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진단] 故 신해철 “인생은 산책 나온 것”…그의 26년 음악인생

입력 2014.10.30 (16:30) 수정 2014.10.30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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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에 우리는 신해철, 한 젊은 대중 음악가 홀연한 이별을 맞았습니다.

너무나 갑자기 찾아온 이별이기에 놀랍고 또 그가 남긴 음악이 아름다워서 더욱 안 타깝기만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젊은 나이에 홀연히 대중 의 곁을 떠난 가수들의 이야기로 꾸며볼 까 합니다.

음악평론가 송명하 씨 그리고 문화평론가 하재근 씨 두 분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조금 전에 우리가 신해철 씨 빈소 그리 고 또 생전에 그가 남겼던 음악들 쭉 들 어봤는데요.

이승현 씨가 먼저 신해철 씨가 26년 음악 인생 어떤 업적들을 남겼는지 간단히 소 개를 좀 해 주시죠.

-마왕 신해철 씨가 떠났습니다.

그가 어떤 삶을 살고자 했는지 그가 시 도했던 새로운 음악, 불꽃 같은 음악들에 담겨 있는데요.

26년간의 음악인생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 다.

고 신해철 씨는 1988년이죠.

대학가요제에서 밴드 무한궤도로 출전하 면서 대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했습 니다.

지금 듣고 계신 음악, 당시 부른 그대에 게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 랑을 받고 있는데요.

성찰적인 랩을 시도하고 또 솔로2집에서 는 컴퓨터음악을 도입하는 등 매 앨범마 다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선보이 며 대중음악사에 한 획을 그었습니다.

신해철 씨는 카리스마 넘치는 무대 장악 력과 특유의 가창력으로 수많은 마니아층 을 형성하면서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구축 해 갔는데요.

92년에는 전설의 록밴드 넥스트를 결성해 서 록음악의 대중화를 이끌기도 했습니다.

신해철 씨 음악 얘기를 하면서 또 그가 얼 마나 천재였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는 대 목이 있는데요.

지금은 해에게서 소년에게 듣고 계시고요.

짝짝짝짝짝.

그렇죠.

저 대한민국이라는 구호.

월드컵 기간 동안 온국민을 뜨겁게 했던 바로 저 구호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합니 다.

-저걸 신해철 씨가 만들었군요.

-얼마나 우리와 가깝게 있었는지.

그렇기 때문에 천재라고 불리는 게 아닐 까 싶고요.

앞으로 대한민국 구호 들을 때마다 신해 철 씨가 더 그리워질 것 같습니다.

음악을 인생처럼 즐겼던 진정한 음악인.

고 신해철 씨는 지난 6월 새 앨범으로 돌 아오고 다시 활발한 활동을 하기로 약속 했지만 그 앨범이 마지막 유작이 된 것 같 습니다.

더 안타깝죠.

-신해철 씨 음악세계를 쭉 짚어봤는데.

신해철 씨가 했던 음악들은 어떤 것이고 그가 대중음악사에 남긴 족적, 의미는 어 떤 것이 있을까요?

-신해철 씨가 대중음악사에 남긴 가장 큰 족적 가운데 하나라고 얘기할 것 같으면 요.

록음악, 특히 밴드음악을 하면서 대중들 에게 사랑을 받았던 최후의 뮤지션이다 이 렇게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그 이후에는 록커들이 지금도 활동 을 하고 있지만 밴드음악으로 사랑을 받 았던 그런 뮤지션들은 그 뒤에, 넥스트 뒤 에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처음 나왔을 때는 아이돌로 나왔 었죠.

그 당시에는 안녕이라는 노래를 부를 때 아이돌로 나왔다가 그 뒤에 오히려 그 뒤 에 넥스트라는 밴드를 결성해서 밴드음악 으로 돌아가게 됐는데요.

안녕이라는 노래, 솔로음반 만들 때 계약 조건이 나는 이후에 밴드를 조직해서 음 반을 낼 거다.

그래서 밴드음악을 만드는 걸 조건으로 내 걸고 솔로활동을 시작할 정도로 밴드음악 에 대한 관심, 록음악에 대한 관심이 많 았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겠고요.

컴퓨터음악을 도입해서 처음으로 히트곡 을 만들어냈던 장본인이었고요.

또 록밴드와 오케스트라의 협연을 이루어 냈던 그런 뮤지션이었습니다.

-하여튼 보니까 뭔가 새로운 장르를 열고 개척을 해 나가는 선구자적인 그런 독보 적인 역할을 좀 했군요.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90년대 우리나라 대중가요가 르 네상스를 겪게 되는데 그때 록이라는 축 을 형성했던 거대한 대들보 같은 인물이 고 한국 가요계의 산맥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죠.

그리고 그러한 음악적인 성취도 놀랍지만 또 다른 놀라운 점은 그 음악에 담긴 가 사.

가사가 그때까지 한국가요에서 볼 수 없 었던 수준의 굉장히 독보적인 성찰적인 의 미를 담고 있어서 그리고 그때까지뿐만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사실은 그 정도 수준 의 성찰적인 의미를 담은 가사는 거의 없 는 거죠.

신해철 씨가 랩을 최초로 시도한 가수 중 의 하나인데.

-국내에서는 처음이죠.

-국내에서.

그 이후에 한국에서의 랩이 주로 댄스음 악의 말의 은율, 리듬감 위주로 발전한 데 반해서 신해철 씨의 랩은 그 안에 개인의 정서에 대한 성찰이, 치열한 성찰이 담겨 있기 때문에 요즘처럼 가사의 의미가 사 라지는 시대일수록 신해철 씨의 가사의 의 미가 더욱 우리한테 더 크게 다가오는 거 고.

-사회적으로 충격적인 메시지 그런 것도 많이 남겼죠.

