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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사건] ‘비극의 총성’ 12·12 사태…35년 전 오늘, 무슨일이?
입력 2014.12.12 (16:28) 수정 2014.12.12 (16:57) 시사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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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종일 12. 12사태가 실시간 검 색 상위권을 오르내렸습니다.

국내 유통업체 10여 곳이 동시에 할인행 사를 진행하면서 벌어진 현상인데요.

하지만 사실 12. 12 사건 하면 35년 벌어 진 오늘의 12. 12사태를 떠올릴 수밖에 없 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현대사의 아픈 기 억인데요.

그래서 과거의 교훈을 통해서 오늘의 현 장을 분석해 보는 그때 그 사건 오늘은 1 2. 12 사건.

35년 전 그날 어떤 일이 벌어졌고 우리 사 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이야기해 보 도록 하겠습니다.

12. 12사태 등 내란음모 사건의 담당 검사 장이셨던 최환 변호사님 그리고 한국정 치아카데미 김만흠 원장님 두 분 모셨습 니다.

어서 오십시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본격적인 이야기하기에 앞서서 35년 전 12. 12사태, 이승현 아나운서가 간단히 정 리를 해 주시죠.

-35년 전 1979년 12월 12일로 돌아가 보 겠습니다.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화면으로 함께 보 시죠.

던져지는 신문 바로 호외입니다.

고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된 10. 26사건 이 후 국민들은 또다시 호외를 접하게 됐습니 다.

12. 12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촉각을 곤 두세웠는데요.

1979년 12월 12일 밤 전두환 보안사령관 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 켜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대장을 대통령 재가도 없이 체포했습니다.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계엄사령관 정승화 가 박정희 대통령의 살해를 공모했다며 강 제연행했고 이 과정에서 총격전도 벌어졌 는데요.

3명이 사망한 이 총격전의 결과는 쿠데타 세력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의 멤버들이 중 심이 된 신군부 세력은 이후 선배 장성들 을 강제전역시켰고요.

수두경비사령관, 특전사령관 등 군부조직 을 두루 장악하면서 계엄령 아래 권력의 중심으로 떠올랐습니다.

이때부터 1980년 5월 17일까지 우리나라 는 당시 주한미대사 글라이스틴의 표현을 빌리면 최규화를 수반으로 하는 형식적 정부와 전두환을 수반으로 하는 2중 권력 상태에 놓이게 됐습니다.

기념사진 찍는 장면인데요.

-12. 12사태 주역들이 지금 기념사진 촬영 을 하려고 쭉 모였던 그런 장면인데. . .

-끝나고 보안사에서 찍은 거네요, 보니까.

-그렇죠.

당시 사태가 일어나게 된 원인, 우리 이 승현 아나운서가 얘기를 했습니다마는 우 리 당시 수사하셨던 변호사님 그때 어떻 게 정리가 됐습니까?

-그때 사건이 이게 여러 사람들에 따라서 견해에 따라서 달리 하는 사람도 있습니 다.

뭐냐하면 그게 어떻게 군사반란이냐 하는 사람도 있고요.

그건 이미 군사반란은 대법원에서 확정판 결이 났으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지금 누 가 이의를 제기할 수 없죠.

또 하나는 그분들이 어떻게 하다가 결국 은 10. 26 이후에 12. 12까지 간 것은 10. 2 6 때 그때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관련 자들을 결국 잡아들이기 위해서 작전하다 가 일어난 일인데요.

그러다 보니까 그때 그 사건에 대해서 관 련자들만 처벌했어요.

처벌하고 나머지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 상 그저 그냥 마무리지은 다음에 군대로 원대복귀했으면 이런 문제가 안 생기죠.

그러면 군사반란 문제도 어느 정도 상관 에 대해서 총격도 한 것에 대해서는 범인 들을 잡기 위한 불가피한 행위였다 이렇 게 된다면 넘어갈 수 있거나 군부회의나 또는 그 당시 재판에 넘어가더라도 사형 까지 가는 엄중한 구형이나 선고가 이루 어질 수가 없었죠.

그랬는데 그렇게 안 하고 하다 보니까 제 가 볼 때는 그렇습니다.

뭔가 내친김에 우리가 되돌아갈 수도 없 는 처지 아니겠나.

직접적으로 자기들이 총격을 해서 사망한 사람도 있습니다, 상관들이.

그리고 또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또 재가 도 없이, 대통령 재가도 없이 체포했고 하 니까. . .

-그래서 내친김에 결국 5. 18까지 가서 직 권까지 갔다.

-내친김에라는 것은 제가 말을 부드럽게 하니까 그렇지, 실제로는 그런 정권 장악 을 위한 그러한. . .

-정권장악을 위한 거사였다는 거죠?

-거사였죠, 그러니까. . .

-그런데 김 원장님 반대로 신군부측의 주 장인데 당시 10. 26 사건의 연루가 돼 있 는 것을 의심하는 계엄사령관 정승화 씨 를 체포하기 위해서 그분들의 주장입니다.

불가피한 행동이었다, 이런 얘기도 있거 든요.

왜냐하면 당시에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합 동참모본부장 전두환 수사본부장을 경질 시키려고 했던, 그런 수사를 하지 못하게 하려고 했던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에 불가 피한 어떤 거사였다 그런 주장도 있거든요.

어떻게 보십니까?

-전두환 전 대통령을 비롯한 그쪽 사람들 은 지금도 그렇게 주장을 하고 있겠죠.

그런 여러 주장 가운데서도 판단을 해 가 지고 최종 판단했지 않겠습니까, 당시 수 사를 총지휘하셨던.

하기는 했습니다마는 제가 당시 상황을 사 적인 맥락에서 설명을 드리자면요, 우리 나라는 역사적인 주요 사건에 대해서 날 짜를 많이 붙여요.

대개 서양을 보면 장소라든가 사람 이름 을 붙이지 않습니까?

무슨 베르사유조약, 무슨 무슨 사건 이렇 게 붙이는데 우리나라는 날짜를 붙여서 3. 1절 무슨 절 붙이는데.

12. 12도 역시 또.

-그렇게 된 거죠.

-그러다 보니까 오늘 아까 무슨 세일하면서 붙인 이름하고 12. 12사태와 헷갈리도 했었 는데요.

그때 어쨌든간에 박정희 대통령이 5. 16부 터 보자면, 61년부터 보자면 18년이 되겠 고요.

