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재판 표본’ 세월호 재판 이끈 임정엽 부장판사

입력 2014.11.11 (15:28) 수정 2014.11.11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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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다음 재판 절차를 안내하고 재판을 마치겠다는 말을 하는데 영상을 미리 봤더니 너무 슬펐습니다. 보고 나서 '재판을 마친다'고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이번 사고로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지난달 21일 세월호 승무원들에 대한 28회 공판에서 숨진 단원고 2학년 8반 학생의 부모가 만든 영상 시청을 앞두고 미리 던진 재판장의 맺음말이다.

광주지법 형사 11부 임정엽(44·사법연수원 28기) 부장판사의 재판 절차 진행은 '배려'로 대변된다.

이준석 선장의 살인죄를 인정하지 않고 검찰의 사형 구형에 훨씬 못 미치는 징역 36년을 선고해 유가족의 반발을 샀지만 그동안 재판부와 유가족 간 소통 노력은 두루 좋은 평가를 받았

'세기의 재판', '역사에 남을 재판', '판사로서 평생 한 번 할까말까한 재판'에 대한 부담을 오롯이 지게 된 임 부장판사는 책임자 처벌과 사고원인 규명 등 재판의 본질적 목적을 이루는 것 외에도 피해자의 아픔을 보듬어야 하는 어려운 숙제를 안았다.

재판 초기 100여석 법정을 꽉 채운 유가족은 재판 중에도 "살인자", "학살자", "내 새끼 살려내"라고 외치며 울분을 토해냈다.

"방금 소리치신 분 누구시죠? 일어나 보세요."

임 부장판사는 그럴 때마다 유가족을 일으켜 세워 이름을 묻고는 "마음을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계속 이러시면 재판을 진행할 수 없습니다. 법정에 경위들이 도울 테니 증인지원실에서 잠시 쉬고 오세요"라고 다독였다.

대신 유가족에게는 절차에서 허용하는 범위에서 최대한 발언 기회를 줬다.

재판 시작과 마무리 순서에는 항상 절차 진행 등과 관련한 유가족 진술을 들었고, 증인·피고인 신문 끝에도 유가족의 질문을 받아 대신 물었다.

지난달 21일에는 생존자, 유가족 등 피해자 16명의 진술을 몰아서 듣기도 했다.

재판마다 법정을 찾아 익숙해진 유가족이 진술을 위해 마이크를 넘겨받기라도 하면 "▲▲ 어머니, ◇◇◇씨죠. 지난 공판 때 발언하셨었죠"라며 친근하게 접근했다.

"검사님, 마이크", "변호사님, 마이크", "증인, 검사를 보고 이야기하실 때 고개를 돌리면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신문, 변론, 증언에 치중하느라 마이크에 입을 떼고 말하는 재판 관계자들에게는 어김없이 '주의'를 줬다. 재판 실황이 전해지는 광주지법 보조법정과 수원지법 안산지원에서 방청하는 이들을 위한 배려였다.

그 사이 가족을 잃은 피해자들의 마음은 누그러졌다. 재판 초기 "왜 말을 못하게 하느냐"고 격렬하게 항의했던 유가족은 자신을 알아보는 판사에게 "판사라서 머리가 좋다", "나는 재판장에게 찍혔어"라며 농담을 나누기도 했다.

그러나 마냥 배려하지만은 않았다. 피고인들의 구속 기간(6개월)을 고려하면 주어진 재판 기간이 넉넉지 않은 상황에서 중복된 질문을 하는 유가족에게는 예외 없이 "앞에서 다 나왔어요. 재판장이 허락하지 않습니다"라며 야박하게 말을 끊었다.

재판 진행이 원활하지 않을 때는 검사, 변호사에게도 예외 없이 지적을 했고 신문 과정에서 변명하느라 질문의 논점을 피해가는 피고인들에게는 엄중한 경고를 줬다.

재판 당사자는 물론 방청하는 이들의 집중력을 유지하려고 1시간 30분 안팎 재판을 진행한 뒤에는 20분 휴정을 원칙으로 하고, 야간 재판도 철저히 배제했다.

피고인들의 식사 시간까지 고려하는 섬세함도 보였다.

법원 내부는 물론 검찰, 변호인들 사이에서도 어려운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는 반응이 나왔다. 임 부장판사가 재판의 역사성을 강조하며 절차 진행에 주의를 기울인 덕에 "공판 중심주의를 준용한 형사재판의 표본이 될 것"이라는 평가도 나왔다.

어려운 짐을 떠맡았던 임 부장판사의 후일담은 아직 들을 수 없다. 임 부장판사는 형사 11부 장재용·권노을, 형사 13부 장재용·임상은 등 배석판사들과 함께 청해진해운 임직원에 대한 선고 등 세월호 관련 사건 6건(피고인 33명)을 더 처리해야 한다.

