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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적’ 미 한국전 전쟁포로모임 38년만에 해산
입력 2014.08.04 (09:54) 연합뉴스
지난 1976년 미국 내 6·25 전쟁포로 출신들이 설립한 '한국전쟁 포로협회'가 3일(현지시간) 공식 해산했다.

협회는 이날 켄터키주 루이빌의 한 호텔에서 전쟁포로 출신 95명과 가족들을 포함해 모두 47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해단식을 하고 38년간 활동해온 모임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참석자들이 전했다.

윌리엄 노우드 회장은 "계속 모임을 갖고 싶지만, 회원들 대다수가 고령화돼 더이상 활동할 여력이 없다"며 해단을 공식 선언했다.

협회는 6·25 전쟁 당시 2년6개월간 포로수용소 생활을 겪었던 노우드 회장의 주도로 설립됐다.

지옥과 같았던 북한 수용소 생활을 함께 이겨낸 동지들을 서로 위로하는 동시에 귀환하지 못하고 숨져간 동지들의 넋을 기리고 그 가족들을 돕자는 취지였다.

협회는 한때 회원 수가 1천200명에 달했지만 이번 해단식에 참석한 회원은 95명에 그쳤다. 평균 연령은 85세에 달한다.

회원들은 주로 38선 부근 전투와 장진호 전투, 홍성 대학살, 평양 북쪽 운산전투에서 체포된 미군들이었다.

이들은 기나 긴 행군으로 점철된 북송과정을 거쳐 압록강 유역 벽동과 장성의 중공군 포로수용소 6곳과 북한군이 관리한 에이펙스(apex) 수용소에 분리 수용됐다.

이날 전쟁포로 출신 40명과 연쇄 인터뷰를 진행한 한종우 한국전쟁 유업재단 이사장은 "대부분 군화를 빼앗긴 채 맨발로, 또는 허름한 민간인 신발을 신고 가장 혹독했던 1950년 겨울을 산과 들에서 보내야만 했다고 증언했다"며 "체포 이후 수용소에 도착하는 기간이 지옥과 같았다고 한다"고 전했다.

수용소 생활 역시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의 연속이었다는 게 전쟁포로 출신들의 회고다.

이들은 한 이사장과의 인터뷰에서 "아무런 온기가 없는 조그마한 방 한 칸에 15여 명의 포로가 옆으로 누워 칼잠을 자야만 했다"면서 "포탄의 파편이 등에 박혀 피를 흘리다가 추위로 얼어붙어 피조차 흘리지 못했다"고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한 전쟁포로 출신은 "가장 참기 힘들었던 것 중의 하나가 머리와 몸에 득실거리던 이였다"면서 "휴전협정 조인 후 풀려나자마자 가장 먼저 받은 게 살충제인 디디티(DDT)였다"고 말했다.

중공군의 세뇌교육이 가장 고통스러웠다는 증언도 나왔다.

매일 4시간씩 계속되는 공산주의 미화 교육에 반항했던 살바토로 콩테(85) 씨는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가 앉을 수 있는 나무상자에 무려 8개월을 갇혀 있었다고 회고했다.

콩테 씨의 아들은 부친이 갇혔던 실물크기 나무상자의 모형을 만들어 협회 홈페이지에 게시했다.

해단식에는 악명 높았던 벽동 포로수용소에 함께 갇혔다 석방된 두 전쟁포로 출신의 가족이 자리를 함께해 눈길을 끌었다.

로버트 하멜스미스(87)씨와 로버트 긴(81) 씨의 가족이었다. 두 사람은 벽동 캠프5에 2년간 함께 수용돼 있었고 수용소 내 '더스 아워'(Dearth Hours)로 불리던 지옥병원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들로 알려졌다.

협회는 해단식을 끝으로 공식 해산했지만, 회원들은 내년부터 비공식적인 후손모임을 갖는다는데 뜻을 같이했다.

한 이사장은 "해단식에서 전쟁포로 출신들이 3대와 4대에 걸친 후손들과 함께 춤을 추는 광경을 보면서 감동했다"고 말했다.

