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스타제조기 김창환 “그때만큼 화려한 시절 올까”

입력 2015.01.26 (08:00) 수정 2015.01.26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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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무한도전'의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를 통해 1990년대 가수와 히트곡이 재조명되는 바람이 불었다. 20여 년 전 음악이지만 3040세대엔 추억으로, 1020세대엔 신선함으로 다가가 각종 음원차트 상위권을 뒤흔들었다.

그중 1995년 1월 발표된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은 꼭 20년 만에 음원차트 1위에 올랐고 거리와 카페에 다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 곡을 만든 사람은 1990년대 대표 프로듀서 겸 작곡가인 김창환(52)이다.

과거 한 신문에는 '1990년대는 서태지와아이들과 김창환으로 대변된다'는 평이 나오기도 했다.

1990년대 '라인기획'을 이끈 김창환은 싱어송라이터 신승훈을 데뷔시켜 1~6집을 프로듀싱했고, 김건모를 발굴해 1~3집의 히트곡을 작사·작곡했다. 노이즈, 박미경, 클론도 그의 손에서 스타 대열에 올랐다.

1990년대를 뒤흔든 그의 히트곡은 무수하다.

김건모의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 '핑계' '잘못된 만남', 신승훈의 '날 울리지마' '오랜 이별 뒤에', 노이즈의 '변명' '상상속의 너' '어제와 다른 오늘', 박미경의 '이유 같지 않은 이유' '이브의 경고', 클론의 '쿵따리 샤바라' '도시 탈출' '초련', 엄정화의 '몰라' 등을 작사·작곡했다.

2000년대에도 베이비복스의 '우연', 김태영의 '오랜 방황의 끝' 등의 히트곡을 냈고 홍경민, 채연, 이정을 데뷔시켜 성공하게 했다.

김건모와 신승훈의 앨범 등 그가 프로듀싱해 밀리언셀러가 된 앨범도 여러 장이다. 레게·테크노 등의 장르를 유행시켰고, 클론을 대만에 진출시켜 중국어권 한류의 싹을 틔우기도 했다.

요즘 같은 1990년대 복고 열풍을 이야기할 때 그가 빠질 수 없는 이유다.

시대를 풍미한 김창환을 최근 서초구 방배동 그의 녹음실에서 만났다. '토토가'를 보며 감회가 새로웠을 법하다.

"가족이 있는 미국에 있을 때였는데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 글이 올라오며 난리가 났더라고요. 이런 반향이 일어날 줄은 상상도 못했죠. 당시 청년기를 보낸 3040세대가 그 시대에 대한 그리움이 컸나 봐요. 추억을 다시 건드려준 느낌이었죠."

1990년대는 노래만큼 추억을 준 문화가 없었다. CD를 사려고 음반 매장 앞에 줄을 섰고 가요 프로그램을 보는 게 낙이었다. 수학여행을 갈 때 필수품은 손안에 쏙 들어오는 '가요 책'이었다. 길거리 카세트테이프 노점상(길보드)과 락카페, 클럽에는 가요가 울러퍼졌다.

그는 "팝의 추억이 많은 1980년대와 달리 1990년대는 음반판매량의 대부분이 가요였다"며 "이때부터 가요가 80%, 팝이 20%로 음악 소비의 비중이 바뀌었다. 그래서 다른 시대보다 유난히 가요에 대한 추억이 많다. 모든 추억이 음악에 녹아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 DJ 출신에서 '김창환 사단' 일궈…"내 인생 한 곡은 김건모의 '핑계'"

보성고교 시절 밴드를 한 김창환은 1981년 대학교 1학년 때 디스코텍과 클럽 DJ로 나섰다. 당시 좋아하던 미국의 유명 DJ인 젤리 빈이 마돈나의 '홀리데이'를 프로듀싱했다는 걸 알고 그다음 직업은 음악 프로듀서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독학으로 시작한 그는 1984~85년 데모곡을 레코드사에 돌렸지만 '댄스 뮤직은 장사가 안 된다'고 거절당했다. 꿈을 접으려던 차에 이승환의 '텅빈 마음'이 방송 홍보 없이 다운타운에서부터 히트하는 걸 보고 '댄스를 고집하지 말고 발라드를 해보자'고 마음을 바꿨다.

