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100억 헛돈 쓴 ‘저탄소 마을’

입력 2015.01.13 (11:18) 수정 2015.01.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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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겨울인데 보일러가 고장이라고요?

정말 보일러가 멈춰 있었습니다. 이 엄동설한에 말입니다. 마을 보일러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다름 아닌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보일러 부품들이었습니다. 멈춰선 보일러에는 온기 조차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한 마을 전체에 난방을 해야 하는 경북 봉화군의 중앙난방식 보일러는 국내에서 보기 드문 대용량 펠릿 전용 보일러입니다. 나무를 잘게 잘라 톱밥으로 만든 뒤 압축시킨 '펠릿'은 수십 년 전부터 유럽에서 친환경 연료로 각광 받고 있습니다. 이 마을은 탄소발생량을 줄이는 친환경 마을을 조성하자는 산림청 공모사업에 선정돼 지난 2013년부터 펠릿 보일러 시험 가동에 들어갔습니다. 이후 마을의 106 가구는 기존의 연탄보일러 대신 각 가정마다 펠릿 보일러 열 분배기를 교체 설치했습니다.



하지만 설치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보일러가 고장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크고 작은 소모품은 물론이고 보일러 주요 부품인 버너까지 고장이 났습니다. ‘연료비가 싸니 설치하면 좋다’는 말만 믿고 연탄 같이 저렴한 연료를 사용하던 주민들까지 보일러를 설치했는데 말입니다. 국내 대용량 펠릿 보일러의 기술력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업을 추진하다 보니 빚어진 일입니다. 현재는 잦은 고장을 견디다 못한 마을의 절반이 펠릿 보일러 대신 기존의 연탄과 경유 보일러를 쓰겠다며 교체한 상황입니다.

취재 당시 만난 봉화군 주민들은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손자가 놀러왔다 얼어 죽는다꼬 아주 난리를 쳤다‘는 할머니부터 ’노인네들 자다 얼어 죽으라꼬 뭐하는 짓이냐‘며 고함치는 어르신도 있었습니다. 섣부른 행정에 피해를 보는 건 결국 주민들이었습니다.

■ 2호 마을, 이번엔 장비가 없다?

1호 마을의 어려움을 지켜 본 2호 마을은 국산 대신 외국산 보일러를 선택했습니다. 덕분에 잦은 보일러 고장 문제만큼은 면할 수 있었습니다. 또 보일러의 종류도 펠릿과 함께 나무를 잘게 부숴 연료용으로 만든 이른바 ‘우드칩’까지 쓸 수 있는 겸용 보일러를 설치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복병이 있었으니 바로 우드칩 생산 기계였습니다. 기껏 우드칩 겸용 보일러를 들여놨더니 이번에는 우드칩을 만들 수 있는 기계가 없는 겁니다. 기존 화목 보일러처럼 장작 등의 큰 목재는 사용할 수 없기에 우드칩 기계는 보일러가 설치되는 곳이라면 반드시 한 쌍처럼 같이 들여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펠릿과 우드칩 겸용 보일러를 둘 이유가 없겠지요.



기자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잠시 기계를 빌려와 우드칩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기계가 오기 전까지는 연료로 만들기 위해 들여온 6백 톤이 넘는 폐목을 잔뜩 쌓아만 놓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마을은 1년 사이 톤 당 5만원이나 오른 펠릿을 울며 겨자 먹기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70 가구가 넘는 마을이 보일러를 돌릴 정도의 우드칩을 생산하려면 적어도 1억 원 이상의 기계를 사야 합니다. 그래야 연료 걱정 없이 따뜻한 겨울을 날 수 있습니다. 이번 겨울은 어찌 넘겼지만 다음 겨울에는 다시 기계를 임대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향후 계획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마을 관계자는 멋쩍게 웃었습니다.

