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을 버린 나라는 어떻게 무너지는가?

입력 2015.02.09 (06:12) 수정 2015.02.09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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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훈의 대담한 경제 #11


이제껏 우리 정부는 기업이 살아야 경제를 살릴 수 있다며 ‘기업하기 좋은 나라’ 만들기에 총력을 기울여 왔다. 그래서 기업에게 다양한 방식의 비정규직 고용을 허용해 준 탓에 비정규직 근로자가 600만 명을 돌파하기에 이르렀고, 비정규직이 늘어나면서 시간당 임금이 정규직의 64% 수준까지 떨어지는 등 그 처우는 점점 더 열악해져 갔다.

이제 새로 취업한 청년 취업자 5명 중 1명은 1년 이하의 단기 계약직으로 시작하고, 비정규직으로 시작한 근로자 가운데 1년 뒤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비율은 고작 11%에 불과하다. 정부가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데 몰두하는 동안 우리 청년들은 철저히 소외되어 실업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정부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면 청년 실업도 자연스럽게 해결된다는 굳건한 믿음을 고수하고 있는 듯하다. 과연 그 믿음대로 기업부터 살려야 우리 청년들도 살릴 수 있는 것일까? 혹시, 우리 청년부터 살리는 것이 우리 기업도 사는 길은 아닐까?

그리스와 아이슬란드, 같은 시기 다른 대응

그리스와 아이슬란드, 두 나라는 저금리 시대에 천문학적인 돈을 끌어와 위험한 투자를 일삼았다. 덕분에 금리가 낮을 때는 흥청망청 호황을 누릴 수 있었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신용경색이 시작되자 한순간에 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 두 나라는 거의 동시에 위기를 맞았지만, 두 정부의 대응은 너무나 달랐다.

그리스는 파산 위기에 처한 은행과 대기업을 살리기 위해 남아있던 재정 여력을 모조리 쏟아 부었다. 그 결과 국가재정이 극도로 악화된 그리스는 국민들에게 고통 분담을 요구하며 복지지출을 거의 절반 수준으로 줄였다. 특히 젊은 세대를 위한 육아와 교육 예산이 최우선적으로 삭감되었다.

게다가 은행과 재벌의 부실투자를 국가가 대신 갚아주는 바람에 국가채무가 천문학적으로 늘어났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청년들이 부실기업과 부실은행을 대신해 천문학적인 빚더미를 갚아야 할 처지가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리스 청년들은 복지 혜택을 빼앗기고 앞 세대의 빚더미까지 짊어지는 절망적인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그리스는 이 같은 청년들의 희생을 대가로 경제 회생에 성공하기는 했을까? 안타깝게도 2013년 그리스 경제성장률이 -3.3%로 여전히 최악의 경기침체 속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실 자국의 청년들을 경제위기 극복의 제물로 삼고서 경제가 되살아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생산성 향상의 주체이자 소비의 기반인 청년들이 힘을 잃으면 그 나라 경제 전체까지 흔들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주방용품 혁명, 아이슬란드의 청년과 경제를 살리다

같은 시기에 경제 위기를 겪었지만 그리스와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한 나라가 바로 아이슬란드다. 금융위기가 일어난 직후 아이슬란드 3대 은행의 부채 규모는 최소한 2000억 달러(약 230조 원)가 넘었는데, 이는 당시 아이슬란드 GDP의 10배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였다. 이처럼 천문학적인 부실 규모에 당황한 아이슬란드 정부는 대규모 국채 발행을 통해 공적자금을 조성하여 부실화된 은행에 투입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국민들에게 고통 분담을 호소하였다. 이 때까지만 해도 일단 빚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그 빚더미를 미래세대에게 떠넘기려 한 점에서 금융위기를 당한 여느 나라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아이슬란드 국민들은 미래세대를 경제 회생의 제물로 삼으려는 정부의 계획에 분노했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아이슬란드의 시민들은 집에서 가지고 나온 냄비와 솥을 두드리며 시위를 벌였다. 이 때문에 현지 언론들은 이를 ‘주방용품 혁명(Kitchenware Revolution, 아이슬란드어로는 Búsáhaldabyltingin)’이라고 불렀다. 아이슬란드 시민들은 민간 은행이나 기업들이 자신들의 탐욕으로 위험한 투기를 벌이다 생긴 부채는 국민들에게 손 벌리지 말고 그들 스스로 책임지도록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한 국채를 발행해 조성한 공적자금을 부실은행에 투입한다면 현 세대의 투기로 인한 손실을 미래세대에게 떠넘기는 것이라며 강력히 반대하였다.

