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21세기 관음증…지라시 or 찌라시!!!

입력 2014.12.12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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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라시(<일>chirashi[散])
「명사」 선전을 위해 만든 종이 쪽지. '낱장 광고','선전지'로 순화.


국립국어원의 정의다. '찌라시'가 아닌 '지라시'다. 그런데 요즘은 '지'라시가 진화해 '찌'라시가 됐나? 하는 느낌이다. 단순한 선전지가 정보 사회로 넘어오면서 '찌라시'가 되더니 세간의 중심에 선 느낌이다.

정윤회 문건을 둘러싸고 검찰 수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초기에 반짝 주목받다가 요즘은 많이들 잊혀진 한가지 사실이 있다. 바로 그 문건에 적혀 있던 내용, 비서실상 퇴진설이다. 실제 올해 초를 지나면서 봄까지 김기춘 비서실장이 물러난다는 소문이 여의도 정가를 중심으로 언론계 등에 파다했었다. 소문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소문이 있었던 것은 팩트다.

이러저러한 이유가 붙여졌고, 실제로 누가 비서실장 후보로 올랐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오늘은 과거 대선 캠프에 몸담았던 누가 비서실장 후보다, 내일은 모 장관이 비서실장으로 갈 준비를 한다더라 등등 상당 기간, 질기게 이 동네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정말 한참이 지나 소문이 돌다 돌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 바람이 불어서야 비서실장 퇴진설은 완전히 사라졌다.



□ 누가 ‘찌’라시를 만드는가?

속칭 정보 모임이라는게 있다. 원래는 증권가에서 각 주식을 거래하는 이른바 트레이더들이 모여 각 회사의 정보를 공유하는 모임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이 모임이 확장되면서 찌라시의 산실이 되고 있다. 이제는 단순한 기업 정보 뿐 아니라, 정계, 경제계, 연예계까지 그 대상이 엄청나게 확대됐다.

우선 정보기관들이 있다. 국정원과 기무사 여기에 수사기관인 검찰과 경찰은 수사 단초를 제공하기 위해 광범위한 정보요원들을 두고 있다. 대검찰청 산하 정보과, 경찰청 산하 정보분실 등 정보파트가 있고, 각 지검은 지검별로, 심지어 경찰은 각 경찰서마다 이른바 정보과 형사를 둔다. 문건을 만들었던 박관천 경정도 정보파트에서 잔뼈가 굵어진 사람이다. 국세청도 빠질 수 없는 곳이다.

이번 검찰 수사 과정에서도 유출된 청와대 문건이 일부 대기업에 흘러들어간 사실이 드러났지만, 대기업들도 하나같이 정보 담당 파트나 담당자를 두고 있다. 이른바 '대관 업무'다. 정부나 국회, 이른바 관청을 상대로 하는 업무라는 의미인데, 기본은 정보 수집이다. 정부의 정책 기류, 국회의 입법 방향, 경쟁사의 사업 계획이나 내부 경영 갈등 등을 파악해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하는 곳들이다.

그리고 이를 모아 유통시키는 사람들이 있다. 과거에는 정기적으로 회합을 통해 찌라시를 만들었다지만, 이제는 점 조직 처럼 온라인 상에서 주고 받고, 이를 취합해 돌리는 사람이 있다는 게 통설이다.

□ 하더라, 알려졌다, 전해졌다…

정보의 속성은 주고받기다. 일방적으로 받기만 해서는 고급 정보를 알 수가 없다. 나도 뭔가를 줘야한다. 그런데 모든 사안을 본인이 다 알아내 전달할 수는 없다. 그리고 진짜 고급 정보는 나만 알고, 윗선에 보고해야한다. 그래서 찌라시에는 어중간한 수준의 '하더라' 통신이 많다. 찌라시 문장을 보면 '알려졌다. 전해졌다. 했다고 한다'가 대부분이다. 다 전해들은 말이다. 직접 본 사람에게 전해들은 1차 수용자가 아니더라도, 어디를 거쳐서 왔는지 모르지만 내가 받아 그럴 듯 하면 다음 사람에게 전달해 '정보화' 시킨다. 근거는 없어지고, 확인도 안된다.

그래서 일단 퍼지기 시작하면 바로 잡기가 힘들고, 어떨 때는 나만 모르고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 되기도 한다.



