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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인생] 양희은 “‘아침이슬’과 만남, 운명 결정된 순간”
입력 2014.08.25 (07:09) 수정 2014.08.25 (10:14) 연합뉴스
시대를 대표하는 노래가 있다. 시대의 양지와 음지를 모두 반영한 노래, 수십년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노래, 듣기만 해도 당시로 돌아가게 만드는 노래들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의 1970년대는 '아침이슬'로 시작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억압된 사회에 대한 분노를 터뜨릴 방도가 없었던 그 시절 청년들이 방황하는 마음의 거처로 삼은 것이 바로 이 노래니 말이다.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이 노래는 험한 세상에 상처입은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있다. 어쩌면 '아침이슬'의 가장 커다란 힘은 노래의 정치성도, 역사성도 아닌 이와 같은 세월과 무관한 공감과 위로의 능력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생명력의 근원에는 1970년 가장 막막한 상황에서 노래를 접하고 단숨에 사랑에 빠진 가수 양희은(62)이 있다. 그의 절실함이 바로 시대의 절실함과 맞닿은 셈이다.

"집안 형편이 무척 안좋았어요. 어머니 홀로 생계를 잇는 현실이 답답했죠. 언젠가 이런 현실에서 벗어나는 날이 과연 올까 생각했어요. 서러운 매일이었죠. 그러다 정식 발표 전 김민기 씨가 학교 축제에서 '아침이슬'을 부르는 모습을 봤어요.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부분을 듣는 순간 노래와 사랑에 빠졌죠."

양희은은 '아침이슬'과의 만남이 '인생의 행운'이라고도 했고, '운명의 활시위가 당겨진 순간'이라고도 정의했다. 이제와 '운명'과 '노력'의 선후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지만 이런 운명은 스스로 개척한 것이기도 하다.

"노래가 너무 좋아 배우고 싶었는데 김민기 씨가 공연을 위해 악보를 그렸다가 찢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선배들 모임이 파하고 청소부 아저씨가 모임 장소를 청소할 때를 기다렸다가 찢긴 조각을 찾아내 보면서 연습했죠.(웃음) 이후 '내가 부르고 싶다'하니 김민기 씨가 그러라 하셨어요. 당시는 저작권 개념이 그렇게 뚜렷하지 않았어요. 누가 '그 노래 좋다'해서 '너 가져'하면 끝이었죠."

활시위는 그의 힘으로 당겼지만 쏜 화살이 온전히 예상한 방향으로 날아가지는 않았다. 등굣길 아침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며 그에게 '놀라운 행복'을 선사한 노래는 이내 유신 체제에 저항하는 시위의 상징이 됐다.

그는 "유신 체제하 젊은 사람들이 마음속 마그마를 분출할 길이 없을 때 뭔가 통로가 된 것 같다"며 "아무리 평범해 보이는 사람도 마음 깊은 곳에는 슬픔이 있지 않나. 그걸 건드리고 터뜨려 노래가 사랑받았다고 생각한다"고 되돌아봤다.

"교문 밖에서 사람들이 스크럼을 짜고 부르는 노래를 들었을 때 솔직히 소름이 끼칠 정도였어요. 내가 부른 그 노래가 아니더라고요. 그때 '노래의 사회성이 이렇게 무섭구나, 부른 사람의 의도와는 상관이 없구나'라고 생각했죠."

1971년 발표한 데뷔 앨범과 청바지 패션으로 단숨에 '통기타 시대'의 아이콘이 됐지만, 양희은은 유년기 호기심이 남달랐던 것을 빼면 비교적 평범한 아이였다고 한다.

"미취학아동 시절이던 1950년대 항상 어딘가로 떠나는 자신을 꿈꿨어요. 새우젓이나 생선을 파는 아저씨들이 집에 올 때면 항상 '나 좀 어디로 데려가주세요'라고 부탁했죠. 항상 밖의 세상을 궁금해하던 아이였어요."

새로운 세상 속 자유를 꿈꾼 그는 바다 건너 외국에서 당시 같은 감성을 노래했던 통기타 가수들의 음악을 들으며 감수성을 달래곤 했다. 그는 "학창 시절 '에벌리 브라더스', '조안 바에즈', '밥 딜런', '브라더스 포', '피터, 폴 앤 메리' 등 포크 뮤지션의 음악에 빠져 살았다"고 돌아봤다.