금융위기의 주범으로 지목된 게이르 하르데(Geir Haarde) 당시 아이슬란드 총리는 국민들이 복지 축소와 국채발행을 거부하면 국제통화기금(IMF)의 지원을 받지 못할 것이라며 국민들을 위협했다. 그러나 다음 세대로 빚더미를 떠넘기지 않겠다는 아이슬란드 국민들의 의지는 단호했다. 결국 성난 시민들에 밀려 하르데 총리는 사퇴하였고, 투기를 일삼았던 은행들이 스스로 책임을 지도록 내버려두기로 결정하였다. 또 은행가와 정치가를 비롯한 90여 명이 금융위기를 일으켰거나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처럼 금융위기의 책임을 철저히 물은 아이슬란드 국민들은 경제위기라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청년과 가족복지를 대폭 확대하고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는 놀라운 선택을 하였다. 실제로 2009년 사회보장 지출은 금융위기 직전보다 무려 36%나 늘어난 3,800억 크로나(3조 1천억 원)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그 예산은 대부분 법인세와 부유층에 대한 증세로 마련하였다. 당시 아이슬란드는 우리나라 경제 관료들이 경제를 망치는 짓이라며 결사반대하고 있는 여러 정책들을 총망라한 ‘정책 패키지’를 단행한 셈이었다.

청년의 가치를 아는 나라만이 위기를 기회로 바꾼다

그렇다면 아이슬란드 경제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강화된 사회안전망 덕분에 아이슬란드 청년들은 누구나 직업훈련을 받고 재취업에 도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재기에 성공한 청년들이 무너져가던 아이슬란드 경제에 놀라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 결과 2013년 아이슬란드는 유럽 평균을 훌쩍 뛰어넘는 3.5%라는 놀라운 경제 성장률을 달성하였고, 실업률도 유럽 평균의 절반도 안 되는 4.9%를 기록하였다.

우리나라는 ‘기업하기 좋은’ 환경 만들기에만 몰두한 나머지, 그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는 청년들의 문제를 부수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우(愚)를 범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경제의 가장 중요한 성장 동력은 바로 청년과 미래세대다. 청년이 무너진 경제에서 기업만 살아남을 수는 없다. 청년이 살아야 기업도 살 수 있다. 청년인구 자체가 급속도로 줄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제를 다시 살리기 위해서는 더 늦기 전에 대대적인 청년 투자에 나서야 한다.

* 간혹 아이슬란드의 경제 규모가 작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합리적 근거도 없이 막연하게 우리는 아이슬란드와 다르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청년에 대한 투자와 경제 성장의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사례는 우리보다 훨씬 경제 규모가 큰 나라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 ‘대담한 경제’를 통해 그 놀라운 실상과 그 뒤에 숨어 있는 이론적 토대를 찬찬히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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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훈의 대담한 경제 #11


이제껏 우리 정부는 기업이 살아야 경제를 살릴 수 있다며 ‘기업하기 좋은 나라’ 만들기에 총력을 기울여 왔다. 그래서 기업에게 다양한 방식의 비정규직 고용을 허용해 준 탓에 비정규직 근로자가 600만 명을 돌파하기에 이르렀고, 비정규직이 늘어나면서 시간당 임금이 정규직의 64% 수준까지 떨어지는 등 그 처우는 점점 더 열악해져 갔다.

이제 새로 취업한 청년 취업자 5명 중 1명은 1년 이하의 단기 계약직으로 시작하고, 비정규직으로 시작한 근로자 가운데 1년 뒤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비율은 고작 11%에 불과하다. 정부가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데 몰두하는 동안 우리 청년들은 철저히 소외되어 실업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정부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면 청년 실업도 자연스럽게 해결된다는 굳건한 믿음을 고수하고 있는 듯하다. 과연 그 믿음대로 기업부터 살려야 우리 청년들도 살릴 수 있는 것일까? 혹시, 우리 청년부터 살리는 것이 우리 기업도 사는 길은 아닐까?

그리스와 아이슬란드, 같은 시기 다른 대응

그리스와 아이슬란드, 두 나라는 저금리 시대에 천문학적인 돈을 끌어와 위험한 투자를 일삼았다. 덕분에 금리가 낮을 때는 흥청망청 호황을 누릴 수 있었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신용경색이 시작되자 한순간에 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 두 나라는 거의 동시에 위기를 맞았지만, 두 정부의 대응은 너무나 달랐다.

그리스는 파산 위기에 처한 은행과 대기업을 살리기 위해 남아있던 재정 여력을 모조리 쏟아 부었다. 그 결과 국가재정이 극도로 악화된 그리스는 국민들에게 고통 분담을 요구하며 복지지출을 거의 절반 수준으로 줄였다. 특히 젊은 세대를 위한 육아와 교육 예산이 최우선적으로 삭감되었다.