독재정권이라고 분명하게 얘기할 수 있는 유신체제로 보자면 72년부터 해가지고 유신 체제가 한계에 달했을 때 박정희 대통령 이 피살이 됐기 때문에 사실상 유신체제 가 붕괴되는 상황이었는데 학생을 중심으 로 한 민주화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이제 민주화 일정을 내놔라라고 당시 최기화 대 통령 직무대행도 그렇게 일정을 제시하고 있는 가운데 이게 다시 군부가 무너지고 민주화로 가는 길인가 했었는데 12. 12사태 를 통해 새로운 신군부가 권력을 잡고 이 게 5. 18까지 이어지면서 우리나라 민주화 과정이 다시 1908, 7년까지 확장되게 되고 이른바 그 기간 동안 5공화국 기간 동안에 또 다른 아픈 경험을 하게 됐던 그런 결정 적인 계기가 12. 12사태였다고 볼 수 있겠습 니다.

-그렇죠.

그러면 그 12. 12 당시 그날 밤에 어떤 일 이 있었는지 긴박했던 증언을 저희들이 하 나 확보했습니다.

35년 전에 특전사 보안대장으로 있었던 김 충립 씨의 증언을 들어보겠습니다.

-아, 이거 아닌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찰나에 바로 2층인데 아래층에서 막 군홧발 소리가 확 나면서 한 10여 명이 딱 사령관 실 앞을 덮친 거예요.

사령관실 집무실을 두드려요.

그리고 이쪽에서 집무실 문고리에다 대고 사격하는 거예요.

한 100여 발 이상 쐈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 문고리가 부서지지 않았겠어 요?

그 안에는 누가 있었냐 하면 정병주 장관 하고 김오랑 소령관이 있었던 거예요.

그런 상황이 벌어진 것이죠.

그래서 12시 20분쯤 상황이 종료되고 김 오랑 소령은 의무실로 가고 정병주 사령 관은 계엄군들이 지프차에 싣고 삼성동 병 원으로 이송하고 그렇게 상황이 종료됐죠.

-그러니까 저게 특전사의 정병주 사령관 을 체포하러 갔던 신군부 당시 상황을 쭉 설명을 한 건데 문에다 총을 100여 발을 쏴가지고 그때 김오랑 소령은 결국 숨졌 죠.

-죽게 됐죠.

-그런데 최 변호사님이 특별수사본부장을 하시면서 이런 얘기를 누가 했어요.

12. 12사태가 역사상 가장 오래 걸린 쿠데 타다.

그러니까 실제로 12. 12부터 전두환 대통 령이 대통령에 취임하기까지가 이게 기간 을 따지고 보면 한 9개월 정도 걸리거든 요.

-그렇습니다.

-쿠데타를 9개월 동안이나 오랜 기간 동 안 막을 수는 없었는지 좀 궁금합니다.

-그것을 설명하면서 단계별로 나눕니다.

12. 12사태.

그다음에 진압을 해가지고 자기들이 정권 잡고 그러고 나서 그 이듬해. . .

-5. 18, 5. 17.

-그렇죠, 이듬해에 5. 18 나오고 그러니까 12. 12 그 사태가 없었으면 광주의 5. 18사 태도 일어날 수도 없죠.

-그렇죠.

-광주의 5. 18 민주화 일종의 민주항쟁인 데 그렇게 민주화운동을 할 수 없는 거죠.

-김 원장님도 이 질문에 최 변호사님 분 석에는 동의하십니까?

12. 12가 없었으면 5. 18도 없었고.

-당연하죠, 그렇게 보고요.

제가 보기에 유신체제가 붕괴된 이유로 여 러 가지 흐름이 있었고 그중에서 민주화 흐름이 주도하고 있었는데 12. 12를 통해서 군부의 신군부가 주도권을 잡고 그 권력이 직권까지 이어졌는데 12. 12를 통해서 군 내부의 주도권을 잡고 그다음에 일반 국민 들의 저항을 짓누르고 잡아왔던 것이 5. 1 7 계엄 아니었겠습니까?

그 점에서 하나 보자면 이런 게 있습니다.

왜 그러면 진압을 못 했느냐 요인에 대해 서 여러 가지 설명을 할 수 있겠지만 그중 하나를 우리가 남북 분단 상황을 들 수가 있습니다.

진압쪽에서 유혈사태를 각오하더0라도 진 압하려고 했으면 진압할 수 있었을 것인데 유혈사태가 나면 분단상태에서 어떻게 될 것인가.

아니까 진압하려고 하는 쪽도 주저할 수 없었고 사실 그것은 12. 12뿐만 아니라 5.

18도 되돌아봐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후에 왜 우리나라가 이렇게 군 부독재가 되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를 할 때 분단의 문제를 알게 됐고.

그러다 보니까 미국 문제에 관련하게 됐 고 그래서 이후에 한국사회의 문제를 얘 기하다 보니 극단적으로 간 게 추사파가 등장하는 배경이 나오기도 하고.

왜 이런 독재정권이 우리나라에 들어설 수 있는가.

그런 가운데는 분단체제라는 지적도 상당 한 설득력이 있긴 합니다.

-그렇게 볼 수 있겠군요.

-주체사상, 주사파 노동현장인데.

그런데 그전에 잠깐 보면 이런 생각이 듭 니다.

문세광이라는 간첩에 의해가지고 유교사 가. . .

-74년 8월 15일이요.

-피살된 사망하신 그때가 74년 8월 15일 이거든요.

그러면 그때.

그리고 그 후로 김재규에 의해서 박정희 대통령께서 시해를 당한. . .

그때가 79년 10. 26 아닙니까.

그렇게 본다면 한 5년 차이가 납니다.

제가 왜 이런 얘기를 드리냐 하면 이 12.

12사건, 다시 말하면 군사반란이라고 지 금 저희가 명명하고 있습니다마는 그 사 태가 생긴 것이 결국은 주축이 된 게 군 내에 있는, 육군에 있는 하나회의 조직에 서 움직이는 겁니다.

-전두환 조직을 정점으로 하는. . .

-사조직, 군사조직이요.

-그 조직이 없었으면 이것도 이렇게 못합 니다.

아까 9개월 동안이나 걸린. . .

장장 그렇게 긴 쿠데타가 어디 있느냐, 이 렇게 얘기하는데 그나마 그것도 하나회가 받 침이 됐이 때문에 가능했는데 저는 그래서 하나회가 그렇게 군의 주축인 사조직으로 됐다면 제가 보기에 74년도에 유교사가 살 해된 거 아닙니까, 피살.

그럴 때 물론 경호실 차원에서 잘못도 크 지만 주로 경호나 이런 데 있을 때를 보 면 군 내 요직에 있는 간부들이 주로 배 속돼 가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렇죠.

-그래서 그때 물론 경호실장 하던 분도 여 러 가지 소홀함도 있었지만 그때 문세광 을 제압하지 못했기 때문에 문세광의 동 영상을 보면 대통령께서 나가셔서 연설을 막 시작하는데 뒤늦게 저 앞쪽에서 튀어 나오거든요.

있던 경호요원이 발을 걸기도 하고.