-신해철 씨 하면 가수가 왜 토론 프로그 램에 나올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토론 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하는 가수로 유명했 고 간통죄 문제라든가 영어교육 문제라든 가 이런 거에 계속 끼어들면서 아주 직설 적으로 말을 내뱉으니까 우리나라에서 연 예인이 이렇게 강하게 말을 내뱉으면 그 말에 찬성하건 반대하건 그 말의 내용과 상관없이 왜 이렇게 나대냐라고 한다면 조 금 공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신해철써는 음악적으로도 아주 충격을 줬 지만 대중의 메시지, 강렬한 메시지로.

-활동성 자체가 아주 특이했던 거죠.

-가사에서도 메시지만 있었던 것도 아니 고요.

청소년들에게 주는 그런 어떤 훈계라고 하 기에는 좀 그래도 도움말 같은 얘기들을 많이 해 줬어요, 청소년들에게.

그래서 신해철 씨의 음악을 들으면서 음 악가로서의 꿈을 가져갔던 그런 친구들도 많았었고요.

또 라디오스테이션을 진행하면서 상담을 하면서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굉장히 많 은 부분을 그들에게 심어줬습니다.

-그런 점에서 참 안타까운데.

신해철 씨가 이렇게 갑자기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고 나니까 이런 얘기가 시중에 떠돈다고 그래요.

11월 괴담이다.

이게 무슨 얘기인지 제가 궁금한데 무슨 얘기입니까?

-11월에 세상을 떠난, 특히 우리에게 사 랑을 많이 받았던 그런 뮤지션들이 많았 기 때문에 11월이 참 뮤지션들에게는 피 해갈 수 없는.

-11월에 떠난 분들이 어떤 분들이 있습니 까?

-예전부터 살펴보면 배호 씨가 있었고요.

-배호 씨.

-차중락 씨가 있었고요.

-차중락 씨.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

-김정호 씨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재하 씨, 김현식 씨.

다 11월달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그러면 11월에 이렇게 음악가들이 많이 사망을 한 건 봤는데 실제로 그럼 1 1월에 가장 많이 사망을 하는 겁니까?

-그런 건 아니고요.

-그런 건 아닙니까?

-특히 우리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고 음 악계에 큰 족적을 남겼던 그런 뮤지션들 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우리에게 11월 이 음악가들이 많이 떠났구나 이렇게 기 억이 되는 겁니다.

다른 월, 그러니까 다른 때도 음악가들이 세상을 많이 떠났죠.

-그러면 그냥 일종의 과도한 괴담 수준의.

-11월 괴담 자체가 괴담인 겁니다.

옛날에 어느 매체가 한 프로그램이 조사 를 했는데 실제로 사고가 많이 일어나는 달은 3월, 9월, 12월로 나왔으니까.

11월 괴담이라는 게 언론매체가 괴담이라 고 하면 왠지 보도하기가 좋으니까 매체 에 의해서 좀 증폭된 측면이 있습니다.

-얘기를 하셨으니까 우리가 전설의 가수 들.

아까 배호 씨부터 얘기를 했는데.

배호 씨가 한 가요사에 남긴 족적이 굉장 히 크고 또 그가 요절을 했을 때 당시 충 격이 엄청났다면서요.

-활동하던 기간은 8년밖에는 되지 않지만 사실 배호 씨도 트로트가수로 잘 알려져 있잖아요.

그전까지 배호 씨가 활동하기 이전까지 트 로트음악은 남인수 씨, 남성 가수로는 남 인수 씨로 대변되는 트로트음악이었어요.

남인수 씨의 목소리는 철성이라고 해서 굉 장히 여성스러운 목소리지만 날카롭고 찌 르는 듯한 그런 목소리였었는데 이렇게 부 드럽고.

-배호 씨의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아 주 굵네요.

중저음이고.

-타이르고 위로를 주는 듯한 이런 목소리 를 가지고 있잖아요.

그래서 젊은 여성분들이 굉장히 좋아했던.

그리고 연령대를 넘어선 사랑을 많이 받 았던 그런 뮤지션이었습니다.

-그렇군요.

그리고 또 가을, 아까 잠깐 얘기를 하셨 습니다마는 또 하나 생각나는 분이 가을 하면 차중락 씨 아닙니까?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

-차중락 씨가 우리나라 최초의 밴드라고 할 수 있는 키보이스의 멤버였고.

배호 씨가 트로트로 전국민적인 사랑을 받 았다면 차중락 씨는 그때 막 등장하는 신 세대들의 보다 서구화된 기호를 반영하는 인물로 사랑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 분이 육상선수 출신이고.

-그렇습니까?

-그리고 또 미스터코리아 2위를 했었고 예 술적인 감각도 뛰어나면서 잘생긴 외모에 세련된 매너,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반 영이 되고 서구적인 음악을 하니까 당시 젊은 여성들한테 굉장히 귀공자 오빠 이 런 스타일로 인기가 높았다고 합니다.

-이분도 돌연 갑자기 사망을 하셨는데 그 이후에 팬들의 정성이 대단했다는 그런 얘 기가 있던데요.

-기사를 찾아봤었는데요.

1년 뒤에, 차중락 씨가 세상을 떠난 뒤 1 년 뒤에 차중락 씨의 묘에 가서 기사를 쓰 신 분의 기사를 봤는데 팬들이 와서 돌멩 이를 하나씩 쌓아서 거기에 우체통을 만 들어서.

-묘 앞에다가.

-거기에 여중생들, 여고생들이 차중락 씨 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그 우체통에 넣 었는데 그 우체통이 꽉 찼다.

-대단히 한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이렇게 봐도 되겠군요.

-그렇죠.

지금으로 보면 정말 아이돌 스타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우리가 남진, 나훈아 대립 이걸 이야기 를 하는데.

사실은 배호 씨하고 차중락 씨가 요절하 지 않았다면 배호, 차중락 씨가 또 하나 의 한국 사회의 라이벌로서 큰 축을 형성 했을 것이다.

