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사장님 나빠요” 개그 아닌 다큐인 이유

입력 2014.12.12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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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장님 나빠요!"…'코미디' 아닌 '비극'

"사장님 나빠요~” 한 개그맨의 몇 해 전 유행어다. 익살스런 연기에 웃으며 들었던 이 말. 2014년, 나는 이 말에 더 이상 웃을 수 없다.

#1. 갑작스런 한파에 매서운 칼바람이 불던 날, 우즈베키스탄 출신 잠시드 씨를 만난 건 얼마 전부터 그가 더부살이를 시작한 이주민 노동센터였다. 그는 취재진을 보자마자 종이가방에서 100장 쯤 되는 서류를 꺼내 보였다. 회사가 만든 출퇴근 기록부, 산업재해 진료서, 해고 통지서...... 한국생활 4년 차, 아직 서툰 한국말은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는 내내 점점 알아 듣기 어려워졌다. 흥분이었고, 분노였다.



우리나라 법정근무시간은 주 40시간이다. 그는 한 달 동안 430시간을, 391시간을, 336시간을 일했다. 퇴근기록이 공란으로 비어있는 날, 51시간을 일한 날도 있었다. "밤에도 일했어요. 낮에도 일했어요. 계속 한국 사람들은 24시간 일 안했어요.” 그리고 지난 5월, 작업용 칼에 손가락을 다쳤다. 산업재해 14등급. 수술을 받았지만 손가락이 구부러지지 않게 됐다. 수술 일주일 뒤부터 다시 일을 시작했다고 했다. 두 번의 작업장 변경을 거쳤고, 후유증을 앓고 있다고 했다. 11월 1일, 잠시드 씨는 해고됐다. 근무태만과 무단결근 13일이 해고 이유였다.

오롯이 가족을 위해 낮선 타국생활을 시작했다는 잠시드 씨는 지금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그는 내년 5월, 다시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가야 한다.



#2. 사람들이 잔뜩 움추린 채 집으로 향하던 늦은 저녁, 두꺼운 얼음이 낀 계단을 조심스레 올라 만난 쪽방에는 까만 피부의 외국인들이 모여 있었다. 외국인이 직접 운영하는 이주 노동자 쉼터였다. 오늘 새로 왔다는 네팔 출신의 두 청년과 이주노동자 인권센터 소장의 상담이 진행되고 있었다. 석 달 전 한국에 들어와 처음으로 시작한 일은 농사였다. 경기도의 한 미나리 농장이었다. 차가운 물속에 들어가 작업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했다. 거처는 비닐하우스 안 컨테이너였다. 한 달 두 번 쉬고 받은 월급은 122만 원, 감기에 걸려 하루 쉬겠다고 했단다. 직후 농장 주인이 내민 '작업 거부 확인서'에 서명을 했고, 며칠 뒤 해고됐다. 그들은 한글을 모른다.



"이제 일 안해도 된다고 했어요. 해고된 것인지 몰랐어요. 그날 저녁이 안 나왔고, 다음날에는 방에 전기가 안 들어 왔어요." 악몽일 거라는 답을 기대하며 그들에게 한국에 대한 인상을 물었다. 그들은 한국이 아직 좋다고 했다.

■ 사장님이 나쁜 '진짜 이유'

믿기 힘든 증언들었다. 자유와 평등, 복지를 강조하는 2014년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 잠시드 씨가 일했던 공장을 찾았다.



#1. 취재진이 만난 공장 관리자들은 잠시드 씨의 해고에 대해 분명하고, 단호했다. 근무태만을 지적했고, 무단 결근을 지적했다. 외국인 근로자들을 위한 사측의 배려도 들려줬다. 그리고 서운함을 토로했다. "일주일 간 입원까지 시켜줬어요. 우리나라 사람 같으면 붕대 감고 와서 일 할 정도였는데, 외국인이기 때문에 배려했습니다." 잠시드 씨의 말과 정반대의 해명들이 이어졌다. 한 외국인 노동자의 폭로는 시간 지난 '진실 게임'으로 바뀌는 듯 했다.

이 진실게임의 실체는 무엇일까? 답은 병원에서 찾을 수 있었다. 잠시드 씨가 부상을 입고 응급 후송된 병원, 담당 의사는 잠시드 씨의 부상에 대해 '위험한 상태'였다고 기억했다. "당시 손가락을 펴는 힘줄이 끊어져서, 다음날 수술했습니다. 한참 뒤에 다시 왔을 때는 여전히 동통이 심각한 상황이었어요."

그날 밤, 400시간의 살인적인 노동의 원인이 잠시드 본인의 선택이었다는 회사 측의 해명에도 '명백한 불법'임이 확인됐다.