이럴 때 경호실장이 앉아서 그대로 거기 서 응사했으면 그 사람을 잡습니다.

경호실장은 총으로 할 수 있으니까.

그게 뭐냐하면. . .

-실제로 쏘기도 했죠.

-하긴 했죠.

-했는데 오발도 나고.

-저는 그 얘기가 아니라 또 더 나아가면 이런 사태가 있을 때 하나회 조직에 있는 군부에 있는 아주 똑똑한 장군들 많거든 요.

장교도 많고.

그런 분들은 어떤 생각을 했는가.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지금 박정희 대통 령께서 서거하신 시해당한 그때는 나라가 시끄러웠고 또 부마사태도 일어났고 여러 가지 치안상태가 어려울 때였습니다.

그때 하나회 출신들이 쿠데타 하는 데 신 경 쓰기에 앞서서 제대로만 했으면 충남 아산인가. . .

-삽교천에 갔었죠.

-삽교천에 갔다 오실 때 편안하게 하시게 하고 여기서부터는 이제 좀더 비상적인 태 세를 갖추고 경호를 하고 했으면 어떻게 그렇게 어떻게 그런 사태가 생기며 가면서 아무리 대통령께서 비무장상태로 순복할 때는 무장하지 말고 오라.

-알겠습니다.

-했다 하더라도 그걸 그렇게 그대로 합니 까?

그래서 안타까운 생각이 들어서 하나회한 테 제가. . .

-수사를 직접 하셨던 분이니까 그런 말씀 을 하시는군요.

-선배로서 얘기를 하는 겁니다.

-당시 상황을 잠깐 말씀 드리면 그 당시에 하나회 관련도 있지만 당시 79년, 70년대 말이라는 것은 외부적으로 김재규 중앙정보 부 부장이 시해해 가지고 그게 유신이 붕 괴되는 상황이 됐지만 그때 여러 가지 상 황이 정말 한계에 다르게 폭발한 상황 아니 었습니까?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내부적으로 붕괴가 될 정도였고.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재명되는 상황이었 고 그래서 부마사태가 터지고 여러 가지 가 상당히 한계에 달하는 가운데 내부적으 로 폭발했던.

그래서 일반적으로 정치학자들은 그렇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결국 12. 12사태는 어떻게 보면 유신체제 의 도저히 지탱할 수 없었던 유신체제가 막바지 달해서 민주적 붕괴의 사태인데 민 주시대가 오는 걸 12. 12사태가 사실 또 몇 년을 지연시킨 거죠.

그렇죠?

-그러니까 새로운 군부정권이 된 신군부 라는 용어를. . .

군부정권이 끝나나 했더니 새로운 군부가 등장해서 다시 87년까지.

더 확대하면 노태우 정부도 그 기반에 있 는 거죠.

-그 연장선에 있는데 결국은 뭐냐하면 12 . 12사태가 5공화국 정권의 탄생의 시초 가 되는 건데.

-그렇죠.

-그래서 저희들이 12. 12사태를 계기로 5공 화국 정권.

저희들이 역사적 평가를 지금에 와서는 이 제 좀 시작해도 되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 이 듭니다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될 정 부였다는 평가도 있고.

또 한측에서는 그래도 5공화 정부가 잘한 것도 많다.

뭐냐하면 그때가 우리나라 경제가 사실은 가장 정점에 이르렀을 때거든요.

또 하나 일각에서 그분들이 또 주장하던 7년 단임제를 성공시켰다.

그리고 예를 들면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 를 마련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그런 평가 들도 있어요.

어떻게 봐야 됩니까?

-개혁했다는 거죠, 직선제로.

-그 평가를 좀 듣고 싶습니다.

-경제 가끔 내세우는데요.

외형상으로는 맞기는 합니다.

1983년에도 우리나라 축구가 이름을 떨쳤 던 대회가 있었는데 기억하십니까?

-멕시코 4강 청소년 축구 때.

-청소년 4강 때 4강에 올랐었는데 당시 4 강이 세계 외칠 4강이었습니다.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한국.

외칠 4강이었는데 그 이후에 일어났던 시 기가 바로 전두환 정권시기인데 당시에 주 로 수출했던 게 자동차가 붐 아니었습니 까?

자동차 같은 산업이 바로 투자에서 나오 는 거겠습니까?

상당히 시간이 걸리는 거죠.

이게 상당수 전두환 정권 시대에 나타나 기는 했지만 박정희 정권 후반기 때 투자 했던 중압권 효과가 나왔다라고 보여지고.

-그 효과가 80년대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당시에는 이른바 국 제적으로 3저 효과라고 했던 저유가 등 포 함한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환경이어서.

그 시기에는 좋기는 했었지만 그것을 가 지고 정두환 정권의 업적으로 평가하기에 는 굉장히 문제가 있고요.

알다시피 80년 광주항쟁을 비롯해서 얼마 나 많은 일이 있었습니까?

오직 공포스러운 시대였기 때문에 과연 왜 우리나라가 이럴까 하다 보니까 심지어 기 형적인 주사파가 생길 정도로.

-결국 주사파가 생긴 건 5공 정권의 어떤 폭압 때문에 반작용으로 생긴 거다라고 볼 수 있겠죠.

-왜 이랬을까.

제가 지적했지만 분단 상황도 있고 분단 하고 관련해서 5. 18과 관련해서 미국의 책 임도 왔다 갔다 하고.

이러다 보니까 무엇이 책임인가에 대한 이 런 강조점이 다른 가운데 일부 분파가 북 한에 상당히 호의적인 평가를 하는 주사파 가 등장했고.

또 그 일부는 아직까지도 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기는 합니다.

-어쨌든 12. 12 사태는 최 변호사님이 당 시 수사본부장님을 하시면서 군사 반란으 로 규정을 했습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이승현 아나운서가 당시 역사 바 로세우기 작업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잠깐 정리 좀 해 주시죠.

-그 김영삼 대통령의 92년 역사 바로세우 기 선언에 의해서 5. 18특별법이 제정이 됐 고요.

그에 따라서 신군부측의 핵심인사 11명.

노태우, 전두환 전 대통령도 법정에 서게 됐습니다.

96년 1년 내내 전두환, 노태우 피고인에 대한 12. 12 그리고 5. 18 비자금 사건 관 련 공판이 진행됐습니다.

이 법정에서 두 사람이 손을 꼭 잡은 모 습이 포착되기도 했는데요.

결국 전두환 전 대통령은 무기징역, 노태 우 전 대통령은 징역 17년을 선고받았습 니다.

하지만 두 전직 대통령이 97년 말 국민 대 화합 차원에 있었던 특별사면을 통해서 석 방됐죠.

-그런데 말이죠.