-남진, 나훈아만큼의 엄청난.

-그 정도 수준으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는 거죠.

-그리고 아까 말씀하셨던 11월에 떠난 또 하나의 가수.

그건 저도 중학교 때 많이 들었던 노래 같 은데.

김정호.

하얀 나비의 김정호 씨.

-히트곡이 굉장히 많죠.

김정호 씨가 부른 곡도 있지만 어니언스 라는 듀오가 부른 히트곡들도 거의 김정 호 씨가 만든 곡들이 많았었거든요.

그러니까 원래 작곡을 하다가 뒤늦게 사월 과 오월의 백승진 씨에게 발탁이 돼서 사 월과 오월은 이수만 씨 이후에 김태풍 씨.

김태풍 씨 다음에 멤버로 사월과 오월의 멤버로 활동하다가 솔로로 독립해서 이름 모를 소녀라든가 하얀 나비라는 이런 히 트곡을 남겼습니다.

-11월 1일에 동시에 떠난 두 뮤지션들, 음 악가들이 있는데 우리 이승현 씨도 알 것 같은데.

그렇죠?

기억을 좀 합니까?

너무 어린 나이였나요, 그때?

-남매였던 것 같은데.

이름이. . .

장덕, 장현?

오누이가 혹시.

-남매가수.

-남매가수가 좀 안타깝게 요절했던 걸로 기억을 하네요.

-목소리가 아주 걸걸하면서 정말 안타까 움을 일으켰던 허스키 보이스 김현식 씨.

내 사랑 내 곁에.

이분도 11월에 떠나지 않았던가요?

-그렇죠.

김현식 씨 같은 경우에는 1980년대 언어 그라운드에서 솟아오른 보컬로 김현식, 전 인권 이 두 분이 양대 언더그라운드 출신 보컬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이분이 1980년대 TV 활동을 거의 안 하면 서 굉장히 또 사랑했어요라는 히트곡을 양 산해서 당시 대학생을 중심으로 굉장히 많 은 젊은 사람들이 김현식 씨를 좋아했었 고 오늘 나오는 여러 가수들의 목소리의 특징이 뭔가 애끓는 한의 느낌 그런 게 있 다는 겁니다.

김현식 씨도 그렇고 배호 씨도 그렇고 김 정호 씨도 그렇고.

이분들이 굉장히 애끓는 슬픔, 비애의 느 낌을 목소리에 담았기 때문에 한국인의 정 서에 굉장히 절절하게 이런 분들의 마음 에 다가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 다.

-그런데 이분들이 실제로 처음에서부터 이 렇게 탁성이었습니까?

-김현식 씨 같은 경우에는 탁성이 아니었 고요.

처음에 1집, 2집, 가면 갈수록 탁성으로 변해서 목소리에 스크래치를 넣는다고 하 는데 일부러 그렇게 한 부분도 있고 목소 리가 갈라져서 오히려 그게 자연스럽고 그 런 자신의 특징으로 자리매김될 정도로 자 기 끼로 만들어낸 거죠.

-병세가 깊어져서 미성이 사라진 그런 부 분도 혹시 있지 않을까 싶은네요.

-그런 부분도 있기는 있는데요.

그게 병이 있기 전에 조금씩조금씩 갈라 지다가 뒤로 갈수록 점점 우리가 기억하 는 김현식 씨의 목소리가 되는 거죠.

초창기에 1, 2집 나왔을 때는 KBS에서 연 말에 시상하는 그런 음악대상 같은 데에 서 신인상을 받았었어요, 김현식 씨가.

신인상은 굉장히 데뷔할 무렵에 받는 거 잖아요.

그 당시에는 굉장히 깔끔한 목소리, 깨끗 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조금 전에 들었던 내 사랑 내 곁에 는 김현식 씨가 죽은 뒤에 앨범이 나왔죠.

-그래서 91년에 이 노래가 김현식 씨가 죽 은 이후에 거의 국민가요가 됐었는데 김 현식 씨가 병마와 싸우면서 병실에서 이 노래를 연습하고 노래하고 그랬다고 해서 국민들이 굉장히 안타까워했고.

오늘 소개해 드린 가수분들이 다 그렇습 니다.

배호 씨도 병상에서 악보를 받아서 병상 에서 연습하고 또 부축을, 동료가수들 의 부축을 받으면서 무대 위에 서고 그리 고 김정호 씨도 아픈 상태에서 80년대 음 반을 또 만들고.

김현식 씨도 똑같이 그렇게 해서 아픈 상 태에서 그렇게 사투를 벌이면서 정말 끓 어오르듯이 목소리를 내는 그런 한서린 소 리들이 결국에는 우리 국민들을 가장 감 동시키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욱 팬들도 안타깝고 오래 기억 하고.

11월 1일날 같은 날 떠난 유재하 씨가 또 있죠.

-유재하 씨 같은 경우에는 무려 대학생일 때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멤버가 됐던.

-대학생일 때.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멤버가 됐다는 것은 한국 최고라는 뜻입니다.

그 분야에 관한 한.

-그분이 보컬로 처음에 된 건 아니죠?

-처음에 가수로 된 건 아니고 세션, 아마 키보드.

-키보드 연주를 하면서 조용필 씨의 음반 에 지금 나오고 있는 사랑하기 때문에를 먼저 조용필 씨한테 줘서 조용필 씨 음반 에 먼저 수록을 했었는데요.

조용필 씨의 음성으로는 먼저 히트하지 못 하고 나중에 유재하 씨의 음반에 들어가 서 유재하 씨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 히트 했던 곡입니다.

-그렇군요.

-오늘 소개해 드린 가수들이 다 한인데 유 재하 씨만 한이 아니고 좀 밝은 느낌, 고 급스럽고 우아한 느낌.

다른 가수들, 여태까지의 가수들은 대체 로 가난해서 잘 못 먹어서 그것 때문에 병 도 걸리고 10년 동안 점심도 잘 못 먹었 다 이런 가수분들이 쭉 나왔거든요, 지금 까지.

