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위에 저 소나무’도 위험하다

입력 2015.01.25 (11:10) 수정 2015.01.25 (11:11)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5백 년 전통을 이어온 경북 경주의 양동마을. 뒷산을 오르자 여기저기 소나무를 잘라낸 뒤 비닐을 덮은 '훈증 더미'가 눈에 띄었다. 산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갔다. 잎이 붉게 변한 채로 말라 죽은 소나무가 있었다. 벌채를 기다리고 있는 듯 줄기엔 하얀 페인트가 표시돼 있었다.

양동마을은 마을 전체가 국가지정문화재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이다. 이런 양동마을에 재선충이 들이닥친 건 2013년이다. 그해 소나무 220여 그루가 고사했고, 지난해에도 100여 그루에서 재선충이 추가 발생했다.

지난해 11월 문화재청과 산림청, 경주시는 긴급 회의를 열고 대책 마련을 논의했다. 우선 긴급방제비로 1억 2천만 원을 교부하고, 올해도 19억 원을 지급하기로 했다.

☞바로가기 [미리보기] 취재파일K : “한민족 상징 소나무 멸종” (1월25일 방송)

‘세계문화유산’ 양동마을도 소나무 재선충 피해

방제가 제대로 이뤄졌는지 살펴봤다. 서재철 녹색연합 전문위원이 동행했다. 훈증 더미 주변에서 쓰러진 소나무가 발견됐다. 지름 4~5센티미터 정도의 가지도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작업이 원칙적으로 이뤄졌다면 고사목은 완전히 제거돼야 한다.

쓰러진 소나무와 멀지 않은 곳에선 잘린 채 밑동만 남은 소나무가 여럿 있었다. 고사한 소나무를 베어낸 흔적이다. 밑동엔 껍질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역시 원칙대로라면 껍질을 모두 벗겨내야 한다.

"소나무 재선충 방제가 여전히 부실하다는 걸 보여주는 현장입니다. 99%를 방제했더라도 1%가 방치되면 소나무 재선충은 잡을 수 없습니다." 서 전문위원이 목소리를 높였다. "세계문화유산 지역에서조차 재선충에 대한 방제가 이렇게 허술하다면, 다른 지역은 말할 것도 없는 거죠."

허술한 방제…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소나무 재선충은 길이 1밀리미터 정도의 작은 선충이다. 알에서 성충이 되는데 3일밖에 안 걸릴 정도로 번식 속도가 빠르다. 재선충이 소나무에 들어가면 보통 4~5개월 이내에 말라 죽는다. 재선충이 어떻게 소나무를 죽이는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재선충이 소나무 세포를 파괴하면서 그 영향으로 수분 공급을 막아 고사에 이르게 한다는 게 가장 유력한 학설이다.

재선충은 스스로 숙주인 소나무를 벗어날 수 없다. 대신 솔수염하늘소나 북방수염하늘소와 같은 매개충의 도움을 받아 다른 소나무로 이동한다.

솔수염하늘소는 고사한 소나무에만 알을 낳는다. 알을 낳은 나무에 재선충이 있다면 재선충은 솔수염하늘소 애벌레에 달라붙는다. 솔수염하늘소는 5월에서 8월 사이 번데기에서 성충으로 우화해 소나무 잎을 갉아 먹는데, 이때 재선충이 다른 소나무로 옮겨지게 된다.

재선충 500마리 정도면 소나무 한 그루를 고사시킬 수 있다. 보통 솔수염하늘소 한 마리에 재선충 20만 마리가 달라붙는다. 산술적으로만 따지면 솔수염하늘소 한 마리가 소나무 400그루를 죽일 수 있는 셈이다. 재선충이 침입한 소나무는 해를 넘기지 못하고 말라 죽는다. 솔수염하늘소는 이렇게 고사한 나무에 다시 알을 낳는다.

재선충은 솔수염하늘소로부터 새로운 숙주를 얻고, 솔수염하늘소는 재선충으로부터 알을 낳을 수 있는 고사목을 얻는다. 완벽한 공생이다.

소나무 4~5개월 만에 고사…손쓸 틈 없어

재선충은 '소나무 에이즈'로 불린다. 아직 재선충 자체를 박멸할 방법은 없다. 하지만 솔수염하늘소와 같은 매개충을 제거할 수는 있다. 성충이 되기 전, 고사한 소나무에서 겨울을 나는 애벌레를 퇴치한다면, 자연스럽게 재선충의 확산도 막을 수 있다.

죽은 소나무를 잘라내 한곳에 모아 약제를 넣은 뒤 비닐을 밀봉하는 '훈증'이 가장 일반적인 방제 방법이다. 하지만 산림 경관을 해치고, 산불 위험을 키울 수 있어 최근엔 애벌레가 살 수 없도록 잘게 파쇄하거나 아예 소각하는 방법이 주로 쓰인다. 소나무를 2.5센티미터 이하로 파쇄하면 애벌레는 죽는다.

