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손 없는 날, 누구를 위해 이사 하는가

입력 2015.03.01 (07:02) 수정 2015.03.01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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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 없는 날? 발 없는 날?

달력에도 없는 '손 없는 날'의 존재를 알고 사실 기자는 매우 당황했습니다. 명절도 아니고 공휴일도 아닌데 주변 사람들은 이 손 없는 날을 알고 있더군요. 발 없는 날도 있냐는 제 물음에 옆 자리 선배는 너털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손 없는 날이 뭘까. 포털 검색으로 찾아보니 연관 검색어에 '이사 날짜'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습니다. 이사하기 좋은 날이라는 블로그 글들도 많이 보이더군요. 그러니 결국 '손' 이라는건 나쁜 것이고 이것을 피해 이사를 해야 좋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좀 더 정확하고 자세한 설명이 필요했던 저는 전문가의 자문을 구하기 위해 곧장 전화기를 들었습니다.

한국역술인협회 백운산 회장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손 없는 날이란 보통 음력 날짜 중 끝수에 9가 들어 있는 날, 9일, 19일, 29일을 말합니다. 귀신들은 세상을 떠돌다 인간에게 해를 끼치곤 하는데 이 손 없는 날 만큼은 귀신이 피해 간다고 조상들은 믿었지요. 그래서 개업이나 중요한 행사, 혼례나 계약서 작성 등을 이 손 없는 날에 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조상때부터 내려온 하나의 풍습이지 꼭 믿어야 할 것은 아닙니다."

자, 대답이 됐나요? 손 없는 날은 결국 '휘파람을 불면 뱀이 나온다거나, 밤에 손발톱을 깎으면 쥐가 먹고 사람으로 변한다' 따위의 미신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 날도 아닌 날. 손 없는 날은 그런 날이었습니다. 굳이 역술인에게 묻지 않더라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손 없는 날이 미신이라는 것 쯤은 알고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손 없는 날 비싼 돈을 내가며 이사를 하려고 하는 걸까. 기자는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 나만 안 믿으면 되지? 이사는 나 혼자 하나!

이사는 참 어려운 일입니다. 저도 지난해 가을 난생 처음 이사를 했는데요, 이사란 제가 원하는 날짜와 시간에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먼저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존 세입자 혹은 집주인과 이사 날짜를 절충해야 합니다. 전세 계약이 만료된 경우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그러니 내가 손 없는 날을 믿지 않아도 상대방이 반드시 손 없는 날에 이사를 하겠다고 한다면 울며 겨자 먹기로 이사를 해야겠지요.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손 없는 날의 횟수를 알아볼까요. 달력을 확인해보니 2015년 1월 손 없는 날은 5일, 2월은 6일, 3월은 5일입니다. 이중 이사 수요가 몰리는 주말과 겹치는 날은 무려 6일. 이사가 몰리는 날의 3분의 1이 손 없는 날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어쩔수 없이 손 없는 날이 이사일과 겹치는 경우가 생기게 되지요.

손 있는 날의 이사는 결국 모두가 이 미신을 버리지 않는 한, 아니 버린다해도 손 없는 날과 주말과 겹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또 전월세 계약일이 이 모든 날짜를 피해가는게 아니라면 영영 실현되기 어려운 일입니다.



■ 130만원이 300만원으로, 수요 공급의 법칙이라고요?

그럼 이제부터 이사 업체 비용이 얼마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이사비용이 너무 비싸 도무지 이사를 못하겠다는 제보자의 집을 찾았습니다. 제보자의 집은 33평형 6층 아파트. 짐은 5톤이고 이사가는 곳은 13층입니다. 두 집 사이의 거리는 약 85km. 이사업체 대부분이 사다리차, 인부 3명, 청소를 도와줄 여성 인부 1명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모두 10곳의 이사업체에 견적을 의뢰했고 이중 두 곳이 현장 방문을 통해 견적서를 작성했습니다.