유재하 씨 같은 경우에는 집안의 가구가 다 외제였다고 하고.

그런데 이분이 불렀던 최근에 새삼스럽게 밝혀졌던 사실이 이분이 불렀던 사랑 노 래들이 다 오직 한 여자만을 대상으로 불 렀다는 거죠.

그 여자분을 생각하면서 초등학교 동창생 을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 고 해서 순애보의 남자라고 다시 네티즌 들에게 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그러니까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라는 게 있다면서요.

-유재하 음악경연대회가 있어서.

유재하 씨는 사실 유재하 이전의 음악, 유 재하 이후의 음악이 좀 분리가 될 정도로 나뉘어질 정도로 한 장의 음반만을 발표 했지만 굉장히 음악계에는 커다란 충격을 던졌어요.

그건 뭐였었냐 하면 여태까지는 정말 노 래 잘하는 사람만 잘하는 줄 알았었는데 유재하 씨는 노래 잘하는 사람은 아니었 거든요.

음악을 잘 만드는 사람이었죠.

심지어 그런 얘기도 했었어요.

창법미숙, 음정불안 이런 걸로 금지곡이 됐다 이런 얘기도 있었는데.

국내에 퓨전재즈라고 하는 약간 가벼운 스 타일의 재즈음악을 도입하면서 유재하 씨 이후에 음악이 굉장히 많이 달라졌어요.

그런 음악들을 또 휴진양성을 위해서 만 들어진 행사가 유재하 씨 사후에 만들어 진 행사가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지막 한 분만 점검을 해 봤으 면 좋겠는데.

이 가수는 이승현 씨도 알 것 같아요.

김광석 씨.

-마침 제가 또 서른 즈음이 돼서 이 음악 을 들으면 요즘 어떤 느낌을 가져야 되나 들어보고 있거든요, 귀를 기울여서.

또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어느 60대 노부 부의 이야기를 들으시면 그렇게 가슴이 찡 하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어느 날 저는 들으니까 눈물이 주르륵 흐 르던데.

-저는 아직까지는 그런 나이가 아닌가 봅 니다.

-김광석 씨는 가요사에서 어떤 위치입니 까?

-제가 생각할 때는 김광석 씨는 되게 편 하게 하는 얘기 같지만 노래를 정말 잘해 요.

이 얘기는 뭐냐하면 김광석 씨가 부른 노 래들은 김광석 씨가 부르기 이전에 다른 가수가 이미 불렀던 노래를 부르는 경우 가 많았었거든요.

그런데 김광석 씨의 목소리에 가면서 우 리에게 잘 알려졌습니다.

서른 즈음에도 그렇고 이등병의 편지도 그 렇고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도 그렇 고 김광석 씨 이전에 먼저 발표된 오리지 널곡들이 있는 곡들이었어요.

그런데 우리는 김광석 씨의 곡으로 알고 있고 거의 김광석 씨의 목소리로 알고 있 잖아요.

그러니까 예전에 있는 그런 음악들을 정 말 내 것으로 만들어서 소화해서 김광석 의 노래로 만들 수 있는 가수였습니다.

그래서 김광석 씨가 세상을 떠난 게 아쉬 웠던 게 다른 부분도 많았지만 더 좋은 노 래들을 더 발굴해서 우리한테 알려줄 수 있었을 텐데 김광석 씨 같았으면.

이런 아쉬움이 듭니다.

-그렇군요.

김광석 씨의 노래가 요즘 젊은 가수들한 테 리메이크가 가장 많이 되는 곡 중의 하 나다 그런 얘기가 있던데요.

-그렇습니다.

김광석 씨의 노래가 요즘에 듣는 음악의 시대로 돌아가고 있는 거죠.

아이돌댄스를 10년 이상 봤기 때문에 다 시는 음악을 들으려고 하고 있는데.

가장 듣는 사람을 감동적이게 하고 마음 에 위안을 주는 노래들이 결국에는 김광 석 씨의 노래들이기 때문에 요즘 젊은 세 대들도 김광석 씨의 노래를 계속 재발견 하고 있는 거고.

또 김광석 씨 노래는 서른 살만 되면 누 구나 찾을 수밖에 없는 그런 노래고.

-우리 이승현 씨가 찾은.

-또 군대 갈 때 되면 이등병의 편지 찾게 되고.

인생의 고비고비에 항상 공감을 하면서 듣 게 되니까 결국에는 모든 세대가 김광석 씨의 노래를 계속해서 반복해서 찾게 되 는 거죠.

-이 가을에 하여튼 홀연히 우리 곁을 떠 난 대중예술인들 참 안타까운 마음이 많 이 드는데.

이 가을에 가장 좀 생각나는 노래 있으면 한 곡씩만 추천을 한번 해 봐주시죠.

-저는 개인적으로는 이분도 세상을 떠나 신 분인데 예전에 따로 또 같이라는 팀이 있었어요.

여기에 이주원 씨.

양희은 씨 노래를 많이 작곡해서 알려진 분인데 가을의 노래라는 곡이 있습니다.

-김광석 씨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너 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이런 노래 들으면 진짜 가을의 정취가 시리게 느껴집니다.

-알겠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오늘 두 분 말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지금까지 세상을 위로하는 음악들을 남 기고 떠난 음악가들, 특히 대중예술인들 과 잠시 짧은 여행을 다녀봤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죠.

하지만 가슴을 울리는 노래만큼은 영원하 지 않나 싶습니다.

사랑했지만 그저 멀리서 이렇게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우리 대중들의 심정도 이 가을 참 안타깝다 이런 생각듭니다.