게다가 은행과 재벌의 부실투자를 국가가 대신 갚아주는 바람에 국가채무가 천문학적으로 늘어났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청년들이 부실기업과 부실은행을 대신해 천문학적인 빚더미를 갚아야 할 처지가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리스 청년들은 복지 혜택을 빼앗기고 앞 세대의 빚더미까지 짊어지는 절망적인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그리스는 이 같은 청년들의 희생을 대가로 경제 회생에 성공하기는 했을까? 안타깝게도 2013년 그리스 경제성장률이 -3.3%로 여전히 최악의 경기침체 속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실 자국의 청년들을 경제위기 극복의 제물로 삼고서 경제가 되살아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생산성 향상의 주체이자 소비의 기반인 청년들이 힘을 잃으면 그 나라 경제 전체까지 흔들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주방용품 혁명, 아이슬란드의 청년과 경제를 살리다

같은 시기에 경제 위기를 겪었지만 그리스와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한 나라가 바로 아이슬란드다. 금융위기가 일어난 직후 아이슬란드 3대 은행의 부채 규모는 최소한 2000억 달러(약 230조 원)가 넘었는데, 이는 당시 아이슬란드 GDP의 10배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였다. 이처럼 천문학적인 부실 규모에 당황한 아이슬란드 정부는 대규모 국채 발행을 통해 공적자금을 조성하여 부실화된 은행에 투입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국민들에게 고통 분담을 호소하였다. 이 때까지만 해도 일단 빚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그 빚더미를 미래세대에게 떠넘기려 한 점에서 금융위기를 당한 여느 나라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아이슬란드 국민들은 미래세대를 경제 회생의 제물로 삼으려는 정부의 계획에 분노했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아이슬란드의 시민들은 집에서 가지고 나온 냄비와 솥을 두드리며 시위를 벌였다. 이 때문에 현지 언론들은 이를 ‘주방용품 혁명(Kitchenware Revolution, 아이슬란드어로는 Búsáhaldabyltingin)’이라고 불렀다. 아이슬란드 시민들은 민간 은행이나 기업들이 자신들의 탐욕으로 위험한 투기를 벌이다 생긴 부채는 국민들에게 손 벌리지 말고 그들 스스로 책임지도록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한 국채를 발행해 조성한 공적자금을 부실은행에 투입한다면 현 세대의 투기로 인한 손실을 미래세대에게 떠넘기는 것이라며 강력히 반대하였다.

금융위기의 주범으로 지목된 게이르 하르데(Geir Haarde) 당시 아이슬란드 총리는 국민들이 복지 축소와 국채발행을 거부하면 국제통화기금(IMF)의 지원을 받지 못할 것이라며 국민들을 위협했다. 그러나 다음 세대로 빚더미를 떠넘기지 않겠다는 아이슬란드 국민들의 의지는 단호했다. 결국 성난 시민들에 밀려 하르데 총리는 사퇴하였고, 투기를 일삼았던 은행들이 스스로 책임을 지도록 내버려두기로 결정하였다. 또 은행가와 정치가를 비롯한 90여 명이 금융위기를 일으켰거나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처럼 금융위기의 책임을 철저히 물은 아이슬란드 국민들은 경제위기라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청년과 가족복지를 대폭 확대하고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는 놀라운 선택을 하였다. 실제로 2009년 사회보장 지출은 금융위기 직전보다 무려 36%나 늘어난 3,800억 크로나(3조 1천억 원)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그 예산은 대부분 법인세와 부유층에 대한 증세로 마련하였다. 당시 아이슬란드는 우리나라 경제 관료들이 경제를 망치는 짓이라며 결사반대하고 있는 여러 정책들을 총망라한 ‘정책 패키지’를 단행한 셈이었다.

청년의 가치를 아는 나라만이 위기를 기회로 바꾼다

그렇다면 아이슬란드 경제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강화된 사회안전망 덕분에 아이슬란드 청년들은 누구나 직업훈련을 받고 재취업에 도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재기에 성공한 청년들이 무너져가던 아이슬란드 경제에 놀라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 결과 2013년 아이슬란드는 유럽 평균을 훌쩍 뛰어넘는 3.5%라는 놀라운 경제 성장률을 달성하였고, 실업률도 유럽 평균의 절반도 안 되는 4.9%를 기록하였다.

우리나라는 ‘기업하기 좋은’ 환경 만들기에만 몰두한 나머지, 그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는 청년들의 문제를 부수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우(愚)를 범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경제의 가장 중요한 성장 동력은 바로 청년과 미래세대다. 청년이 무너진 경제에서 기업만 살아남을 수는 없다. 청년이 살아야 기업도 살 수 있다. 청년인구 자체가 급속도로 줄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제를 다시 살리기 위해서는 더 늦기 전에 대대적인 청년 투자에 나서야 한다.

* 간혹 아이슬란드의 경제 규모가 작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합리적 근거도 없이 막연하게 우리는 아이슬란드와 다르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청년에 대한 투자와 경제 성장의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사례는 우리보다 훨씬 경제 규모가 큰 나라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 ‘대담한 경제’를 통해 그 놀라운 실상과 그 뒤에 숨어 있는 이론적 토대를 찬찬히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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