가격이 궁금하시죠? 제보자 이사일인 2월 28일을 기준으로 이사 비용은 170만원에서 최대 300만원까지 말그대로 천차만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2주 뒤인 3월 14일은 어떨까요. 같은 토요일 이사 비용은 최대 120만원까지 곤두박질쳤습니다. 2월 28일은 손 없는 날, 개학 직전, 공무원 인사 이동과 겹치는 정말 말도 안되는 날이었던 겁니다. 제가 만났던 일부 이사업체들은 솔직하게 커밍아웃을 하기도 했습니다. 2월의 많은 수요와 이른바 손 없는 날 특수로 이사를 하려면 어느업체를 가든지 바가지를 쓸 수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수요가 많으면 당연히 공급가가 비싸다. 시장경제의 아주 기본중의 기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장경제 안에는 엄연히 룰이라는게 있고 상식이라는게 있습니다. 그러니 상법이 있고 공정거래위원회가 있고 소비자원이 있는 것이겠지요. 이사 조건의 변동 없이 단지 수요가 많다는 이유로 세배 가까이 비싼 값을 요구하는 업체의 행태를 과연 수요 공급의 법칙이라 부를 수 있을지 기자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여기에 공정거래위원회가 이러한 피해를 막기 위해 각 품목별 무게와 이사 비용을 표기해 만든 이사화물표준계약서도 사용되는 곳이 거의 없었습니다. 물론 제가 만났던 이사업체들처럼 터무니 없는 이사비용을 부르는 비상식적인 업체는 일부일겁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 소비자는 바보가 아닙니다.

제보자는 현재 살고 있는 집에서 전세 계약 2년 연장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집주인으로부터 집을 비워달라는 얘기를 들었고 반드시 2월 28일에 이사를 하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제보자처럼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비단 한 두 명은 아닐겁니다. 그래서 억울한 마음에 기자를 찾아 제보를 하는 분도 생겨났겠지요.

여러분, 아직도 제보자가 손 없는 날 미신을 믿어 비싼 돈 주고 이사하는 아둔한 소비자라고 생각하시나요?

☞ 바로가기 <뉴스9> ‘손 없는 날’은 ‘손해 보는 날’…이사비 뻥튀기 횡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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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손 없는 날, 누구를 위해 이사 하는가
    • 입력 2015-03-01 07:02:20
    • 수정2015-03-01 09:23:34
    취재후·사건후


■ 손 없는 날? 발 없는 날?

달력에도 없는 '손 없는 날'의 존재를 알고 사실 기자는 매우 당황했습니다. 명절도 아니고 공휴일도 아닌데 주변 사람들은 이 손 없는 날을 알고 있더군요. 발 없는 날도 있냐는 제 물음에 옆 자리 선배는 너털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손 없는 날이 뭘까. 포털 검색으로 찾아보니 연관 검색어에 '이사 날짜'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습니다. 이사하기 좋은 날이라는 블로그 글들도 많이 보이더군요. 그러니 결국 '손' 이라는건 나쁜 것이고 이것을 피해 이사를 해야 좋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좀 더 정확하고 자세한 설명이 필요했던 저는 전문가의 자문을 구하기 위해 곧장 전화기를 들었습니다.

한국역술인협회 백운산 회장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손 없는 날이란 보통 음력 날짜 중 끝수에 9가 들어 있는 날, 9일, 19일, 29일을 말합니다. 귀신들은 세상을 떠돌다 인간에게 해를 끼치곤 하는데 이 손 없는 날 만큼은 귀신이 피해 간다고 조상들은 믿었지요. 그래서 개업이나 중요한 행사, 혼례나 계약서 작성 등을 이 손 없는 날에 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조상때부터 내려온 하나의 풍습이지 꼭 믿어야 할 것은 아닙니다."

자, 대답이 됐나요? 손 없는 날은 결국 '휘파람을 불면 뱀이 나온다거나, 밤에 손발톱을 깎으면 쥐가 먹고 사람으로 변한다' 따위의 미신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 날도 아닌 날. 손 없는 날은 그런 날이었습니다. 굳이 역술인에게 묻지 않더라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손 없는 날이 미신이라는 것 쯤은 알고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손 없는 날 비싼 돈을 내가며 이사를 하려고 하는 걸까. 기자는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 나만 안 믿으면 되지? 이사는 나 혼자 하나!