오늘 김광석의 사랑했지만 이 노래 들으 면서 오늘 순서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대한민국의 오늘을 읽는다 황상무의 시사 진단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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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슈 진단] 故 신해철 “인생은 산책 나온 것”…그의 26년 음악인생
    • 입력 2014-10-30 16:23:01
    • 수정2014-10-30 17:16:29
    시사진단


-이번 주에 우리는 신해철, 한 젊은 대중 음악가 홀연한 이별을 맞았습니다.

너무나 갑자기 찾아온 이별이기에 놀랍고 또 그가 남긴 음악이 아름다워서 더욱 안 타깝기만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젊은 나이에 홀연히 대중 의 곁을 떠난 가수들의 이야기로 꾸며볼 까 합니다.

음악평론가 송명하 씨 그리고 문화평론가 하재근 씨 두 분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조금 전에 우리가 신해철 씨 빈소 그리 고 또 생전에 그가 남겼던 음악들 쭉 들 어봤는데요.

이승현 씨가 먼저 신해철 씨가 26년 음악 인생 어떤 업적들을 남겼는지 간단히 소 개를 좀 해 주시죠.

-마왕 신해철 씨가 떠났습니다.

그가 어떤 삶을 살고자 했는지 그가 시 도했던 새로운 음악, 불꽃 같은 음악들에 담겨 있는데요.

26년간의 음악인생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 다.

고 신해철 씨는 1988년이죠.

대학가요제에서 밴드 무한궤도로 출전하 면서 대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했습 니다.

지금 듣고 계신 음악, 당시 부른 그대에 게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 랑을 받고 있는데요.

성찰적인 랩을 시도하고 또 솔로2집에서 는 컴퓨터음악을 도입하는 등 매 앨범마 다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선보이 며 대중음악사에 한 획을 그었습니다.

신해철 씨는 카리스마 넘치는 무대 장악 력과 특유의 가창력으로 수많은 마니아층 을 형성하면서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구축 해 갔는데요.

92년에는 전설의 록밴드 넥스트를 결성해 서 록음악의 대중화를 이끌기도 했습니다.

신해철 씨 음악 얘기를 하면서 또 그가 얼 마나 천재였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는 대 목이 있는데요.

지금은 해에게서 소년에게 듣고 계시고요.

짝짝짝짝짝.

그렇죠.

저 대한민국이라는 구호.

월드컵 기간 동안 온국민을 뜨겁게 했던 바로 저 구호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합니 다.

-저걸 신해철 씨가 만들었군요.

-얼마나 우리와 가깝게 있었는지.

그렇기 때문에 천재라고 불리는 게 아닐 까 싶고요.

앞으로 대한민국 구호 들을 때마다 신해 철 씨가 더 그리워질 것 같습니다.

음악을 인생처럼 즐겼던 진정한 음악인.

고 신해철 씨는 지난 6월 새 앨범으로 돌 아오고 다시 활발한 활동을 하기로 약속 했지만 그 앨범이 마지막 유작이 된 것 같 습니다.

더 안타깝죠.

-신해철 씨 음악세계를 쭉 짚어봤는데.

신해철 씨가 했던 음악들은 어떤 것이고 그가 대중음악사에 남긴 족적, 의미는 어 떤 것이 있을까요?

-신해철 씨가 대중음악사에 남긴 가장 큰 족적 가운데 하나라고 얘기할 것 같으면 요.

록음악, 특히 밴드음악을 하면서 대중들 에게 사랑을 받았던 최후의 뮤지션이다 이 렇게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그 이후에는 록커들이 지금도 활동 을 하고 있지만 밴드음악으로 사랑을 받 았던 그런 뮤지션들은 그 뒤에, 넥스트 뒤 에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처음 나왔을 때는 아이돌로 나왔 었죠.

그 당시에는 안녕이라는 노래를 부를 때 아이돌로 나왔다가 그 뒤에 오히려 그 뒤 에 넥스트라는 밴드를 결성해서 밴드음악 으로 돌아가게 됐는데요.

안녕이라는 노래, 솔로음반 만들 때 계약 조건이 나는 이후에 밴드를 조직해서 음 반을 낼 거다.

그래서 밴드음악을 만드는 걸 조건으로 내 걸고 솔로활동을 시작할 정도로 밴드음악 에 대한 관심, 록음악에 대한 관심이 많 았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겠고요.

컴퓨터음악을 도입해서 처음으로 히트곡 을 만들어냈던 장본인이었고요.

또 록밴드와 오케스트라의 협연을 이루어 냈던 그런 뮤지션이었습니다.

-하여튼 보니까 뭔가 새로운 장르를 열고 개척을 해 나가는 선구자적인 그런 독보 적인 역할을 좀 했군요.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90년대 우리나라 대중가요가 르 네상스를 겪게 되는데 그때 록이라는 축 을 형성했던 거대한 대들보 같은 인물이 고 한국 가요계의 산맥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죠.

그리고 그러한 음악적인 성취도 놀랍지만 또 다른 놀라운 점은 그 음악에 담긴 가 사.

가사가 그때까지 한국가요에서 볼 수 없 었던 수준의 굉장히 독보적인 성찰적인 의 미를 담고 있어서 그리고 그때까지뿐만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사실은 그 정도 수준 의 성찰적인 의미를 담은 가사는 거의 없 는 거죠.

신해철 씨가 랩을 최초로 시도한 가수 중 의 하나인데.

-국내에서는 처음이죠.

-국내에서.

그 이후에 한국에서의 랩이 주로 댄스음 악의 말의 은율, 리듬감 위주로 발전한 데 반해서 신해철 씨의 랩은 그 안에 개인의 정서에 대한 성찰이, 치열한 성찰이 담겨 있기 때문에 요즘처럼 가사의 의미가 사 라지는 시대일수록 신해철 씨의 가사의 의 미가 더욱 우리한테 더 크게 다가오는 거 고.

-사회적으로 충격적인 메시지 그런 것도 많이 남겼죠.