"당시 유일하게 이런 노래를 접할 매체였던 라디오를 통해 노래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이 왠지 모르게 위로를 받았어요. 당시 국내 가요계는 주로 트로트 아니면 팝발라드 스타일이었는데 포크 음악이 참신하게 느껴져 열광했죠."

가사도 정확히 모르던 곡이었지만 이런 취향이 그를 통기타의 세계로 운명처럼 이끌었다. 경기여고 2학년 때 '트윈폴리오'로 활동하던 송창식과 윤형주 선배가 축제에 오면서 재학생 답가로 노래를 불렀는데, 그의 노래를 선배들이 통기타로 즉석에서 반주를 해주며 인연이 시작됐다.

그리고 이 인연은 이내 당시 공동체적 분위기에서 청년들이 통기타 음악을 나누던 명동 YMCA의 유명 음악홀 '청개구리'로 이어졌다. 양희은이 김민기를 처음 만난 것도 이곳이었다.

"대학교에서 통기타 치고 노래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자유롭게 번갈아가며 무대를 꾸몄죠. 저는 처음에는 재수생이어서 모임에 낄 '군번'은 아녔는데 친구들에게 등 떠밀려 두어곡 불렀어요. 나중에 대학에 입학한 뒤에는 그때 얼굴을 익힌 덕분으로 자연스럽게 모임에 끼었죠."

그는 "그게 초창기 통기타 문화의 시발점이었다. 운동선수들처럼 서로 팀워크가 좋고 챙겨주는 분위기었다. 참 푸근한 시절이었다"고 돌아봤다.

하지만 그의 '통기타와 청바지'에는 어머니의 공헌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고3 때 어머니가 생일 선물로 기타와 청바지를 사주셨다. 젊음의 상징이었던 청바지를 갖고 싶다고 거의 노래를 불렀다(웃음)"고 고백했다.

이런 '동아리' 느낌으로 시작해 대입 후에는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생계형'으로 바뀐 가수 활동이었다. 데뷔 앨범에 수록된 '아침이슬'이 뜻밖에 성공하며 일약 '청바지와 운동화'로 대학 문화의 아이콘이 됐지만 어려움도 적지 않았다.

"그 시절 청바지를 많이 입는 분위기는 아녔어요. 차라리 젊은 여성들은 미니스커트를 입었죠. 제가 매번 바지에 운동화 차림으로 무대에 서니 원로 가수 분들이 무대에 대한 예의를 모른다고 혼내시기도 했죠."

이제는 널리 알려진 금지곡에 얽힌 사연도 그는 담담히 풀어냈다. 그의 노래 가운데 30여 곡이 금지곡 '신세'를 겪었는데 당초 '아침이슬'이 '건전가요'였다가 이듬해 일부 가사 때문에 금지곡이 된 것은 유명하다.

그는 "공중파에서 못 부른 것은 당연하고 대학교 축제에서도 노래를 부르지 말라는 누군가의 쪽지를 몇 차례 받아봤다"면서도 "그런데 오히려 금지해서 노래 인기가 더 커진 부분도 있는 것 같다"고 역사의 아이러니를 짚었다.

양희은은 이어 "내가 진행하던 라디오 방송이 있었고, 라이브 무대에서는 자유롭게 노래를 부를 수 있어서 (대중과 소통할) 통로가 완전히 막혀 상심했다거나 그러지는 않았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갈수록 어두워지는 시대 현실은 그의 음악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1970년대 말 '상록수'와 '늙은 군인의 노래'는 발표하고서 제대로 대중에 선보이지도 못했다. 그즈음 학교를 졸업하면서 '기성세대'로서 새로운 음악을 선보여야한다는 중압감도 그를 내리눌렀다.

거기에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서 1981년 병원에서 '시한부 인생'이라는 진단까지 받는다. 병을 이겨내고 발표한 것이 '하얀 목련'. 양희은 음악 인생 제2막이 열린 것이다.

"제 노래 가운데 가장 대중적인 노래가 '하얀 목련'이 아닌가 싶어요. '통기타 가수'로서 활동을 일단락지었죠. 이어 '한계령'도 나왔고요. 그런데 그때는 정신없이 방송하느라고 이 노래들이 히트한 것도 전혀 몰랐어요."