변호사님, 하나 궁금한 것이 당시에 이거 하시기 직전에 검찰에서 뭐라고 얘기가 있 었는가 하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이랬었단 말이에요.

그걸 어떻게 뒤집으셨습니까?

-그게 검찰에서 일반적인 얘기가 아니고 여러 전세계적으로 쿠데타가 어떤 식으로 성공을 하고 어떤 식으로 그 뒤에 처벌을 받았는가.

이런 선례를 찾다 보니까 이거 우리 말고 는 웬만한 나라에서는 쿠데타 했다가 그 다음에 계속 반복하면서도 반대파들이 처 벌된 사례가 없어요.

웬만하면 국외로 추방 비슷하게 해가지고 탈출하고 말이죠.

그런 식으로 됐는데 우리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

왜냐하면 이게 우리나라가 제대로 되려면 경제발전도 해야 되고 그다음에 정의사회 도 구현시켜야 되겠고.

뭐든지 제대로 된 나라가 되려면. . .

-오히려 오공정권이 내세웠던 정의사회 구 현을 하기 위해서는. . .

-그렇습니다.

-그 주역들을 처벌해야 된다?

-아니, 그때 오공에서 제일 주창했던 것 이.

-정의사회 구현이죠.

-정의사회 구현입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른다고 해 가지고.

그런데 실질적으로 나중에 말씀드립니다 마는. . .

-민정당도 만들었죠, 집권에서.

-물론이죠, 다 만들고 했는데 민주정의당 이죠.

그런데 그게 문제는 그런 식으로 했는데 도 어떻든간에 그래도 우리가 지금까지 3 5년을 지내왔지 않습니까?

저개발국 같은 경우에는 35년 동안에도 나 라에 따라서는 쿠데타가 여러 번 났을 수 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게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것을 우리가 할 때는 결국은 쿠데타라는 것은 이 땅에서는 다시는 우 리가 그런 걸 반복해서는 안 되겠다.

-당시 수사 비화 좀 여쭤보겠습니다.

법정에서 두 분이 나왔던 저런 장면들은 많이 공개가 됐는데.

-손을 꼭 잡고 가는 것 같은 거. . .

-수사하실 때 당시 지검장님을 직접 만나보 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제가 수사본부장이고 검사장이고 하면서 우리. . .

-직접 그래도 대해 보시죠.

-아니, 우리 검사들이 잘하고 있는 걸 자 꾸 돌아다니고 한다는 것은 수사를 어떤 의미에서는 방해하는 겁니다.

-그래서 직접 대면하시지는 않았군요.

-그래서 일부분은 피했고요.

나중에 보고를 받죠.

그분들 태도가 어떻고 . . .

-태도는 어땠답니까?

-순순히 얘기를 다 하느냐인데 순순히 다 얘기를 하고 당당하더랍니다.

-굉장히 당당했다.

-지금 아까 말씀하신 대로 우리도 정권 야 욕 때문에 한다고 하지만 그 당시 상황으 로 봐서는 불가피했다.

계엄사령이 육군참모총장이면서 계엄사령 관 하는 분이 김재규하고 내통했지 않느 냐?

-그런 주장들을 펼쳤군요.

-시해범하고 그러니까 그분을 잡으려면 그 방법밖에 없지 않느냐, 이렇게 나오는 여 러 가지가 있습니다마는 어찌했건간에, 어 쨌든간에 이것은 결국 우리 헌정을 파괴 하는 행위가 되고 따라서 군사형법에 나 오는 군사반란이 되는 것이다.

-원장님, 어떻습니까?

군사반란을 우리가 뒤늦게라도 법정에 세 워가지고 처리한 것.

이거 평가를 어떻게 해야 됩니까?

-당연하죠.

당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라 고 했던 사람이 누구다라고 지금 현재 국 회의원하고 있는 분으로 보도는 됐는데 사 실인가는 모르겠는데요.

돼 있는데 성공한 쿠데타라는 말은 쿠데 타를 당 집권했다는 말이 되겠는데 이게 바 람직했느냐 안 했느냐는 우리가 사후에 평 가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 점에 대해서는 올바르게 진단해서 처 벌했다고 본다면 문제가 있는 것을 평가 하는 거고요.

사회과학적 의미에서 성공한 쿠데타는 사 실 혁명이 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정치혁명이 되는 것인데 그 점에서는 권 력은 잡았지만 국민들의 역사 속에서는 실 패했던 걸로 평가하는 게 맞다라고 봐지 네요.

그 점에서는 그 당시 조금 발언 하나가 과 장 보도가 됐나 모르겠는데요.

그래서 이후에 5. 18 특별법이 마련돼 가지 고 아시다시피 제대로 평가한 거죠.

그런데 이후에 아직도 주장을 하고 있으 면서 심지어는 군인연금도 다시 해 달라 고 서너 번에 걸쳐가지고 지금 뭐 소를 제 기하기도 하고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저희들이 정리할 시간이 가까워졌는데 1 2. 12사태 근현대사에 우리 현대사의 아픈 사건 중의 하나인데 여기서 우리가 받아 야 될 교훈 간단히 정리를 하고 넘어갔 으면 좋겠습니다.

한말씀씩만 간단히 듣겠습니다.

-이건 제가 처음에도 말씀 올렸지만 절대 쿠데타라는 것은 다시 이 땅에서 무슨 명 분이 어떻든지간에 그런 건 있어서는 안 된다.

-헌정질서를 파괴한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제가 참 검사 생활 그래도 30년 이 상을 했습니다마는 제 손에 의해 가지고 1 2. 12 군사반란 사건이 역사의 법적으로 옳 게 평가받았다는 거 그게 있고.

그전에 또 어떻든간에 정의사회를 그렇게 부르짖던 분들이. . .

-아까 말씀하셨던. . .

-어떻게 수천억씩을 또 뇌물수수를 해서 전직 대통령 얘기지만 대통령 재임 때거 든요.

그런 대통령이 다시는 나와서는 안 되겠 다.

그런 것도 있고요.

-국가를 지키라고 주어진 폭력을 국민에 게 행사했던 것은 다시는 돼서는 안 되겠 고요.

지난번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그런 얘기 가 나왔습니다마는 이 시점에서 과연 국 가라는 것이 우리에게 우리 국민에게 무 엇인가 다시 한 번 생각을 해 봤으면 하 는 생각이 듭니다.

-알겠습니다.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35년 전에 발생했던 12. 12사태.

우리 현대사에서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비 극이었다는 것이 지금 역사가들의 평가입 니다.

물론 본인들로서는 나름의 명분이 있었겠 지만 신부 군부 세력에 대한 역사의 평가 는 하극상에 의한 군사 쿠데타였습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평범 한 진리를 되새겨볼 때가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황상무의 시사진단 다음 주에 다시 찾아뵙 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그때 그 사건] ‘비극의 총성’ 12·12 사태…35년 전 오늘, 무슨일이?
    • 입력 2014-12-12 16:13:02
    • 수정2014-12-12 16:57:46
    시사진단
-오늘 하루 종일 12. 12사태가 실시간 검 색 상위권을 오르내렸습니다.