#2.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고용주들의 기막힌 배려(?)는 '시골 농장'에서도 다르지 않다.

이유도 모르고 해고된 네팔 청년 인드라, 현재 농장 주인은 이들이 떠난 직후, 이 네팔 청년들이 농장에서 도망쳤다고 당국에 신고한 상태다. 다행히 인권센터의 신속한 대응으로 불법체류 신세는 면했다. 그러나, 센터가 진행하고 있는 법적대응이 마무리될 때 까지 그들은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다고 했다.



지난 2004년, 외국인 고용허가제가 시행됐다. 불법체류를 막기 위해 강화된 제도다. 그리고 10년, 이 제도는 잠시드 씨나 인드라 씨가 만났던 '나쁜 사장님'을 만들어 냈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직장 변동의 전권 대부분이 고용주에게 있다. 내국인 노동자와 사업장 보호를 위해 고용주 동의 없이 이주 노동자가 다른 사업장으로 옮겨가면 비자 갱신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부당 행위가 있더라도 이주 근로자들이 따를 수밖에 없는 구조다.



불법을 알고 있지만 단속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던 기관 공무원의 인터뷰는 그래서 충격적이다. "80~90% 되는 이주노동자들이 주 40시간 넘게 다 일하고 있는데, 당장 다 조치를 해야하나요? 칼 자루가 상대방(고용주)에게 있습니다."

■ 이 땅에, '코리안 드림'은 있는가?

전문가들은 고용허가제 폐해를 개선하기 위해 '노동허가제'로 제도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1960년 대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에서 독일로 떠났던 광부와 간호사를 말하곤 한다.

응당 거창한 제도 개선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 전에 조용히 귀 기울여야 들어야 할 말이 있다. "누군가의 아버지고, 소중한 가족임을 기억해주세요."

마지막으로 잠시드 씨가 눈물을 흘리며 읽어주었던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의 일부로 글을 맺는다.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에게"

이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이런 저런 많은 어려움을 겪다 보니 고국의 소중함을 세삼 느끼게 됩니다.
부디 다시 만날 날까지 건강하세요."