그는 작곡가 후배들로부터 한 장의 데모 테이프를 받았다. 목소리가 너무 좋았다. 그날로 DJ 일을 펑크내고 대전으로 내려가 만난 사람이 신승훈이었다. 2주 후 신승훈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왔고 신혼 시절 옆방에 같이 살았다.

지인이 새롭게 만든 레코드사 덕윤산업에서 신승훈의 1집을 내기로 하고 바로 녹음에 들어갔다. 1990년 신승훈의 자작곡인 1집의 '미소 속에 비친 그대'는 3개월 만에 1등을 했다.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며 '빵' 터진 것이다.

이즈음 덕윤산업의 사맹석 씨와 라인기획을 설립한 김창환은 첫 가수를 성공시키자 알앤비(R&B), 댄스 등의 음악을 하고 싶었다.

그가 다운타운에서 일할 때부터 알던 박미경이 "오빠가 좋아할 후배가 있는데 스티비 원더 노래를 정말 잘한다"고 데려온 친구가 김건모다.

"오디션을 보러 온 김건모가 제임스 잉그램의 '저스트 원스'(Just Once)를 부르는데 워낙 노래를 잘해 '이 놈이다' 싶었어요. 제가 추구하던 음악을 표현할 수 있겠단 생각에 하루 10시간씩 알앤비 창법과 랩을 연습시켰고 10개월 만에 녹음에 들어갔죠. 김건모는 제 안의 감성을 대변해준 인생 첫손에 꼽히는 가수예요."

1992년 1집 타이틀곡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를 시작으로 2집의 '핑계', 3집의 '잘못된 만남'까지 그가 쓴 곡들은 3연타석 홈런을 쳤다.

그는 "김건모의 인생을 바꾼 노래가 '핑계'"라며 "당시 김건모가 레게풍인 이 곡을 안 부르겠다고 해 억지로 취입시켰는데 크게 히트했다. '잘못된 만남'도 반강제로 녹음시켰다. 두 곡 모두 김건모가 원한 노래는 아니었지만 이 곡들이 지금의 김건모를 만들었다"고 웃었다.

그에게도 '핑계'는 '내 인생의 한 곡'이다.

"'핑계'가 터지자 모든 언론이 절 집중하며 작곡가로 조명했어요. 그때 처음 느꼈죠. '폭발적으로 터진다는 게 이런 거구나'하고요. 세상이 떠들썩하단 느낌을 받았어요. 세상 사람이 좋아하는 노래를 만들 수 있다는 기쁨을 준 노래죠."

라인기획의 명성은 그룹 노이즈가 이어갔다. 김건모의 친구인 홍종구의 미성이 마음에 들어 자신이 데리고 있던 작곡가 천성일에게 "둘이 테크노뮤직을 하는 팀을 해보라"고 권유했다. 춤이 강점인 멤버 둘(한상일, 김학규)을 더해 1993년 랩 댄스곡인 1집 타이틀곡 '너에게 원한 건'을 선보였다. 당시 서태지와아이들의 초기 돌풍을 연상시킨다는 언론 기사가 잇달았다.

이어 박미경이 라인기획으로 옮겨와 1994년 '이유 같지 않은 이유'를 히트시켰고, 1996년 클론이 데뷔해 성공하며 김창환 사단의 빛나는 라인업이 구축됐다.

그는 "강원래와 구준엽은 내가 심사를 했던 다운타운 댄스 경연대회 대상 출신"이라며 "이수만 형이 둘을 '현진영과 와와'로 데뷔시켰는데 이후 준엽이는 '탁이와 준이'란 팀으로, 원래는 라인기획의 안무팀을 맡았다"고 기억했다.

"탁이와준이가 해체되고 준엽이가 찾아왔죠. 안무가로 날리던 원래에게 팀을 제안했는데 보컬이 필요했어요. 박진영이 연습생으로 들어와 둘에게 춤을 배우며 데뷔를 준비했는데 다른 회사로 갔고 고민 끝에 둘이 데뷔한 거죠."