□ 광속 유통의 시대

10여 년 전 증권가를 취재하면서 한가지 실험을 해본 적이 있다. 당시는 카카오톡은 없었고, 메신저들이 활발하게 이용되던 때였다.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가공의 정보를 만들어 증권사 직원을 통해 평소처럼 정보를 주고 받는 몇에게 메신저를 통해 해당 내용을 보내게 한 적이 있다.

불과 3시간 여 만에 해당 문장이 한자도 고치지 않고 처음 보냈던 사람에게 돌아왔다. 10년 전 이야기니, 그 유통 속도가 이제 절반으로 단축됐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고 최진실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당시 최 씨를 둘러싼 악성 소문의 유통과정을 추적하던 중, 아주 초기에 이를 접했던 증권가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당시 그 사람이 관련 이야기를 듣고 옮긴 사람이 7~8명 정도. 하지만 그 7~8명이 또 7~8명에게 옮기고 그 단계가 몇 차례 반복되자 온 세상이 다 그 소문을 듣게 됐었다. 본인은 손쓸 수도 없는 사이 벌어지는 일이다.

□ 21세기 관음증 ‘찌’라시

지라시를 넘어선 '찌라시'는 이제 2015년의 어휘에 선정되어도 될 정도의 지위(?)에 올라섰다. 그런데 그 본질은 21세기 관음증이라 할 정도다. 내가 속하지 않은 곳,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들여다 보고픈 욕망의 표현이다.

