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크리스마스 실(seal), 이젠 추억 속으로?

입력 2014.10.24 (16:13) 수정 2014.10.24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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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에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를 다닌 기자는 연말 학교 풍경을 떠올렸을 때 빠지지 않고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미술 시간에 친구들에게 나눠줄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고, 완성된 카드 겉봉투에 '크리스마스 실'을 붙여 대미를 장식했던 그 장면 말이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올해는 어떤 카드를 만들지, 친구들로부터 카드를 몇 장이나 받게 될지, 올해 크리스마스 실은 어떤 그림일지 등을 상상하며 설레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때로는 의무적으로 실을 사야하는 현실이 짜증스럽기도 했다.

아마 60년대 이후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와 비슷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어른들에게 추억으로 남은 크리스마스실은 그 시절 이후 지금까지도 계속 발행‧판매되고 있다.


<사진1. 2014년 크리스마스 실. 다음주부터 우체국과 대한결핵협회 홈페이지에서 구입 할 수 있다>

◇ 결핵 퇴치를 위한 의무 기부 '크리스마스 실' 

크리스마스 실은 결핵퇴치를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1904년 덴마크에서 처음으로 발행됐다. 영국 산업혁명 이후 결핵이 전 유럽에 만연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덴마크의 한 우체국 직원이 고안한 것이다.

이후 실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우리나라도 1953년부터 범국민적인 크리스마스 실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민간 주도의 결핵퇴치 운동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매년 발행되는 크리스마스 실은 으레 학교나 정부기관, 공공단체에서 의무적으로 구입해야 하는 연말 기부상품이 됐다.

그랬던 크리스마스 실이 지금 위기에 봉착했다.

‘의무적’으로 구입해줬던 ‘단골고객’들이 떨어져나갈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사는 사람이 없다면 크리스마스 실은 존폐의 기로에 놓일 수도 있다.

◇ 공공기관 의무규정 폐지에 결핵협회 ‘발 동동’ 


최근 보건복지부는 크리스마스 실 모금의 허가와 협조 의무 규정을 폐지하는 것을 골자로 한 ‘결핵예방법 일부개정법률안’을 입법예고했다.

학교 내 강제모금이라는 문제의 소지가 있어 모금의 투명성과 신뢰성을 높이겠다는 이유에서다. 개정된 법은 내년 하반기부터 시행된다.

이로 인해 ‘정부 각 기관․공공단체 또는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법인은 크리스마스 실 모금에 협조하여야 한다’는 규정이 삭제될 예정이다.


<사진2. 1970년 발행된 크리스마스 실 '골목 놀이'(위)와 1986년 발행된 크리스마스 실 '한국의 연'(아래)>

정부 방침에 실 발행 주체인 대한결핵협회는 말 그대로 ‘화들짝' 놀란 상태다.

결핵협회는 정부 입법예고안에 반대하며 실 모금협조 의무조항 폐지만은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안간힘을 쏟고 있다.

협회는 ‘협조하여야 한다’는 의무 조항을 ‘할 수 있다’는 선택 조항으로라도 수정해달라는 의견서를 복지부에 전달했다.

◇ 안그래도 줄어드는 모금액, 복지부는 "수정 안돼" 


결핵협회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해당 의무 조항이 국내 결핵퇴치 재원 마련에 큰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 모금액은 결핵협회 총예산의 20% 이상을 차지할 만큼 비중이 높다.

하지만, 결핵협회가 최근 국회 보건복지위 남윤인순 의원에게 제출한 크리스마스 실 모금 현황 자료에 따르면 판매실적이 매년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상황에서 구매 의무 조항까지 없어지면 모금액이 대폭 줄어들 수밖에 없다.



1950년대 130만 명에 달했던 국내 결핵환자수가 현재 5만 명 수준까지 떨어졌지만, 지난해 전 세계적으로 900만 명이 폐결핵에 걸리고 이 중 150만 명이 숨지는 등 국내외적으로 결핵퇴치 사업의 필요성은 여전한 상황이다. 관련 재원 확보가 필요한 이유다.

하지만 복지부는 결핵협회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결핵협회의 한 관계자는 “어제(23일) 복지부로부터 우리가 제출한 의견서에 대해 '어렵다'는 답변 공문을 받았다. 개정 법안이 국회를 통과해 시행되면 따를 수밖에 없지만 기회가 있다면 다시 설득해 볼 계획”이라고 밝혔다.