-신해철 씨 하면 가수가 왜 토론 프로그 램에 나올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토론 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하는 가수로 유명했 고 간통죄 문제라든가 영어교육 문제라든 가 이런 거에 계속 끼어들면서 아주 직설 적으로 말을 내뱉으니까 우리나라에서 연 예인이 이렇게 강하게 말을 내뱉으면 그 말에 찬성하건 반대하건 그 말의 내용과 상관없이 왜 이렇게 나대냐라고 한다면 조 금 공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신해철써는 음악적으로도 아주 충격을 줬 지만 대중의 메시지, 강렬한 메시지로.

-활동성 자체가 아주 특이했던 거죠.

-가사에서도 메시지만 있었던 것도 아니 고요.

청소년들에게 주는 그런 어떤 훈계라고 하 기에는 좀 그래도 도움말 같은 얘기들을 많이 해 줬어요, 청소년들에게.

그래서 신해철 씨의 음악을 들으면서 음 악가로서의 꿈을 가져갔던 그런 친구들도 많았었고요.

또 라디오스테이션을 진행하면서 상담을 하면서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굉장히 많 은 부분을 그들에게 심어줬습니다.

-그런 점에서 참 안타까운데.

신해철 씨가 이렇게 갑자기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고 나니까 이런 얘기가 시중에 떠돈다고 그래요.

11월 괴담이다.

이게 무슨 얘기인지 제가 궁금한데 무슨 얘기입니까?

-11월에 세상을 떠난, 특히 우리에게 사 랑을 많이 받았던 그런 뮤지션들이 많았 기 때문에 11월이 참 뮤지션들에게는 피 해갈 수 없는.

-11월에 떠난 분들이 어떤 분들이 있습니 까?

-예전부터 살펴보면 배호 씨가 있었고요.

-배호 씨.

-차중락 씨가 있었고요.

-차중락 씨.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

-김정호 씨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재하 씨, 김현식 씨.

다 11월달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그러면 11월에 이렇게 음악가들이 많이 사망을 한 건 봤는데 실제로 그럼 1 1월에 가장 많이 사망을 하는 겁니까?

-그런 건 아니고요.

-그런 건 아닙니까?

-특히 우리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고 음 악계에 큰 족적을 남겼던 그런 뮤지션들 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우리에게 11월 이 음악가들이 많이 떠났구나 이렇게 기 억이 되는 겁니다.

다른 월, 그러니까 다른 때도 음악가들이 세상을 많이 떠났죠.

-그러면 그냥 일종의 과도한 괴담 수준의.

-11월 괴담 자체가 괴담인 겁니다.

옛날에 어느 매체가 한 프로그램이 조사 를 했는데 실제로 사고가 많이 일어나는 달은 3월, 9월, 12월로 나왔으니까.

11월 괴담이라는 게 언론매체가 괴담이라 고 하면 왠지 보도하기가 좋으니까 매체 에 의해서 좀 증폭된 측면이 있습니다.

-얘기를 하셨으니까 우리가 전설의 가수 들.

아까 배호 씨부터 얘기를 했는데.

배호 씨가 한 가요사에 남긴 족적이 굉장 히 크고 또 그가 요절을 했을 때 당시 충 격이 엄청났다면서요.

-활동하던 기간은 8년밖에는 되지 않지만 사실 배호 씨도 트로트가수로 잘 알려져 있잖아요.

그전까지 배호 씨가 활동하기 이전까지 트 로트음악은 남인수 씨, 남성 가수로는 남 인수 씨로 대변되는 트로트음악이었어요.

남인수 씨의 목소리는 철성이라고 해서 굉 장히 여성스러운 목소리지만 날카롭고 찌 르는 듯한 그런 목소리였었는데 이렇게 부 드럽고.

-배호 씨의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아 주 굵네요.

중저음이고.

-타이르고 위로를 주는 듯한 이런 목소리 를 가지고 있잖아요.

그래서 젊은 여성분들이 굉장히 좋아했던.

그리고 연령대를 넘어선 사랑을 많이 받 았던 그런 뮤지션이었습니다.

-그렇군요.

그리고 또 가을, 아까 잠깐 얘기를 하셨 습니다마는 또 하나 생각나는 분이 가을 하면 차중락 씨 아닙니까?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

-차중락 씨가 우리나라 최초의 밴드라고 할 수 있는 키보이스의 멤버였고.

배호 씨가 트로트로 전국민적인 사랑을 받 았다면 차중락 씨는 그때 막 등장하는 신 세대들의 보다 서구화된 기호를 반영하는 인물로 사랑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 분이 육상선수 출신이고.

-그렇습니까?

-그리고 또 미스터코리아 2위를 했었고 예 술적인 감각도 뛰어나면서 잘생긴 외모에 세련된 매너,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반 영이 되고 서구적인 음악을 하니까 당시 젊은 여성들한테 굉장히 귀공자 오빠 이 런 스타일로 인기가 높았다고 합니다.

-이분도 돌연 갑자기 사망을 하셨는데 그 이후에 팬들의 정성이 대단했다는 그런 얘 기가 있던데요.

-기사를 찾아봤었는데요.

1년 뒤에, 차중락 씨가 세상을 떠난 뒤 1 년 뒤에 차중락 씨의 묘에 가서 기사를 쓰 신 분의 기사를 봤는데 팬들이 와서 돌멩 이를 하나씩 쌓아서 거기에 우체통을 만 들어서.

-묘 앞에다가.

-거기에 여중생들, 여고생들이 차중락 씨 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그 우체통에 넣 었는데 그 우체통이 꽉 찼다.

-대단히 한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이렇게 봐도 되겠군요.

-그렇죠.

지금으로 보면 정말 아이돌 스타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우리가 남진, 나훈아 대립 이걸 이야기 를 하는데.

사실은 배호 씨하고 차중락 씨가 요절하 지 않았다면 배호, 차중락 씨가 또 하나 의 한국 사회의 라이벌로서 큰 축을 형성 했을 것이다.