이번 청와대 비선 실세 의혹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도 그렇다. 마치 궁중 암투를 보는 듯, '십상시'가 등장하고, 대통령이 과거 비서로 썼던 사람과 대통령의 동생이 나온다. '그 속에서 무슨일이 있었던 게냐?'는 시선, 그리고 '당연히 그런 일이 있었을 거야'하는 의식이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사실은 사실로 밝혀져야 한다. 검찰 수사는 그래서 필요하다. 그런데 사실이 드러나면 관음증적 시각은 버리고 사안을 정리해 바라볼 필요가 있다. 계속해서 '찌라시'에 얽매여 있으면 이 사회가 더 나아갈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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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21세기 관음증…지라시 or 찌라시!!!
    • 입력 2014-12-12 12:17:27
    취재후·사건후
지라시(<일>chirashi[散]) 「명사」 선전을 위해 만든 종이 쪽지. '낱장 광고','선전지'로 순화. 국립국어원의 정의다. '찌라시'가 아닌 '지라시'다. 그런데 요즘은 '지'라시가 진화해 '찌'라시가 됐나? 하는 느낌이다. 단순한 선전지가 정보 사회로 넘어오면서 '찌라시'가 되더니 세간의 중심에 선 느낌이다. 정윤회 문건을 둘러싸고 검찰 수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초기에 반짝 주목받다가 요즘은 많이들 잊혀진 한가지 사실이 있다. 바로 그 문건에 적혀 있던 내용, 비서실상 퇴진설이다. 실제 올해 초를 지나면서 봄까지 김기춘 비서실장이 물러난다는 소문이 여의도 정가를 중심으로 언론계 등에 파다했었다. 소문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소문이 있었던 것은 팩트다. 이러저러한 이유가 붙여졌고, 실제로 누가 비서실장 후보로 올랐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오늘은 과거 대선 캠프에 몸담았던 누가 비서실장 후보다, 내일은 모 장관이 비서실장으로 갈 준비를 한다더라 등등 상당 기간, 질기게 이 동네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정말 한참이 지나 소문이 돌다 돌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 바람이 불어서야 비서실장 퇴진설은 완전히 사라졌다. □ 누가 ‘찌’라시를 만드는가? 속칭 정보 모임이라는게 있다. 원래는 증권가에서 각 주식을 거래하는 이른바 트레이더들이 모여 각 회사의 정보를 공유하는 모임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이 모임이 확장되면서 찌라시의 산실이 되고 있다. 이제는 단순한 기업 정보 뿐 아니라, 정계, 경제계, 연예계까지 그 대상이 엄청나게 확대됐다. 우선 정보기관들이 있다. 국정원과 기무사 여기에 수사기관인 검찰과 경찰은 수사 단초를 제공하기 위해 광범위한 정보요원들을 두고 있다. 대검찰청 산하 정보과, 경찰청 산하 정보분실 등 정보파트가 있고, 각 지검은 지검별로, 심지어 경찰은 각 경찰서마다 이른바 정보과 형사를 둔다. 문건을 만들었던 박관천 경정도 정보파트에서 잔뼈가 굵어진 사람이다. 국세청도 빠질 수 없는 곳이다. 이번 검찰 수사 과정에서도 유출된 청와대 문건이 일부 대기업에 흘러들어간 사실이 드러났지만, 대기업들도 하나같이 정보 담당 파트나 담당자를 두고 있다. 이른바 '대관 업무'다. 정부나 국회, 이른바 관청을 상대로 하는 업무라는 의미인데, 기본은 정보 수집이다. 정부의 정책 기류, 국회의 입법 방향, 경쟁사의 사업 계획이나 내부 경영 갈등 등을 파악해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하는 곳들이다. 그리고 이를 모아 유통시키는 사람들이 있다. 과거에는 정기적으로 회합을 통해 찌라시를 만들었다지만, 이제는 점 조직 처럼 온라인 상에서 주고 받고, 이를 취합해 돌리는 사람이 있다는 게 통설이다. □ 하더라, 알려졌다, 전해졌다… 정보의 속성은 주고받기다. 일방적으로 받기만 해서는 고급 정보를 알 수가 없다. 나도 뭔가를 줘야한다. 그런데 모든 사안을 본인이 다 알아내 전달할 수는 없다. 그리고 진짜 고급 정보는 나만 알고, 윗선에 보고해야한다. 그래서 찌라시에는 어중간한 수준의 '하더라' 통신이 많다. 찌라시 문장을 보면 '알려졌다. 전해졌다. 했다고 한다'가 대부분이다. 다 전해들은 말이다. 직접 본 사람에게 전해들은 1차 수용자가 아니더라도, 어디를 거쳐서 왔는지 모르지만 내가 받아 그럴 듯 하면 다음 사람에게 전달해 '정보화' 시킨다. 근거는 없어지고, 확인도 안된다. 그래서 일단 퍼지기 시작하면 바로 잡기가 힘들고, 어떨 때는 나만 모르고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 되기도 한다. □ 광속 유통의 시대 10여 년 전 증권가를 취재하면서 한가지 실험을 해본 적이 있다. 당시는 카카오톡은 없었고, 메신저들이 활발하게 이용되던 때였다.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가공의 정보를 만들어 증권사 직원을 통해 평소처럼 정보를 주고 받는 몇에게 메신저를 통해 해당 내용을 보내게 한 적이 있다. 불과 3시간 여 만에 해당 문장이 한자도 고치지 않고 처음 보냈던 사람에게 돌아왔다. 10년 전 이야기니, 그 유통 속도가 이제 절반으로 단축됐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고 최진실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당시 최 씨를 둘러싼 악성 소문의 유통과정을 추적하던 중, 아주 초기에 이를 접했던 증권가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당시 그 사람이 관련 이야기를 듣고 옮긴 사람이 7~8명 정도. 하지만 그 7~8명이 또 7~8명에게 옮기고 그 단계가 몇 차례 반복되자 온 세상이 다 그 소문을 듣게 됐었다. 본인은 손쓸 수도 없는 사이 벌어지는 일이다. □ 21세기 관음증 ‘찌’라시 지라시를 넘어선 '찌라시'는 이제 2015년의 어휘에 선정되어도 될 정도의 지위(?)에 올라섰다. 그런데 그 본질은 21세기 관음증이라 할 정도다. 내가 속하지 않은 곳,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들여다 보고픈 욕망의 표현이다. 이번 청와대 비선 실세 의혹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도 그렇다. 마치 궁중 암투를 보는 듯, '십상시'가 등장하고, 대통령이 과거 비서로 썼던 사람과 대통령의 동생이 나온다. '그 속에서 무슨일이 있었던 게냐?'는 시선, 그리고 '당연히 그런 일이 있었을 거야'하는 의식이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사실은 사실로 밝혀져야 한다. 검찰 수사는 그래서 필요하다. 그런데 사실이 드러나면 관음증적 시각은 버리고 사안을 정리해 바라볼 필요가 있다. 계속해서 '찌라시'에 얽매여 있으면 이 사회가 더 나아갈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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