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떠나는 뒷모습의 아름다움’ 헤이글 장관 퇴임기

입력 2015.02.19 (07:07) 수정 2015.03.02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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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보다 좋은 마무리…장관의 깔끔한 중도 퇴장 

장관 재임 2년이면 미국서는 짧은 편이다. 손꼽아 계산해보니 딱 2년에서 열흘 모자라는 720일을 장관으로 재직했다. 지난 16일 퇴임한 헤이글 미 국방장관 얘기다. 아직도 헤이글이 장관이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교체 발표와 함께 집에 가는 경우가 다반사인 한국의 장관 경질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매우 생경할 수밖에 없다. 헤이글 장관이 물러나겠다고 공식 발표한 때는 지난해 11월 24일이니까 그 후에도 두 달 반 이상을 근무했다.

◆ 헤이글 장관, 백악관과의 대립부터 경질까지

헤이글 장관은 경질됐다. 퇴임 결정을 발표하는 날 찍힌 사진 한 장이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다. 슬픈 표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 헤이글 장관, 머리를 숙인 오바마 대통령. 이들의 포옹에 담긴 바디 랭귀지를 백악관을 취재하는 사진기자들이 절묘하게 잡아냈다. ‘헤이글이 퇴진을 발표하겠다고 했다’는 오바마 대통령의 당일 언급은 말 그대로 퇴진 사실을 공개하는 날짜를 헤이글 장관이 스스로 선택했다는 의미일 뿐이다.

당시 헤이글 국방장관과 백악관의 대립은 심각했다. 퇴임 발표 한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에는 ‘선거 후에 헤이글이 교체될 것’이라는 익명의 백악관 관계자를 인용한 기사가 미국 언론에 보도됐다. 국가 안보 관련 회의가 열려도 헤이글 장관은 의사 표현이 분명치 않고 존재감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같다는 험악한 인신공격이다. 이런 일이 있은 조금 뒤에는 ‘시리아 아사드 정권에 대한 백악관의 모호한 스탠스를 강도 높게 지적’한 헤이글 메모가 공개됐다. 헤이글 진영과 백악관의 핵심 이너서클 간에 치고받기가 시작됐고 결국은 후자의 완승으로 귀결된 것이다.

◆ 어떤 사안을 놓고 대립했나

헤이글 국방장관과 백악관은 우선 쿠바 관타나모 미군기지에 있는 테러 용의자 수용소를 폐쇄할 것인지를 놓고 의견이 달랐다. 오바마 대통령은 국제사회로부터 탈법적 인권 탄압의 대명사처럼 비판받는 수용소를 자신의 임기 내에 폐쇄하려 하고 있고 백악관의 참모들은 국방부를 재촉해 왔다. 하지만 헤이글 장관은 수감자들이 풀려난 후 다시 돌아와 미국에 해를 끼치지 않을 보장이 있어야 한다며 ‘수감자들의 타국 이전을 통한 수용소 폐쇄 방안’에 제동을 걸어 왔다. 지난해 말과 올해 초에 백악관의 독촉 속에 44명이 풀려나거나 다른 나라로 이송됐지만 아직도 관타나모 수용소에는 122명의 수감자들이 남아 있고 그동안의 접근 방법으로는 오바마 대통령 임기 내에 수용소를 폐쇄하기는 어렵다는 분석들이 있다.

헤이글 장관과 백악관은 IS, 이슬람 반군 격퇴 전략을 놓고도 대립했다. 지상군 투입 여부를 놓고 확고하게 반대 입장을 천명한 오바마 대통령과 전투 목적상 필요할 수 있다는 군 지휘관들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로 전락했다. 이른바 헤이글 메모로 공개된 시리아 아사드 대통령에 대한 군사 대응 문제도 갈등을 증폭시키는 요인이 됐다. 헤이글 국방장관을 활용해 국방 예산과 인원을 효율화하는 등 이라크, 아프간 전쟁 이후의 새로운 국방개혁을 시도해보려던 오바마 대통령의 계획도 중동 상황이 꼬이면서 의미가 없게 됐다. 이럴 바에야 '말을 갈아보자'는 백악관 이너서클 핵심들의 헤이글 장관 경질론에 힘이 실린 것이다.

