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영업 환경은 나빠지는데…실적 목표는 2배로

입력 2015.01.29 (06:17) 수정 2015.01.29 (19:34)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은행원이 실적 압박에 시달리지 않은 적이 없지만 올해는 목표치가 거의 두 배로 올랐네요."

오후 4시 서울 종로구의 A은행 지점. 창구 업무를 마친 김모 과장의 목소리에는 피곤함이 묻어났다.

그는 "월급 통장 목표치가 크게 높아진 데 이어 요즘 연말정산이 이슈가 되면서 퇴직연금 판매 압박도 한층 심해졌다"고 털어놨다.

그는 이어 "그래도 여기는 개인금융 점포여서 사정이 나은 편"이라며 "기업금융 점포는 요새 기술금융 때문에 압박이 더 심하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구의 B은행 기업금융 지점에 근무하는 또 다른 김모 과장은 기술금융 얘기를 꺼내자마자 혀를 내둘렀다.

그는 "반기마다 영업점 평가를 하는데, 중소기업 대출은 목표치가 거의 두 배로 늘었다"며 "늘어난 목표치의 60%는 기술금융 실적으로 채워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가 기술력을 지닌 중소기업이 자금난에 시달리는 일이 없게 한다는 취지로 기술금융 활성화를 내세우며 매달 은행별 실적을 공개하고 하위 실적 금융사에 불이익을 주겠다고 엄포를 놓자 은행마다 기술금융 성과를 내려고 혈안이 된 상태다.

김 과장은 "모든 거래업체가 기술기업인 것도 아닌데 기술신용평가를 받을 수 있는 업체를 발굴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며 "막상 기술금융 대출을 하려 하면 평가서를 받는데 한 달도 넘게 걸리니 언제 실적을 채울지 막막하다"고 토로했다.

대출 연장하러 온 고객에게 적금 상품 하나 소개하는 말도 붙이기가 조심스럽다. 구속성 예금(일명 '꺾기') 유치가 엄격히 금지되면서 실적 압박은 커졌는데 영업은 더 어려워진 것이다.

서울 송파구의 C은행 이모 과장은 시간이 날 때마다 거래 고객에게 틈틈이 전화를 건다.

그는 "인터넷 뱅킹이 늘면서 영업점을 찾는 고객 발길은 점점 더 뜸해지고 있다"며 "상품만기가 다가온 고객이나 오래 거래하던 고객에게는 주기적으로 연락해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 과장은 "고객이 만기 적금을 찾으러 오면 슬며시 예금이나 주가연계증권(ELS), 하다 못해 새 적금이라도 가입하도록 권유하는데 인터넷이나 모바일 뱅킹이 발달하면서 이젠 그런 기회도 줄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동대문구의 D은행 김모 지점장은 주말이 주말 같지 않다.

"요즘은 소셜네트워킹서비스(SNS) 발달로 본부장의 불호령도 각 영업점에 동시에 실시간으로 떨어진다"며 "영업점 실적 순위가 매일매일 체크되다 보니 하루라도 순위에서 처질까 봐 주말에도 스트레스가 심하다"고 말했다.

SNS의 그룹채팅방은 매일같이 영업본부장의 불호령이 떨어지는 가시방석 같은 공간이 된 지 오래다.

은행원들의 업무부담이 왜 늘어난 것일까. 김 지점장은 저금리로 이자 마진이 줄어든 점을 이유로 꼽았다.

과거와 달리 일반 수신상품이 아닌 ELS나 퇴직연금, 방카슈랑스같은 비이자수익 상품에 대한 경영평가 가점이 늘었는데, 이런 상품은 과거 예·적금 상품과 비교해 고객에게 판매하기가 녹록치 않은 것들이다.

상대적으로 고금리인 신용대출에 대한 실적 압박도 커졌지만 이 역시 목표를 달성하기가 쉽지 않다.

최근 은행장이 새로 취임한 국민은행이나 우리은행의 경우 새 최고경영자(CEO)의 의지에 따라 영업 압박이 한층 거센 분위기다.

국민은행의 한 간부급 직원은 "윤종규 회장이 취임한 이후 영업력 제고에 대한 요구가 심상치 않다"며 "내부 사정을 그대로 전하기는 어렵지만 영업 현장에서는 비장감마저 감도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우리은행 관계자도 "이광구 행장이 취임하면서 매년 자산을 15조원씩 증가시키겠다고 공언한 상태"라며 "자산을 늘리려면 대출이 증가해야하기 때문에 대출 목표치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고 말했다.

한국씨티은행과 스탠다드차타드은행과 같이 지난해 영업점을 구조조정한 외국계 은행의 경우도 영업점 직원의 업무강도가 대폭 늘었다.

한국씨티은행 노조의 조성길 정책기획국장은 "감축된 점포의 자산과 고객 관리를 인근 점포가 그대로 떠안다 보니 직원들의 업무 강도가 최소한 1.5배는 늘었다"고 전했다.

김우진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실제로 국내 은행 영업점 직원이 받는 업무강도는 외국 은행과 비교할 때 상당히 높은 상태"라고 말했다.

몇 년째 은행 수익성이 악화하면서 인건비 부담에 신규 직원을 충분히 보충하지 못하면서 업무 여건이 더 어려워졌다는 설명이다.

김 연구위원은 "근로여건 개선 없이 영업목표만 강화하는 것도, 인력이 부족하니 영업목표를 낮춰달라는 것도 모두 해법이 될 수 없다"며 "결국 임금체계를 개선하고 영업점 체계를 재설계 하는 식으로 접근해야 하는데 노사 상호간 양보 없이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은행 영업 환경은 나빠지는데…실적 목표는 2배로
    • 입력 2015-01-29 06:17:09
    • 수정2015-01-29 19:34:08
    연합뉴스
"은행원이 실적 압박에 시달리지 않은 적이 없지만 올해는 목표치가 거의 두 배로 올랐네요."