클론은 2집을 낸 이후 1998년 대만 공략에 나섰고 중국어권에서 최초로 한국어 노래로 뜬 원조 한류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당초 클론은 일본에 진출해 머라이어 캐리의 음반보다 많이 팔릴 정도로 반응을 얻었는데 일본에서 한국 가수에 대한 제재가 강해 대만으로 선회한 것이었다"며 "대만과 중국에서 클론이 공연할 때 오프닝 무대에 H.O.T와 베이비복스가 섰다. 중국어권 한류의 원조는 클론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좋은 시절만 있었던 건 아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몇 년 새 안 좋은 일들이 몰려왔다.

라인기획은 1998년 국세청으로부터 강도 높은 세무 조사를 받았고 소속 가수들의 이름까지 거론되며 타격을 받자 결국 공중분해 됐다.

이후 클론만 데리고 기획사 우퍼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한 김창환은 홍경민을 캐스팅해 재기를 노렸다. 그러나 설상가상으로 2000년 클론의 강원래가 오토바이 사고를 당해 하반신 마비 장애를 입었고, '흔들린 우정'으로 인기를 끌던 홍경민에겐 영장이 나왔다.

그는 "어느 날 느닷없이 유명 가수가 다 없어졌다"며 "이때 연습생이 이정과 채연이었다. 그래서 2002년, 2003년 둘이 비슷하게 데뷔했다. 채연은 섹시 여가수로 군인들에게 난리가 났고 이정은 '제2의 김건모로 주목받았다"고 말했다.

◇ "90년대 전성기, 시행착오 있던 2000년대"…EDM 장르에 도전해 새길 개척

그러나 2000년대 들어 MP3 시대가 열리며 음원의 불법 다운로드가 판쳤다. 아이돌 가수 시대가 시작됐고 음악보다 가수의 캐릭터를 파는 산업이 커져갔다.

지나갈 세월이라고 여긴 김창환은 2000년대 중반 이후 곡을 많이 쓰지 않았다. 아이돌 가수로 경쟁해 성공시킬 자신도 없었다.

그는 "언젠가는 불법이 없어질 것이고 아이돌 음악만 팔리는 문화도 일시적일 테니 음악을 사는 시대가 오면 '그때 다시 하면 돼'라고 생각했다.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아이돌은 SM의 특화된 장르라고 여겼다. 1990년대 '핫'하던 사람들에겐 '멘붕'이 온 것"이라고 말했다.

이 흐름이 계속되자 그 역시 아이돌 그룹 VNT(2010)와 엔트레인(2011)을 데뷔시켰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다.

"1990년대 제가 선보인 가수들은 1집부터 성공했는데 아이돌 그룹은 바로 반응이 없자 포기하게 되더군요. 과거에도 제가 10대를 겨냥해 음악을 만든 건 아니어서 그 심리를 몰랐던 거죠. '과거의 나처럼 하면 안되는구나, 시대가 바뀌었구나'란 걸 몸소 깨달았죠."

신승훈을 통해 프로듀서로 데뷔해 올해로 25주년을 맞은 그는 "1990년대가 내 전성기였다"고 돌아봤다.

그는 "그땐 나도 '젊음'이었으니 내가 읽는 트렌드가 시대의 젊은이가 원하는 것이었다"며 "나이가 드니 나와 젊은이의 생각이 다르더라. 그들의 문화 안에 내가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현실이 슬프다"고 솔직하게 인정했다.

이어 1990년대 만큼 화려한 가요 시절은 안 올 것 같다고 했다.

"지금은 아이돌 가수가 차트 1등을 해도 그때처럼 전 국민이 알진 못하잖아요. 그땐 대중의 노래에 대한 소유욕이 강했고 배우보다 가수의 광고료가 훨씬 높을 정도로 음악 콘텐츠가 중심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디지털 시대로 바뀐 지금은 음악 외에 재미있는 게 너무 많아요."

그러나 그는 지금껏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며 길을 개척했듯이 지금은 전 세계적인 트렌드인 '일렉트로닉 댄스 뮤직'(EDM)을 파고 있다.

아직 국내에선 생소한 세계적인 DJ인 케빈 해리스, 아비치 등의 뮤지션을 거론하며 이 장르를 가요에 녹여내는 게 2015~2016년의 목표라고 강조했다.