◇ ‘올드(old)'한 크리스마스 실, 시대에 맞게 변모해야 

인터넷·모바일 시대를 맞아 손 편지 문화가 사라지고 있는 요즘, 전통적 방식의 크리스마스 실도 변화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취약계층이나 국내외 결핵퇴치 사업을 돕는다는 모금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우편 기능도 없는 크리스마스 실이 모금 상품으로서 별로 매력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결핵협회에 접수되는 민원들 중에는 실 판매가 시대적 조류에 맞지 않아 무언가 다른 형식으로 변모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들이 다수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결핵협회도 이 같은 사회적 요구에 발맞춰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지난해에는 한 소셜커머스 업체와 협력해 크리스마스 실 기부를 유도하기도 했다.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 올해에도 해당 서비스를 추진할 계획이라는 게 협회 측 설명이다.



이밖에 우표 값에 크리스마스 실 가격을 합해 발행하는 방안이나, 모바일 메신저 이모티콘을 활용하는 방안, SNS를 이용하는 방안 등 다양한 자구책을 마련 중이다.

더불어 문제로 제기돼 온 학생 모금 비중은 해마다 줄이고 있다. 올해는 50%를 목표로 잡았는데 앞으로 더 줄여나갈 계획이다.

기부의 범위를 일반 기업체로도 넓힐 예정이다. 올해 3월 기획재정부령으로 시행규칙이 변경되면서 결핵협회가 기존 ‘지정기부금 단체’에서 ‘법정기부금 단체’로 지정된 덕분이다.

기존에는 학교법인, 정부기관, 공공단체 등 공익성을 띤 단체로부터 기부를 받았다.

결핵퇴치 재원 마련을 위해 국가가 나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남윤인순 복지위 의원은 “국민불편 규제개혁 차원에서 크리스마스 실 강제모금 규제를 폐지하는 것이라면, 결핵퇴치 사업을 국가사업으로 바꿔 국비를 지원하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 60여 년 간 국내외 결핵퇴치에 큰 힘을 보탰던 크리스마스 실 모금 운동.

모금 방식에 변화의 바람이 부는 가운데 사업주체가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할 경우 머지않아 크리스마스 실이 추억으로만 남을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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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말 크리스마스 실(seal), 이젠 추억 속으로?
    • 입력 2014-10-24 16:13:08
    • 수정2014-10-24 17:56:58
    사회
80년대에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를 다닌 기자는 연말 학교 풍경을 떠올렸을 때 빠지지 않고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미술 시간에 친구들에게 나눠줄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고, 완성된 카드 겉봉투에 '크리스마스 실'을 붙여 대미를 장식했던 그 장면 말이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올해는 어떤 카드를 만들지, 친구들로부터 카드를 몇 장이나 받게 될지, 올해 크리스마스 실은 어떤 그림일지 등을 상상하며 설레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때로는 의무적으로 실을 사야하는 현실이 짜증스럽기도 했다.

아마 60년대 이후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와 비슷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어른들에게 추억으로 남은 크리스마스실은 그 시절 이후 지금까지도 계속 발행‧판매되고 있다.


<사진1. 2014년 크리스마스 실. 다음주부터 우체국과 대한결핵협회 홈페이지에서 구입 할 수 있다>

◇ 결핵 퇴치를 위한 의무 기부 '크리스마스 실' 

크리스마스 실은 결핵퇴치를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1904년 덴마크에서 처음으로 발행됐다. 영국 산업혁명 이후 결핵이 전 유럽에 만연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덴마크의 한 우체국 직원이 고안한 것이다.

이후 실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우리나라도 1953년부터 범국민적인 크리스마스 실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민간 주도의 결핵퇴치 운동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매년 발행되는 크리스마스 실은 으레 학교나 정부기관, 공공단체에서 의무적으로 구입해야 하는 연말 기부상품이 됐다.

그랬던 크리스마스 실이 지금 위기에 봉착했다.

‘의무적’으로 구입해줬던 ‘단골고객’들이 떨어져나갈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사는 사람이 없다면 크리스마스 실은 존폐의 기로에 놓일 수도 있다.

◇ 공공기관 의무규정 폐지에 결핵협회 ‘발 동동’ 


최근 보건복지부는 크리스마스 실 모금의 허가와 협조 의무 규정을 폐지하는 것을 골자로 한 ‘결핵예방법 일부개정법률안’을 입법예고했다.

