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첫 메달리스트 “땀은 헛되지 않아”

입력 2015.01.29 (16:09) 수정 2015.01.29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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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방울의 대가는 절대 헛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든 어렵고 힘들다고 도망치면 꿈은 이뤄지지 않습니다. 꿈을 이룬 사람은 항상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고,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노선배의 덕담은 진중하면서도 따뜻했다.

한국 장애인체육 최초의 국제대회 및 패럴림픽 메달리스트 송신남(69) 선생이 29일 경기도 이천훈련원에서 열린 2015 장애인 국가대표 훈련 개시식에 참석해 후배들에게 역경을 헤쳐나가라고 주문했다.

송 선생은 1971년 영국에서 열린 상이군경대회와 1972년 독일 하이델베르크 패럴림픽에 탁구 대표로 출전, 단식과 복식 2관왕에 오르며 한국 장애인체육의 새 장을 연 인물이다.

평범하게 살아오던 그의 운명은 1965년 베트남전쟁 파병으로 요동쳤다.

육군 맹호부대 통신병으로 참전한 그는 교전 중 총탄이 목을 관통하면서 7번 경추를 다쳤다.

하지 마비는 물론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병상에만 머무르는 생활이 2년 넘게 이어지면서 여러 재활 수단을 알아보던 송 선생은 가장 적성에 맞았던 탁구를 시작하면서 새 인생을 살게 됐다.

그는 "독일 패럴림픽 2관왕이 돼서 돌아왔을 때는 김포공항에서 서울시청까지 카퍼레이드를 하고 청와대에 가서 훈장까지 받았다"며 "월남 상이용사가 다친 몸으로도 국위선양을 했다는 식으로 매스컴에 크게 홍보됐다"고 떠올리며 웃었다.

1972년 패럴림픽 이후 건축업체를 운영하며 두 아들을 키운 송 선생은 1988 서울 패럴림픽을 앞두고 이번에는 론볼 선수가 됐다.

론볼은 '잔디밭에서 하는 컬링' 정도로 이해할 수 있는, 장애인체육에만 있는 종목이다.

송 선생은 "당시엔 론볼 선수가 국내에 아무도 없어서 내가 외국에서 하는 워크샵에 가서 기술을 배워와서는 선수들을 모집해 가르치고 1988년 서울과 1996년 애틀랜타 패럴림픽에 출전했다"고 회고했다.

한국 론볼이 2002년 이후 장애인아시안게임 론볼에서 금메달 14개를 따내는 강국이 된 배경에는 창시자나 다름없었던 송 선생의 노력과 희생이 있었던 셈이다.

어느덧 한국 장애인체육계의 원로가 된 송 선생은 후배들이 좋은 환경에서 운동에 매진해 좋은 성과를 내고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는 "인터뷰를 하러 가야 하는데 택시를 잡지 못해서 보훈처에 구급차를 보내달라고 부탁하던 시절도 있었다"며 과거 국내의 열악한 장애인 복지 환경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지금은 이곳 이천훈련원도 그렇고 예전보다 시설이 정말 잘 갖춰져 있다"며 "후배들은 좋은 시설에서 열심히 운동해서 더 큰 보람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선전을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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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애인 첫 메달리스트 “땀은 헛되지 않아”
    • 입력 2015-01-29 16:09:48
    • 수정2015-01-29 16:19:07
    연합뉴스
"땀방울의 대가는 절대 헛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든 어렵고 힘들다고 도망치면 꿈은 이뤄지지 않습니다. 꿈을 이룬 사람은 항상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고,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노선배의 덕담은 진중하면서도 따뜻했다. 한국 장애인체육 최초의 국제대회 및 패럴림픽 메달리스트 송신남(69) 선생이 29일 경기도 이천훈련원에서 열린 2015 장애인 국가대표 훈련 개시식에 참석해 후배들에게 역경을 헤쳐나가라고 주문했다. 송 선생은 1971년 영국에서 열린 상이군경대회와 1972년 독일 하이델베르크 패럴림픽에 탁구 대표로 출전, 단식과 복식 2관왕에 오르며 한국 장애인체육의 새 장을 연 인물이다. 평범하게 살아오던 그의 운명은 1965년 베트남전쟁 파병으로 요동쳤다. 육군 맹호부대 통신병으로 참전한 그는 교전 중 총탄이 목을 관통하면서 7번 경추를 다쳤다. 하지 마비는 물론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병상에만 머무르는 생활이 2년 넘게 이어지면서 여러 재활 수단을 알아보던 송 선생은 가장 적성에 맞았던 탁구를 시작하면서 새 인생을 살게 됐다. 그는 "독일 패럴림픽 2관왕이 돼서 돌아왔을 때는 김포공항에서 서울시청까지 카퍼레이드를 하고 청와대에 가서 훈장까지 받았다"며 "월남 상이용사가 다친 몸으로도 국위선양을 했다는 식으로 매스컴에 크게 홍보됐다"고 떠올리며 웃었다. 1972년 패럴림픽 이후 건축업체를 운영하며 두 아들을 키운 송 선생은 1988 서울 패럴림픽을 앞두고 이번에는 론볼 선수가 됐다. 론볼은 '잔디밭에서 하는 컬링' 정도로 이해할 수 있는, 장애인체육에만 있는 종목이다. 송 선생은 "당시엔 론볼 선수가 국내에 아무도 없어서 내가 외국에서 하는 워크샵에 가서 기술을 배워와서는 선수들을 모집해 가르치고 1988년 서울과 1996년 애틀랜타 패럴림픽에 출전했다"고 회고했다. 한국 론볼이 2002년 이후 장애인아시안게임 론볼에서 금메달 14개를 따내는 강국이 된 배경에는 창시자나 다름없었던 송 선생의 노력과 희생이 있었던 셈이다. 어느덧 한국 장애인체육계의 원로가 된 송 선생은 후배들이 좋은 환경에서 운동에 매진해 좋은 성과를 내고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는 "인터뷰를 하러 가야 하는데 택시를 잡지 못해서 보훈처에 구급차를 보내달라고 부탁하던 시절도 있었다"며 과거 국내의 열악한 장애인 복지 환경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지금은 이곳 이천훈련원도 그렇고 예전보다 시설이 정말 잘 갖춰져 있다"며 "후배들은 좋은 시설에서 열심히 운동해서 더 큰 보람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선전을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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