그는 "난 취미가 직업이 된 사람"이라며 "DJ를 할 때도 행복했고 지금은 EDM에 도전하는 즐거움으로 산다. 가장 두려운 건 젊은 세대가 날 밀어내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음악을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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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0년대 스타제조기 김창환 “그때만큼 화려한 시절 올까”
    • 입력 2015-01-26 08:00:46
    • 수정2015-01-26 08:07:34
    연합뉴스
MBC '무한도전'의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를 통해 1990년대 가수와 히트곡이 재조명되는 바람이 불었다. 20여 년 전 음악이지만 3040세대엔 추억으로, 1020세대엔 신선함으로 다가가 각종 음원차트 상위권을 뒤흔들었다.

그중 1995년 1월 발표된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은 꼭 20년 만에 음원차트 1위에 올랐고 거리와 카페에 다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 곡을 만든 사람은 1990년대 대표 프로듀서 겸 작곡가인 김창환(52)이다.

과거 한 신문에는 '1990년대는 서태지와아이들과 김창환으로 대변된다'는 평이 나오기도 했다.

1990년대 '라인기획'을 이끈 김창환은 싱어송라이터 신승훈을 데뷔시켜 1~6집을 프로듀싱했고, 김건모를 발굴해 1~3집의 히트곡을 작사·작곡했다. 노이즈, 박미경, 클론도 그의 손에서 스타 대열에 올랐다.

1990년대를 뒤흔든 그의 히트곡은 무수하다.

김건모의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 '핑계' '잘못된 만남', 신승훈의 '날 울리지마' '오랜 이별 뒤에', 노이즈의 '변명' '상상속의 너' '어제와 다른 오늘', 박미경의 '이유 같지 않은 이유' '이브의 경고', 클론의 '쿵따리 샤바라' '도시 탈출' '초련', 엄정화의 '몰라' 등을 작사·작곡했다.

2000년대에도 베이비복스의 '우연', 김태영의 '오랜 방황의 끝' 등의 히트곡을 냈고 홍경민, 채연, 이정을 데뷔시켜 성공하게 했다.

김건모와 신승훈의 앨범 등 그가 프로듀싱해 밀리언셀러가 된 앨범도 여러 장이다. 레게·테크노 등의 장르를 유행시켰고, 클론을 대만에 진출시켜 중국어권 한류의 싹을 틔우기도 했다.

요즘 같은 1990년대 복고 열풍을 이야기할 때 그가 빠질 수 없는 이유다.

시대를 풍미한 김창환을 최근 서초구 방배동 그의 녹음실에서 만났다. '토토가'를 보며 감회가 새로웠을 법하다.

"가족이 있는 미국에 있을 때였는데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 글이 올라오며 난리가 났더라고요. 이런 반향이 일어날 줄은 상상도 못했죠. 당시 청년기를 보낸 3040세대가 그 시대에 대한 그리움이 컸나 봐요. 추억을 다시 건드려준 느낌이었죠."

1990년대는 노래만큼 추억을 준 문화가 없었다. CD를 사려고 음반 매장 앞에 줄을 섰고 가요 프로그램을 보는 게 낙이었다. 수학여행을 갈 때 필수품은 손안에 쏙 들어오는 '가요 책'이었다. 길거리 카세트테이프 노점상(길보드)과 락카페, 클럽에는 가요가 울러퍼졌다.

그는 "팝의 추억이 많은 1980년대와 달리 1990년대는 음반판매량의 대부분이 가요였다"며 "이때부터 가요가 80%, 팝이 20%로 음악 소비의 비중이 바뀌었다. 그래서 다른 시대보다 유난히 가요에 대한 추억이 많다. 모든 추억이 음악에 녹아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 DJ 출신에서 '김창환 사단' 일궈…"내 인생 한 곡은 김건모의 '핑계'"

보성고교 시절 밴드를 한 김창환은 1981년 대학교 1학년 때 디스코텍과 클럽 DJ로 나섰다. 당시 좋아하던 미국의 유명 DJ인 젤리 빈이 마돈나의 '홀리데이'를 프로듀싱했다는 걸 알고 그다음 직업은 음악 프로듀서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독학으로 시작한 그는 1984~85년 데모곡을 레코드사에 돌렸지만 '댄스 뮤직은 장사가 안 된다'고 거절당했다. 꿈을 접으려던 차에 이승환의 '텅빈 마음'이 방송 홍보 없이 다운타운에서부터 히트하는 걸 보고 '댄스를 고집하지 말고 발라드를 해보자'고 마음을 바꿨다.