그는 특히 '하얀 목련'에 대해 "깁희갑 선생께 곡을 받고 가사를 직접 쓰려 했는데 안 써져서 그야말로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무렵 뉴욕의 제 친구가 저와 같은 병으로 세상을 떠난 여성의 장례식에 다녀오며 편지를 보내줬다. 그 편지를 읽고 새벽 2시까지 한달음에 가사를 썼다"고 설명했다.

활발히 활동하던 1987년 그는 만난 지 3주만에 지금의 남편과 결혼해 미국으로 돌연 떠났다. 그는 "내가 미쳤었다(웃음)"라고 돌아보면서도 "둘다 첫사랑처럼 한눈에 반했다. 뭐라 표현할 수가 없다. 내가 '동물성' 사람을 싫어하는데 그는 상큼한 느낌의 '식물성' 사람이었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미국에서 노래를 떠난 시간이 어땠냐'라고 묻자 그는 역설적으로 그 시절이 가장 노래를 많이 부른 시기였다고 답했다.

"아이러니하지만 7년 동안 미국에서 노래를 하나도 안한 시간이 어쩌면 가장 노래를 많이 한 시간이기도 한 것 같아요. 사람들과 떨어져 평범한 주부의 생활을 하는 하루하루가 그야말로 노래였죠."

그가 돌아온 뒤 1990년대 중반 대중음악계는 급변을 맞는다. 대형 연예기획사가 득세하고 아이돌 가수가 등장하면서 장르의 편향성도 심화했다. 물론 어떤 세대에는 '응답하라'고 외치고 싶은 소중한 시절이지만, 기획보다 순수가 우선이던 시절을 지나온 그에게는 '쓴맛'이 강하다.

"요새는 뭐든지 의도적으로 기획되는 세상 같아요. 누군가를 길러내고, 그만큼 뽑아먹죠. 요즘 노래를 들으면 '히트를 위해서 이 부분을 딱 이렇게 썼구나'하는 것이 느껴져요. 우리 때는 이런 의도와는 상관 없었죠. 그런 순수함이 노래를 오래가게 만드는 힘이라고 생각해요. 순수가 의도를 앞지르는 것이죠."

그는 이어 "지금 사회는 문화적으로 말도 못할 정도로 편중됐다. 말도 못할 정도로 쏠림이 심하다. 건강하지 못하다"면서 "음반 시장을 어린 친구들이 좌지우지하면서 그 세대에 맞는 노래만 제작된다. 중장년층은 만날 '살다보니 피곤해서'라고 핑계만 댄다"고 한탄했다.

"요즘 팬들을 만나면 '옛날에 참 좋아했어요"라는 이야기를 들어요. 그러면 저는 "지금은요?"라고 되묻곤 하죠.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요즘 분들은 새 노래를 불러도 관심이 없고, 현실적으로 들려드릴 통로도 부족하죠. 단지 추억의 노래만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이런 고민의 결과로 그가 택한 것은 새로운 도전이다. 양희은은 10월께 새 앨범을 발표할 예정이다. 구체적인 시기를 묻자 '찬바람 불어올 때, 스웨터 입기 시작할 때' 즈음이라고 시처럼 답한다.

발표할 앨범이 이상순을 비롯한 후배 뮤지션들과의 공동 작업의 성과라는 사실이 앞서 알려지면서 많은 궁금증을 낳았다. 그는 "그냥 해보고 싶던 걸 해봤다. 비슷한 분위기의 노래를 많이 해왔으니 이제는 다른 작업도 해보고 싶다. 작곡가가 다르면 음악도 다르다. 새로운 도전이 재미있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인터뷰를 마치며 '한국 포크 음악계의 대모'를 만나 기뻤다고 말하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짐짓 '불쾌한' 얼굴을 한다. "그런 표현은 싫다. 참 고루한 느낌이다"라는 그는 "차라리 '43년차 신인 가수'라는 표현이 마음에 든다"고 미소지었다.

"50년차가 될 때까지 노래를 지금처럼 부를 수 있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그때도 역시 신인 가수의 마음이면 좋겠어요. 초심으로 두려움, 떨림, 조마조마한 마음을 느끼며 노래를 부르고 싶어요."