이사는 참 어려운 일입니다. 저도 지난해 가을 난생 처음 이사를 했는데요, 이사란 제가 원하는 날짜와 시간에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먼저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존 세입자 혹은 집주인과 이사 날짜를 절충해야 합니다. 전세 계약이 만료된 경우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그러니 내가 손 없는 날을 믿지 않아도 상대방이 반드시 손 없는 날에 이사를 하겠다고 한다면 울며 겨자 먹기로 이사를 해야겠지요.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손 없는 날의 횟수를 알아볼까요. 달력을 확인해보니 2015년 1월 손 없는 날은 5일, 2월은 6일, 3월은 5일입니다. 이중 이사 수요가 몰리는 주말과 겹치는 날은 무려 6일. 이사가 몰리는 날의 3분의 1이 손 없는 날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어쩔수 없이 손 없는 날이 이사일과 겹치는 경우가 생기게 되지요.

손 있는 날의 이사는 결국 모두가 이 미신을 버리지 않는 한, 아니 버린다해도 손 없는 날과 주말과 겹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또 전월세 계약일이 이 모든 날짜를 피해가는게 아니라면 영영 실현되기 어려운 일입니다.



■ 130만원이 300만원으로, 수요 공급의 법칙이라고요?

그럼 이제부터 이사 업체 비용이 얼마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이사비용이 너무 비싸 도무지 이사를 못하겠다는 제보자의 집을 찾았습니다. 제보자의 집은 33평형 6층 아파트. 짐은 5톤이고 이사가는 곳은 13층입니다. 두 집 사이의 거리는 약 85km. 이사업체 대부분이 사다리차, 인부 3명, 청소를 도와줄 여성 인부 1명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모두 10곳의 이사업체에 견적을 의뢰했고 이중 두 곳이 현장 방문을 통해 견적서를 작성했습니다.

가격이 궁금하시죠? 제보자 이사일인 2월 28일을 기준으로 이사 비용은 170만원에서 최대 300만원까지 말그대로 천차만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2주 뒤인 3월 14일은 어떨까요. 같은 토요일 이사 비용은 최대 120만원까지 곤두박질쳤습니다. 2월 28일은 손 없는 날, 개학 직전, 공무원 인사 이동과 겹치는 정말 말도 안되는 날이었던 겁니다. 제가 만났던 일부 이사업체들은 솔직하게 커밍아웃을 하기도 했습니다. 2월의 많은 수요와 이른바 손 없는 날 특수로 이사를 하려면 어느업체를 가든지 바가지를 쓸 수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수요가 많으면 당연히 공급가가 비싸다. 시장경제의 아주 기본중의 기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장경제 안에는 엄연히 룰이라는게 있고 상식이라는게 있습니다. 그러니 상법이 있고 공정거래위원회가 있고 소비자원이 있는 것이겠지요. 이사 조건의 변동 없이 단지 수요가 많다는 이유로 세배 가까이 비싼 값을 요구하는 업체의 행태를 과연 수요 공급의 법칙이라 부를 수 있을지 기자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여기에 공정거래위원회가 이러한 피해를 막기 위해 각 품목별 무게와 이사 비용을 표기해 만든 이사화물표준계약서도 사용되는 곳이 거의 없었습니다. 물론 제가 만났던 이사업체들처럼 터무니 없는 이사비용을 부르는 비상식적인 업체는 일부일겁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 소비자는 바보가 아닙니다.

제보자는 현재 살고 있는 집에서 전세 계약 2년 연장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집주인으로부터 집을 비워달라는 얘기를 들었고 반드시 2월 28일에 이사를 하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제보자처럼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비단 한 두 명은 아닐겁니다. 그래서 억울한 마음에 기자를 찾아 제보를 하는 분도 생겨났겠지요.

여러분, 아직도 제보자가 손 없는 날 미신을 믿어 비싼 돈 주고 이사하는 아둔한 소비자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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