그는 작곡가 후배들로부터 한 장의 데모 테이프를 받았다. 목소리가 너무 좋았다. 그날로 DJ 일을 펑크내고 대전으로 내려가 만난 사람이 신승훈이었다. 2주 후 신승훈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왔고 신혼 시절 옆방에 같이 살았다.

지인이 새롭게 만든 레코드사 덕윤산업에서 신승훈의 1집을 내기로 하고 바로 녹음에 들어갔다. 1990년 신승훈의 자작곡인 1집의 '미소 속에 비친 그대'는 3개월 만에 1등을 했다.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며 '빵' 터진 것이다.

이즈음 덕윤산업의 사맹석 씨와 라인기획을 설립한 김창환은 첫 가수를 성공시키자 알앤비(R&B), 댄스 등의 음악을 하고 싶었다.

그가 다운타운에서 일할 때부터 알던 박미경이 "오빠가 좋아할 후배가 있는데 스티비 원더 노래를 정말 잘한다"고 데려온 친구가 김건모다.

"오디션을 보러 온 김건모가 제임스 잉그램의 '저스트 원스'(Just Once)를 부르는데 워낙 노래를 잘해 '이 놈이다' 싶었어요. 제가 추구하던 음악을 표현할 수 있겠단 생각에 하루 10시간씩 알앤비 창법과 랩을 연습시켰고 10개월 만에 녹음에 들어갔죠. 김건모는 제 안의 감성을 대변해준 인생 첫손에 꼽히는 가수예요."

1992년 1집 타이틀곡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를 시작으로 2집의 '핑계', 3집의 '잘못된 만남'까지 그가 쓴 곡들은 3연타석 홈런을 쳤다.

그는 "김건모의 인생을 바꾼 노래가 '핑계'"라며 "당시 김건모가 레게풍인 이 곡을 안 부르겠다고 해 억지로 취입시켰는데 크게 히트했다. '잘못된 만남'도 반강제로 녹음시켰다. 두 곡 모두 김건모가 원한 노래는 아니었지만 이 곡들이 지금의 김건모를 만들었다"고 웃었다.

그에게도 '핑계'는 '내 인생의 한 곡'이다.

"'핑계'가 터지자 모든 언론이 절 집중하며 작곡가로 조명했어요. 그때 처음 느꼈죠. '폭발적으로 터진다는 게 이런 거구나'하고요. 세상이 떠들썩하단 느낌을 받았어요. 세상 사람이 좋아하는 노래를 만들 수 있다는 기쁨을 준 노래죠."

라인기획의 명성은 그룹 노이즈가 이어갔다. 김건모의 친구인 홍종구의 미성이 마음에 들어 자신이 데리고 있던 작곡가 천성일에게 "둘이 테크노뮤직을 하는 팀을 해보라"고 권유했다. 춤이 강점인 멤버 둘(한상일, 김학규)을 더해 1993년 랩 댄스곡인 1집 타이틀곡 '너에게 원한 건'을 선보였다. 당시 서태지와아이들의 초기 돌풍을 연상시킨다는 언론 기사가 잇달았다.

이어 박미경이 라인기획으로 옮겨와 1994년 '이유 같지 않은 이유'를 히트시켰고, 1996년 클론이 데뷔해 성공하며 김창환 사단의 빛나는 라인업이 구축됐다.

그는 "강원래와 구준엽은 내가 심사를 했던 다운타운 댄스 경연대회 대상 출신"이라며 "이수만 형이 둘을 '현진영과 와와'로 데뷔시켰는데 이후 준엽이는 '탁이와 준이'란 팀으로, 원래는 라인기획의 안무팀을 맡았다"고 기억했다.

"탁이와준이가 해체되고 준엽이가 찾아왔죠. 안무가로 날리던 원래에게 팀을 제안했는데 보컬이 필요했어요. 박진영이 연습생으로 들어와 둘에게 춤을 배우며 데뷔를 준비했는데 다른 회사로 갔고 고민 끝에 둘이 데뷔한 거죠."