오후 4시 서울 종로구의 A은행 지점. 창구 업무를 마친 김모 과장의 목소리에는 피곤함이 묻어났다.

그는 "월급 통장 목표치가 크게 높아진 데 이어 요즘 연말정산이 이슈가 되면서 퇴직연금 판매 압박도 한층 심해졌다"고 털어놨다.

그는 이어 "그래도 여기는 개인금융 점포여서 사정이 나은 편"이라며 "기업금융 점포는 요새 기술금융 때문에 압박이 더 심하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구의 B은행 기업금융 지점에 근무하는 또 다른 김모 과장은 기술금융 얘기를 꺼내자마자 혀를 내둘렀다.

그는 "반기마다 영업점 평가를 하는데, 중소기업 대출은 목표치가 거의 두 배로 늘었다"며 "늘어난 목표치의 60%는 기술금융 실적으로 채워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가 기술력을 지닌 중소기업이 자금난에 시달리는 일이 없게 한다는 취지로 기술금융 활성화를 내세우며 매달 은행별 실적을 공개하고 하위 실적 금융사에 불이익을 주겠다고 엄포를 놓자 은행마다 기술금융 성과를 내려고 혈안이 된 상태다.

김 과장은 "모든 거래업체가 기술기업인 것도 아닌데 기술신용평가를 받을 수 있는 업체를 발굴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며 "막상 기술금융 대출을 하려 하면 평가서를 받는데 한 달도 넘게 걸리니 언제 실적을 채울지 막막하다"고 토로했다.

대출 연장하러 온 고객에게 적금 상품 하나 소개하는 말도 붙이기가 조심스럽다. 구속성 예금(일명 '꺾기') 유치가 엄격히 금지되면서 실적 압박은 커졌는데 영업은 더 어려워진 것이다.

서울 송파구의 C은행 이모 과장은 시간이 날 때마다 거래 고객에게 틈틈이 전화를 건다.

그는 "인터넷 뱅킹이 늘면서 영업점을 찾는 고객 발길은 점점 더 뜸해지고 있다"며 "상품만기가 다가온 고객이나 오래 거래하던 고객에게는 주기적으로 연락해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 과장은 "고객이 만기 적금을 찾으러 오면 슬며시 예금이나 주가연계증권(ELS), 하다 못해 새 적금이라도 가입하도록 권유하는데 인터넷이나 모바일 뱅킹이 발달하면서 이젠 그런 기회도 줄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동대문구의 D은행 김모 지점장은 주말이 주말 같지 않다.

"요즘은 소셜네트워킹서비스(SNS) 발달로 본부장의 불호령도 각 영업점에 동시에 실시간으로 떨어진다"며 "영업점 실적 순위가 매일매일 체크되다 보니 하루라도 순위에서 처질까 봐 주말에도 스트레스가 심하다"고 말했다.

SNS의 그룹채팅방은 매일같이 영업본부장의 불호령이 떨어지는 가시방석 같은 공간이 된 지 오래다.

은행원들의 업무부담이 왜 늘어난 것일까. 김 지점장은 저금리로 이자 마진이 줄어든 점을 이유로 꼽았다.

과거와 달리 일반 수신상품이 아닌 ELS나 퇴직연금, 방카슈랑스같은 비이자수익 상품에 대한 경영평가 가점이 늘었는데, 이런 상품은 과거 예·적금 상품과 비교해 고객에게 판매하기가 녹록치 않은 것들이다.

상대적으로 고금리인 신용대출에 대한 실적 압박도 커졌지만 이 역시 목표를 달성하기가 쉽지 않다.

최근 은행장이 새로 취임한 국민은행이나 우리은행의 경우 새 최고경영자(CEO)의 의지에 따라 영업 압박이 한층 거센 분위기다.

국민은행의 한 간부급 직원은 "윤종규 회장이 취임한 이후 영업력 제고에 대한 요구가 심상치 않다"며 "내부 사정을 그대로 전하기는 어렵지만 영업 현장에서는 비장감마저 감도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우리은행 관계자도 "이광구 행장이 취임하면서 매년 자산을 15조원씩 증가시키겠다고 공언한 상태"라며 "자산을 늘리려면 대출이 증가해야하기 때문에 대출 목표치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고 말했다.

한국씨티은행과 스탠다드차타드은행과 같이 지난해 영업점을 구조조정한 외국계 은행의 경우도 영업점 직원의 업무강도가 대폭 늘었다.

한국씨티은행 노조의 조성길 정책기획국장은 "감축된 점포의 자산과 고객 관리를 인근 점포가 그대로 떠안다 보니 직원들의 업무 강도가 최소한 1.5배는 늘었다"고 전했다.

김우진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실제로 국내 은행 영업점 직원이 받는 업무강도는 외국 은행과 비교할 때 상당히 높은 상태"라고 말했다.

몇 년째 은행 수익성이 악화하면서 인건비 부담에 신규 직원을 충분히 보충하지 못하면서 업무 여건이 더 어려워졌다는 설명이다.

김 연구위원은 "근로여건 개선 없이 영업목표만 강화하는 것도, 인력이 부족하니 영업목표를 낮춰달라는 것도 모두 해법이 될 수 없다"며 "결국 임금체계를 개선하고 영업점 체계를 재설계 하는 식으로 접근해야 하는데 노사 상호간 양보 없이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