끝으로 그가 생각하는 명곡의 기준을 물었다. 대답을 들으니 그의 앞으로의 노래도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한 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해줄 수 있는 노래가 명곡 아닐까요. 같은 시대를 살고 같은 지점을 걸어가면서 사람들 가슴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노래라면 그것이 명곡이라 생각해요."
  • [노래 인생] 양희은 “‘아침이슬’과 만남, 운명 결정된 순간”
    • 입력 2014-08-25 07:09:14
    • 수정2014-08-25 10:14:43
    연합뉴스
시대를 대표하는 노래가 있다. 시대의 양지와 음지를 모두 반영한 노래, 수십년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노래, 듣기만 해도 당시로 돌아가게 만드는 노래들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의 1970년대는 '아침이슬'로 시작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억압된 사회에 대한 분노를 터뜨릴 방도가 없었던 그 시절 청년들이 방황하는 마음의 거처로 삼은 것이 바로 이 노래니 말이다.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이 노래는 험한 세상에 상처입은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있다. 어쩌면 '아침이슬'의 가장 커다란 힘은 노래의 정치성도, 역사성도 아닌 이와 같은 세월과 무관한 공감과 위로의 능력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생명력의 근원에는 1970년 가장 막막한 상황에서 노래를 접하고 단숨에 사랑에 빠진 가수 양희은(62)이 있다. 그의 절실함이 바로 시대의 절실함과 맞닿은 셈이다.

"집안 형편이 무척 안좋았어요. 어머니 홀로 생계를 잇는 현실이 답답했죠. 언젠가 이런 현실에서 벗어나는 날이 과연 올까 생각했어요. 서러운 매일이었죠. 그러다 정식 발표 전 김민기 씨가 학교 축제에서 '아침이슬'을 부르는 모습을 봤어요.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부분을 듣는 순간 노래와 사랑에 빠졌죠."

양희은은 '아침이슬'과의 만남이 '인생의 행운'이라고도 했고, '운명의 활시위가 당겨진 순간'이라고도 정의했다. 이제와 '운명'과 '노력'의 선후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지만 이런 운명은 스스로 개척한 것이기도 하다.

"노래가 너무 좋아 배우고 싶었는데 김민기 씨가 공연을 위해 악보를 그렸다가 찢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선배들 모임이 파하고 청소부 아저씨가 모임 장소를 청소할 때를 기다렸다가 찢긴 조각을 찾아내 보면서 연습했죠.(웃음) 이후 '내가 부르고 싶다'하니 김민기 씨가 그러라 하셨어요. 당시는 저작권 개념이 그렇게 뚜렷하지 않았어요. 누가 '그 노래 좋다'해서 '너 가져'하면 끝이었죠."

활시위는 그의 힘으로 당겼지만 쏜 화살이 온전히 예상한 방향으로 날아가지는 않았다. 등굣길 아침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며 그에게 '놀라운 행복'을 선사한 노래는 이내 유신 체제에 저항하는 시위의 상징이 됐다.

그는 "유신 체제하 젊은 사람들이 마음속 마그마를 분출할 길이 없을 때 뭔가 통로가 된 것 같다"며 "아무리 평범해 보이는 사람도 마음 깊은 곳에는 슬픔이 있지 않나. 그걸 건드리고 터뜨려 노래가 사랑받았다고 생각한다"고 되돌아봤다.

"교문 밖에서 사람들이 스크럼을 짜고 부르는 노래를 들었을 때 솔직히 소름이 끼칠 정도였어요. 내가 부른 그 노래가 아니더라고요. 그때 '노래의 사회성이 이렇게 무섭구나, 부른 사람의 의도와는 상관이 없구나'라고 생각했죠."

1971년 발표한 데뷔 앨범과 청바지 패션으로 단숨에 '통기타 시대'의 아이콘이 됐지만, 양희은은 유년기 호기심이 남달랐던 것을 빼면 비교적 평범한 아이였다고 한다.

"미취학아동 시절이던 1950년대 항상 어딘가로 떠나는 자신을 꿈꿨어요. 새우젓이나 생선을 파는 아저씨들이 집에 올 때면 항상 '나 좀 어디로 데려가주세요'라고 부탁했죠. 항상 밖의 세상을 궁금해하던 아이였어요."

새로운 세상 속 자유를 꿈꾼 그는 바다 건너 외국에서 당시 같은 감성을 노래했던 통기타 가수들의 음악을 들으며 감수성을 달래곤 했다. 그는 "학창 시절 '에벌리 브라더스', '조안 바에즈', '밥 딜런', '브라더스 포', '피터, 폴 앤 메리' 등 포크 뮤지션의 음악에 빠져 살았다"고 돌아봤다.