-남진, 나훈아만큼의 엄청난.

-그 정도 수준으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는 거죠.

-그리고 아까 말씀하셨던 11월에 떠난 또 하나의 가수.

그건 저도 중학교 때 많이 들었던 노래 같 은데.

김정호.

하얀 나비의 김정호 씨.

-히트곡이 굉장히 많죠.

김정호 씨가 부른 곡도 있지만 어니언스 라는 듀오가 부른 히트곡들도 거의 김정 호 씨가 만든 곡들이 많았었거든요.

그러니까 원래 작곡을 하다가 뒤늦게 사월 과 오월의 백승진 씨에게 발탁이 돼서 사 월과 오월은 이수만 씨 이후에 김태풍 씨.

김태풍 씨 다음에 멤버로 사월과 오월의 멤버로 활동하다가 솔로로 독립해서 이름 모를 소녀라든가 하얀 나비라는 이런 히 트곡을 남겼습니다.

-11월 1일에 동시에 떠난 두 뮤지션들, 음 악가들이 있는데 우리 이승현 씨도 알 것 같은데.

그렇죠?

기억을 좀 합니까?

너무 어린 나이였나요, 그때?

-남매였던 것 같은데.

이름이. . .

장덕, 장현?

오누이가 혹시.

-남매가수.

-남매가수가 좀 안타깝게 요절했던 걸로 기억을 하네요.

-목소리가 아주 걸걸하면서 정말 안타까 움을 일으켰던 허스키 보이스 김현식 씨.

내 사랑 내 곁에.

이분도 11월에 떠나지 않았던가요?

-그렇죠.

김현식 씨 같은 경우에는 1980년대 언어 그라운드에서 솟아오른 보컬로 김현식, 전 인권 이 두 분이 양대 언더그라운드 출신 보컬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이분이 1980년대 TV 활동을 거의 안 하면 서 굉장히 또 사랑했어요라는 히트곡을 양 산해서 당시 대학생을 중심으로 굉장히 많 은 젊은 사람들이 김현식 씨를 좋아했었 고 오늘 나오는 여러 가수들의 목소리의 특징이 뭔가 애끓는 한의 느낌 그런 게 있 다는 겁니다.

김현식 씨도 그렇고 배호 씨도 그렇고 김 정호 씨도 그렇고.

이분들이 굉장히 애끓는 슬픔, 비애의 느 낌을 목소리에 담았기 때문에 한국인의 정 서에 굉장히 절절하게 이런 분들의 마음 에 다가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 다.

-그런데 이분들이 실제로 처음에서부터 이 렇게 탁성이었습니까?

-김현식 씨 같은 경우에는 탁성이 아니었 고요.

처음에 1집, 2집, 가면 갈수록 탁성으로 변해서 목소리에 스크래치를 넣는다고 하 는데 일부러 그렇게 한 부분도 있고 목소 리가 갈라져서 오히려 그게 자연스럽고 그 런 자신의 특징으로 자리매김될 정도로 자 기 끼로 만들어낸 거죠.

-병세가 깊어져서 미성이 사라진 그런 부 분도 혹시 있지 않을까 싶은네요.

-그런 부분도 있기는 있는데요.

그게 병이 있기 전에 조금씩조금씩 갈라 지다가 뒤로 갈수록 점점 우리가 기억하 는 김현식 씨의 목소리가 되는 거죠.

초창기에 1, 2집 나왔을 때는 KBS에서 연 말에 시상하는 그런 음악대상 같은 데에 서 신인상을 받았었어요, 김현식 씨가.

신인상은 굉장히 데뷔할 무렵에 받는 거 잖아요.

그 당시에는 굉장히 깔끔한 목소리, 깨끗 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조금 전에 들었던 내 사랑 내 곁에 는 김현식 씨가 죽은 뒤에 앨범이 나왔죠.

-그래서 91년에 이 노래가 김현식 씨가 죽 은 이후에 거의 국민가요가 됐었는데 김 현식 씨가 병마와 싸우면서 병실에서 이 노래를 연습하고 노래하고 그랬다고 해서 국민들이 굉장히 안타까워했고.

오늘 소개해 드린 가수분들이 다 그렇습 니다.

배호 씨도 병상에서 악보를 받아서 병상 에서 연습하고 또 부축을, 동료가수들 의 부축을 받으면서 무대 위에 서고 그리 고 김정호 씨도 아픈 상태에서 80년대 음 반을 또 만들고.

김현식 씨도 똑같이 그렇게 해서 아픈 상 태에서 그렇게 사투를 벌이면서 정말 끓 어오르듯이 목소리를 내는 그런 한서린 소 리들이 결국에는 우리 국민들을 가장 감 동시키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욱 팬들도 안타깝고 오래 기억 하고.

11월 1일날 같은 날 떠난 유재하 씨가 또 있죠.

-유재하 씨 같은 경우에는 무려 대학생일 때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멤버가 됐던.

-대학생일 때.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멤버가 됐다는 것은 한국 최고라는 뜻입니다.

그 분야에 관한 한.

-그분이 보컬로 처음에 된 건 아니죠?

-처음에 가수로 된 건 아니고 세션, 아마 키보드.

-키보드 연주를 하면서 조용필 씨의 음반 에 지금 나오고 있는 사랑하기 때문에를 먼저 조용필 씨한테 줘서 조용필 씨 음반 에 먼저 수록을 했었는데요.

조용필 씨의 음성으로는 먼저 히트하지 못 하고 나중에 유재하 씨의 음반에 들어가 서 유재하 씨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 히트 했던 곡입니다.

-그렇군요.

-오늘 소개해 드린 가수들이 다 한인데 유 재하 씨만 한이 아니고 좀 밝은 느낌, 고 급스럽고 우아한 느낌.