클론은 2집을 낸 이후 1998년 대만 공략에 나섰고 중국어권에서 최초로 한국어 노래로 뜬 원조 한류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당초 클론은 일본에 진출해 머라이어 캐리의 음반보다 많이 팔릴 정도로 반응을 얻었는데 일본에서 한국 가수에 대한 제재가 강해 대만으로 선회한 것이었다"며 "대만과 중국에서 클론이 공연할 때 오프닝 무대에 H.O.T와 베이비복스가 섰다. 중국어권 한류의 원조는 클론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좋은 시절만 있었던 건 아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몇 년 새 안 좋은 일들이 몰려왔다.

라인기획은 1998년 국세청으로부터 강도 높은 세무 조사를 받았고 소속 가수들의 이름까지 거론되며 타격을 받자 결국 공중분해 됐다.

이후 클론만 데리고 기획사 우퍼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한 김창환은 홍경민을 캐스팅해 재기를 노렸다. 그러나 설상가상으로 2000년 클론의 강원래가 오토바이 사고를 당해 하반신 마비 장애를 입었고, '흔들린 우정'으로 인기를 끌던 홍경민에겐 영장이 나왔다.

그는 "어느 날 느닷없이 유명 가수가 다 없어졌다"며 "이때 연습생이 이정과 채연이었다. 그래서 2002년, 2003년 둘이 비슷하게 데뷔했다. 채연은 섹시 여가수로 군인들에게 난리가 났고 이정은 '제2의 김건모로 주목받았다"고 말했다.

◇ "90년대 전성기, 시행착오 있던 2000년대"…EDM 장르에 도전해 새길 개척

그러나 2000년대 들어 MP3 시대가 열리며 음원의 불법 다운로드가 판쳤다. 아이돌 가수 시대가 시작됐고 음악보다 가수의 캐릭터를 파는 산업이 커져갔다.

지나갈 세월이라고 여긴 김창환은 2000년대 중반 이후 곡을 많이 쓰지 않았다. 아이돌 가수로 경쟁해 성공시킬 자신도 없었다.

그는 "언젠가는 불법이 없어질 것이고 아이돌 음악만 팔리는 문화도 일시적일 테니 음악을 사는 시대가 오면 '그때 다시 하면 돼'라고 생각했다.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아이돌은 SM의 특화된 장르라고 여겼다. 1990년대 '핫'하던 사람들에겐 '멘붕'이 온 것"이라고 말했다.

이 흐름이 계속되자 그 역시 아이돌 그룹 VNT(2010)와 엔트레인(2011)을 데뷔시켰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다.

"1990년대 제가 선보인 가수들은 1집부터 성공했는데 아이돌 그룹은 바로 반응이 없자 포기하게 되더군요. 과거에도 제가 10대를 겨냥해 음악을 만든 건 아니어서 그 심리를 몰랐던 거죠. '과거의 나처럼 하면 안되는구나, 시대가 바뀌었구나'란 걸 몸소 깨달았죠."

신승훈을 통해 프로듀서로 데뷔해 올해로 25주년을 맞은 그는 "1990년대가 내 전성기였다"고 돌아봤다.

그는 "그땐 나도 '젊음'이었으니 내가 읽는 트렌드가 시대의 젊은이가 원하는 것이었다"며 "나이가 드니 나와 젊은이의 생각이 다르더라. 그들의 문화 안에 내가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현실이 슬프다"고 솔직하게 인정했다.

이어 1990년대 만큼 화려한 가요 시절은 안 올 것 같다고 했다.

"지금은 아이돌 가수가 차트 1등을 해도 그때처럼 전 국민이 알진 못하잖아요. 그땐 대중의 노래에 대한 소유욕이 강했고 배우보다 가수의 광고료가 훨씬 높을 정도로 음악 콘텐츠가 중심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디지털 시대로 바뀐 지금은 음악 외에 재미있는 게 너무 많아요."

그러나 그는 지금껏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며 길을 개척했듯이 지금은 전 세계적인 트렌드인 '일렉트로닉 댄스 뮤직'(EDM)을 파고 있다.

아직 국내에선 생소한 세계적인 DJ인 케빈 해리스, 아비치 등의 뮤지션을 거론하며 이 장르를 가요에 녹여내는 게 2015~2016년의 목표라고 강조했다.

그는 "난 취미가 직업이 된 사람"이라며 "DJ를 할 때도 행복했고 지금은 EDM에 도전하는 즐거움으로 산다. 가장 두려운 건 젊은 세대가 날 밀어내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음악을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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