■ "애초에 그냥 사다 쓰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왜 우드칩 생산 기계를 애초부터 들여 놓지 않았냐는 저의 물음에 돌아온 화천군 관계자의 말입니다. 우드칩 없으면 펠릿을 사서 때면 된다는 얘기겠지요. 당연합니다. 펠릿과 우드칩 겸용 보일러니 이가 없으면 잇몸을 쓰면 됩니다. 하지만 시골 마을에서 그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농촌지역에는 홀로 사는 노인 가구가 많습니다. 연탄보일러를 때거나 경유 보일러를 때더라도 연료비가 적게 듭니다. 하지만 펠릿 보일러는 경유 보일러보다는 싸지만 연탄보일러보다는 돈이 더 듭니다. 홀로 사는 노인들이 펠릿 보일러를 사용하면 당연히 연료비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탄소발생량을 줄인다는 취지는 좋지만 펠릿보일러는 농촌 지역 노인 가구에게 그리 적합한 연료는 아닙니다. 사업 도입 당시부터 고려됐어야 할 사항들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잦은 보일러 고장, 이를 면하면 연료비 걱정. 제가 현장에서 본 저탄소 순환마을 1, 2호는 성공적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습니다.



■ 저탄소 녹색성장, 잘 추진되고 있습니까?

저탄소 에너지 생산 보급을 위한 ‘폐자원 및 바이오매스 에너지 대책’ 실행 계획. 기자가 처음 취재를 시작하며 열어 본 이 보고서에는 산림청을 비롯한 7개 정부 부처의 저탄소 녹색성장을 위한 계획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건국 60주년을 맞아 저탄소 녹색성장을 국가 비전으로 제시한 이명박 전 대통령의 국정기조에 맞춰 추진한 정책들입니다.

지금 그 많던 정책들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요. 저탄소 순환마을은 본 계획대로라면 2012년까지 10개, 2020년까지 600개 마을을 조성하기로 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추가 추진이 불투명합니다.

봉화군 저탄소 마을에는 나무로 지어진 홍보관이 있습니다. 6억이 넘는 돈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보일러가 돌지 않아 난방도 되지 않는 썰렁한 홍보관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저탄소 녹색성장, 제대로 진행되고 있습니까?

☞ 다시보기 <뉴스9> 100억 쓴 ‘저탄소 마을’…애물단지 전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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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1-13 11:18:12
    • 수정2015-01-13 16:23:18
    취재후·사건후
■ 한 겨울인데 보일러가 고장이라고요?

정말 보일러가 멈춰 있었습니다. 이 엄동설한에 말입니다. 마을 보일러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다름 아닌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보일러 부품들이었습니다. 멈춰선 보일러에는 온기 조차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한 마을 전체에 난방을 해야 하는 경북 봉화군의 중앙난방식 보일러는 국내에서 보기 드문 대용량 펠릿 전용 보일러입니다. 나무를 잘게 잘라 톱밥으로 만든 뒤 압축시킨 '펠릿'은 수십 년 전부터 유럽에서 친환경 연료로 각광 받고 있습니다. 이 마을은 탄소발생량을 줄이는 친환경 마을을 조성하자는 산림청 공모사업에 선정돼 지난 2013년부터 펠릿 보일러 시험 가동에 들어갔습니다. 이후 마을의 106 가구는 기존의 연탄보일러 대신 각 가정마다 펠릿 보일러 열 분배기를 교체 설치했습니다.



하지만 설치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보일러가 고장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크고 작은 소모품은 물론이고 보일러 주요 부품인 버너까지 고장이 났습니다. ‘연료비가 싸니 설치하면 좋다’는 말만 믿고 연탄 같이 저렴한 연료를 사용하던 주민들까지 보일러를 설치했는데 말입니다. 국내 대용량 펠릿 보일러의 기술력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업을 추진하다 보니 빚어진 일입니다. 현재는 잦은 고장을 견디다 못한 마을의 절반이 펠릿 보일러 대신 기존의 연탄과 경유 보일러를 쓰겠다며 교체한 상황입니다.

취재 당시 만난 봉화군 주민들은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손자가 놀러왔다 얼어 죽는다꼬 아주 난리를 쳤다‘는 할머니부터 ’노인네들 자다 얼어 죽으라꼬 뭐하는 짓이냐‘며 고함치는 어르신도 있었습니다. 섣부른 행정에 피해를 보는 건 결국 주민들이었습니다.