훈증이든, 파쇄든, 소각이든, 중요한 것은 고사한 소나무를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겨진 고사목이 있다면, 그리고 그 고사목에 매개충 애벌레가 잠들어 있다면 이듬해 재선충은 다시 퍼질 것이기 때문이다. 양동마을의 방제 상황에 전문위원이 흥분했던 이유다.

매개충 제거가 유일한 방제 방법

우리나라에선 1988년 부산에서 처음 재선충이 발견됐다. 2005년부터 급격히 피해가 커졌고, 2010년엔 중부지방으로 번졌다. 이후엔 파죽지세다.

2011년 46개 지자체였던 피해 지역이, 2012년 50개 시군, 지난해엔 64개 시군으로 확산했다. 그리고 2015년 1월 현재 전국 74개 지자체, 사실상 전국으로 퍼졌다.

지난 27년 동안 소나무 860만 그루가 고사했다. 문제는 앞으로다. 전문가들은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입을 모은다. 서재철 녹색연합 전문위원은 2015년을 '골든타임'으로 지목했다.

"앞으로 2~3년 동안 재선충을 잡아내지 못한다면 우리 산림의 절반 이상으로 확대돼 더는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올해 방제가 어떻게 이뤄지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2015년 재선충 방제 골든타임”

일본은 '골든타임'을 놓친 경우다. 1905년 재선충 피해가 처음 알려진 일본은 70년 동안이나 소나무 고사 원인을 파악하지 못했다. 1980년대 재선충은 급격히 퍼져나갔고, 현재는 사실상 소나무를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본은 문화재나 해안 방풍림, 공원 등을 제외하고는 방제에 손을 놓은 상황이다.

하지만 일본의 산림에서 소나무가 차지하는 비중은 5% 내외였다. 우리는 30%에 이른다. 소나무가 사라졌을 때 입는 피해는 우리가 훨씬 치명적이다.

지난해 말 우리나라의 재선충 피해 지역을 둘러본 후타이 가즈요시 교토대학 명예교수 역시 현 시점이 매우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한국은 2015년에 재선충을 잡지 못하면 일본과 같이 실패할 것입니다."

답은 분명하다. 우리는 재선충이 어떻게 이동하는지, 매개충이 언제 활동하는지 알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방제의 원칙을 세웠지만, 안타깝게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의 방제가 반복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제 재선충 피해는 인재다.

오늘 밤 KBS 1TV에서 방영되는 <취재파일K>에서는 재선충 방제의 문제점과 과제를 집중적으로 보도한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남산 위에 저 소나무’도 위험하다
    • 입력 2015-01-25 11:10:53
    • 수정2015-01-25 11:11:39
    사회
5백 년 전통을 이어온 경북 경주의 양동마을. 뒷산을 오르자 여기저기 소나무를 잘라낸 뒤 비닐을 덮은 '훈증 더미'가 눈에 띄었다. 산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갔다. 잎이 붉게 변한 채로 말라 죽은 소나무가 있었다. 벌채를 기다리고 있는 듯 줄기엔 하얀 페인트가 표시돼 있었다.

양동마을은 마을 전체가 국가지정문화재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이다. 이런 양동마을에 재선충이 들이닥친 건 2013년이다. 그해 소나무 220여 그루가 고사했고, 지난해에도 100여 그루에서 재선충이 추가 발생했다.

지난해 11월 문화재청과 산림청, 경주시는 긴급 회의를 열고 대책 마련을 논의했다. 우선 긴급방제비로 1억 2천만 원을 교부하고, 올해도 19억 원을 지급하기로 했다.

☞바로가기 [미리보기] 취재파일K : “한민족 상징 소나무 멸종” (1월25일 방송)

‘세계문화유산’ 양동마을도 소나무 재선충 피해

방제가 제대로 이뤄졌는지 살펴봤다. 서재철 녹색연합 전문위원이 동행했다. 훈증 더미 주변에서 쓰러진 소나무가 발견됐다. 지름 4~5센티미터 정도의 가지도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작업이 원칙적으로 이뤄졌다면 고사목은 완전히 제거돼야 한다.

쓰러진 소나무와 멀지 않은 곳에선 잘린 채 밑동만 남은 소나무가 여럿 있었다. 고사한 소나무를 베어낸 흔적이다. 밑동엔 껍질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역시 원칙대로라면 껍질을 모두 벗겨내야 한다.

"소나무 재선충 방제가 여전히 부실하다는 걸 보여주는 현장입니다. 99%를 방제했더라도 1%가 방치되면 소나무 재선충은 잡을 수 없습니다." 서 전문위원이 목소리를 높였다. "세계문화유산 지역에서조차 재선충에 대한 방제가 이렇게 허술하다면, 다른 지역은 말할 것도 없는 거죠."