국내 유통업체 10여 곳이 동시에 할인행 사를 진행하면서 벌어진 현상인데요.

하지만 사실 12. 12 사건 하면 35년 벌어 진 오늘의 12. 12사태를 떠올릴 수밖에 없 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현대사의 아픈 기 억인데요.

그래서 과거의 교훈을 통해서 오늘의 현 장을 분석해 보는 그때 그 사건 오늘은 1 2. 12 사건.

35년 전 그날 어떤 일이 벌어졌고 우리 사 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이야기해 보 도록 하겠습니다.

12. 12사태 등 내란음모 사건의 담당 검사 장이셨던 최환 변호사님 그리고 한국정 치아카데미 김만흠 원장님 두 분 모셨습 니다.

어서 오십시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본격적인 이야기하기에 앞서서 35년 전 12. 12사태, 이승현 아나운서가 간단히 정 리를 해 주시죠.

-35년 전 1979년 12월 12일로 돌아가 보 겠습니다.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화면으로 함께 보 시죠.

던져지는 신문 바로 호외입니다.

고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된 10. 26사건 이 후 국민들은 또다시 호외를 접하게 됐습니 다.

12. 12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촉각을 곤 두세웠는데요.

1979년 12월 12일 밤 전두환 보안사령관 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 켜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대장을 대통령 재가도 없이 체포했습니다.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계엄사령관 정승화 가 박정희 대통령의 살해를 공모했다며 강 제연행했고 이 과정에서 총격전도 벌어졌 는데요.

3명이 사망한 이 총격전의 결과는 쿠데타 세력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의 멤버들이 중 심이 된 신군부 세력은 이후 선배 장성들 을 강제전역시켰고요.

수두경비사령관, 특전사령관 등 군부조직 을 두루 장악하면서 계엄령 아래 권력의 중심으로 떠올랐습니다.

이때부터 1980년 5월 17일까지 우리나라 는 당시 주한미대사 글라이스틴의 표현을 빌리면 최규화를 수반으로 하는 형식적 정부와 전두환을 수반으로 하는 2중 권력 상태에 놓이게 됐습니다.

기념사진 찍는 장면인데요.

-12. 12사태 주역들이 지금 기념사진 촬영 을 하려고 쭉 모였던 그런 장면인데. . .

-끝나고 보안사에서 찍은 거네요, 보니까.

-그렇죠.

당시 사태가 일어나게 된 원인, 우리 이 승현 아나운서가 얘기를 했습니다마는 우 리 당시 수사하셨던 변호사님 그때 어떻 게 정리가 됐습니까?

-그때 사건이 이게 여러 사람들에 따라서 견해에 따라서 달리 하는 사람도 있습니 다.

뭐냐하면 그게 어떻게 군사반란이냐 하는 사람도 있고요.

그건 이미 군사반란은 대법원에서 확정판 결이 났으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지금 누 가 이의를 제기할 수 없죠.

또 하나는 그분들이 어떻게 하다가 결국 은 10. 26 이후에 12. 12까지 간 것은 10. 2 6 때 그때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관련 자들을 결국 잡아들이기 위해서 작전하다 가 일어난 일인데요.

그러다 보니까 그때 그 사건에 대해서 관 련자들만 처벌했어요.

처벌하고 나머지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 상 그저 그냥 마무리지은 다음에 군대로 원대복귀했으면 이런 문제가 안 생기죠.

그러면 군사반란 문제도 어느 정도 상관 에 대해서 총격도 한 것에 대해서는 범인 들을 잡기 위한 불가피한 행위였다 이렇 게 된다면 넘어갈 수 있거나 군부회의나 또는 그 당시 재판에 넘어가더라도 사형 까지 가는 엄중한 구형이나 선고가 이루 어질 수가 없었죠.

그랬는데 그렇게 안 하고 하다 보니까 제 가 볼 때는 그렇습니다.

뭔가 내친김에 우리가 되돌아갈 수도 없 는 처지 아니겠나.

직접적으로 자기들이 총격을 해서 사망한 사람도 있습니다, 상관들이.

그리고 또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또 재가 도 없이, 대통령 재가도 없이 체포했고 하 니까. . .

-그래서 내친김에 결국 5. 18까지 가서 직 권까지 갔다.

-내친김에라는 것은 제가 말을 부드럽게 하니까 그렇지, 실제로는 그런 정권 장악 을 위한 그러한. . .

-정권장악을 위한 거사였다는 거죠?

-거사였죠, 그러니까. . .

-그런데 김 원장님 반대로 신군부측의 주 장인데 당시 10. 26 사건의 연루가 돼 있 는 것을 의심하는 계엄사령관 정승화 씨 를 체포하기 위해서 그분들의 주장입니다.

불가피한 행동이었다, 이런 얘기도 있거 든요.

왜냐하면 당시에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합 동참모본부장 전두환 수사본부장을 경질 시키려고 했던, 그런 수사를 하지 못하게 하려고 했던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에 불가 피한 어떤 거사였다 그런 주장도 있거든요.

어떻게 보십니까?

-전두환 전 대통령을 비롯한 그쪽 사람들 은 지금도 그렇게 주장을 하고 있겠죠.

그런 여러 주장 가운데서도 판단을 해 가 지고 최종 판단했지 않겠습니까, 당시 수 사를 총지휘하셨던.

하기는 했습니다마는 제가 당시 상황을 사 적인 맥락에서 설명을 드리자면요, 우리 나라는 역사적인 주요 사건에 대해서 날 짜를 많이 붙여요.

대개 서양을 보면 장소라든가 사람 이름 을 붙이지 않습니까?

무슨 베르사유조약, 무슨 무슨 사건 이렇 게 붙이는데 우리나라는 날짜를 붙여서 3. 1절 무슨 절 붙이는데.

12. 12도 역시 또.

-그렇게 된 거죠.

-그러다 보니까 오늘 아까 무슨 세일하면서 붙인 이름하고 12. 12사태와 헷갈리도 했었 는데요.

그때 어쨌든간에 박정희 대통령이 5. 16부 터 보자면, 61년부터 보자면 18년이 되겠 고요.