◆ 갈등 끝 장관 경질…모양새는?



이런 갈등과 대립 속에 이뤄진 장관 경질은 험한 모양새를 연출하기 십상이다. 헤이글 장관 경질이 표면화되는 단계에서도 위험 신호가 감지됐다. 오바마 대통령은 헤이글 장관을 경질하겠다고 통보하고도 발표는 뒤로 미룰 것을 요청했지만 헤이글 장관은 경질을 통보 받은 즉시 발표를 강행했다. 섭섭함을 감추지 않은 첫 반발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후임자 후보군을 물색해보지도 못한 상황에서 바이든 부통령과 함께 나와 퇴임 발표를 강행하는 헤이글 장관을 지켜봐야 했다. 며칠 후 불과 몇 달 전에 국방부 부장관 자리에서 물러난 애쉬턴 카터를 후임 장관으로 발탁하고 내정 사실을 발표했지만 이 자리에 헤이글 국방장관은 참석하지 않았다. 그 날은 새로 장관될 사람이 주인공이어서 일부러 자리를 피한 것이라는 것이 본인의 해명이지만 또 다른 불만의 표시임에 분명하다.



이런 갈등 기류는 오래 가지 않았다. 오바마 대통령이 나서서 정리했다. 교체 사실 발표 후에도 흔들림 없이 장관직을 수행하도록 보장하고 배려했다. 20개월 갓 넘기고 교체돼 단명 국방장관의 대열에 들어서는 오명을 쓰지 않도록 임기 2년을 거의 채우도록 했다. 사실 오바마 대통령이 군통수권자가 된 후 국방장관은 계속 상대적 단명으로 끝났다. 초대 게이츠 장관, 파네타 장관도 재임 기간이 2년 안팎에 불과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군사전략이 소극적이라며 퇴임 후 비판에 나섰던 파네타 장관은 2년에 훨씬 못미치는 608일을 국방장관으로 재임했다. 전임 부시 대통령 시절 럼스펠드 장관이 2,159일, 게이츠 장관이 오바마 대통령 때까지 이어지며 1,657일을 재임한 것에 비하면 많이 짧은 편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헤이글 장관에게는 2년을 채우도록 배려해준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달 28일에는 국방부에서 주관한 헤이글 장관 환송식에 직접 참석했다. 인도와 사우디아리비아 방문을 마치고 당일 새벽에 도착해 피곤한 상태였지만 바이든 부통령과 함께 참석해서 헤이글 장관의 업적을 치하했다. 지난주 의회에 무력 사용권을 요청하는 서한과 법률 초안을 보낼 때는 백악관 발표장에 헤이글 장관을 배석시켰다.

◆ "나는 책 팔려고 대통령 얘기 함부로 할 사람 아니다"

이런 배려도 작용했을 것이다. 백악관과 갈등 끝에 경질되는 헤이글 장관이지만 오바마 대통령이나 백악관을 비판하는 말을 아직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언론들이 많은 질문을 던졌지만 "주요 국방 현안에 대해 자신도 많은 의견을 밝혔다" 고만 할뿐이다. 오히려 자신은 책 팔려고 대통령 얘기를 함부로 할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I don't get into the book-telling business of conversations I have with the president. That's not my style, and I don't think that's a responsible thing to do.”- 1/23 NPR 인터뷰) 전임 게이츠 장관과 파네타 장관이 퇴임 후에 책을 써서 오바마 정권의 국방정책을 비판했던 것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1967년 사병으로 입대해 베트남 전에서 부상하기도 했던 헤이글. 사병 출신 최초의 미국 국방장관으로 장병들의 환호를 받았던 척 헤이글은 시작 때부터 공화당과 백악관의 견제를 받으며 장관으로서 기념비적인 업적은 남기지 못한 채 중도 퇴장하지만, 떠나는 뒷모습은 아름다웠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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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떠나는 뒷모습의 아름다움’ 헤이글 장관 퇴임기
    • 입력 2015-02-19 07:07:00
    • 수정2015-03-02 10:02:36
    취재후·사건후
시작보다 좋은 마무리…장관의 깔끔한 중도 퇴장 