☞ 바로가기 <뉴스광장> 400시간 중노동에 월급은 ‘쥐꼬리’…이주 노동자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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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사장님 나빠요” 개그 아닌 다큐인 이유
    • 입력 2014-12-12 17:13:47
    취재후·사건후
■ "사장님 나빠요!"…'코미디' 아닌 '비극' "사장님 나빠요~” 한 개그맨의 몇 해 전 유행어다. 익살스런 연기에 웃으며 들었던 이 말. 2014년, 나는 이 말에 더 이상 웃을 수 없다. #1. 갑작스런 한파에 매서운 칼바람이 불던 날, 우즈베키스탄 출신 잠시드 씨를 만난 건 얼마 전부터 그가 더부살이를 시작한 이주민 노동센터였다. 그는 취재진을 보자마자 종이가방에서 100장 쯤 되는 서류를 꺼내 보였다. 회사가 만든 출퇴근 기록부, 산업재해 진료서, 해고 통지서...... 한국생활 4년 차, 아직 서툰 한국말은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는 내내 점점 알아 듣기 어려워졌다. 흥분이었고, 분노였다. 우리나라 법정근무시간은 주 40시간이다. 그는 한 달 동안 430시간을, 391시간을, 336시간을 일했다. 퇴근기록이 공란으로 비어있는 날, 51시간을 일한 날도 있었다. "밤에도 일했어요. 낮에도 일했어요. 계속 한국 사람들은 24시간 일 안했어요.” 그리고 지난 5월, 작업용 칼에 손가락을 다쳤다. 산업재해 14등급. 수술을 받았지만 손가락이 구부러지지 않게 됐다. 수술 일주일 뒤부터 다시 일을 시작했다고 했다. 두 번의 작업장 변경을 거쳤고, 후유증을 앓고 있다고 했다. 11월 1일, 잠시드 씨는 해고됐다. 근무태만과 무단결근 13일이 해고 이유였다. 오롯이 가족을 위해 낮선 타국생활을 시작했다는 잠시드 씨는 지금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그는 내년 5월, 다시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가야 한다. #2. 사람들이 잔뜩 움추린 채 집으로 향하던 늦은 저녁, 두꺼운 얼음이 낀 계단을 조심스레 올라 만난 쪽방에는 까만 피부의 외국인들이 모여 있었다. 외국인이 직접 운영하는 이주 노동자 쉼터였다. 오늘 새로 왔다는 네팔 출신의 두 청년과 이주노동자 인권센터 소장의 상담이 진행되고 있었다. 석 달 전 한국에 들어와 처음으로 시작한 일은 농사였다. 경기도의 한 미나리 농장이었다. 차가운 물속에 들어가 작업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했다. 거처는 비닐하우스 안 컨테이너였다. 한 달 두 번 쉬고 받은 월급은 122만 원, 감기에 걸려 하루 쉬겠다고 했단다. 직후 농장 주인이 내민 '작업 거부 확인서'에 서명을 했고, 며칠 뒤 해고됐다. 그들은 한글을 모른다. "이제 일 안해도 된다고 했어요. 해고된 것인지 몰랐어요. 그날 저녁이 안 나왔고, 다음날에는 방에 전기가 안 들어 왔어요." 악몽일 거라는 답을 기대하며 그들에게 한국에 대한 인상을 물었다. 그들은 한국이 아직 좋다고 했다. ■ 사장님이 나쁜 '진짜 이유' 믿기 힘든 증언들었다. 자유와 평등, 복지를 강조하는 2014년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 잠시드 씨가 일했던 공장을 찾았다. #1. 취재진이 만난 공장 관리자들은 잠시드 씨의 해고에 대해 분명하고, 단호했다. 근무태만을 지적했고, 무단 결근을 지적했다. 외국인 근로자들을 위한 사측의 배려도 들려줬다. 그리고 서운함을 토로했다. "일주일 간 입원까지 시켜줬어요. 우리나라 사람 같으면 붕대 감고 와서 일 할 정도였는데, 외국인이기 때문에 배려했습니다." 잠시드 씨의 말과 정반대의 해명들이 이어졌다. 한 외국인 노동자의 폭로는 시간 지난 '진실 게임'으로 바뀌는 듯 했다. 이 진실게임의 실체는 무엇일까? 답은 병원에서 찾을 수 있었다. 잠시드 씨가 부상을 입고 응급 후송된 병원, 담당 의사는 잠시드 씨의 부상에 대해 '위험한 상태'였다고 기억했다. "당시 손가락을 펴는 힘줄이 끊어져서, 다음날 수술했습니다. 한참 뒤에 다시 왔을 때는 여전히 동통이 심각한 상황이었어요." 그날 밤, 400시간의 살인적인 노동의 원인이 잠시드 본인의 선택이었다는 회사 측의 해명에도 '명백한 불법'임이 확인됐다. #2.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고용주들의 기막힌 배려(?)는 '시골 농장'에서도 다르지 않다. 이유도 모르고 해고된 네팔 청년 인드라, 현재 농장 주인은 이들이 떠난 직후, 이 네팔 청년들이 농장에서 도망쳤다고 당국에 신고한 상태다. 다행히 인권센터의 신속한 대응으로 불법체류 신세는 면했다. 그러나, 센터가 진행하고 있는 법적대응이 마무리될 때 까지 그들은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다고 했다. 지난 2004년, 외국인 고용허가제가 시행됐다. 불법체류를 막기 위해 강화된 제도다. 그리고 10년, 이 제도는 잠시드 씨나 인드라 씨가 만났던 '나쁜 사장님'을 만들어 냈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직장 변동의 전권 대부분이 고용주에게 있다. 내국인 노동자와 사업장 보호를 위해 고용주 동의 없이 이주 노동자가 다른 사업장으로 옮겨가면 비자 갱신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부당 행위가 있더라도 이주 근로자들이 따를 수밖에 없는 구조다. 불법을 알고 있지만 단속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던 기관 공무원의 인터뷰는 그래서 충격적이다. "80~90% 되는 이주노동자들이 주 40시간 넘게 다 일하고 있는데, 당장 다 조치를 해야하나요? 칼 자루가 상대방(고용주)에게 있습니다." ■ 이 땅에, '코리안 드림'은 있는가? 전문가들은 고용허가제 폐해를 개선하기 위해 '노동허가제'로 제도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1960년 대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에서 독일로 떠났던 광부와 간호사를 말하곤 한다. 응당 거창한 제도 개선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 전에 조용히 귀 기울여야 들어야 할 말이 있다. "누군가의 아버지고, 소중한 가족임을 기억해주세요." 마지막으로 잠시드 씨가 눈물을 흘리며 읽어주었던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의 일부로 글을 맺는다.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에게" 이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이런 저런 많은 어려움을 겪다 보니 고국의 소중함을 세삼 느끼게 됩니다. 부디 다시 만날 날까지 건강하세요." ☞ 바로가기 <뉴스광장> 400시간 중노동에 월급은 ‘쥐꼬리’…이주 노동자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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