학교 내 강제모금이라는 문제의 소지가 있어 모금의 투명성과 신뢰성을 높이겠다는 이유에서다. 개정된 법은 내년 하반기부터 시행된다.

이로 인해 ‘정부 각 기관․공공단체 또는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법인은 크리스마스 실 모금에 협조하여야 한다’는 규정이 삭제될 예정이다.


<사진2. 1970년 발행된 크리스마스 실 '골목 놀이'(위)와 1986년 발행된 크리스마스 실 '한국의 연'(아래)>

정부 방침에 실 발행 주체인 대한결핵협회는 말 그대로 ‘화들짝' 놀란 상태다.

결핵협회는 정부 입법예고안에 반대하며 실 모금협조 의무조항 폐지만은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안간힘을 쏟고 있다.

협회는 ‘협조하여야 한다’는 의무 조항을 ‘할 수 있다’는 선택 조항으로라도 수정해달라는 의견서를 복지부에 전달했다.

◇ 안그래도 줄어드는 모금액, 복지부는 "수정 안돼" 


결핵협회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해당 의무 조항이 국내 결핵퇴치 재원 마련에 큰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 모금액은 결핵협회 총예산의 20% 이상을 차지할 만큼 비중이 높다.

하지만, 결핵협회가 최근 국회 보건복지위 남윤인순 의원에게 제출한 크리스마스 실 모금 현황 자료에 따르면 판매실적이 매년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상황에서 구매 의무 조항까지 없어지면 모금액이 대폭 줄어들 수밖에 없다.



1950년대 130만 명에 달했던 국내 결핵환자수가 현재 5만 명 수준까지 떨어졌지만, 지난해 전 세계적으로 900만 명이 폐결핵에 걸리고 이 중 150만 명이 숨지는 등 국내외적으로 결핵퇴치 사업의 필요성은 여전한 상황이다. 관련 재원 확보가 필요한 이유다.

하지만 복지부는 결핵협회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결핵협회의 한 관계자는 “어제(23일) 복지부로부터 우리가 제출한 의견서에 대해 '어렵다'는 답변 공문을 받았다. 개정 법안이 국회를 통과해 시행되면 따를 수밖에 없지만 기회가 있다면 다시 설득해 볼 계획”이라고 밝혔다.

◇ ‘올드(old)'한 크리스마스 실, 시대에 맞게 변모해야 

인터넷·모바일 시대를 맞아 손 편지 문화가 사라지고 있는 요즘, 전통적 방식의 크리스마스 실도 변화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취약계층이나 국내외 결핵퇴치 사업을 돕는다는 모금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우편 기능도 없는 크리스마스 실이 모금 상품으로서 별로 매력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결핵협회에 접수되는 민원들 중에는 실 판매가 시대적 조류에 맞지 않아 무언가 다른 형식으로 변모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들이 다수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결핵협회도 이 같은 사회적 요구에 발맞춰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지난해에는 한 소셜커머스 업체와 협력해 크리스마스 실 기부를 유도하기도 했다.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 올해에도 해당 서비스를 추진할 계획이라는 게 협회 측 설명이다.



이밖에 우표 값에 크리스마스 실 가격을 합해 발행하는 방안이나, 모바일 메신저 이모티콘을 활용하는 방안, SNS를 이용하는 방안 등 다양한 자구책을 마련 중이다.

더불어 문제로 제기돼 온 학생 모금 비중은 해마다 줄이고 있다. 올해는 50%를 목표로 잡았는데 앞으로 더 줄여나갈 계획이다.

기부의 범위를 일반 기업체로도 넓힐 예정이다. 올해 3월 기획재정부령으로 시행규칙이 변경되면서 결핵협회가 기존 ‘지정기부금 단체’에서 ‘법정기부금 단체’로 지정된 덕분이다.

기존에는 학교법인, 정부기관, 공공단체 등 공익성을 띤 단체로부터 기부를 받았다.

결핵퇴치 재원 마련을 위해 국가가 나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남윤인순 복지위 의원은 “국민불편 규제개혁 차원에서 크리스마스 실 강제모금 규제를 폐지하는 것이라면, 결핵퇴치 사업을 국가사업으로 바꿔 국비를 지원하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 60여 년 간 국내외 결핵퇴치에 큰 힘을 보탰던 크리스마스 실 모금 운동.

모금 방식에 변화의 바람이 부는 가운데 사업주체가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할 경우 머지않아 크리스마스 실이 추억으로만 남을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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