장관 재임 2년이면 미국서는 짧은 편이다. 손꼽아 계산해보니 딱 2년에서 열흘 모자라는 720일을 장관으로 재직했다. 지난 16일 퇴임한 헤이글 미 국방장관 얘기다. 아직도 헤이글이 장관이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교체 발표와 함께 집에 가는 경우가 다반사인 한국의 장관 경질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매우 생경할 수밖에 없다. 헤이글 장관이 물러나겠다고 공식 발표한 때는 지난해 11월 24일이니까 그 후에도 두 달 반 이상을 근무했다.

◆ 헤이글 장관, 백악관과의 대립부터 경질까지

헤이글 장관은 경질됐다. 퇴임 결정을 발표하는 날 찍힌 사진 한 장이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다. 슬픈 표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 헤이글 장관, 머리를 숙인 오바마 대통령. 이들의 포옹에 담긴 바디 랭귀지를 백악관을 취재하는 사진기자들이 절묘하게 잡아냈다. ‘헤이글이 퇴진을 발표하겠다고 했다’는 오바마 대통령의 당일 언급은 말 그대로 퇴진 사실을 공개하는 날짜를 헤이글 장관이 스스로 선택했다는 의미일 뿐이다.

당시 헤이글 국방장관과 백악관의 대립은 심각했다. 퇴임 발표 한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에는 ‘선거 후에 헤이글이 교체될 것’이라는 익명의 백악관 관계자를 인용한 기사가 미국 언론에 보도됐다. 국가 안보 관련 회의가 열려도 헤이글 장관은 의사 표현이 분명치 않고 존재감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같다는 험악한 인신공격이다. 이런 일이 있은 조금 뒤에는 ‘시리아 아사드 정권에 대한 백악관의 모호한 스탠스를 강도 높게 지적’한 헤이글 메모가 공개됐다. 헤이글 진영과 백악관의 핵심 이너서클 간에 치고받기가 시작됐고 결국은 후자의 완승으로 귀결된 것이다.

◆ 어떤 사안을 놓고 대립했나

헤이글 국방장관과 백악관은 우선 쿠바 관타나모 미군기지에 있는 테러 용의자 수용소를 폐쇄할 것인지를 놓고 의견이 달랐다. 오바마 대통령은 국제사회로부터 탈법적 인권 탄압의 대명사처럼 비판받는 수용소를 자신의 임기 내에 폐쇄하려 하고 있고 백악관의 참모들은 국방부를 재촉해 왔다. 하지만 헤이글 장관은 수감자들이 풀려난 후 다시 돌아와 미국에 해를 끼치지 않을 보장이 있어야 한다며 ‘수감자들의 타국 이전을 통한 수용소 폐쇄 방안’에 제동을 걸어 왔다. 지난해 말과 올해 초에 백악관의 독촉 속에 44명이 풀려나거나 다른 나라로 이송됐지만 아직도 관타나모 수용소에는 122명의 수감자들이 남아 있고 그동안의 접근 방법으로는 오바마 대통령 임기 내에 수용소를 폐쇄하기는 어렵다는 분석들이 있다.

헤이글 장관과 백악관은 IS, 이슬람 반군 격퇴 전략을 놓고도 대립했다. 지상군 투입 여부를 놓고 확고하게 반대 입장을 천명한 오바마 대통령과 전투 목적상 필요할 수 있다는 군 지휘관들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로 전락했다. 이른바 헤이글 메모로 공개된 시리아 아사드 대통령에 대한 군사 대응 문제도 갈등을 증폭시키는 요인이 됐다. 헤이글 국방장관을 활용해 국방 예산과 인원을 효율화하는 등 이라크, 아프간 전쟁 이후의 새로운 국방개혁을 시도해보려던 오바마 대통령의 계획도 중동 상황이 꼬이면서 의미가 없게 됐다. 이럴 바에야 '말을 갈아보자'는 백악관 이너서클 핵심들의 헤이글 장관 경질론에 힘이 실린 것이다.