■ 2호 마을, 이번엔 장비가 없다?

1호 마을의 어려움을 지켜 본 2호 마을은 국산 대신 외국산 보일러를 선택했습니다. 덕분에 잦은 보일러 고장 문제만큼은 면할 수 있었습니다. 또 보일러의 종류도 펠릿과 함께 나무를 잘게 부숴 연료용으로 만든 이른바 ‘우드칩’까지 쓸 수 있는 겸용 보일러를 설치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복병이 있었으니 바로 우드칩 생산 기계였습니다. 기껏 우드칩 겸용 보일러를 들여놨더니 이번에는 우드칩을 만들 수 있는 기계가 없는 겁니다. 기존 화목 보일러처럼 장작 등의 큰 목재는 사용할 수 없기에 우드칩 기계는 보일러가 설치되는 곳이라면 반드시 한 쌍처럼 같이 들여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펠릿과 우드칩 겸용 보일러를 둘 이유가 없겠지요.



기자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잠시 기계를 빌려와 우드칩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기계가 오기 전까지는 연료로 만들기 위해 들여온 6백 톤이 넘는 폐목을 잔뜩 쌓아만 놓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마을은 1년 사이 톤 당 5만원이나 오른 펠릿을 울며 겨자 먹기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70 가구가 넘는 마을이 보일러를 돌릴 정도의 우드칩을 생산하려면 적어도 1억 원 이상의 기계를 사야 합니다. 그래야 연료 걱정 없이 따뜻한 겨울을 날 수 있습니다. 이번 겨울은 어찌 넘겼지만 다음 겨울에는 다시 기계를 임대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향후 계획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마을 관계자는 멋쩍게 웃었습니다.

■ "애초에 그냥 사다 쓰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왜 우드칩 생산 기계를 애초부터 들여 놓지 않았냐는 저의 물음에 돌아온 화천군 관계자의 말입니다. 우드칩 없으면 펠릿을 사서 때면 된다는 얘기겠지요. 당연합니다. 펠릿과 우드칩 겸용 보일러니 이가 없으면 잇몸을 쓰면 됩니다. 하지만 시골 마을에서 그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농촌지역에는 홀로 사는 노인 가구가 많습니다. 연탄보일러를 때거나 경유 보일러를 때더라도 연료비가 적게 듭니다. 하지만 펠릿 보일러는 경유 보일러보다는 싸지만 연탄보일러보다는 돈이 더 듭니다. 홀로 사는 노인들이 펠릿 보일러를 사용하면 당연히 연료비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탄소발생량을 줄인다는 취지는 좋지만 펠릿보일러는 농촌 지역 노인 가구에게 그리 적합한 연료는 아닙니다. 사업 도입 당시부터 고려됐어야 할 사항들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잦은 보일러 고장, 이를 면하면 연료비 걱정. 제가 현장에서 본 저탄소 순환마을 1, 2호는 성공적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습니다.



■ 저탄소 녹색성장, 잘 추진되고 있습니까?

저탄소 에너지 생산 보급을 위한 ‘폐자원 및 바이오매스 에너지 대책’ 실행 계획. 기자가 처음 취재를 시작하며 열어 본 이 보고서에는 산림청을 비롯한 7개 정부 부처의 저탄소 녹색성장을 위한 계획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건국 60주년을 맞아 저탄소 녹색성장을 국가 비전으로 제시한 이명박 전 대통령의 국정기조에 맞춰 추진한 정책들입니다.

지금 그 많던 정책들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요. 저탄소 순환마을은 본 계획대로라면 2012년까지 10개, 2020년까지 600개 마을을 조성하기로 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추가 추진이 불투명합니다.

봉화군 저탄소 마을에는 나무로 지어진 홍보관이 있습니다. 6억이 넘는 돈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보일러가 돌지 않아 난방도 되지 않는 썰렁한 홍보관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저탄소 녹색성장, 제대로 진행되고 있습니까?

☞ 다시보기 <뉴스9> 100억 쓴 ‘저탄소 마을’…애물단지 전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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