서울 출신인 임 부장판사는 서울 대성고와 서울대 공법학과를 졸업한 뒤 1996년 38회 사법시험에 합격, 수원지법·서울서부지법·창원지법·서울고법 판사와 법원행정처 정책심의관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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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형사재판 표본’ 세월호 재판 이끈 임정엽 부장판사
    • 입력 2014-11-11 15:28:41
    • 수정2014-11-11 15:3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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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다음 재판 절차를 안내하고 재판을 마치겠다는 말을 하는데 영상을 미리 봤더니 너무 슬펐습니다. 보고 나서 '재판을 마친다'고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이번 사고로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지난달 21일 세월호 승무원들에 대한 28회 공판에서 숨진 단원고 2학년 8반 학생의 부모가 만든 영상 시청을 앞두고 미리 던진 재판장의 맺음말이다. 광주지법 형사 11부 임정엽(44·사법연수원 28기) 부장판사의 재판 절차 진행은 '배려'로 대변된다. 이준석 선장의 살인죄를 인정하지 않고 검찰의 사형 구형에 훨씬 못 미치는 징역 36년을 선고해 유가족의 반발을 샀지만 그동안 재판부와 유가족 간 소통 노력은 두루 좋은 평가를 받았 '세기의 재판', '역사에 남을 재판', '판사로서 평생 한 번 할까말까한 재판'에 대한 부담을 오롯이 지게 된 임 부장판사는 책임자 처벌과 사고원인 규명 등 재판의 본질적 목적을 이루는 것 외에도 피해자의 아픔을 보듬어야 하는 어려운 숙제를 안았다. 재판 초기 100여석 법정을 꽉 채운 유가족은 재판 중에도 "살인자", "학살자", "내 새끼 살려내"라고 외치며 울분을 토해냈다. "방금 소리치신 분 누구시죠? 일어나 보세요." 임 부장판사는 그럴 때마다 유가족을 일으켜 세워 이름을 묻고는 "마음을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계속 이러시면 재판을 진행할 수 없습니다. 법정에 경위들이 도울 테니 증인지원실에서 잠시 쉬고 오세요"라고 다독였다. 대신 유가족에게는 절차에서 허용하는 범위에서 최대한 발언 기회를 줬다. 재판 시작과 마무리 순서에는 항상 절차 진행 등과 관련한 유가족 진술을 들었고, 증인·피고인 신문 끝에도 유가족의 질문을 받아 대신 물었다. 지난달 21일에는 생존자, 유가족 등 피해자 16명의 진술을 몰아서 듣기도 했다. 재판마다 법정을 찾아 익숙해진 유가족이 진술을 위해 마이크를 넘겨받기라도 하면 "▲▲ 어머니, ◇◇◇씨죠. 지난 공판 때 발언하셨었죠"라며 친근하게 접근했다. "검사님, 마이크", "변호사님, 마이크", "증인, 검사를 보고 이야기하실 때 고개를 돌리면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신문, 변론, 증언에 치중하느라 마이크에 입을 떼고 말하는 재판 관계자들에게는 어김없이 '주의'를 줬다. 재판 실황이 전해지는 광주지법 보조법정과 수원지법 안산지원에서 방청하는 이들을 위한 배려였다. 그 사이 가족을 잃은 피해자들의 마음은 누그러졌다. 재판 초기 "왜 말을 못하게 하느냐"고 격렬하게 항의했던 유가족은 자신을 알아보는 판사에게 "판사라서 머리가 좋다", "나는 재판장에게 찍혔어"라며 농담을 나누기도 했다. 그러나 마냥 배려하지만은 않았다. 피고인들의 구속 기간(6개월)을 고려하면 주어진 재판 기간이 넉넉지 않은 상황에서 중복된 질문을 하는 유가족에게는 예외 없이 "앞에서 다 나왔어요. 재판장이 허락하지 않습니다"라며 야박하게 말을 끊었다. 재판 진행이 원활하지 않을 때는 검사, 변호사에게도 예외 없이 지적을 했고 신문 과정에서 변명하느라 질문의 논점을 피해가는 피고인들에게는 엄중한 경고를 줬다. 재판 당사자는 물론 방청하는 이들의 집중력을 유지하려고 1시간 30분 안팎 재판을 진행한 뒤에는 20분 휴정을 원칙으로 하고, 야간 재판도 철저히 배제했다. 피고인들의 식사 시간까지 고려하는 섬세함도 보였다. 법원 내부는 물론 검찰, 변호인들 사이에서도 어려운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는 반응이 나왔다. 임 부장판사가 재판의 역사성을 강조하며 절차 진행에 주의를 기울인 덕에 "공판 중심주의를 준용한 형사재판의 표본이 될 것"이라는 평가도 나왔다. 어려운 짐을 떠맡았던 임 부장판사의 후일담은 아직 들을 수 없다. 임 부장판사는 형사 11부 장재용·권노을, 형사 13부 장재용·임상은 등 배석판사들과 함께 청해진해운 임직원에 대한 선고 등 세월호 관련 사건 6건(피고인 33명)을 더 처리해야 한다. 서울 출신인 임 부장판사는 서울 대성고와 서울대 공법학과를 졸업한 뒤 1996년 38회 사법시험에 합격, 수원지법·서울서부지법·창원지법·서울고법 판사와 법원행정처 정책심의관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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