독재정권이라고 분명하게 얘기할 수 있는 유신체제로 보자면 72년부터 해가지고 유신 체제가 한계에 달했을 때 박정희 대통령 이 피살이 됐기 때문에 사실상 유신체제 가 붕괴되는 상황이었는데 학생을 중심으 로 한 민주화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이제 민주화 일정을 내놔라라고 당시 최기화 대 통령 직무대행도 그렇게 일정을 제시하고 있는 가운데 이게 다시 군부가 무너지고 민주화로 가는 길인가 했었는데 12. 12사태 를 통해 새로운 신군부가 권력을 잡고 이 게 5. 18까지 이어지면서 우리나라 민주화 과정이 다시 1908, 7년까지 확장되게 되고 이른바 그 기간 동안 5공화국 기간 동안에 또 다른 아픈 경험을 하게 됐던 그런 결정 적인 계기가 12. 12사태였다고 볼 수 있겠습 니다.

-그렇죠.

그러면 그 12. 12 당시 그날 밤에 어떤 일 이 있었는지 긴박했던 증언을 저희들이 하 나 확보했습니다.

35년 전에 특전사 보안대장으로 있었던 김 충립 씨의 증언을 들어보겠습니다.

-아, 이거 아닌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찰나에 바로 2층인데 아래층에서 막 군홧발 소리가 확 나면서 한 10여 명이 딱 사령관 실 앞을 덮친 거예요.

사령관실 집무실을 두드려요.

그리고 이쪽에서 집무실 문고리에다 대고 사격하는 거예요.

한 100여 발 이상 쐈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 문고리가 부서지지 않았겠어 요?

그 안에는 누가 있었냐 하면 정병주 장관 하고 김오랑 소령관이 있었던 거예요.

그런 상황이 벌어진 것이죠.

그래서 12시 20분쯤 상황이 종료되고 김 오랑 소령은 의무실로 가고 정병주 사령 관은 계엄군들이 지프차에 싣고 삼성동 병 원으로 이송하고 그렇게 상황이 종료됐죠.

-그러니까 저게 특전사의 정병주 사령관 을 체포하러 갔던 신군부 당시 상황을 쭉 설명을 한 건데 문에다 총을 100여 발을 쏴가지고 그때 김오랑 소령은 결국 숨졌 죠.

-죽게 됐죠.

-그런데 최 변호사님이 특별수사본부장을 하시면서 이런 얘기를 누가 했어요.

12. 12사태가 역사상 가장 오래 걸린 쿠데 타다.

그러니까 실제로 12. 12부터 전두환 대통 령이 대통령에 취임하기까지가 이게 기간 을 따지고 보면 한 9개월 정도 걸리거든 요.

-그렇습니다.

-쿠데타를 9개월 동안이나 오랜 기간 동 안 막을 수는 없었는지 좀 궁금합니다.

-그것을 설명하면서 단계별로 나눕니다.

12. 12사태.

그다음에 진압을 해가지고 자기들이 정권 잡고 그러고 나서 그 이듬해. . .

-5. 18, 5. 17.

-그렇죠, 이듬해에 5. 18 나오고 그러니까 12. 12 그 사태가 없었으면 광주의 5. 18사 태도 일어날 수도 없죠.

-그렇죠.

-광주의 5. 18 민주화 일종의 민주항쟁인 데 그렇게 민주화운동을 할 수 없는 거죠.

-김 원장님도 이 질문에 최 변호사님 분 석에는 동의하십니까?

12. 12가 없었으면 5. 18도 없었고.

-당연하죠, 그렇게 보고요.

제가 보기에 유신체제가 붕괴된 이유로 여 러 가지 흐름이 있었고 그중에서 민주화 흐름이 주도하고 있었는데 12. 12를 통해서 군부의 신군부가 주도권을 잡고 그 권력이 직권까지 이어졌는데 12. 12를 통해서 군 내부의 주도권을 잡고 그다음에 일반 국민 들의 저항을 짓누르고 잡아왔던 것이 5. 1 7 계엄 아니었겠습니까?

그 점에서 하나 보자면 이런 게 있습니다.

왜 그러면 진압을 못 했느냐 요인에 대해 서 여러 가지 설명을 할 수 있겠지만 그중 하나를 우리가 남북 분단 상황을 들 수가 있습니다.

진압쪽에서 유혈사태를 각오하더0라도 진 압하려고 했으면 진압할 수 있었을 것인데 유혈사태가 나면 분단상태에서 어떻게 될 것인가.

아니까 진압하려고 하는 쪽도 주저할 수 없었고 사실 그것은 12. 12뿐만 아니라 5.

18도 되돌아봐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후에 왜 우리나라가 이렇게 군 부독재가 되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를 할 때 분단의 문제를 알게 됐고.

그러다 보니까 미국 문제에 관련하게 됐 고 그래서 이후에 한국사회의 문제를 얘 기하다 보니 극단적으로 간 게 추사파가 등장하는 배경이 나오기도 하고.

왜 이런 독재정권이 우리나라에 들어설 수 있는가.

그런 가운데는 분단체제라는 지적도 상당 한 설득력이 있긴 합니다.

-그렇게 볼 수 있겠군요.

-주체사상, 주사파 노동현장인데.

그런데 그전에 잠깐 보면 이런 생각이 듭 니다.

문세광이라는 간첩에 의해가지고 유교사 가. . .

-74년 8월 15일이요.

-피살된 사망하신 그때가 74년 8월 15일 이거든요.

그러면 그때.

그리고 그 후로 김재규에 의해서 박정희 대통령께서 시해를 당한. . .

그때가 79년 10. 26 아닙니까.

그렇게 본다면 한 5년 차이가 납니다.

제가 왜 이런 얘기를 드리냐 하면 이 12.

12사건, 다시 말하면 군사반란이라고 지 금 저희가 명명하고 있습니다마는 그 사 태가 생긴 것이 결국은 주축이 된 게 군 내에 있는, 육군에 있는 하나회의 조직에 서 움직이는 겁니다.

-전두환 조직을 정점으로 하는. . .

-사조직, 군사조직이요.

-그 조직이 없었으면 이것도 이렇게 못합 니다.

아까 9개월 동안이나 걸린. . .

장장 그렇게 긴 쿠데타가 어디 있느냐, 이 렇게 얘기하는데 그나마 그것도 하나회가 받 침이 됐이 때문에 가능했는데 저는 그래서 하나회가 그렇게 군의 주축인 사조직으로 됐다면 제가 보기에 74년도에 유교사가 살 해된 거 아닙니까, 피살.

그럴 때 물론 경호실 차원에서 잘못도 크 지만 주로 경호나 이런 데 있을 때를 보 면 군 내 요직에 있는 간부들이 주로 배 속돼 가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렇죠.

-그래서 그때 물론 경호실장 하던 분도 여 러 가지 소홀함도 있었지만 그때 문세광 을 제압하지 못했기 때문에 문세광의 동 영상을 보면 대통령께서 나가셔서 연설을 막 시작하는데 뒤늦게 저 앞쪽에서 튀어 나오거든요.

있던 경호요원이 발을 걸기도 하고.