다른 가수들, 여태까지의 가수들은 대체 로 가난해서 잘 못 먹어서 그것 때문에 병 도 걸리고 10년 동안 점심도 잘 못 먹었 다 이런 가수분들이 쭉 나왔거든요, 지금 까지.

유재하 씨 같은 경우에는 집안의 가구가 다 외제였다고 하고.

그런데 이분이 불렀던 최근에 새삼스럽게 밝혀졌던 사실이 이분이 불렀던 사랑 노 래들이 다 오직 한 여자만을 대상으로 불 렀다는 거죠.

그 여자분을 생각하면서 초등학교 동창생 을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 고 해서 순애보의 남자라고 다시 네티즌 들에게 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그러니까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라는 게 있다면서요.

-유재하 음악경연대회가 있어서.

유재하 씨는 사실 유재하 이전의 음악, 유 재하 이후의 음악이 좀 분리가 될 정도로 나뉘어질 정도로 한 장의 음반만을 발표 했지만 굉장히 음악계에는 커다란 충격을 던졌어요.

그건 뭐였었냐 하면 여태까지는 정말 노 래 잘하는 사람만 잘하는 줄 알았었는데 유재하 씨는 노래 잘하는 사람은 아니었 거든요.

음악을 잘 만드는 사람이었죠.

심지어 그런 얘기도 했었어요.

창법미숙, 음정불안 이런 걸로 금지곡이 됐다 이런 얘기도 있었는데.

국내에 퓨전재즈라고 하는 약간 가벼운 스 타일의 재즈음악을 도입하면서 유재하 씨 이후에 음악이 굉장히 많이 달라졌어요.

그런 음악들을 또 휴진양성을 위해서 만 들어진 행사가 유재하 씨 사후에 만들어 진 행사가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지막 한 분만 점검을 해 봤으 면 좋겠는데.

이 가수는 이승현 씨도 알 것 같아요.

김광석 씨.

-마침 제가 또 서른 즈음이 돼서 이 음악 을 들으면 요즘 어떤 느낌을 가져야 되나 들어보고 있거든요, 귀를 기울여서.

또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어느 60대 노부 부의 이야기를 들으시면 그렇게 가슴이 찡 하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어느 날 저는 들으니까 눈물이 주르륵 흐 르던데.

-저는 아직까지는 그런 나이가 아닌가 봅 니다.

-김광석 씨는 가요사에서 어떤 위치입니 까?

-제가 생각할 때는 김광석 씨는 되게 편 하게 하는 얘기 같지만 노래를 정말 잘해 요.

이 얘기는 뭐냐하면 김광석 씨가 부른 노 래들은 김광석 씨가 부르기 이전에 다른 가수가 이미 불렀던 노래를 부르는 경우 가 많았었거든요.

그런데 김광석 씨의 목소리에 가면서 우 리에게 잘 알려졌습니다.

서른 즈음에도 그렇고 이등병의 편지도 그 렇고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도 그렇 고 김광석 씨 이전에 먼저 발표된 오리지 널곡들이 있는 곡들이었어요.

그런데 우리는 김광석 씨의 곡으로 알고 있고 거의 김광석 씨의 목소리로 알고 있 잖아요.

그러니까 예전에 있는 그런 음악들을 정 말 내 것으로 만들어서 소화해서 김광석 의 노래로 만들 수 있는 가수였습니다.

그래서 김광석 씨가 세상을 떠난 게 아쉬 웠던 게 다른 부분도 많았지만 더 좋은 노 래들을 더 발굴해서 우리한테 알려줄 수 있었을 텐데 김광석 씨 같았으면.

이런 아쉬움이 듭니다.

-그렇군요.

김광석 씨의 노래가 요즘 젊은 가수들한 테 리메이크가 가장 많이 되는 곡 중의 하 나다 그런 얘기가 있던데요.

-그렇습니다.

김광석 씨의 노래가 요즘에 듣는 음악의 시대로 돌아가고 있는 거죠.

아이돌댄스를 10년 이상 봤기 때문에 다 시는 음악을 들으려고 하고 있는데.

가장 듣는 사람을 감동적이게 하고 마음 에 위안을 주는 노래들이 결국에는 김광 석 씨의 노래들이기 때문에 요즘 젊은 세 대들도 김광석 씨의 노래를 계속 재발견 하고 있는 거고.

또 김광석 씨 노래는 서른 살만 되면 누 구나 찾을 수밖에 없는 그런 노래고.

-우리 이승현 씨가 찾은.

-또 군대 갈 때 되면 이등병의 편지 찾게 되고.

인생의 고비고비에 항상 공감을 하면서 듣 게 되니까 결국에는 모든 세대가 김광석 씨의 노래를 계속해서 반복해서 찾게 되 는 거죠.

-이 가을에 하여튼 홀연히 우리 곁을 떠 난 대중예술인들 참 안타까운 마음이 많 이 드는데.

이 가을에 가장 좀 생각나는 노래 있으면 한 곡씩만 추천을 한번 해 봐주시죠.

-저는 개인적으로는 이분도 세상을 떠나 신 분인데 예전에 따로 또 같이라는 팀이 있었어요.

여기에 이주원 씨.

양희은 씨 노래를 많이 작곡해서 알려진 분인데 가을의 노래라는 곡이 있습니다.

-김광석 씨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너 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이런 노래 들으면 진짜 가을의 정취가 시리게 느껴집니다.

-알겠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오늘 두 분 말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지금까지 세상을 위로하는 음악들을 남 기고 떠난 음악가들, 특히 대중예술인들 과 잠시 짧은 여행을 다녀봤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죠.

하지만 가슴을 울리는 노래만큼은 영원하 지 않나 싶습니다.

사랑했지만 그저 멀리서 이렇게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우리 대중들의 심정도 이 가을 참 안타깝다 이런 생각듭니다.

오늘 김광석의 사랑했지만 이 노래 들으 면서 오늘 순서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대한민국의 오늘을 읽는다 황상무의 시사 진단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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