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두 장의 앨범은 전작에 비해 만족스러운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이때부터 국내 가요계가 아이돌 가수로 세대교체가 된 영향도 있었다.

그는 "'별이 지다'를 끝으로 '가수 생활을 접을까' 진지하게 고민했다"며 "이어서 낸 '인섬니아'(2009)를 마지막으로 프로듀서로 전향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 노래가 정말 큰 사랑을 받았다"고 말했다.

실제 그는 이즈음 다른 가수들의 음반에 참여하며 작사·작곡가로 빛을 발했다.

윤하의 '비밀번호 486', 아이비의 '유혹의 소나타', 이효리의 '헤이 미스터 빅' 등의 가사를 썼다.

섬세하면서도 직설적이고 재치있는 노랫말이 강점이었다.

작사를 시작으로 작곡가로도 폭을 넓혀 올해만 엠블랙의 '남자답게', 에일리의 '노래가 늘었어', 임창정의 '마지막 악수' 등을 만들었다.

현재 에일리의 음반 프로듀서로도 주목받고 있다.

2009년 박근태와 결별한 그는 '결혼까지 생각했어'(2010), '가슴 시린 이야기'(2011) 등을 다시 히트시킨 뒤 2011년 입대했다.

그 사이 미국 유명 프로듀서 로드니 저킨스와 손잡고 현지 진출도 준비했는데 입대와 함께 좌절됐다.

논산훈련소 조교로 복무하고서 지난해 제대한 그는 에일리의 소속사 YMC엔터테인먼트에 새 둥지를 틀었지만 다시 가요계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고 한다.

"언젠가 콘서트 준비를 하면서 한쪽에 쌍꺼풀이 생기더니 군대에서도 마음고생을 해 다른 한쪽에 쌍꺼풀이 생기더라"고 웃었다.

그러나 제대 몇 개월 뒤 KBS 2TV '불후의 명곡'과 JTBC '히든 싱어'에 출연하며 그의 과거 명곡들이 재조명 받는 행운이 따랐다.

멜론, 엠넷닷컴 등 각종차트 100위권에 10여 년 전 곡인 '안되나요'를 비롯해 대표곡 10여 곡이 진입하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휘성은 "솔직히 신기했다"며 "당시 그 프로그램에서 내 노래를 불러준 분들이 너무 잘해줘 그런 것이었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이런 반향에 힘을 얻었지만 제대 후 처음 선보일 앨범에 대한 부담은 되레 커졌다.

다시 김도훈과 손잡고 몇 개월간 작업실에서 먹고 자며 작업했다.

음악에 함몰되다 보니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지난 5월 발표한 앨범 수록곡 '돈벌어야돼'에서 직접 쓴 가사가 이 같은 심경을 대변해준다.

'음악은 내 꿈이야 내 삶의 유일한 행복의 길이야, 티비 속 저 아이들도 이런 생각을 하겠지, 어릴 적 나처럼 말이야, 음악은 이젠 내게 일이야, 헤드폰을 머리에 쓰는 것마저도 일이야, 뮤직은 내게 휴식이었는데, 언젠가부터 내게 숙직을 시키네~.'

그는 "음악을 처음 시작할 때는 장르를 만드는 게 꿈이었지만 그럴 자신이 없다고 느낀 순간도 경험했다"며 "그럼에도 음악은 여전히 내가 사는 유일한 길인데 이젠 나이도 들어가니 '그게 돈까지 벌어주면 얼마나 좋을까'란 솔직한 마음을 써봤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지난 12년간 한결같은 건 보컬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발라드 정서에 강한 끌림을 갖고 있죠. 실제 '나는 가수다'에서도 성악 발성에 기반해 폭발력 있는 성량으로 발라드를 잘 부른 가수가 높은 점수를 받았고요. 하지만 전 발라드를 그리 좋아하지 않아 '사랑은 맛있다' 이후부터 '그런 걸 못하면 끝까지 노래할 수 없겠구나'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최근에 지르지 않고 스타일리시하게 노래한 정기고 씨의 음악이 받아들여지는 걸 보고 반가운 현상이라고 여겼어요."

그는 이번 앨범에서 정기고, 프라이머리의 음악처럼 출근길, 퇴근길에 부담없이 들을 수 있는 스타일리시한 음악을 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악을 쓰는 노래보다 말동무가 되는 음악"이라며 "그러나 타이틀곡이 아쉬웠고 결국 이 부분을 어필하진 못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그는 데뷔 이래 처음으로 새로운 영역에 도전한다.

다음 달 충무아트홀에서 막이 오르는 뮤지컬 '조로'에서 조로 역을 맡았다.

과제가 주어지면 한 가지에 몰두하는 성격답게 지금은 밤낮으로 이 작품에만 매달려 있다고 한다.

하반기에 선보일 음반 작업도 해놨다.

그는 이날, 이 자리에 오기까지 응원해준 가족들에 대한 애틋함도 내비쳤다.

지난 5월 그는 '불후의 명곡' 가족특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고(故)김정호의 '하얀나비'를 듀엣해 우승을 차지하며 큰 감동을 줬다.

"전 타고 났단 소리를 못 들었지만, 아버지는 타고난 목소리여서 꿈이 가수였죠. 가세가 기울어 꿈이고 뭐고 포기하고 먹고 살길만 생각하며 사시다 보니…. 아버지와 TV에서 같이 노래한 게 처음이었는데 그날 소원을 이루신 것 같아 뭉클했어요."

그는 "가수 휘성이 되고선 스트레스 탓인지, 걱정을 끼치는 게 싫어서인지 집안에서 말을 잘 안 하는 무뚝뚝한 아들이었다"며 "분명 좋은 아들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가수 휘성으로는 성공한 삶인지 물었다.

"전 성공했다기보다 열등감, 자격지심, 호기심, 모험심 덕에 살아남았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아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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