"당시 유일하게 이런 노래를 접할 매체였던 라디오를 통해 노래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이 왠지 모르게 위로를 받았어요. 당시 국내 가요계는 주로 트로트 아니면 팝발라드 스타일이었는데 포크 음악이 참신하게 느껴져 열광했죠."

가사도 정확히 모르던 곡이었지만 이런 취향이 그를 통기타의 세계로 운명처럼 이끌었다. 경기여고 2학년 때 '트윈폴리오'로 활동하던 송창식과 윤형주 선배가 축제에 오면서 재학생 답가로 노래를 불렀는데, 그의 노래를 선배들이 통기타로 즉석에서 반주를 해주며 인연이 시작됐다.

그리고 이 인연은 이내 당시 공동체적 분위기에서 청년들이 통기타 음악을 나누던 명동 YMCA의 유명 음악홀 '청개구리'로 이어졌다. 양희은이 김민기를 처음 만난 것도 이곳이었다.

"대학교에서 통기타 치고 노래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자유롭게 번갈아가며 무대를 꾸몄죠. 저는 처음에는 재수생이어서 모임에 낄 '군번'은 아녔는데 친구들에게 등 떠밀려 두어곡 불렀어요. 나중에 대학에 입학한 뒤에는 그때 얼굴을 익힌 덕분으로 자연스럽게 모임에 끼었죠."

그는 "그게 초창기 통기타 문화의 시발점이었다. 운동선수들처럼 서로 팀워크가 좋고 챙겨주는 분위기었다. 참 푸근한 시절이었다"고 돌아봤다.

하지만 그의 '통기타와 청바지'에는 어머니의 공헌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고3 때 어머니가 생일 선물로 기타와 청바지를 사주셨다. 젊음의 상징이었던 청바지를 갖고 싶다고 거의 노래를 불렀다(웃음)"고 고백했다.

이런 '동아리' 느낌으로 시작해 대입 후에는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생계형'으로 바뀐 가수 활동이었다. 데뷔 앨범에 수록된 '아침이슬'이 뜻밖에 성공하며 일약 '청바지와 운동화'로 대학 문화의 아이콘이 됐지만 어려움도 적지 않았다.

"그 시절 청바지를 많이 입는 분위기는 아녔어요. 차라리 젊은 여성들은 미니스커트를 입었죠. 제가 매번 바지에 운동화 차림으로 무대에 서니 원로 가수 분들이 무대에 대한 예의를 모른다고 혼내시기도 했죠."

이제는 널리 알려진 금지곡에 얽힌 사연도 그는 담담히 풀어냈다. 그의 노래 가운데 30여 곡이 금지곡 '신세'를 겪었는데 당초 '아침이슬'이 '건전가요'였다가 이듬해 일부 가사 때문에 금지곡이 된 것은 유명하다.

그는 "공중파에서 못 부른 것은 당연하고 대학교 축제에서도 노래를 부르지 말라는 누군가의 쪽지를 몇 차례 받아봤다"면서도 "그런데 오히려 금지해서 노래 인기가 더 커진 부분도 있는 것 같다"고 역사의 아이러니를 짚었다.

양희은은 이어 "내가 진행하던 라디오 방송이 있었고, 라이브 무대에서는 자유롭게 노래를 부를 수 있어서 (대중과 소통할) 통로가 완전히 막혀 상심했다거나 그러지는 않았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갈수록 어두워지는 시대 현실은 그의 음악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1970년대 말 '상록수'와 '늙은 군인의 노래'는 발표하고서 제대로 대중에 선보이지도 못했다. 그즈음 학교를 졸업하면서 '기성세대'로서 새로운 음악을 선보여야한다는 중압감도 그를 내리눌렀다.

거기에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서 1981년 병원에서 '시한부 인생'이라는 진단까지 받는다. 병을 이겨내고 발표한 것이 '하얀 목련'. 양희은 음악 인생 제2막이 열린 것이다.

"제 노래 가운데 가장 대중적인 노래가 '하얀 목련'이 아닌가 싶어요. '통기타 가수'로서 활동을 일단락지었죠. 이어 '한계령'도 나왔고요. 그런데 그때는 정신없이 방송하느라고 이 노래들이 히트한 것도 전혀 몰랐어요."