이럴 때 경호실장이 앉아서 그대로 거기 서 응사했으면 그 사람을 잡습니다.

경호실장은 총으로 할 수 있으니까.

그게 뭐냐하면. . .

-실제로 쏘기도 했죠.

-하긴 했죠.

-했는데 오발도 나고.

-저는 그 얘기가 아니라 또 더 나아가면 이런 사태가 있을 때 하나회 조직에 있는 군부에 있는 아주 똑똑한 장군들 많거든 요.

장교도 많고.

그런 분들은 어떤 생각을 했는가.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지금 박정희 대통 령께서 서거하신 시해당한 그때는 나라가 시끄러웠고 또 부마사태도 일어났고 여러 가지 치안상태가 어려울 때였습니다.

그때 하나회 출신들이 쿠데타 하는 데 신 경 쓰기에 앞서서 제대로만 했으면 충남 아산인가. . .

-삽교천에 갔었죠.

-삽교천에 갔다 오실 때 편안하게 하시게 하고 여기서부터는 이제 좀더 비상적인 태 세를 갖추고 경호를 하고 했으면 어떻게 그렇게 어떻게 그런 사태가 생기며 가면서 아무리 대통령께서 비무장상태로 순복할 때는 무장하지 말고 오라.

-알겠습니다.

-했다 하더라도 그걸 그렇게 그대로 합니 까?

그래서 안타까운 생각이 들어서 하나회한 테 제가. . .

-수사를 직접 하셨던 분이니까 그런 말씀 을 하시는군요.

-선배로서 얘기를 하는 겁니다.

-당시 상황을 잠깐 말씀 드리면 그 당시에 하나회 관련도 있지만 당시 79년, 70년대 말이라는 것은 외부적으로 김재규 중앙정보 부 부장이 시해해 가지고 그게 유신이 붕 괴되는 상황이 됐지만 그때 여러 가지 상 황이 정말 한계에 다르게 폭발한 상황 아니 었습니까?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내부적으로 붕괴가 될 정도였고.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재명되는 상황이었 고 그래서 부마사태가 터지고 여러 가지 가 상당히 한계에 달하는 가운데 내부적으 로 폭발했던.

그래서 일반적으로 정치학자들은 그렇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결국 12. 12사태는 어떻게 보면 유신체제 의 도저히 지탱할 수 없었던 유신체제가 막바지 달해서 민주적 붕괴의 사태인데 민 주시대가 오는 걸 12. 12사태가 사실 또 몇 년을 지연시킨 거죠.

그렇죠?

-그러니까 새로운 군부정권이 된 신군부 라는 용어를. . .

군부정권이 끝나나 했더니 새로운 군부가 등장해서 다시 87년까지.

더 확대하면 노태우 정부도 그 기반에 있 는 거죠.

-그 연장선에 있는데 결국은 뭐냐하면 12 . 12사태가 5공화국 정권의 탄생의 시초 가 되는 건데.

-그렇죠.

-그래서 저희들이 12. 12사태를 계기로 5공 화국 정권.

저희들이 역사적 평가를 지금에 와서는 이 제 좀 시작해도 되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 이 듭니다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될 정 부였다는 평가도 있고.

또 한측에서는 그래도 5공화 정부가 잘한 것도 많다.

뭐냐하면 그때가 우리나라 경제가 사실은 가장 정점에 이르렀을 때거든요.

또 하나 일각에서 그분들이 또 주장하던 7년 단임제를 성공시켰다.

그리고 예를 들면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 를 마련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그런 평가 들도 있어요.

어떻게 봐야 됩니까?

-개혁했다는 거죠, 직선제로.

-그 평가를 좀 듣고 싶습니다.

-경제 가끔 내세우는데요.

외형상으로는 맞기는 합니다.

1983년에도 우리나라 축구가 이름을 떨쳤 던 대회가 있었는데 기억하십니까?

-멕시코 4강 청소년 축구 때.

-청소년 4강 때 4강에 올랐었는데 당시 4 강이 세계 외칠 4강이었습니다.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한국.

외칠 4강이었는데 그 이후에 일어났던 시 기가 바로 전두환 정권시기인데 당시에 주 로 수출했던 게 자동차가 붐 아니었습니 까?

자동차 같은 산업이 바로 투자에서 나오 는 거겠습니까?

상당히 시간이 걸리는 거죠.

이게 상당수 전두환 정권 시대에 나타나 기는 했지만 박정희 정권 후반기 때 투자 했던 중압권 효과가 나왔다라고 보여지고.

-그 효과가 80년대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당시에는 이른바 국 제적으로 3저 효과라고 했던 저유가 등 포 함한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환경이어서.

그 시기에는 좋기는 했었지만 그것을 가 지고 정두환 정권의 업적으로 평가하기에 는 굉장히 문제가 있고요.

알다시피 80년 광주항쟁을 비롯해서 얼마 나 많은 일이 있었습니까?

오직 공포스러운 시대였기 때문에 과연 왜 우리나라가 이럴까 하다 보니까 심지어 기 형적인 주사파가 생길 정도로.

-결국 주사파가 생긴 건 5공 정권의 어떤 폭압 때문에 반작용으로 생긴 거다라고 볼 수 있겠죠.

-왜 이랬을까.

제가 지적했지만 분단 상황도 있고 분단 하고 관련해서 5. 18과 관련해서 미국의 책 임도 왔다 갔다 하고.

이러다 보니까 무엇이 책임인가에 대한 이 런 강조점이 다른 가운데 일부 분파가 북 한에 상당히 호의적인 평가를 하는 주사파 가 등장했고.

또 그 일부는 아직까지도 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기는 합니다.

-어쨌든 12. 12 사태는 최 변호사님이 당 시 수사본부장님을 하시면서 군사 반란으 로 규정을 했습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이승현 아나운서가 당시 역사 바 로세우기 작업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잠깐 정리 좀 해 주시죠.

-그 김영삼 대통령의 92년 역사 바로세우 기 선언에 의해서 5. 18특별법이 제정이 됐 고요.

그에 따라서 신군부측의 핵심인사 11명.

노태우, 전두환 전 대통령도 법정에 서게 됐습니다.

96년 1년 내내 전두환, 노태우 피고인에 대한 12. 12 그리고 5. 18 비자금 사건 관 련 공판이 진행됐습니다.

이 법정에서 두 사람이 손을 꼭 잡은 모 습이 포착되기도 했는데요.

결국 전두환 전 대통령은 무기징역, 노태 우 전 대통령은 징역 17년을 선고받았습 니다.

하지만 두 전직 대통령이 97년 말 국민 대 화합 차원에 있었던 특별사면을 통해서 석 방됐죠.

-그런데 말이죠.