한국전쟁 유업재단은 내년 6·25 발발 65주년을 맞아 개최하는 내년 제3회 청년 봉사단 컨벤션에 전쟁포로 후손들을 초청할 예정이다.
  • ‘세월이 적’ 미 한국전 전쟁포로모임 38년만에 해산
    • 입력 2014-08-04 09:54:37
    연합뉴스
지난 1976년 미국 내 6·25 전쟁포로 출신들이 설립한 '한국전쟁 포로협회'가 3일(현지시간) 공식 해산했다.

협회는 이날 켄터키주 루이빌의 한 호텔에서 전쟁포로 출신 95명과 가족들을 포함해 모두 47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해단식을 하고 38년간 활동해온 모임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참석자들이 전했다.

윌리엄 노우드 회장은 "계속 모임을 갖고 싶지만, 회원들 대다수가 고령화돼 더이상 활동할 여력이 없다"며 해단을 공식 선언했다.

협회는 6·25 전쟁 당시 2년6개월간 포로수용소 생활을 겪었던 노우드 회장의 주도로 설립됐다.

지옥과 같았던 북한 수용소 생활을 함께 이겨낸 동지들을 서로 위로하는 동시에 귀환하지 못하고 숨져간 동지들의 넋을 기리고 그 가족들을 돕자는 취지였다.

협회는 한때 회원 수가 1천200명에 달했지만 이번 해단식에 참석한 회원은 95명에 그쳤다. 평균 연령은 85세에 달한다.

회원들은 주로 38선 부근 전투와 장진호 전투, 홍성 대학살, 평양 북쪽 운산전투에서 체포된 미군들이었다.

이들은 기나 긴 행군으로 점철된 북송과정을 거쳐 압록강 유역 벽동과 장성의 중공군 포로수용소 6곳과 북한군이 관리한 에이펙스(apex) 수용소에 분리 수용됐다.

이날 전쟁포로 출신 40명과 연쇄 인터뷰를 진행한 한종우 한국전쟁 유업재단 이사장은 "대부분 군화를 빼앗긴 채 맨발로, 또는 허름한 민간인 신발을 신고 가장 혹독했던 1950년 겨울을 산과 들에서 보내야만 했다고 증언했다"며 "체포 이후 수용소에 도착하는 기간이 지옥과 같았다고 한다"고 전했다.

수용소 생활 역시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의 연속이었다는 게 전쟁포로 출신들의 회고다.

이들은 한 이사장과의 인터뷰에서 "아무런 온기가 없는 조그마한 방 한 칸에 15여 명의 포로가 옆으로 누워 칼잠을 자야만 했다"면서 "포탄의 파편이 등에 박혀 피를 흘리다가 추위로 얼어붙어 피조차 흘리지 못했다"고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한 전쟁포로 출신은 "가장 참기 힘들었던 것 중의 하나가 머리와 몸에 득실거리던 이였다"면서 "휴전협정 조인 후 풀려나자마자 가장 먼저 받은 게 살충제인 디디티(DDT)였다"고 말했다.

중공군의 세뇌교육이 가장 고통스러웠다는 증언도 나왔다.

매일 4시간씩 계속되는 공산주의 미화 교육에 반항했던 살바토로 콩테(85) 씨는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가 앉을 수 있는 나무상자에 무려 8개월을 갇혀 있었다고 회고했다.

콩테 씨의 아들은 부친이 갇혔던 실물크기 나무상자의 모형을 만들어 협회 홈페이지에 게시했다.

해단식에는 악명 높았던 벽동 포로수용소에 함께 갇혔다 석방된 두 전쟁포로 출신의 가족이 자리를 함께해 눈길을 끌었다.

로버트 하멜스미스(87)씨와 로버트 긴(81) 씨의 가족이었다. 두 사람은 벽동 캠프5에 2년간 함께 수용돼 있었고 수용소 내 '더스 아워'(Dearth Hours)로 불리던 지옥병원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들로 알려졌다.

협회는 해단식을 끝으로 공식 해산했지만, 회원들은 내년부터 비공식적인 후손모임을 갖는다는데 뜻을 같이했다.

한 이사장은 "해단식에서 전쟁포로 출신들이 3대와 4대에 걸친 후손들과 함께 춤을 추는 광경을 보면서 감동했다"고 말했다.

한국전쟁 유업재단은 내년 6·25 발발 65주년을 맞아 개최하는 내년 제3회 청년 봉사단 컨벤션에 전쟁포로 후손들을 초청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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