그는 특히 '하얀 목련'에 대해 "깁희갑 선생께 곡을 받고 가사를 직접 쓰려 했는데 안 써져서 그야말로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무렵 뉴욕의 제 친구가 저와 같은 병으로 세상을 떠난 여성의 장례식에 다녀오며 편지를 보내줬다. 그 편지를 읽고 새벽 2시까지 한달음에 가사를 썼다"고 설명했다.

활발히 활동하던 1987년 그는 만난 지 3주만에 지금의 남편과 결혼해 미국으로 돌연 떠났다. 그는 "내가 미쳤었다(웃음)"라고 돌아보면서도 "둘다 첫사랑처럼 한눈에 반했다. 뭐라 표현할 수가 없다. 내가 '동물성' 사람을 싫어하는데 그는 상큼한 느낌의 '식물성' 사람이었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미국에서 노래를 떠난 시간이 어땠냐'라고 묻자 그는 역설적으로 그 시절이 가장 노래를 많이 부른 시기였다고 답했다.

"아이러니하지만 7년 동안 미국에서 노래를 하나도 안한 시간이 어쩌면 가장 노래를 많이 한 시간이기도 한 것 같아요. 사람들과 떨어져 평범한 주부의 생활을 하는 하루하루가 그야말로 노래였죠."

그가 돌아온 뒤 1990년대 중반 대중음악계는 급변을 맞는다. 대형 연예기획사가 득세하고 아이돌 가수가 등장하면서 장르의 편향성도 심화했다. 물론 어떤 세대에는 '응답하라'고 외치고 싶은 소중한 시절이지만, 기획보다 순수가 우선이던 시절을 지나온 그에게는 '쓴맛'이 강하다.

"요새는 뭐든지 의도적으로 기획되는 세상 같아요. 누군가를 길러내고, 그만큼 뽑아먹죠. 요즘 노래를 들으면 '히트를 위해서 이 부분을 딱 이렇게 썼구나'하는 것이 느껴져요. 우리 때는 이런 의도와는 상관 없었죠. 그런 순수함이 노래를 오래가게 만드는 힘이라고 생각해요. 순수가 의도를 앞지르는 것이죠."

그는 이어 "지금 사회는 문화적으로 말도 못할 정도로 편중됐다. 말도 못할 정도로 쏠림이 심하다. 건강하지 못하다"면서 "음반 시장을 어린 친구들이 좌지우지하면서 그 세대에 맞는 노래만 제작된다. 중장년층은 만날 '살다보니 피곤해서'라고 핑계만 댄다"고 한탄했다.

"요즘 팬들을 만나면 '옛날에 참 좋아했어요"라는 이야기를 들어요. 그러면 저는 "지금은요?"라고 되묻곤 하죠.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요즘 분들은 새 노래를 불러도 관심이 없고, 현실적으로 들려드릴 통로도 부족하죠. 단지 추억의 노래만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이런 고민의 결과로 그가 택한 것은 새로운 도전이다. 양희은은 10월께 새 앨범을 발표할 예정이다. 구체적인 시기를 묻자 '찬바람 불어올 때, 스웨터 입기 시작할 때' 즈음이라고 시처럼 답한다.

발표할 앨범이 이상순을 비롯한 후배 뮤지션들과의 공동 작업의 성과라는 사실이 앞서 알려지면서 많은 궁금증을 낳았다. 그는 "그냥 해보고 싶던 걸 해봤다. 비슷한 분위기의 노래를 많이 해왔으니 이제는 다른 작업도 해보고 싶다. 작곡가가 다르면 음악도 다르다. 새로운 도전이 재미있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인터뷰를 마치며 '한국 포크 음악계의 대모'를 만나 기뻤다고 말하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짐짓 '불쾌한' 얼굴을 한다. "그런 표현은 싫다. 참 고루한 느낌이다"라는 그는 "차라리 '43년차 신인 가수'라는 표현이 마음에 든다"고 미소지었다.

"50년차가 될 때까지 노래를 지금처럼 부를 수 있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그때도 역시 신인 가수의 마음이면 좋겠어요. 초심으로 두려움, 떨림, 조마조마한 마음을 느끼며 노래를 부르고 싶어요."

끝으로 그가 생각하는 명곡의 기준을 물었다. 대답을 들으니 그의 앞으로의 노래도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한 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해줄 수 있는 노래가 명곡 아닐까요. 같은 시대를 살고 같은 지점을 걸어가면서 사람들 가슴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노래라면 그것이 명곡이라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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