변호사님, 하나 궁금한 것이 당시에 이거 하시기 직전에 검찰에서 뭐라고 얘기가 있 었는가 하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이랬었단 말이에요.

그걸 어떻게 뒤집으셨습니까?

-그게 검찰에서 일반적인 얘기가 아니고 여러 전세계적으로 쿠데타가 어떤 식으로 성공을 하고 어떤 식으로 그 뒤에 처벌을 받았는가.

이런 선례를 찾다 보니까 이거 우리 말고 는 웬만한 나라에서는 쿠데타 했다가 그 다음에 계속 반복하면서도 반대파들이 처 벌된 사례가 없어요.

웬만하면 국외로 추방 비슷하게 해가지고 탈출하고 말이죠.

그런 식으로 됐는데 우리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

왜냐하면 이게 우리나라가 제대로 되려면 경제발전도 해야 되고 그다음에 정의사회 도 구현시켜야 되겠고.

뭐든지 제대로 된 나라가 되려면. . .

-오히려 오공정권이 내세웠던 정의사회 구 현을 하기 위해서는. . .

-그렇습니다.

-그 주역들을 처벌해야 된다?

-아니, 그때 오공에서 제일 주창했던 것 이.

-정의사회 구현이죠.

-정의사회 구현입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른다고 해 가지고.

그런데 실질적으로 나중에 말씀드립니다 마는. . .

-민정당도 만들었죠, 집권에서.

-물론이죠, 다 만들고 했는데 민주정의당 이죠.

그런데 그게 문제는 그런 식으로 했는데 도 어떻든간에 그래도 우리가 지금까지 3 5년을 지내왔지 않습니까?

저개발국 같은 경우에는 35년 동안에도 나 라에 따라서는 쿠데타가 여러 번 났을 수 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게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것을 우리가 할 때는 결국은 쿠데타라는 것은 이 땅에서는 다시는 우 리가 그런 걸 반복해서는 안 되겠다.

-당시 수사 비화 좀 여쭤보겠습니다.

법정에서 두 분이 나왔던 저런 장면들은 많이 공개가 됐는데.

-손을 꼭 잡고 가는 것 같은 거. . .

-수사하실 때 당시 지검장님을 직접 만나보 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제가 수사본부장이고 검사장이고 하면서 우리. . .

-직접 그래도 대해 보시죠.

-아니, 우리 검사들이 잘하고 있는 걸 자 꾸 돌아다니고 한다는 것은 수사를 어떤 의미에서는 방해하는 겁니다.

-그래서 직접 대면하시지는 않았군요.

-그래서 일부분은 피했고요.

나중에 보고를 받죠.

그분들 태도가 어떻고 . . .

-태도는 어땠답니까?

-순순히 얘기를 다 하느냐인데 순순히 다 얘기를 하고 당당하더랍니다.

-굉장히 당당했다.

-지금 아까 말씀하신 대로 우리도 정권 야 욕 때문에 한다고 하지만 그 당시 상황으 로 봐서는 불가피했다.

계엄사령이 육군참모총장이면서 계엄사령 관 하는 분이 김재규하고 내통했지 않느 냐?

-그런 주장들을 펼쳤군요.

-시해범하고 그러니까 그분을 잡으려면 그 방법밖에 없지 않느냐, 이렇게 나오는 여 러 가지가 있습니다마는 어찌했건간에, 어 쨌든간에 이것은 결국 우리 헌정을 파괴 하는 행위가 되고 따라서 군사형법에 나 오는 군사반란이 되는 것이다.

-원장님, 어떻습니까?

군사반란을 우리가 뒤늦게라도 법정에 세 워가지고 처리한 것.

이거 평가를 어떻게 해야 됩니까?

-당연하죠.

당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라 고 했던 사람이 누구다라고 지금 현재 국 회의원하고 있는 분으로 보도는 됐는데 사 실인가는 모르겠는데요.

돼 있는데 성공한 쿠데타라는 말은 쿠데 타를 당 집권했다는 말이 되겠는데 이게 바 람직했느냐 안 했느냐는 우리가 사후에 평 가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 점에 대해서는 올바르게 진단해서 처 벌했다고 본다면 문제가 있는 것을 평가 하는 거고요.

사회과학적 의미에서 성공한 쿠데타는 사 실 혁명이 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정치혁명이 되는 것인데 그 점에서는 권 력은 잡았지만 국민들의 역사 속에서는 실 패했던 걸로 평가하는 게 맞다라고 봐지 네요.

그 점에서는 그 당시 조금 발언 하나가 과 장 보도가 됐나 모르겠는데요.

그래서 이후에 5. 18 특별법이 마련돼 가지 고 아시다시피 제대로 평가한 거죠.

그런데 이후에 아직도 주장을 하고 있으 면서 심지어는 군인연금도 다시 해 달라 고 서너 번에 걸쳐가지고 지금 뭐 소를 제 기하기도 하고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저희들이 정리할 시간이 가까워졌는데 1 2. 12사태 근현대사에 우리 현대사의 아픈 사건 중의 하나인데 여기서 우리가 받아 야 될 교훈 간단히 정리를 하고 넘어갔 으면 좋겠습니다.

한말씀씩만 간단히 듣겠습니다.

-이건 제가 처음에도 말씀 올렸지만 절대 쿠데타라는 것은 다시 이 땅에서 무슨 명 분이 어떻든지간에 그런 건 있어서는 안 된다.

-헌정질서를 파괴한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제가 참 검사 생활 그래도 30년 이 상을 했습니다마는 제 손에 의해 가지고 1 2. 12 군사반란 사건이 역사의 법적으로 옳 게 평가받았다는 거 그게 있고.

그전에 또 어떻든간에 정의사회를 그렇게 부르짖던 분들이. . .

-아까 말씀하셨던. . .

-어떻게 수천억씩을 또 뇌물수수를 해서 전직 대통령 얘기지만 대통령 재임 때거 든요.

그런 대통령이 다시는 나와서는 안 되겠 다.

그런 것도 있고요.

-국가를 지키라고 주어진 폭력을 국민에 게 행사했던 것은 다시는 돼서는 안 되겠 고요.

지난번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그런 얘기 가 나왔습니다마는 이 시점에서 과연 국 가라는 것이 우리에게 우리 국민에게 무 엇인가 다시 한 번 생각을 해 봤으면 하 는 생각이 듭니다.

-알겠습니다.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35년 전에 발생했던 12. 12사태.

우리 현대사에서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비 극이었다는 것이 지금 역사가들의 평가입 니다.

물론 본인들로서는 나름의 명분이 있었겠 지만 신부 군부 세력에 대한 역사의 평가 는 하극상에 의한 군사 쿠데타였습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평범 한 진리를 되새겨볼 때가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황상무의 시사진단 다음 주에 다시 찾아뵙 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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