◆ 갈등 끝 장관 경질…모양새는?



이런 갈등과 대립 속에 이뤄진 장관 경질은 험한 모양새를 연출하기 십상이다. 헤이글 장관 경질이 표면화되는 단계에서도 위험 신호가 감지됐다. 오바마 대통령은 헤이글 장관을 경질하겠다고 통보하고도 발표는 뒤로 미룰 것을 요청했지만 헤이글 장관은 경질을 통보 받은 즉시 발표를 강행했다. 섭섭함을 감추지 않은 첫 반발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후임자 후보군을 물색해보지도 못한 상황에서 바이든 부통령과 함께 나와 퇴임 발표를 강행하는 헤이글 장관을 지켜봐야 했다. 며칠 후 불과 몇 달 전에 국방부 부장관 자리에서 물러난 애쉬턴 카터를 후임 장관으로 발탁하고 내정 사실을 발표했지만 이 자리에 헤이글 국방장관은 참석하지 않았다. 그 날은 새로 장관될 사람이 주인공이어서 일부러 자리를 피한 것이라는 것이 본인의 해명이지만 또 다른 불만의 표시임에 분명하다.



이런 갈등 기류는 오래 가지 않았다. 오바마 대통령이 나서서 정리했다. 교체 사실 발표 후에도 흔들림 없이 장관직을 수행하도록 보장하고 배려했다. 20개월 갓 넘기고 교체돼 단명 국방장관의 대열에 들어서는 오명을 쓰지 않도록 임기 2년을 거의 채우도록 했다. 사실 오바마 대통령이 군통수권자가 된 후 국방장관은 계속 상대적 단명으로 끝났다. 초대 게이츠 장관, 파네타 장관도 재임 기간이 2년 안팎에 불과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군사전략이 소극적이라며 퇴임 후 비판에 나섰던 파네타 장관은 2년에 훨씬 못미치는 608일을 국방장관으로 재임했다. 전임 부시 대통령 시절 럼스펠드 장관이 2,159일, 게이츠 장관이 오바마 대통령 때까지 이어지며 1,657일을 재임한 것에 비하면 많이 짧은 편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헤이글 장관에게는 2년을 채우도록 배려해준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달 28일에는 국방부에서 주관한 헤이글 장관 환송식에 직접 참석했다. 인도와 사우디아리비아 방문을 마치고 당일 새벽에 도착해 피곤한 상태였지만 바이든 부통령과 함께 참석해서 헤이글 장관의 업적을 치하했다. 지난주 의회에 무력 사용권을 요청하는 서한과 법률 초안을 보낼 때는 백악관 발표장에 헤이글 장관을 배석시켰다.

◆ "나는 책 팔려고 대통령 얘기 함부로 할 사람 아니다"

이런 배려도 작용했을 것이다. 백악관과 갈등 끝에 경질되는 헤이글 장관이지만 오바마 대통령이나 백악관을 비판하는 말을 아직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언론들이 많은 질문을 던졌지만 "주요 국방 현안에 대해 자신도 많은 의견을 밝혔다" 고만 할뿐이다. 오히려 자신은 책 팔려고 대통령 얘기를 함부로 할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I don't get into the book-telling business of conversations I have with the president. That's not my style, and I don't think that's a responsible thing to do.”- 1/23 NPR 인터뷰) 전임 게이츠 장관과 파네타 장관이 퇴임 후에 책을 써서 오바마 정권의 국방정책을 비판했던 것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1967년 사병으로 입대해 베트남 전에서 부상하기도 했던 헤이글. 사병 출신 최초의 미국 국방장관으로 장병들의 환호를 받았던 척 헤이글은 시작 때부터 공화당과 백악관의 견제를 받으며 장관으로서 기념비적인 업적은 남기지 못한 채 중도 퇴장하지만, 떠나는 뒷모습은 아름다웠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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