허술한 방제…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소나무 재선충은 길이 1밀리미터 정도의 작은 선충이다. 알에서 성충이 되는데 3일밖에 안 걸릴 정도로 번식 속도가 빠르다. 재선충이 소나무에 들어가면 보통 4~5개월 이내에 말라 죽는다. 재선충이 어떻게 소나무를 죽이는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재선충이 소나무 세포를 파괴하면서 그 영향으로 수분 공급을 막아 고사에 이르게 한다는 게 가장 유력한 학설이다.

재선충은 스스로 숙주인 소나무를 벗어날 수 없다. 대신 솔수염하늘소나 북방수염하늘소와 같은 매개충의 도움을 받아 다른 소나무로 이동한다.

솔수염하늘소는 고사한 소나무에만 알을 낳는다. 알을 낳은 나무에 재선충이 있다면 재선충은 솔수염하늘소 애벌레에 달라붙는다. 솔수염하늘소는 5월에서 8월 사이 번데기에서 성충으로 우화해 소나무 잎을 갉아 먹는데, 이때 재선충이 다른 소나무로 옮겨지게 된다.

재선충 500마리 정도면 소나무 한 그루를 고사시킬 수 있다. 보통 솔수염하늘소 한 마리에 재선충 20만 마리가 달라붙는다. 산술적으로만 따지면 솔수염하늘소 한 마리가 소나무 400그루를 죽일 수 있는 셈이다. 재선충이 침입한 소나무는 해를 넘기지 못하고 말라 죽는다. 솔수염하늘소는 이렇게 고사한 나무에 다시 알을 낳는다.

재선충은 솔수염하늘소로부터 새로운 숙주를 얻고, 솔수염하늘소는 재선충으로부터 알을 낳을 수 있는 고사목을 얻는다. 완벽한 공생이다.

소나무 4~5개월 만에 고사…손쓸 틈 없어

재선충은 '소나무 에이즈'로 불린다. 아직 재선충 자체를 박멸할 방법은 없다. 하지만 솔수염하늘소와 같은 매개충을 제거할 수는 있다. 성충이 되기 전, 고사한 소나무에서 겨울을 나는 애벌레를 퇴치한다면, 자연스럽게 재선충의 확산도 막을 수 있다.

죽은 소나무를 잘라내 한곳에 모아 약제를 넣은 뒤 비닐을 밀봉하는 '훈증'이 가장 일반적인 방제 방법이다. 하지만 산림 경관을 해치고, 산불 위험을 키울 수 있어 최근엔 애벌레가 살 수 없도록 잘게 파쇄하거나 아예 소각하는 방법이 주로 쓰인다. 소나무를 2.5센티미터 이하로 파쇄하면 애벌레는 죽는다.

훈증이든, 파쇄든, 소각이든, 중요한 것은 고사한 소나무를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겨진 고사목이 있다면, 그리고 그 고사목에 매개충 애벌레가 잠들어 있다면 이듬해 재선충은 다시 퍼질 것이기 때문이다. 양동마을의 방제 상황에 전문위원이 흥분했던 이유다.

매개충 제거가 유일한 방제 방법

우리나라에선 1988년 부산에서 처음 재선충이 발견됐다. 2005년부터 급격히 피해가 커졌고, 2010년엔 중부지방으로 번졌다. 이후엔 파죽지세다.

2011년 46개 지자체였던 피해 지역이, 2012년 50개 시군, 지난해엔 64개 시군으로 확산했다. 그리고 2015년 1월 현재 전국 74개 지자체, 사실상 전국으로 퍼졌다.

지난 27년 동안 소나무 860만 그루가 고사했다. 문제는 앞으로다. 전문가들은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입을 모은다. 서재철 녹색연합 전문위원은 2015년을 '골든타임'으로 지목했다.

"앞으로 2~3년 동안 재선충을 잡아내지 못한다면 우리 산림의 절반 이상으로 확대돼 더는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올해 방제가 어떻게 이뤄지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2015년 재선충 방제 골든타임”

일본은 '골든타임'을 놓친 경우다. 1905년 재선충 피해가 처음 알려진 일본은 70년 동안이나 소나무 고사 원인을 파악하지 못했다. 1980년대 재선충은 급격히 퍼져나갔고, 현재는 사실상 소나무를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본은 문화재나 해안 방풍림, 공원 등을 제외하고는 방제에 손을 놓은 상황이다.

하지만 일본의 산림에서 소나무가 차지하는 비중은 5% 내외였다. 우리는 30%에 이른다. 소나무가 사라졌을 때 입는 피해는 우리가 훨씬 치명적이다.

지난해 말 우리나라의 재선충 피해 지역을 둘러본 후타이 가즈요시 교토대학 명예교수 역시 현 시점이 매우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한국은 2015년에 재선충을 잡지 못하면 일본과 같이 실패할 것입니다."

답은 분명하다. 우리는 재선충이 어떻게 이동하는지, 매개충이 언제 활동하는지 알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방제의 원칙을 세웠지만, 안타깝게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의 방제가 반복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제 재선충 피해는 인재다.

오늘 밤 KBS 1TV에서 방영되는 <취재파일K>에서는 재선충 방제의 문제점과 과제를 집중적으로 보도한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